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숙 : 여관을 자주 출입한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강태주 : 건달임에도 불구하고 성격은 착하다.
이돈만 : 강태주와 친구이면서 원수지간이다.
박형준 : 고시 준비생이며 미숙과 같은 집에서 하숙한다.
김형사 : 사건 담당자.
왕지주 : 이돈만의 아버지.
노파
손녀
#1. 씨앗골 - 오후
지루한 장대비가 내리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마당의 심줄 같은 물고랑을 따라 흐른다. 마루에선 담배를 문 노파와 곁에 어린 손녀가 앉아 있다. 노파는 빗줄기 사이로 먼 산을 응시하고, 손녀는 처마 끝 안쪽 개집의 흰둥이와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주시한다. 강아지들은 모두 일곱 마리인데, 그중 한 마리만 검은색이다. 문득 손녀는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린다.
손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할머니, 저 강아지는 왜 색깔이 깜해?
노파 (담뱃재를 턴다) …….
손녀 (못 알아들었나 싶어 치맛자락을 잡아끌며) 강아지가 왜 깜해?
노파 (내뱉듯이) 보리싹을 묵었는갑다.
손녀 보리싹?
노파 (손녀를 바라보며) 너 보리밥 먹을 때 잘 넘어가든?
손녀 (고개를 가로젓는다)
노파 순수 쌀만 있으면 잘 씹히고 맛도 달고 좋은데, 보리가 들어가 잘 안 씹히고 맛도 떱떨하고 목구멍도 깔깔한 것이다.
애당초 보리가 있지 말거나 혹은 보리로만 밥을 지어야 했는데.
손녀는 노파를 빤히 바라보고, 장대비는 계속 내린다. 노파는 장마 속 먼 산을 바라보며 다시 담배를 문다.
노파 할미가 옛날 이야기 하나 해 줄까?
#2. 경찰서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형사와 태주·돈만·형준이 마주 앉아 있다. 이 셋 뒤에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미숙이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고서 셋을 쳐다보는 김형사.
태주 (목을 한번 꺾으며) 젠장 난 아니라니까 왜 귀찮게 구는거요. 정말로 이젠 맘 잡았단 말이에요.
돈만 (태주를 힐끗 노려보며) 나도 아니야.
형준 저도 아닌데요.
돈만 그럼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형사 (책상을 내리치며) 조용히 해! 지금 이게 어린애 소꿉장난인 줄 알어?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간음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중죄란 말이야. 게다가 범죄 은닉마저 추가되면 골치 아프니까 고분고분하게 굴어.
형준 그 두 항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상해하거나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합니다.
태주 (감탄하며) 역시 공부하는 애는 달라. 하하하.
형사 (무안해지자 형준의 머리를 치며) 아는 녀석이 그런 행동을 해?
(태주를 바라보며) 아무튼 너부터 이야기 해봐. 항상 네가 문제야.
#3. 전설
노파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여자가 연못 근처에서 살았단다. 그 여자는 성이 서씨인데 나이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가고 있었지. 얼굴도 곱상하고 신체도 건강한데 말이야. 그래서 부모는 노심초사하다 못해 절에 가서 백일 기도를 드렸단다. 부처님도 정성에 감복했는지, 아니면 측은해 보여서인지, 곧 소식이 있더란 거야. 백일이 지난 후로 웬 남자가 밤마다 서씨 방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홀연히 사라지더니, 또 밤이 되면 어김없이 방으로 들어오고 말이다. 부모가 괴이하게 여겨 딸에게 이르기를 "밤에 그 남자가 잘 때 옷고름에 실을 묶어 두어라"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렇게 했지. 그리고 새벽에 그 남자가 떠나자 그 실을 따라 뒤를 쫓았단다. 그런데 그 실이 연못에 이어져 있더란 거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궁금해서 실을 당겨 보았더니 끝에 자라가 묶여 있었다는 거야. 그 후 서씨는 태기가 있었고 애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커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단다. 자손들도 말이야. 이 소문이 퍼지자 여러 곳곳에서 노처녀들이 모여들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백일 기도를 드렸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경험이 있던 최씨에게도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단다. 그 최씨도 실을 묶어 놓았었고, 그 실을 따라 가보니 역시 연못으로 이어져 있었지.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실을 당겼지. 그런데 올라온 것은 자라가 아니라 가재라는 거야. 최씨도 나중에 잉태를 했고 애를 낳았단다. 그런데 그 아기는 날 때부터 절름발이었고 그 집안은 대대로 절름발이가 나왔단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최씨가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죄를 받은 것이라고 비난했고 그 최씨 집안은 곧 마을서 쫓겨났단다. 그 후로 그 연못이 없어졌지. 그리고 최씨네 집안이 속죄를 벗기 위해서는 서씨네와 사돈을 맺어야 한다는 뜬소문이 한동안 돌았단다.
#4. 경찰서 : 진술 - 태주
태주 (손가락 관절을 꺾고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저년, 아니 미숙이를 처음 만난 건 출감하던 날 이었지요. 간만에 사회에 나왔으니까 그 날이 틀림없을 거요. 쌍둥이 파크에서 만났어요. 물론 술을 마셨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타이핑을 하다가 서류장부로 태주의 머리를 때리는 김형사. 고소하다는 듯 겉웃음을 짓는 돈만.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준) 진짜라니깐. 젠장. 나도 피곤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니요. 생각해 봐요. 간만에 몸에 알콜이 들어갔는데 몸이 안 늘어지고 베긴다요! 하여간 미숙이는 참 착하고 마치 친누나처럼 편안했죠. 나 같은 놈을 만나도 안 무서워하고, 둘도 없는 천사죠 뭐. 가끔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지만. 뭐라더라, 으음, 아! 어딘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가야한다는 말만 해대요. 그땐 성질 나죠. 이걸 그냥 잡어? 말어? 그런데 남 주긴 아까워도 내가 가지기엔 좀 꺼림찍 하더라구요.
#5. 단란주점 골목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는 흥청거리고 있다. 고함을 치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토하는 사람, 오줌누는 사람, 비틀거리는 사람, 택시 잡는 사람, 술을 더 마시려는 사람,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호객 행위를 하는 젊은 여자들. 그 사이를 태주를 태운 차가 지나간다. 차가 단란주점 앞에 서자 몇 명의 양복 입은 젊은 사나이들이 몰려와 넙쭉 절을 한다.
#6. 단란주점 안
태주가 단란주점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와서 인사를 하고 룸으로 안내한다. 무대에서는 30대 중반의 넥타이 부대들이 노래를 하며 몸을 흔들어 대고 있다. 옆에서는 여자들이 적당히 분위기를 띄어주며 코러스를 넣어준다. 한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같이 춤을 추려 한다. 못 이긴척하며 같이 춤을 춘다. 박수 소리가 울린다. 그들을 흘겨보며 룸으로 들어가는 태주.
종업원 (미소를 띠며) 애들 부를 까요?
태주 (귀찮다는 듯이) 술이나 가져와. 그리고 나 찾아오는 사람 있으면 이곳으로 보내.
종업원 예.
- 시간 경과 -
양주는 이미 반이나 비어 있고,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소파 뒤로 몸을 제쳐 기대고 있는 태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가늘게 눈을 뜨며 인상을 구긴다.
태주 (몸을 일으키며) 어, 왔냐!
형준 (두부를 내밀며) 이거나 먹어라. 고생했다.
태주 (웃으며) 짜식, 여전하구나.
형준 뭐가. 난 네가 큰집 좀 갔다오면 달라 질 줄 알았는데 너야말로 여전하구나. 나오자마자 술타령이니.
태주 (술잔을 건네며) 그러냐. 그런데 아직도 공부 하냐? 이젠 그만해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 똑같은 책만 들어다보고 앉았으니 종기라도 안 나든.
(머리를 흔들며) 아니다.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나 모른 체하지 말고 선처 좀 해줘라. 하하하. 그건 그렇고 너 혹시 돈만이 녀석 소식 아냐? 그 녀석에게 빚진 것을 갚아야 하는데. 내가 쉽게 물러설 줄 알고. 흥! 어림없지.
#7. 쌍둥이 파크
형준과 헤어진 태주.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기운이 빠졌는지 침대에 쓰러진다. 어깨가 결리는 것을 느낀다. 수화기를 들고 안마사를 부른다. 잠시 후 안마사가 들어온다. 윗통을 벗고 벌러덩 눕는 태주. 어깨부터 안마하기 시작하는 손길.
#8. 경찰서 내실 : 미숙
미숙 예 맞아요. 그곳에서 태주씨를 처음 보았어요. 그곳에 다니기 시작한지 2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어요. 그는 꽤 피곤해 보이더라구요. 술은 많이 먹은 듯 했지만 술에 의한 피곤함과는 달랐어요. 그것 정도는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거든요. 한번 저를 바라보고는 아무 말 없이 웃옷을 벗고 돌아눕더군요. 그것부터가 달라 보였어요. 다른 손님들은 애당초 안마 같은 것은 부수적인 행위에 불과하거든요. 오해는 말아요. 저도 고집과 자존심이 세거든요. 어깨가 상당히 굳어 있더라구요. 참 그리고 어깨에 심한 칼자국의 흉터가 있었어요. 그때 그가 뭐하는 사람인가를 짐작했죠. 그러면서도 다른 깡패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었던 몇 가지가 더 있어요. 음 우선 몸에 문신이 전혀 없더라구요. 형사님도 알다시피 보통 깡패들은 온갖 잡다한 문신을 새기고 폼 내느라 정신들이 없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잠든 그의 모습이 참 선해 보였어요. 마치 엄마 품에서 젖을 빨다가 잠든 아기처럼 안마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잠든 그의 모습이 매우 평온해 보였거든요. 덕분에 힘 안들이고 제 일을 끝낼 수 있었어요. 그도 만족했는지 그 후 그곳에 오면 항상 저를 찾았어요. 하루는 그가 공원으로 절 부르더라구요.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그때 태주씨와 형준씨가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돈만씨와는 원수지간이라는 것도.
#9. 공원
꽤 청명한 날씨. 몇몇 사람들이 공원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흐를 듯 말 듯한 한 점의 구름에 주시하는 형준. 반대쪽 벤치에서 젊은 부부와 아이가 앙증맞게 장난을 치고 있다. 멀리서 걸어오는 태주가 보인다. 또한 낯익은 여자가 뒤따른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머리에 무언가 얻어맞은 듯 온 몸이 떨려오는 형준. 한참을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 서서히 일어난다.
태주 일찍 왔구나. 소개하지.
(손으로 가리키며) 이쪽은 미숙씨, 그리고 이쪽은.
미숙 (말을 가로채며) 알아요! 형준씨인거.
태주 (어리둥절하며) 어떻게? 둘이 아는 사이야?
미숙 같이 살아요.
태주 (황당해 하며) 뭐?
미숙 (손사래를 치며) 아, 아니요. 같은 하숙집에서 산다구요.
형준 (얼떨결에) 그래 같은 하숙집에.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형준과 미숙을 번갈아 쳐다보는 태주.
#10. 경찰서 : 진술 - 형준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하다. 입에 문 채 다 타 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김형사. 분위기가 의외로 조용하다.
형준 미숙씨가 안마사라는 것을 안 때는 제가 하숙집에 들어간지 4개월 정도 지나서였죠. 처음에는 참 이상하더라구요. 낮이고 밤이고 전화만 오면 어디론가 가더란 말이죠.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아래층에 사는 여자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 그것도 처녀가 새벽에도 밤이슬을 맞고 다니니 말이에요. 그래서 한번은 뒤를 밟았죠.
돈만 (형준의 멱살을 움켜쥐며) 네 놈 짓이구나.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럴 듯 하더라. 둘이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눈에 거슬리더라니.
형사 얌전히 있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횡포야, 횡포는.
형준 (목을 어루만지며) 여관으로 들어가더군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이 여자가 혹시? 이런 여자와 내가 위·아래층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나 할 정도로 말이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여자가 언제 나오나까지 확인하고 싶더군요.
돈만 이 녀석. 그때부터 흑심을 품었구만.
태주 (눈을 감고) 입 닥치고 있어라.
돈만 뭐야?
태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형사 (돈만·태주의 머리를 각각 세게 쥐어박으며) 이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싸움질이야. 그러니까 너희 같은 놈들이 욕을 얻어먹는 거야. 한번만 더 그 따위 행동을 하면 쇠고랑을 채워서 창살 속에 집어넣은 채 심문 할 테니까 알아서 해!
계속 서로를 노려보다 의자에 앉는 태주와 돈만.
형준 그래서 기다려 볼 양으로 근처 포장마차에 갔죠. 출출하기도 해서. 그런데 미행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얼마 후 포장마차에 와서 제 옆에 자연스럽게 앉더군요.
#.11 포장마차
포장마차 안에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담배 연기만은 자욱하다. 한쪽 구석에는 남녀 둘씩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제법 술기운이 오른 상태이다. 반대편에는 애인인 듯한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다. 가운데 앉은 형준은 어색한 듯 소주를 시킨다.
형준 (자신의 잔을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것들!
미숙 누가요? 내가?
깜짝 놀라는 형준. 어느 틈에 미숙이 형준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형준은 안절부절못한다. 소주 한 병을 시키는 미숙.
미숙 (술잔을 비우고 나서) 제가 밤에 무엇하나 궁금했나보죠? 그래요. 전 여관을 출입하는 여자예요. 그것도 손님이 원하면 그 어떤 시간에든 말이죠. 구체적으로 무엇하냐구요? 정 궁금하면 한번 불러주세요. 잘 해드릴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불쾌하군요.
형준 (뒤통수를 만지며) 미, 미안해요. 당황한 나머지 실수를…….
미숙 (크게 웃으면서) 순진하기도 하셔라. 그런데 저한테 관심이 있긴 있는 거요? 아직도 제가 무엇하는지도 모르고. 섭하군요. 같은 집에서 살면서두.
형준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조금. 아주 조금은요.
미숙 (의외라는 듯) 그래요?
형준 예.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고요. 나중에 전화 받는 것을 엿듣고요. 아! 엿들을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미숙씨가 워낙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거든요. 몹시 흥분한 듯 했어요. 그러더니 곧 나가더군요.
미숙 (쑥스러워하며) 그때요. 미친놈이 술 먹고 주정을 하길래, 그냥 왔거든요. 그러자 그 놈이 항의를 한 모양이더라구요. 그래서…….
#12 프라자 여관에서
한 무리가 카운터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그 가운데 술 취한 돈만이와 여관 여주인이 말다툼을 하고 있다. 서로 버티고 서서 면상에 삿대질을 한다. 욕을 하는 돈만. 카운터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던진다. 동시에 여주인이 돈만이를 민다. 힘없이 쿵 쓰러지는 돈만. 비틀거리며 일어나자마자 여주인의 뺨을 치는 돈만. 주저앉아 우는 여주인. 곧 발로 차려는 돈만. 이때 달려와 돈만의 등을 미는 미숙. 다시 퍽 넘어지는 돈만. 미숙의 얼굴을 보고는 아예 누워서 손가락질과 욕을 마구 퍼붓는 돈만. 아랑곳없이 여주인을 이끌고 내실로 들어가는 미숙. 계속 흐느끼는 여주인. 동료의 부축으로 일어나는 돈만. 문을 쾅 차며 밖으로 떠밀리듯 나간다. 뒤돌아 서서 침을 뱉고 연신 욕을 퍼붓는다.
#13. 경찰서 : 진술2 - 형준
형사 공부한다는 녀석이 공부는 안 하고 여자에게 한눈을 팔어?
형준 그것은 본능이지요. 아니 그보다도 떠나버린 부메랑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동심 어린 걱정이지요.
형사 무슨 뜻이야. 쉽게 얘기 해! 먹물 좀 먹었다는 놈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니까.
형준 미숙씨를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고시에 떨어지고 집을 옮겼죠. 더 이상 고시원에 있는 것이 갑갑하고, 자신감도 없고 해서. 그러다 미숙씨를 본 거지요.
#14 하숙집
이사 차량이 집 앞에 선다. 차에서 내린 형준, 주위를 살펴본다. 양옥집과 그 옆으로 2층으로 된 건물이 들어온다. 아래층에 한 여자가 창문을 열어놓고 분주히 왔다갔다한다. 문득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머뭇거리다 외면하는 여자. 짐을 위층으로 옮기는 형준. 세간살이는 얼마 안 된다. 두꺼운 책이 대부분이다. 짐을 다 옮기는 동안에도 분주히 방안을 움직이는 여자.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온다. 형준과 마주친다.
미숙 2개월? 3개월?
형준 (어안이 벙벙하며) 예?
미숙 얼마나 있을 거냐구요. 뭐 아무상관도 없지만.
그냥 나가버린다. 뭔가에 홀린 듯 뒷모습을 바라보는 형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 시간 경과 -
들어오는 미숙. 현관문을 세차게 닫으며 투덜거린다.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형준을 보고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머뭇거리다 내려오는 형준.
미숙 (손을 내밀며) 전 미숙이에요. 안미숙.
형준 (얼떨결에) 예. 전 박형준입니다.
미숙 이름 좋네요. 저와는 달리. 혼자 인가요? 식구가 어떻게 돼냐구요.
형준 아버지가 계시지요.
미숙 그래요. 잘 지내봐요.
#15 영안실
태주 아버지의 영전이 걸려있다.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태주. 여러 문상객이 왔다 간다. 형준이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굳어져 있는 태주의 얼굴.
#16. 단란주점 안
시끌벅적한 분위기. 그와는 달리 밀실 입구에는 건장한 청년 서너 명이 지키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술이 놓여있고 담배연기가 가득하다. 마주앉은 태주와 돈만. 말이 없다. 옆에 앉은 여자들이 술 좀 마시라고 아양떤다.
태주 (담배를 물며) 네 아버지 잘 계시냐?
돈만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계신다.
태주 (인상을 구기며) 사업은 잘 굴러가냐?
돈만 (목을 꺾으며) 역시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태주 욕심을 부리는 구나.
돈만 (술을 마시다 말고) 무슨 소리야?
태주 (몸을 앞으로 당기며 진지하게) 돈만아, 이번 사업에서 손 떼라. 원래 우리 아버지와 네 아버지가 합작할 때 호텔은 네 아버지가, 그 이하 여관은 우리 아버지가 맡기로 했다. 그러니 계약대로 손 테라. 그렇지 않으면 서로간에 손해를 볼 거다.
돈만 (거만하게)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조건을 이미 우리에게 넘겼어. 따라서 우리에게 권리가 있는 거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냐? 착실하게 사업을 넓혀주었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네 아버지는 물론 네 집안은 옛날에.
태주 (말을 가로막으며) 우리 아버지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야. 계획된 타살이라구. 더욱이 병원에 실려올 때만해도 혼수 상태였다고 들었는데 단 1시간만에 죽음으로 판명 내린 것도 의심스럽고. 여하튼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실 리 없어.
돈만 네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 아버지에게 남긴 유언이야. 나도 옆에서 들었어.
태주 (주먹을 쥐며)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돈만 좋을 대로. 여하튼 그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태주 (흥분하여) 뭐야! 이 자식이. 네 놈들의 짓이잖아.
돈만 이거 왜 이래. 증거 있어?
태주 내가 모를 줄 알고. 네 놈들의 속셈을.
돈만 흥. 존심은 있어가지고.
태주 이 자식이 죽을려고.
순간 술잔이 날아간다. 돈만의 이마에 정확히 맞는다. 피가 흐른다. 놀란 여자들이 기겁을 하며 뛰쳐나간다. 그러자 문을 지키고 있던 무리가 들어온다. 테이블에 올라가 돈만의 얼굴을 가격하는 태주. 날라 차기를 하는 졸개. 나가떨어지는 태주. 신음 소리를 내는 태주. 다시 덤비는 졸개를 술병으로 치는 태주. 쓰러지는 졸개. 의자를 던지는 다른 졸개. 피하는 태주. 테이블을 밟고 뛰어넘어 턱을 가격하는 태주. 쿵 쓰러지는 졸개. 놀라 문밖으로 밀리는 졸개들. 술 마시던 사람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그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던 태주의 일당들이 우루루 각목을 들고 들어온다. 각목에 허리를 맞는 사내. 혼비백산. 부서지는 테이블과 술병.
태주 (큰 소리로) 그만! 그만 하란 말이야 새꺄.
옆의 놈을 가격한다. 곧 조용해진다. 두 명에게 이끌려 나오는 돈만.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태주. 신음하는 돈만.
태주 (위엄있게) 오늘은 이 정도만 한다. 이번 사업에서 손떼라. 후회하지 말고. 그리고 또 하나 절대로 우리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마라. 난 한번도 네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방법론이 다를 뿐이야.
얼굴을 가볍게 치고 일어선다.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간다. 뒤따르는 일당. 이마의 피를 닦으며 주먹을 쥐는 돈만. 침을 뱉는다.
#17. 쌍둥이 파크 - 샤워실
샤워를 하는 태주. 옆구리를 거울에 비춰본다. 인상을 쓴다. 거울 속의 얼굴을 주시한다. 눈이 충혈 되어 있다. 긴 숨을 몰아쉰다.
#18. 쌍둥이 파크 입구
택시 한 대가 선다. 모자를 눌러 쓴 한 사나이가 내린다. 비틀거리며 들어간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19. 방 안
샤워를 하고 나오는 태주. TV를 켠다. 냉장고의 문을 열어 캔 맥주를 꺼내 마신다. 곧 침대 위에 엎드려 잔다.
#20.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나이
복도를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호실에 이르자 주위를 한번 둘러보는 사나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살며시 문을 연다. 방안은 TV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들어간다. 사시미를 커내 든다. TV화면 불빛이 침대 위에 자고 있는 태주에게로 퍼져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는 사나이. 점점 가까워진다. 사시미를 높이 치켜든다. 순간 눈을 트는 태주. 움칫한다. 동시에 어깨를 내리 꽂는 사시미. 비명을 지르는 태주. 다시 사시미로 찌르려는 사나이. 이불을 집어던지는 태주. 멈칫하는 사나이. 발로 가격하는 태주. 꼬구라지는 사나이. 사시미를 놓친다. 잽싸게 사시미를 집어 든 태주. 인상을 쓰며 사나이의 복부를 연속으로 찌른다. 신음하는 사나이. 곧 고개를 떨군다. 호흡이 거칠어진 태주.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21. 경찰서 : 진술 - 돈만
서너 명의 학생들이 밀려들어온다. 의자에 앉자마자 머리를 쥐어박는 순경. 머리를 숙이며 웅성거리는 학생들. 옷에는 피가 묻어있다.
돈만 주로 그 여관에서 미숙이를 보았죠. 한번은 술이 많이 취해서 아무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 새벽 3시정도 였을거요. 미숙이 고년이 여관에 들어가더라구요. 분명히 미숙이었어요. 어떻게 아냐구요? 걸음걸이를 보고 알아보았죠. 그년은 정상이면서도 다리를 약간 저는 듯한 걸음걸이를 하거든요. 그래 일행과 함께 그 여관에 투숙했죠. 그리고 미숙이를 보내라고 했죠. 그런데 이년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거예요. 카운터에 전화를 하자 하는 말이 요즘 바쁘다는 핑계를 하더군요. 꼭지가 돌더군요. 그래서 분명히 여기에 있는 거 아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자 웬 늙은 놈팽이랑 나갔다고 하더라구요. 미친년이지요 뭐. 아무 남자나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니 말이죠. 또 한번은 거지랑도 놀더군요. 퉤, 고년은 전생에 분명히 창녀였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온갖 잡다한 놈들과 어울려 방안에서 뒹굴 수 있겠어요. 지저분한 년. 퉤퉤.
#22. 하숙집 앞
전신주에 목을 맨 듯 달려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서히 선다. 잠시 후 뒷문이 열리고 미숙이가 내린다. 차 뒷좌석의 남자는 손을 약간 흔든다. 문을 닫고 인사를 하는 미숙. 차가 서서히 출발한다. 곧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자취를 감춘다. 차가 사라지자 인상을 구기는 미숙.
#23. 경찰서 내실 : 미숙
돈만씨는 이름대로 돈만 아는 사람이에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심지어 저도 돈으로 사려고 한 사람이지요. 하루는 자기 직속 안마사가 되라고 하더군요. 자기만을 위해 안마를 하고 복종하라는 것이지요. 마치 내가 자기 소유물처럼 말이에요. 그렇게만 하면 엄청난 돈과 집을 마련해 주겠노라 하더라구요. 그것을 듣고 제가 어떻게 했겠어요? 거절했죠.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죠. 그런류의 인간들은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오만한 상상에 빠져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발작을 하며 욕을 퍼붓더라구요. 예상했던 일이지요 뭐. 그의 아버지란 인물도 마찬가지죠. 부전자전이란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둘은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꽤 비슷해요. 가끔 한 사람이 둘로 변장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니까요. 사람들은 돈만씨의 아버지를 왕지주라고 불러요. 다들 그 앞에선 굽실거리죠. 그럴 수 밖예요.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일자리 내지는 집마저 빼앗기거든요. 그만큼 그와 연루가 안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조금씩은 빚을 지고 있죠.
#24. 경찰서
갑자기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는 형사. 두 손을 책상에 받치고 셋을 차례로 응시한다. 불만의 표정이 흐르고, 입이 실룩거린다.
형사 (책상을 두들기며) 이게 왜이래? 오늘 밤 샐거야? 8월 ×일 밤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야 될 거 아니야! 장마로 인해 정전이 되던 2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냔 말이야!
(잠시 서류를 들어다보고) 형준은 그날 하숙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돈만이는 여관에 있었고, 태주 네놈은 어디서 뭘했어?
태주 (퉁명스럽게) 단란주점에 있었죠.
형사 단란주점이 네 집이야. 쉬도 때도 없이 그곳에 가게. 여자랑 같이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그 여자가 누구야.
태주 길거리에서 만난 계집일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다방 김양이라고 했어요. 정 의심나면 확인해보면 알 거 아니요. 고년이란 술 마셔죠. 그리고 눈을 떠보니까 아침이더라구요. 고년은 일 나갔는지 안 보이더라구요. 그 뿐이에요.
형사 (형준을 보며) 넌 집에도 안 들어가고 그 빗속에서 뭐했어?
형준 (머뭇거리다) 여관에 있었어요. 그래요 바로 그 여관요. 미숙씨로부터 안마 좀 받으려고요. 그런데 전 아니에요. 곧 나와버렸거든요. 미숙씨랑 그런 곳에서 마주하기가 두려웠어요. 아니 미숙씨를 기다리다가 미숙씨를 데리고 나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정말이에요. 전 곧 나왔어요. 정전이 되기 전에. 그리고 빗속을 그냥 걸어다녔어요. 밤새도록.
형사 돈만이 네 놈도 같은 여관에 있었는데 그 시간에 뭐했어?
돈만 포카 쳤죠. 얘들과 말이에요.
형사 정전 된 후에는 카드놀이를 못했을 거 아니야?
돈만 (한심하다는 듯) 촛불이 있잖아요.
형사 (형준과 돈만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둘이 마주친 적 있어?
형준·돈만 (고개를 가로젓는다)
난감하다는 식으로 큰 한숨을 내 쉬는 형사. 담배를 물고 셋을 째려본다. 잠시 후 후배 동료 형사를 부른다. 서류를 넘기며 조사해 보라고 한다.
#25. 하숙집 - 여자 방
밖에서 장대비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린다. 자고 있는 여자. 전화가 울린다. 귀찮다는 듯이 뒤척이다 겨우 전화를 받는다.
미숙 여보세요. 예, 네에? 미친놈. 다른 년 보내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어떻게 가란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아프다고 하면서 대충 둘러대요. 아, 알았어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자 인상을 구긴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26. 프라자 여관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린다. 바람마저 불어 가로수가 휘어지고 간판이 떨어질듯 불안감이 감돈다. 그 사이를 하나의 불빛이 흐르고 곧 여관 앞에서 멈춘다. 택시에서 내리며 핸드백으로 비로부터 머리를 막고 뛰는 미숙. 입구에 이르자 옷에 젖은 비를 휴지로 닦는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문이 열리고 복도를 따라 걷는다. 호실을 확인한 후 초인종을 누른다. 반응이 없다. 다시 누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잠시 머뭇거린다. 얼굴이 굳어지는 미숙. 긴장한다. 문을 살며시 연다. 방안은 불빛이 약간 어둡고, TV가 켜져 있다.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방안을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신발을 벗는다. 순간 정전이 된다. 깜짝 놀라는 미숙. 앞이 캄캄하다.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때 그녀를 잡아채는 손길. 소리를 지르는 미숙.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사나이. 침대로 이끈다. 발버둥치는 미숙. 그러나 사나이의 양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옷을 벗기는 사나이. 눈을 질끔 감는 미숙. 빗줄기가 창문을 연신 두들긴다.
#27. 경찰서 내실
희미한 불빛 아래로 형사와 미숙이가 마주 앉아있다. 그냥 지켜만 보는 형사.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는 미숙. 담배를 꺼내는 형사. 불을 붙이려다 그만 둔다.
형사 (조심스럽게) 좀 곤란하게 됐군요. 분명 세 놈 중에 한 놈인데 다들 부인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러나 염려 마세요. 곧 밝혀지겠죠. 무엇보다 형준이란 녀석이 가장 유력해 보여요. 지금으로선. 돈만이 녀석도 배제할 수 없구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의외로 태주가 깨끗하다는 것이죠. 또 모를 일이죠. 제 말 따라 정신 차렸는지. 여하튼 좀 시간이 걸리겠는데요. 그건 그렇고 그때 상황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말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미숙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 셋 다 아니에요.
형사 (놀라며 그러면서도 귀를 기울이며) 예? 그게 정말이에요?
미숙 예. 잊으셨어요? 제가 안마사라는 거. 웬만한 체형은 다 알 수 있다구요.
(눈을 감으며) 낯익은 체격이었죠. 그러나 셋은 아니에요.
형사 다른 둘은 몰라도 형준이의 몸은 모르잖아요.
미숙 (눈을 뜨고 형사를 바라보며) 하숙집에서 봤어요. 집안에서는 종종 웃옷을 벗고 지내거든요. 그리고 형준씨를 너무 나쁘게 보지 말아요.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법관보다는 문학가가 더욱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말하는 게 달라요. 물론 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쾌 상징인가 뭔가 하는 것들을 쓰거든요.
형사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음. 분명히 낯익은 체형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곧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죠?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왜 이들 셋을 신고했죠?
미숙 전 신고한 적 없어요.
형사 예? 그럼.
미숙 아무래도 하숙집 아줌마가 한 듯해요. 그날 밤 술에 취해 아줌마에서 하소연 한 것 같아요. 젠장 이놈의 술이 웬수라니깐.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형사는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구긴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미숙 전 줄곧 한 사람을 찾아 다녔어요. 안마사가 된 이유가 그래서 이죠. 혹시 모성본능에 대해 아시나요. 자기자식이라면 누구든지 갖을 수 있는 본능요? 역시 쉽게 생각하는군요. 어쩌면 그게 옳을지도 모르죠. 전 사생아예요. 어머니는 끝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씀 안 하셨죠. 참 불쌍한 분이셨어요. 병으로 죽어가면서까지 자기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게는 단 한마디의 원망도 못하게 하셨거든요. 어머니가 그럴수록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어머니도 한이 됐나봐요. 돌아가시기 전에 네 아버지는 등에 커다란 혹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후 전 여관에 출입했어요. 그러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죠.
#28. 어느 여관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미숙. 테이블 위에 양주가 놓여 있다. 양주는 반정도 비어 있다. 의자에 술에 취한 사나이가 앉아 있다. 사나이가 눈을 지긋이 뜬다. 얼굴을 본 미숙은 약간 긴장한다. 그러면서도 태연한 척하며 말을 건넨다.
미숙 어머 왕지주님! 웬일이세요. 저 같은 년을 다 부르시고요.
왕지주 (화를 내며)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시원하게 주무르기나 해!
비틀거리며 침대로 가는 왕지주. 그러다 쓰러진다. 일으켜 세우고 침대로 안내하는 미숙.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짓는 왕지주. 겉웃음으로 답례하는 미숙. 윗통을 벗는 왕지주. 돌아눕는다. 순간 놀라는 미숙. 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떨리는 손. 목을 서서히 주무른다. 그리고 점차 어깨. 등으로 내려간다. 잠시 멈칫한다. 뒤를 돌아보는 왕지주. 웃는 미숙. 다시 움직이는 손길. 등의 커다란 혹을 피해가다 살며시 만진다.
미숙 왕지주님! 언제부터예요?
왕지주 (인상을 쓰며) 그렇게 부르지마! 그냥 회장님이라고 불러. 뭐가 언제부터야. (미숙이가 등의 혹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건 알아서 뭐하게?
미숙 (흘겨보며) 왜요? 알면 안 되요?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고. 아이 그러지 말고 얘기 해 봐요. 더 잘 해 줄께요. 예?
왕지주 (눈을 감으며) 누구랑 똑같은 얘기를 하는군.
미숙 언년이에요?
왕지주 (움칫하며) 뭐?
미숙 아이 놀래기는요. 그렇게 말한 여자가 누구냐구요.
왕지주 년인지 놈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미숙 에이, 왕지주 아니 회장님도. 제가 그것 하나 모를까봐서요. 척 보면 알죠.
왕지주 20년도 넘은 얘기야.
미숙 (곧바로) 아이 그러니까 누구냐구요.
왕지주 왜 이렇게 귀찮게 해! 주무르기나 해!
미숙 (아양을 떨며) 아이, 회장님임. 말씀해주세요오.
왕지주 (못 이기는 척하며) 이쁜 여자였어. 술집에서 만났지. 그런데 말을 안 들었어. 네년처럼만 고분고분 했어도 좋았을 텐데.
미숙 왜 말을 안 들어요?
왕지주 고년이 고집이 셌거든. 아주 악질이야. 같이 살자고 했더니 첩은 싫다나 어쩐다나. 또 모르지 기둥서방이라도 있었는지.
미숙 그래서요?
왕지주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여편네가 하도 바가지를 긁어서 돈 좀 쥐어 주고 보냈지 뭐.
미숙 (손의 힘이 풀리며) 그 여자를 사랑했나요?
왕지주 왜? 샘 나? 걱정마. 그런 건 아니니까. 그냥 불쌍해서 좀 데리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미숙 그 뒤론 소식을 못 들었나요?
왕지주 이년이 왜 이래? 몰라 못 들었어. 아, 뭐해! 안 주무르고.
미숙 예? 아, 예.
왕지주 근데 한 번은 꼭 보고 싶었어. 아직 살아있는지 원. 그리고 보니 네년과도 좀 비슷한 듯 하다. 네년처럼 피부만큼은 고왔거든.
안마를 중단한 미숙은 씁쓸한 웃음만 짓고 있다. 그리고 주먹을 눈에 띄지 않게 쥔다.
#29. 포장마차
하숙집 앞에서 만난 형준과 미숙. 술 마시자고 하는 미숙. 흔쾌히 승낙하는 형준. 둘은 근처 포장마차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른 저녁이라 포장마차 안은 한산하다. 소주와 안주를 시키는 미숙.
형준 (술잔을 받으며) 항상 불안해 보이는군요.
미숙 뭐가요?
형준 글쎄요. 뭐라고 단정지어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렇게 느껴져요.
미숙 (자기 잔에 술을 직접 따르며) 형준씨는 누군가를 증오해 본 적 있나요? 마치 죽이고 싶도록 말이에요.
형준 (술 한잔을 더 마신 후) 증오정도는 아니지만 미워한 적은 여러 번 있었죠. 아버지죠. 아버지는 항상 저더러 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지죠. 저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말이에요. 술만 드시면 그 말씀은 더욱 집요하죠. 그래서 종종 말다툼을 하죠. 이곳으로 이사온 이유도 그 중의 하나예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아버지는 영원히 저의 아버지거든요. 제가 싫다고 부정해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이 핏줄이죠. 그래서 다시 고시원으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참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는군요. 저를 보자마자 그러셨죠. '2개월? 3개월?'라고요. 그때는 무척 황당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사람 보는 눈이 쾌 있으시더군요. 그래도 제가 이긴 셈이죠. 어느덧 6개월이 지났으니까.
(잠시 침묵)
혹 자연의 색깔 중에서 검은색은 없다는 것 아세요? 어둠요? 아니에요. 자연엔 검은색이 존재하지 않아요. 물론 어둠을 검은색으로 볼 수 있죠.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결코 검은색이 아니에요. 주위의 사물에 따라 다르지만 보라색과 파란색의 혼합에 가깝죠. 단순히 사람들이 검은색으로 인식할 뿐이지요. 허상을 보는 셈이죠.
미숙 언제 가나요?
형준 글쎄요. 일단 아버지를 찾아 뵙고 나서 결정해야죠.
미숙 곧 장마가 질 텐데, 끝나면 가시죠.
형준 꼭 무슨 일을 저지를 듯하군요.
미숙 (웃으며) 아, 아니예요. 단지 장마가 오기 전에 어디 좀 다녀오려고 할뿐 이예요.
형준 어딘지 제가 알면 안 될까요?
미숙 왜요? 또 불안해 보여서요? 걱정 말아요. 절대로 그런 건 아니니까요.
형준은 미숙의 얼굴을 바라본다. 미숙은 부끄러운 듯하면서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다. 밖은 조용하다. 멀리 서쪽 하늘에서 육중한 구름이 서서히 몰려온다.
#30. 무덤 앞에서
술잔을 따르고 절을 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는 미숙. 잔디를 움켜쥐다 땅을 치다 한다.
미숙 (계속 울먹이며) 단지 불쌍해서 불쌍해서 그랬대요. 엄마, 엄마도 들었죠. 그래요. 기어코 그 인간을 찾아냈어요. 근데 그 인간이 하는 말이 불쌍해서래요.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네에? 그런데 왜? 왜? 그 인간을 그렇게도 못 잊으셨어요. 왜? 저는 어떻게 하라구요. 죽일 거예요. 꼭 죽여야 만해요. 엄마 저 저를 용서하세요. 엄마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목놓아 운다) 아버지 안 계신다고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꿋꿋하게 저를 키워주셨는데, 차라리 좋은 아저씨 생겼을 때 그냥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따라가지 그랬어요. 그러면 저도 이렇게 살진 않았을 것 아니에요. 저도 좋은 사람 만나 자식 낳고 알뜰살뜰 잘 살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왜? 왜 그렇게 그 인간에게 집착 했냐구요. 고작 첩 생활하려구요? 고작. 이젠 다 필요 없어요. 두고 보세요. 꼭 제 손으로, 제 손으로…….
#31. 정전되던 날
전화를 끊은 미숙은 서랍을 연다. 서랍을 뒤지다가 무엇인가를 하나 커낸다. 작은 물건 하나가 취침등 불빛에 날카롭게 빛난다. 묘한 웃음을 짓는 미숙. 곧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탄다.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린다. 바람마저 불어 가로수가 휘어지고 간판이 떨어질듯 불안감이 감돈다. 미숙을 태운 택시가 여관 앞에서 멈춘다. 택시에서 내리며 핸드백으로 비로부터 머리를 막고 뛰는 미숙. 입구에 이르자 옷에 젖은 비를 휴지로 닦는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문이 열리고 복도를 따라 걷는다. 호실을 확인한 후 초인종을 누른다. 반응이 없다. 다시 누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잠시 머뭇거린다. 얼굴이 굳어지는 미숙. 긴장한다. 문을 살며시 연다. 방안은 불빛이 약간 어둡고, TV가 켜져 있다.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방안을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신발을 벗는다. 순간 정전이 된다. 깜짝 놀라는 미숙. 앞이 캄캄하다.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려한다. 그때 그녀를 잡아채는 손길. 핸드백을 놓친다. 소리를 지르는 미숙.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사나이. 침대로 이끈다. 발버둥치는 미숙. 그러나 사나이의 양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옷을 벗기는 사나이. 눈을 질끔 감는 미숙. 신음소리가 커진다. 빗줄기가 창문을 연신 두들긴다.
#32. 경찰서 내실
미숙 그 사람을 만난 이후로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남 몰래 준비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매번 실패했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죽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죠.
형사 왜죠? 갑자기 그렇게 마음이 바뀐 이유가?
미숙 아까 말했잖아요. 모성 본능이라고요. 그래요. 아기를 가졌어요. 처음에는 낳을 수 없는 아기이기에 지워버리려고 병원에 갔었죠. 그런데 문득 엄마가 생각나더군요. 엄마가 말이에요. 엄마가 절 내려다보며 웃고 있더군요. 이제서야 네 어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니 하면서 말이죠. 엄마도 분명 분명히 핏덩이 같은 저 때문에 그렇게 살다 가셨을 거예요. 저도 이 핏덩이를 어떻게 하지 못해요. 하지만 엄마와는 달라요. 전 그 사람 앞에 나중에 당당하게 나설 거
예요. 그래서 아주 고통스럽게 해 줄 거예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치욕스러운 고통을 말이죠. 그리고 엄마 앞에 무릎 꿇게 할 거예요. 이 방법이 더 효율적인 것 같아요. 저 세 사람이 그것을 일깨워 줬죠.
형사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이) 그럼 아기와 세 사람과의 관련성은?
미숙 (단호하게) 아기와는 상관없어요.
긴 숨을 내 쉬는 미숙. 가만히 지켜보던 형사, 눈치를 채고 담배를 끈다.
미숙 세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들은 각각 자기의 아버지를 존경해요. 형준씨는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다시 고시원에 간다고 했어요. 그리고 태주씨는 항상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버릇처럼 말해요. 그러면서 이젠 정신차리고 자기도 아버지처럼 깨끗하게 사업을 해 볼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돈만씨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태주씨 아버지 산소에 가서 무릎을 꿇었어요. 아직 태주씨와 돈만씨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많이 좋아진 셈이죠. 이건 본능이에요. 먹고, 자고, 싸고, 누구든지 탯줄을 끊고 나오면 그런 본능에 의해 숨을 쉬게 되고, 때가 되면 자기 새끼도 낳고. 그러다가 서서히 깨닫죠. 서로의 필요성을 말이에요. 어쩌면 머리 속에 있는 허상일 수도 있고, 인간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탯줄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식은 부모를 부모는 자식을 연결할 수 있죠. 사람들은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필요해요. 왜냐구요? 혼자 산다는 건 너무 외롭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배꼽 외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탯줄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제 경우는요? 이건 형준씨가 해 준 말인데요. 진정한 부메랑은 한번 떠나면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요. 호호호…….
미숙이의 웃음소리가 밝게 퍼진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점점 확대된다. 그와 동시에 노파의 얼굴과 겹친다.
#33. 씨앗골 - 저녁
노파 그 소문에도 불구하고 서씨네와 최씨네는 사돈관계를 맺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만나지도 않았단다. 왠지 아니?
손녀를 바라보는 노파. 손녀는 어느새 노파의 무릎에서 잠들어 있다. 조용히 웃는 노파. 살며시 손녀의 다리를 어루만져 본다.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강아지들이 배고픈지 깽깽거린다. 노파는 힐끗 강아지를 쳐다보고 담배를 문다. 담배 연기가 비 사이로 서서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