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자가의 능력
1)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빌립보서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나타나난 천지창조 사역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함께 하셨다.
그가 빛을 원하셔서 명령하시자 즉시 빛이 생겼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속하고 능력이 있다.
요한복음 1장 1~3절 말씀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증거한다. 만물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으신 천지창조의 주인 이셨다.
2)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성부하나님께서는 성자하나님을 낳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부족한 사람은 “독생하신”의 의미가 낳으셨다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더 이상은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시간적 태초를 인간인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무시간적 태초,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속에
홀로 독생하신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았다.
인간이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먼저 창조된 흙이라는 유형에 질료에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이처럼 인간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심히 미약한 존재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품속에서 홀로 독생하신 존재요 인간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부하나님께서는 지음 받은 인간을 자신의 친아들보다 더 사랑하셨고 에덴동산을 만들고 다스리게 하시고 대화하는 존재로 인정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였다.
3)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멸망 받게 두실 수 없으시게에 자신의 친아들을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아주 작은 지구라는 별에 인간으로 보내셔서 죄지은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
인류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예수님이 단순히 칼에 찔려 죽으심으로 갚아질 죄값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으로 짓는 죄값을 위해 가시면류관을 쓰셔야 했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쇠 조각이 붙은 채찍에 무수히 맞으셨고 십자가위에서 인류의 죄값을
감당하기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하셨다. 십자가형은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막고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형벌로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상체의 가슴(횡경막)이 점점 아래로 당겨지며 피를 다 흘리다가 마침내는 질식으로 죽게 되는 형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한번의 숨을 들어쉬기 위해서 못박힌 두발을 밀어 몸을 올리셔야 했고 그때마다 양발과 손에 박힌 못에 체중이 실리며 전해지는 고통은 가히 지옥형벌 그 자체였다. 그 고통의 시간은 무려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그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은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신 시간이었다.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짓으셨지만 성부하나님은 그 고통을 인류의 죄 때문에 외면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죄값을 모두 지불한 것이다.
4) 십자가의 능력
우리가 주의종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급을 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사모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기에 그 사랑 때문에 내 생명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주의 종의 길을 걸어 가려는 것이다. 내가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능력은 어둠에 진을 훼파하고 죄에 눌린 자를 자유케하며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현시대의 교회는 진정한 목자들은 줄어가고 교회에서도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스타가 되어가는 것을 꿈꾸는 신학도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 내가 유명한 청년 사역자가 되고 싶은
하는 생각, 내가 유명한 치유사역자나 능력을 행하는 스타가 되고자 하는 생각이 나에게도
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할까? 요즈음 나는 기도는 낮아지기 위한 연습이란 생각을 한다. 기도를 통해서 나 자신이 점점 낮아져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낮아짐같이 나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마침내 마귀도 더 이상 교만이라는 무기로 나를 유혹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귀하게 쓰지 않으실까?
우리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유명한 주의 종의 겉모습과 설교 스타일과 대중을 휘어 잡는 화술 이런것보다 먼저 그분이 그 자리에 오기까지 그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했고 기도로써 얼마나 영성훈련을 통하여 현재의 자리에 온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스타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따라 갈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 은혜를 더 많이 깨달을 수록 십자가의 능력이 그 안에서 살아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나 자신을 못박고 장사 지내야 한다. 나 자신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장사 지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나 자신이 내가 세상에서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십자가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돈,명예,권세에 대한 욕심,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하나씩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은 내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신다. 이생과 자랑과 정욕을 십자가에 모두 못박고 장사 지낼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일하시며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며 그 열매는 천국에 면류관으로 보화로 쌓여 가는 것이다.
2. 영적부흥이란
1) 영적부흥이란 무엇일까?
참된부흥을 원하는 자들에게 부흥이라는 말은 마음과 영혼을 흥분되게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부흥이라는 것은 과연 수적인 성장만을 말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다수는 부정적으로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데 영적부흥이란 말은 그릇된 생각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다. 여기서 영적부흥를 주제로 하고자 하는 목적은 너무나도 양적인 부흥만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과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들안에서 성도의 수평적인 이동은 진정한 부흥으로 볼 수 없으며 영적부흥은
새신자의 결신과 교회안의 성도들의 참된 내적변화 즉 성령충만한 삶과 열매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2) 성령충만한 삶이란 무엇일까?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님이신
것을 잠시 빌어 말씀드리려고 한다. 성령충만은 은사 충만이 아니며 그것은 성결체험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왜 은사충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가?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성결체험이나 은사체험 모두 처음에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온다. 그러나 은사체험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나 성결체험은 자신의 내적결단이 없이는 온전히 이루어 가기는 힘든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어떤사람이 표적방언이 아닌 은사방언을 받았다. 그가 잠시 잘못하여 범죄하였어도 은사 방언의 은사는 사라지지 않
는다. 그러나 성결체험은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그가 잠시 잘못
해서 범죄하게 되면 그의 성결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에 현대크리스챤
에게 있어 성결체험은 은사충만보다 더 강조되어야 하고 매일 매일 성결체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영적부흥이란 형식적으로 믿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므로 영혼이 새로와지고 억눌렸던 죄에서 자유케 되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화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방을 향해 나갈때 영적부흥은 이루어진다.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회심케 하고 중생하게 하는 역사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그들에 삶이 주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영적부흥이다
3) 영적부흥의 현장 – 1907년의 평양장대현 교회
이제 2천년 교회시대 역사속에서 영적부흥 즉 새신자의 결신과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한 삶이 임하였던 현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적부흥은 준비된 기도와 회개운동에서 시작된다. 1907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 역시 오랫동안 준비된 종들의 기도와 평신도들의 회개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회개의 포문을 연 사람들은 길선주였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평양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장대현교회는 사경회가 끝났는데도 16일 수요일 기도회 때, 다시 20일 주일 예배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평양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소식은 곧 평양 전역으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평양시내 전역에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 부흥의 불길은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시내 교회들로 확산되었고, 평양시내 거의 모든 미션스쿨들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특히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 개강 사경회 때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현시되었다. 이것은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목회자들을 영적으로 무장하고 새로 조직될 한국교회를 축복하시려는 비상한 성령의 섭리였다.
4) 영적부흥의 현장 - 1970년대의 애즈버리대학의 영적부흥
1970년의 애즈버리대학의 부흥도 준비된 기도와 학생들의 회개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학교 학감이었던 레이놀즈 학감은 천여명이 모인
5) 맺는말
우리는 부족하지만 영산신학원에서 이러한 영적부흥을 꿈꾸며 기도해야 한다. 주님이 하시면 우리는 애즈버리대학의 부흥의 역사를 우리 신학원에서 이루실 것이다
변화된 600명의 평양장대현교회에 임했던 성령운동이 한반도에 영적부흥이룬 것처럼 1000여명의 애즈버리대학 학생들의 기도가 미국대학의 성령운동을 주도하였듯이 변화된 800명의 우리영산신학원 학우들의 기도가 한반도의 제2의 성령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우리 4학년세대에서 못한다면 우리후배들이 영적부흥의 역사를 이루리라 나는 믿는다. 영적부흥이란 예수를 믿는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죄에 억눌린자들을 중생토록 하며 성령세례가 임하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며 삶 속에 성결이 임하여 이세상에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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