인사동은 조선시대 중부 관인방(寬仁坊)의 인(仁)자와 대사동(大寺洞)의 사(寺)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한경식략(漢京識略)권2 각동조(各洞條)를 보면 [대사동(大寺洞)은 곧 탑사동(塔寺洞)인데 옛날에는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石塔)만 남아 있다.] 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 (1801 ~ 1834) 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 때에는 대사동(大寺洞)과 탑사동(塔寺洞)으로 혼용하여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사동은 조선초기까지는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 관내였다. 1751년에 반포된 수성책자(守城冊字)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 일패계(一牌契)·이패계(二牌契)·삼패계(三牌契)·사패계(四牌契)와 견평방(堅平坊) 중어물전일패계·이패계(中魚物廛一牌契·二牌契)에 속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성부의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에는 한성부(漢城府) 중서(中署) 관인방(寬仁坊) 대사동계(大寺洞契) 원동(園洞)·대사동(大寺洞) 승동(承洞), 철물교계(鐵物橋契) 대사동(大寺洞)·승동(承洞), 탑동계(塔洞契) 대사동(大寺洞) 및 견평방(堅平坊) 어물전계(魚物廛契) 이문동(里門洞)·향정동(香井洞)·수전동(水典洞), 이문동계(里門洞契) 이문동(里門洞)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7호에 따라 경성부 중부(中部)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 7호로 경성부 중부 대사동(大寺洞)·이문동(里門洞)·향정동(香井洞)·수전동(水典洞)·승동(承洞)·원동(園洞) 각 일부를 합쳐 인사동으로 하였다. 동년 9월 29일에는 경성부 북부출장소 인사동이 되었으며 이듬해 6월 1일 경성부 인사동으로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지 제32호로 경성부(京城府) 인사정(仁寺町)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에는 부령(付令) 제163호로 종로구(鐘路區) 인사정(仁寺町)으로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종로구 인사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인사동은 동으로 낙원동, 남으로 종로 2가와 서쪽의 공평동, 북쪽의 관훈동과 서로 접해 있다. 인사동길과 태화관길이 서로 교차하는 인사동은 동의 서쪽을 재개발하여 상업업무 중심지역이 되었다. 인사동은 종로 1-2가 동사무소의 행정관할구역인데 1946년 10월 서울시의 일부지역에서 동회제도를 실시할 때 인사동회(仁寺洞會)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 66호로 인사동은 공평동 일원과 함께 신설된 대사동(大寺洞)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로 인사동은 낙원동-관철동-공평동-관훈동-견지동-종로2가와 함께 낙원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으며 1975년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 981호로 낙원동 일부와 권농동이 통폐합되어 신설된 종로2가 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181호로 종로1가동과 종로2가동이 통합되어 종로1-2가 동사무소가 신설되자 이의 관할구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인사동(仁寺洞)은 대사동(大寺洞)에서 동명 유래가 되는데 댓절골·사동(寺洞)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걸친 마을이다.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향정동(香井洞)은 향우물골-향나무우물골-상우물골로도 불렀는데 우물 옆에 향나무가 있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문동(里門洞)은 인사동-종로2가-공평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222번지에 순화궁(順和宮)의 이문(里門)이 있어서 마을 이름이 붙었으며 이문안이라고도 하였다. 승동(承洞)은 인사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고 그 옆으로는 수전동(水典洞)이, 승동의 북쪽에는 과부 다섯 명이 살았다는 오과붓골이 있었다. 낙원동과 인사동에 걸쳐 있는 부락은 원골 혹은 원동(園洞)이라 하였다.
인사동을 탑동(塔洞)·사동(寺洞)·탑사동(塔寺洞) 이라는 명칭으로 오랫동안 불러왔던 것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400여칸 규모의 원각사(圓覺寺)에 딸린 석탑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 현존하는 이 석탑은 원각사가 낙성된 후에 세워졌고 이때부터 대사동(大寺洞)이라는 동명보다 탑(塔)과 관련된 동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인사동 194번지는 중종반정 때 공훈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 구수영(具壽永) (1456~1524)이 살았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인맥을 형성한 그는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로 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도총관·지돈녕부사·판돈녕부사를 역임하고 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에게 아부했다 하여 1509년에 파직되었다.
태화정(泰和亭)·부용당(芙蓉堂) 등이 있는 구수영의 집은 증손자인 구사맹(具思孟)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는 구사맹의 딸이었다. 인조가 어릴 때 외가인 이곳에서 자랐으므로서 인조의 잠저(潛邸)가 되었다. 영조는 부용당 앞의 연못을 잠룡지(潛龍池)라 하고 친필 현판을 걸게 하였다.
그후 이 집은 안동김씨에게로 넘어가 김흥근(金興根)(1976 ~1870)의 소유가 되었다. 경상동관찰사·영의정 등을 역임한 김흥근이 극심한 안동김씨의 폐단 속에서도 고고한 인망을 받았던 것은 정수동의 도움이 컸다. 정수동이 김흥근의 문객으로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 무렵 남의 돈 2만 냥을 가로챈 사실로 김흥근이 원망을 듣고 있었다. 어느날 김흥근의 집을 찾은 정수동에게 사색이 된 계집종이 달려와 “세살 된 어린 자식이 돈을 삼켜 목에 걸렸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당황하며 물었다. 정수동은 점잖게 아이가 삼킨 돈이 남의 것인지 아니면 자기 것인지를 물었다. 계집종이 자기 것이라 하자 이번에는 몇푼을 삼켰느냐고 물었다. 한푼이라고 하자 정수동은 “아무 걱정 말아라. 남의 돈 2만 냥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는데 자기 돈 한푼 먹었다고 죽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방 안에서 들은 김흥근은 그 길로 2만 냥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정수동에게 자신의 청렴을 구해주었다며 고마워한 뒤 두고두고 그 말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 후 이 집은 헌종의 후궁은 경빈이씨(慶嬪李氏)의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는데 1908년 서부 반송방(盤松坊) 미동(渼洞)으로 옮겼다가 1911년에 동부 인창면(仁昌面)의 이씨 묘소로 옮겼다. 순화궁을 이전하고 난 후 빈집으로 남아있던 이곳은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다. 별장으로 사용하며 본가로 오가던 이 집은 친일파들의 교유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어느날 하늘이 컴컴해 지면서 소나기와 함께 정원에 있는 고목에 벼락이 내려쳐 둘로 갈라졌다. 때마침 이완용의 집을 찾아와 당구를 즐기고 있던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와 조카 한상룡(韓相龍)은 놀라 갈팡질팡하다가 안방 깊숙이 숨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으면서 숨는 아들을 향해 ‘벼락이 떨어진 후 도망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 이라고 충고하였다. 낙뇌(落雷) 로 이완용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으며 장안의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하늘이 대신 천벌을 주었다”며 쑤군거렸다. 소문과 함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완용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때마침 1918년 화재로 소실된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安淳煥)이 인수하여 명월관의 분점격으로 운영했는데 옥호를 태화정(太華亭)이 있는 곳이라 하여 태화관(太華館)이라 하다가 후일 ‘泰華館’으로 고쳤다.
외진 위치에 있던 태화관은 2층으로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장안의 부호와 총독부 관리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의 장소로 선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2층 동쪽 끝방에 모여 고종황제의 빈소가 있는 남쪽 문을 열어 놓은 후 한용운의 사회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통고, 참석한 29인이 먼저 스스로 체포되었으며 지방운동의 주최 및 연락관계로 늦게 도착한 길선주(吉善宙) 등 3사람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투옥되었다.
궁정 양악대 출신들이 만든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가 자주 출연하던 태화관을 헐고 기독교 감리교 여자교육기관인 태화회관이 설립되었으나 공평지구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현재 12층 높이의 태화빌딩이 들어섰다.
한편 대사동에는 효종 때의 훈련대장 이완(李浣) (1620~1674)이 살았다. 이완은 임진왜란 때 육전(陸戰)의 명장이었던 이수일(李守一)장군의 아들로 칼날같이 강직한 사람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어영대장·수어사·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훈련대장이 되었던 1653년에 효종의 북벌계획에 맞추어 신무기의 제조, 성곽의 개수 및 신축 등으로 전쟁준비를 완료한 바 있으나 효종의 별세로 계획이 중단되고 말았다. 효종의 북벌정책은 이완의 유비무환 실천사상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왕궁을 수비하던 이완에게 효종은 [병자년과 같은 사변이 날 경우 그대가 나를 강화까지 호위하고 갈터인데 적병이 뒤에서 추격해오면 어떻게 할 참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이완은 [신은 이미 20말들이의 큰 부대 수천 개를 만들어서 병사마다 하나씩 갖고 있게 하였습니다. 유사시에는 그 부대에 흙을 담아 지형에 따라 배치하면 높이는 한길이 넘고 둘레도 자기 몸을 호위할만한 포대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은 이완의 이 같은 답변에 더욱 그를 신임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고 담도 컸다. 그가 아직 20세가 되기 전의 일로 외가에 갔을 때이다. 저녁 먹은 것이 좋지 않아 늦은 밤 측간에서 용무를 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개를 물어갔다. 별안간 자지러질듯한 개의 비명소리를 듣고 집안 사람들이 나와 개가 어디 갔느냐고 묻자 그는 “호랑이가 물어 갔어요”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그런 급한 판에 어떻게 태연스러우냐고 묻자, 이완은 웃으며 “범이 이미 달아났는데 소리를 지른다고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물어간 개를 먹기 전에는 오지 않을텐데 무엇이 무서워 보던 뒤를 보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완은 원래 낙산(駱山) 아래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집 옆에 살았는데 왕족의 이웃에 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하여 이곳으로 이사한 후 몸소 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해마다 가지가 휠 정도로 배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그가 죽은 지 20년이나 지나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가 길지(吉地)라 하여 빼앗아 살면서부터 배나무에는 한 개의 배도 열리지 않았다. 그후 공훈을 세운 이완의 서손이 1694년에 나라에 부당하게 집을 빼앗겼던 억울함을 호소하여 되찾으면서부터 배나무에 열매가 다시 맺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인사동에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 많은 명인들이 살았는데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며 가장 뛰어난 철학가이고 경세가(經世家)인 동시에 교육자이며 능변가(能辯家)인 이이(李珥) (1536~1583)가 살았다. 시호는 대성(大成) 호는 율곡(栗谷) 자는 숙헌(叔獻)인 그가 49세에 세상을 떠난 곳은 대사동 모퉁이에 있는 남의 집이었으며 친지와 제자들이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여 집 한 채를 마련해 유가족에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빈하게 살았던 율곡선생이 서거한 그 곳에서 ‘사동 대감’으로 불려지던 조선말 세도 재상 김병학이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니 대조될 만한 일이다. 조선시대의 문신이었던 김병학(1821~1879)의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인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배경으로 대사헌과 판서를 지냈다.
인사동 137번지에는 승동교회가 있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무어 (S.F.Moore)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곤당골 교회에서 분할받는 16명의 교인으로 ‘중앙교회’라는 이름 가지고 시작되었다. 1905년 8월 1일 현재의 인사동으로 이전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때에는 교회 학생의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을 일으켰다. 1934년 승동교회로 개명되었고 1939년 지금의 한신대학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이곳에서 개교하였다.
인사동은 일제말부터 골동품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1960~1970년대에 걸쳐 성시를 이루었다. 지금은 장안평을 비롯, 강남지역까지 군데군데 골동품상가들이 확산되었지만 한때 골동서화는 물론 생활도구·장신구 등 온갖 전통공예품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살아있는 노변박물관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여행객 사이에 골동품의 진품여부와 제대로 된 것을 찾으려면 인사동으로 가야한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전해지는데 성수기 때는 200여개의 골동품 취급점이 인사동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 화랑·전시장·표구점 등 골동품과 관련된 업종들이 하나둘씩 개업하여 서로 병존하고 있다. 이러한 골동품이 집결된 곳에 고미술품의 진품을 감정하는 한국고미술협회가 이곳에서 발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고미술협회 회원 약 80%가 인사동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인사동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화로 하여 해마다 거리축제가 인사동에서 개최되는데 지신밟기·봉산탈춤 등의 행사를 비롯 각종 공예품의 거리판매도 행해지고 있다.
궁궐과 가까워서 양반관료들이 집단 거주하던 인사동의 면모는 달라졌지만 조상의 숨결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중략)…
인사동은 골동품상가 뿐만 아니라 가구점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지금도 동일·파고다 등의 일류 가구점을 필두로 하여 10여 개의 가구점이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호화주택과 맨션아파트가 격증됨에 따라 이에 알맞은 고급가구의 수요가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주택의 양옥화의 경향과는 반대로 가구는 복고조(復古調)의 디자인이 더 많이 팔린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