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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nie], 독서 논술이야기 [한국힐링인문학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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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자료방 스크랩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과정과 특징 - 원광대 사학과 자료실 펌
agada 추천 0 조회 151 07.04.10 09: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과정과 특징》

 

 

 

 

서론

본론

      Ⅰ. 아테네 민주정의 성립 배경

      Ⅱ.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과정

       (1) 왕정에서 과두정으로의 변화

       (2) 솔론(Solon)의 금권정치

       (3)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의 참주정

       (4)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5) 페리클레스(Pericles)의 민주정 완성

     Ⅲ.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

     Ⅳ. 아테네 민주정과 근대 민주정치의 차이점

결론

 

 

 

서론

 

 그리스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넓은 평야가 없었기 때문에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마다 폴리스라 불리는 하나의 작은 나라, 즉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아테네이다. 기원전 8세기 중반 도시국가로 출발한 아테네는 귀족정치를 실시하였지만 기원전 6세기 중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한 참주정,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한 민주정으로 발전하였다. 아테네는 3차에 걸친 페르시아전쟁(BC 492-479)에서 승리한 이후 델로스동맹을 결성하여 그리스와 에게해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그러나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 대항하는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BC 431-404) 과정에서 페리클레스가 사망하고 전염병이 창궐, 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델로스동맹이 해체되면서 지도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정치·군사적 쇠퇴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문화적 지도력은 유지되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수많은 사상가를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에 패배하여 마케도니아가 주도하는 헬로스 동맹의 일원이 되면서 도시국가로서의 정치적 생명력을 다했다.

 이렇듯 아테네 민주정치는 그리스세계를 고찰하는 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요소이다. 상업경제와 함께 아테네를 진취적·개방적 사회로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자치와 자율을 지향하게 한 것은 민주정치였다. 아테네는 상업경제체제였으므로 민주정치를 할 수 있었고 또한 민주체제였기 때문에 상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상업경제에 의해 문화창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또한 페르시아로부터 아테네 자신은 물론 그리스세계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테네는, 그리스문화를 독점하지는 않았고, 또한 모든 폴리스를 대표하는 폴리스가 아니었음에도 그리스를 상징하고 대표하였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아테네의 민주정에 대해서 서술할 것인데, 이해를 돕고자 먼저 아테네 민주정의 성립배경에 대해 서술할 것이며 그 다음은 민주정의 발전과정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앞서 살펴본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에 대해 언급하도록 할 것이다.

 

본론

 

Ⅰ. 아테네 민주정의 성립 배경

 

 아테네라고 해서 처음부터 민주체제로 시작한 것은 물론 아니다. 민주정치는 평민이 투쟁을 통해 지배세력이지만 비교적 진취적인 귀족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즉, 단순한 제도상의 변화가 아니라, 그 제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시민단 내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귀족정은 혈통에 의해 세습되는 소수 귀족들의 지배인 데 반해, 민주정은 다수 민중의 지배를 뜻한다. 결국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의 발전은 종래 귀족들만이 독점하던 실질적인 참정권을 보다 많은 시민들이 공유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한 변화는 물론 귀족들의 자발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귀족들의 정치 독점에 대한 도전 세력이 성장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아테네인의 민주정의 발전 과정을 솔론(Solon),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나 페리클레스(Pericles) 등의 몇몇 정치 지도자만의 개혁과정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을 지도자로 내세운 지지자들의 집단적 동향인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초기에는 상류가문의 대지주인 귀족들만이 폴리스의 국정에 참여하는 귀족정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전투방식은 기병중심의 전술이어서 말을 사육하고 전차 등의 값비싼 전투장비를 스스로 구비할 수 있는 토지귀족층이 국가의 바위를 전담하던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명문가문으로서의 부와 위세, 그리고 국가에 대한 군사적 공헌을 바탕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세력의 정치독점에 대한 도전이 생겨났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들은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건설에 참여했다. 그것은 암흑기 이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회복을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했고 따라서 토지 부족현상이 심각한 현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식민운동은 지중해 전역에 걸치다시피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저 멀리 스페인의 동부해안에까지 이르렀다. 식민운동은 모국의 토지부족과 그로 인해 야기될 사회적 긴장을 완화시켰다. 이때의 식민지 건설은 근대의 식민지와는 다른 농업적인 성격의 식민지 건설로, 식민자들의 목적은 경작할 새로운 토지의 확보였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과 빈번한 해상활동으로 인해 새로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활발해진 교역활동과 수공업생산에 힘입어 부유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들이 등장했다.

 또한 군사전술상의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소수의 기병중심의 전술에서 벗어나 사각밀집대형인 팔랑크스(phalanx)를 주축으로 하는 중갑 보병전술로 바뀌었던 것이다. 중갑보병(hoplites)에 주로 충원된 세력은 중농 이상의 농민들, 부유한 상인, 수공업자들이었다. 이들이 국가의 방위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면서, 폴리스 내에서의 그 발언권과 책임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상업의 발전과 함께 상업활동으로 부유해진 귀족과 대상인이 점차 권력과 재산을 독점해 간 대신 평민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해 갔다. 농산물을 필두로 지중해 각지로부터 유입되는 풍부한 물자들은 농민을 비롯한 평민층을 크게 위협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흉작과 부채로 더욱 더 가난해졌으며 채무관계로 토지를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린 후 갚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도 적지 않았다. 몰락한 평민의 불만은 결국 수탈하는 부유층과 수탈당하는 빈민층으로 계급적 대립을 격화시켰고 그것에 지역적 대립이 더해졌다. 심각한 분열과 대립에 직면한 아테네는 그와 같은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고 그것은 결국 고대의 다른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민주정치를 만들어내었다.

 

Ⅱ.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과정

 

아테네는 초기의 짧은 왕정시대 이후 귀족정을 거쳐 점차 민주정으로 발전해 갔다.

 

  (1) 왕정에서 과두정으로의 변화

 기원전 8세기 중엽까지 아테네는 그리스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왕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Athens)에서는 기원전 7세기 초에 왕권을 제한하는 귀족제도가 수립되었다. 왕(basileus)은 세습제에서 선거제로 바뀌어 선출되다가 7세기 초에 그 통치기간마저 10년으로부터 1년으로 줄어들어, 사실상 왕정은 폐지된 것과 다름없었다. 기원전 638년경에는 집정관(archon)을 비롯한 9명의 최고행정관들이 행정, 사법, 군사 등의 주권을 장악하였다. 이 9명의 최고행정관에는 왕(archon basileus), 군지휘관(polemarchos), 아르콘(archon) 6명의 사법관(themothetai) 등이 포함되었다. 그 결과 왕정시대부터 존속해온 귀족회(areopagos)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2) 솔론(Solon)의 금권정치

 아테네 민주정 성립배경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는 교역과 수공업생산에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이 나타난 반면, 한편으로는 흉작과 부채로 더욱 가난해진 농민들도 많아졌다. 이러한 무질서 상태의 아테네에서 참주의 등장이 예상되는 상황이 직면했는데 그 속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솔론이다.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참정권의 분배와 시민들 사이의 경제적 불균형 문제였다. 그는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이 되자 혈통에 의해 참정권이 제한되던 과거의 방식대신 재산의 등급에 따라 참정권을 차등 부여하는 금권정치(金權政治)를 시행했다.

 솔론은 민회의 예비모임인 4백인 협의회를 새로 만들고 시민들에 대한 법의 보호를 강화하는 사법개혁을 실시하는 등 장래 아테네인의 법제의 기본적인 바탕을 마련했다. 이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헌법을 성문화한 셈인데 헌법의 성문화는 귀족들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하층 계급을 민회에 참여시킴으로써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형사소송의 최고 법정을 조직했는데, 이 법정은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었고 재판관은 남자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

 경제 개혁의 내용은 빈곤한 시민들의 기존 부채를 말소하고 이후에는 인신(人身)을 저당으로 하는 부채를 무효화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여 빈곤한 시민들의 경제적 예속을 방지하기도 했다. 솔론이 시민들의 경제적 예속화를 방지함으로써 차후 아테네인은 외국인 구매노예를 토대로 한 동산 노예제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그는 개인의 토지 소유 면적을 제한함으로써 빈농들에게 유리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대외 무역에서 아테네에게 유리하도록 새로운 화폐제도를 도입했고, 게으른 자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벌을 가했으며,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식들에게 상거래를 가르치도록 명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영구히 거주하고자 하는 외국의 수공업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가 표방한 정책은 기존 정체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 현실 상황을 반영하는 법의 제정을 통해 귀족층의 부당한 수탈을 방지하려는 소극적인 개혁이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그는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솔론의 개혁 시도는 아테네 시민단 내의 갈등과 분열을 원활하게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참주정이었다.  

 

  (3)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의 참주정

 솔론의 개혁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이었지만 불평을 무마하지는 못했다.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 중 일부가 상실된 데 대해 불만을 품었다. 중간 계급과 하층 계급은 자신들이 여전히 행정관직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또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종전의 권력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었다. 뒤이은 혼란과 환멸 가운데 기원전 560년에 아테네 최초의 참주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무력을 사용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그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추방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였으며 빈농에게는 영농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업을 장려하여 특히 흑해 연안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그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이고 아테나 여신과 디오니소스(Dionysos) 신을 위한 대제전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동정성을 확보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배제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서 자신의 개인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문화적 유화정책을 표방함으로써 아테인의 반감을 약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민주정의 발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는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귀족세력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이후 민주정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는 했다.

 즉, 그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귀족세력을 약화시켜 이후 민주제 발전에 도움을 주고 아테네인의 문화발전에도 나름의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제도적인 개혁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그의 개인적인 권력과 자질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히파르코스(Hipparcos)와 히피아스(Hippias) 참주정을 이어받았으나 민심을 잃고 아테네로부터 추방됨으로써 약 반세기에 걸친 참주정치는 막을 내렸다. 참주정치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전술의 변화로 귀족지배가 동요하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된 상황을 이용하여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독재적을 정치를 행한 것을 말하며, 결국 귀족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현상이었다.

 

  (4)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히피아스의 추방으로 참주정치가 쓰러지자 이를 타도하는데 협력하였던 귀족과 평민 사이에 다시 대립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 분쟁에서 추방된 귀족의 한사람인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로 귀환하였다.

 솔론의 개혁과 참주정의 출현과정에서 아테네의 데모스(demos : 民衆)가 자신의 힘으로 민주제를 이루어낼 만한 역량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민주제를 위한 개혁에 나선 인물이 바로 귀족 출신의 클레이스테네스였다. 그는 민중의 지지에 대한 보답을 그들에게 양보를 약속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급격한 개혁 작업을 단행했다. 이 때문에 그 후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08년에서 502년까지 아테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당시 아테네에 거주했던 모든 자유민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시민의 수를 늘렸다. 또한 그는 부족간·지역간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귀족들의 권력기반이 되어 오던 4개의 혈연부족(血緣部族)을 분산시켜 오늘날의 구(區)격인 데모스를 근간으로 하는 10개의 지연부족(地緣部族)으로 개편하였다. 부족제 개편에 따라 4백인 협의회 대신 5백인 협의회가 설치되고 각 부족을 대표하는 50인은 데모스에서 추첨으로 뽑혔으며 데모스의 모든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한 데모스의 구성원들이 아테네 의회인 민회에 출석할 수 있는 자격을 보유하였으며 민회의 활동도 더욱 활성화되었다. 민회의 권한도 확대하여 5백인회에서 상정한 법안에 대한 심의 및 채택 여부 결정권을 부여했고, 전쟁 선포권, 예산 편성권, 그리고 퇴임행정관에 대한 회계 감사권을 부여했다. 민주제 발전을 위한 제도적인 토대가 이룩된 셈이었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입은 아테네시민(데모스)은 중간층인 중갑보병층이었다. 아직 하층시민은 국가의 운용에 참여할 만한 경제적 여력과 여가를 갖지 못했고 국가 방위에 대한 공헌도 미약했던 것이다.

 끝으로 클레이스테네스의 국제(國制)는 기원전 502년에 발효되기 시작하고, 이로써 아테네는 결정적으로 민주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시대가 지난 후 오래지 않은 기원전 487년에 아테네인은 도편추방제도(도편추방법은 민주 정치를 위협할 만한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써서 투표하는 것인데, 6000표 이상을 얻은 자는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하였다)를 제정하여 국가에 대해 참주가 될 위험스러운 인물들을 10년동안 추방시킬 수 있게 했으며 이는 민주정치를 지키는 보완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물론 당파나 부의 불균등으로 인한 갈등과 내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강도는 훨씬 약화되었다. 이제 모든 시민은 정부를 자기와는 무관한 지배기구로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이 그 일원으로서 직접 참여하는 시민공동체와 동일한 통치 기구로 간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테네시민 사이에는 다른 폴리스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싹트고 자라나게 되었다.

 

  (5) 페리클레스(Pericles)의 민주정 완성

 아테네인은 5세기 초 페르시아전쟁서의 공헌을 바탕으로 그리스 내의 강국으로 부각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인의 지배를 받던 이오니아인이 페르시아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이 반란을 그리스인이 지원하자 페르시아 왕은 기원전 490년과 480년에 그리스 본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당시 폴리스들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마라톤전투(BC490)와 살라미스해전(BC480)에서 페르시아군대를 물리쳤다. 아테네인이 그리스인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그로써 아테네인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급부상하였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아테네인과 에게해 주변국가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델로스 동맹을 맺었는데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인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그러나 동맹 내에서 월등한 해군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테네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차츰 동맹은 강압적인 제국으로 변질되었다. 아테네인은 동맹금고의 자금을 스스로 관리하고 동맹국의 내정에도 간섭했다. 이러한 델로스동맹의 결성은 아테네인의 국내 정치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델로스 동맹은 해상동맹이었던 만큼 해군력의 양성과 유지가 관건이었는데, 사실 해군력의 주축이 아테네인이었으므로 동맹금고의 자금은 주로 아테네인을 위해 사용되다시피 했다. 아테네인의 억압적인 제국정책은 동맹국들의 독립과 자유를 유린하는 행동이었다. 이 강압적인 제국정책은 그리스 내에서 아테네인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마침내 스파르타인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아테네 민주정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페리클레스가 등장한 것은 바로 아테네가 이러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있던 황금시기였으며, 그는 아테네인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활약했다. 페리클레스 직전에 민주정을 주도했던 인물은 에피알테스(Ephialtes)였는데 그는 개혁의 급진성으로 인해 불만을 사 암살당하여 그 뒤를 이어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민주정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배심원 수당을 처음 도입하여 하층민들의 재판 참여를 유도했고 아테네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제국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렇게 아테네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 시대(461∼429 BC)에 완성되었다.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의 전성시대를 이끈 페리클레스에 이르러 18세 이상의 남자시민으로 구성된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행정을 담당한 5백인회, 그리고 6천명의 배심원 내지 재판관으로 구성된 재판제도 등을 핵심으로 하는 삼권분립적 민주제도가 확립되었다. 특히 행정의 경우 5백인회는 10개의 위원회로 나뉘어 한 위원회가 1년의 10분의 1을 담당했다. 명목상의 국가원수는 매일 바뀌는 당번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이 시기에 민회는 5백인회의 제출 법안에 대한 비준 여부 결정권에 덧붙여 법안 발의권도 갖게 되었다. 외교정책, 전쟁 또는 식량공급 등 중요한 국책은 민회의 결정을 거쳐야하며, 민회는 자유로운 발언을 통하여 입법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10명의 장군 권한이 확대되어 아레오파고스 회의를 완전히 누르고 최고정무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내각에 해당한다고 하겠으며, 모든 내외정책의 수행이 그들의 수중에 집중되었으며, 그들의 정책이 성공하는 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서 거듭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밑에 아테네나 해외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추첨에 의하여 임명되고 임기는 1년이었다.

 이렇듯 아테네의 재판제도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완성되었다. 행정관의 결정에 대한 상소를 심리하는 최고 법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종류의 소송을 다룰 시민 법정이 설치되었다. 이 명단에 의거해 최소 201명에서 최대 1,001명에 이르는 다양한 규모의 배심원단이 구성되어 특정한 재판을 맡아보았다. 각 배심원단은 하나의 법정을 구성했으며 소송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할 권한을 지녔다. 행정관 중 한 사람이 재판을 주재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판결권이 없었다. 배심원이 곧 재판관이었으며 일단 판결이 내려지면 상소는 불가능했다.

 제국으로의 발전에 따를 경제적 번영과 동맹시로부터의 공납금으로 국고가 윤택해진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배심원과 5백인회 의원, 기타 공직자에게 보수를 지급할 수가 있었고, 이러한 수당제는 후에 민회의 참석자와 연극관람자에게까지 확대되어 빈곤한 시민도 실질적으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수당제의 확대와 더불어 국고부담을 조금이라도 감소하기 위하여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모두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시민권을 한정하는 시민권 제한법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국고에 의한 수당제의 확대와 철저한 추첨제, 그리고 1년 임기제는 시민으로서 원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가 직접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약 3만명을 헤아리는 상공업이나 금융업이 종사하는 재유외인(在留外人)과 20만명에 달하는 노예, 그리고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고, 민주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수는 약 4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수적으로는 제한된 좁은 범위에 한정된 것이었으나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고대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시민의 정치능력에 대한 평등한 신뢰에 입각한 철저한 것이었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된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여 아테네인의 영광을 과시했다. 그런데 그가 아테네인의 이익과 영광을 고양시키는 데 사용된 자금은 사실 델로스 동맹의 기금에서 나온 것이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네인이 누린 자유와 영광은 동맹국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인의 제국지배는 펠로폰네소스전쟁(BC431∼404)을 초래했고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인은 제국과 해상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Ⅲ.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

 

 아테네인의 민주제의 역사는 한마디로 폴리스의 모든 자유민 남성이 폴리스 내의 정치적 활동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추구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시민단 내의 일부가 각기 자신의 경제적 역량과 국가에 대한 공헌을 바탕으로 그 정치적 권리를 확보해 가는 과정이었다.

 아테네 민주정은 다음과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아테네 민주정이 폴리스라는 소규모 국가에서나 가능한 직접민주제였다는 점이다. 전체 시민들의 모임인 민회는 폴리스 국정의 핵심기구로서, 주요 관리를 선출하고 국가의 정책을 의결하는 모임으로 1년에 약 40차례 열렸다. 국가관리들은 대부분 민회에서 추첨으로 선출되어 1년 임기로 국가에 봉사했고 재판도 역시 모든 시민들로부터 추첨으로 선출된 배심원들이 시민 법정을 구성했으며 모든 시민들이 함께 모여 민회에서 중요정치문제에 대해 결정을 했다. 입법·행정·사법 업무가 모두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민주정의 특징을 가진 아테네인은 시민들이 평등하게 직접 민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한 제도들로는 추첨제, 수당제, 중임제한이 있었다. 아테네인은 몇몇 예외적인 관직을 제외하고는 아르콘을 포함한 모든 관직을 추첨으로 선출했다. 이는 시민들의 가문, 재산, 능력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국정에 차별 없이 참여할 수 있다는 원칙을 보여준 것이었다. 수당제는 국정에 대한 모든 참여에 대해 일정한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국정 참여에 대한 수당개념은 기원전 5세기 중엽에 페리클레스가 처음으로 도입했고, 점차 구체적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어떤 가난한 시민이 추첨에 의해 국정의 한 임무를 맡는다고 해도 일년 동안 자신의 가계를 돌보지 않고 국가에 봉사하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필요로 했다. 수당제는 이런 가난한 시민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심지어 법정과 민회에 출석해도 수당을 받았다. 그리고 아테네인의 모든 관직은 특별히 장군과 협의회 의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단임으로 제한되었다. 이것은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에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아테네인은 직접 민주정이 부패하지 않고 건전하게 운영되도록 도키마시아 제도와 다각적인 감사제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사실 직접 민주정은 어떤 시민이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거나 공동체의 가치체계를 위반한다면 원활한 국정 운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테네인은 시민이 추첨으로 관직에 선출되더라고 관직에 취임하기 전에 그에 대한 다른 시민들의 평판이나 그의 개인적인 결격사유를 확인하였는데, 그것이 도키마시아 였으며 관리로서 근무 중이나 그 임기가 끝난 후에는 그가 임기 중에 직무를 부패 없이 성실히 수행했는지를 감사(監査)했던 것이다.    

 그 다음의 특징은 민주제가 실질적으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민회나 법정에 나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역량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했는데, 노예와 아테네 제국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특히 아테네인의 민주정이 갖는 독특한 역사적인 배경이었다. 시민들이 시민적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직접 생계를 돌보지 않더라도 그들을 대신해서 생업을 꾸려가고 가내노동을 담당할 대체 인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대체인력은 노예들이 대행해 줌으로써 시민들은 부담 없이 국정을 논의하고 관리로 봉사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제국에서 얻는 경제적 혜택 때문에 하층민들까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테네인이 동맹국들로부터 그 많은 재정수입을 확보하지 못했더라면, 시민들에게 공무수당으로 제공할 자금이 충분치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테네인 하층민의 정치참여는 배제되었을 것이다. 결국 노예들과 아테네 제국은 고전기 아테네인의 민주정이 발전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아테네 민주제가 추구하던 자유는 시민이라는 특권층만이 누리는 자유였다는 것이다. 그 자유는 20세 이상의 성인남자만이 누리는 것이었고 여성, 노예,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 시대는 아테네 거주 외국인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시민의 수가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시민의 수가 분명 전체 주민 중 소수에 불과했다.

 이렇게 한계도 있지만 그 한계 안에서 아테네 민주주의가 근대 민주주의보다 한 층 더 철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10인의 군사 위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정관을 추첨으로 선발하고, 모든 공직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했으며 ,심지어 재판에서까지 다수결의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했다는 것은, 그들이 현대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민의 정치 역량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근대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은 아직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민(市民)과 비시민(非市民)의 이러한 불평등을 아테네민주제의 큰 결점으로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국가가 전제 지배자의 개인소유물이 아니라 시민들의 공동소유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이것이 아테네인의 직접민주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경험은 당시 동방세계의 전제정치와 비교할 때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Ⅳ. 아테네 민주정과 근대 민주정치의 차이점

 

 아테네 민주정과 근대민주정치와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가장 큰 차이는 아테네는 시민들 모두가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제였고 지금의 민주제는 국민들이 선거로 대표자를 뽑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치를 하게 하는 대의민주제라는 것이다.

 아테네의 시민은 성인남자로 여자와 아이, 노예,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꼭 불공평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시 모두 나가서 싸워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자나 외국인 등은 나가서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즉, 의무에 대한 보상을 참정권이라는 형태로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도 선거를 통해 집정관을 뽑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민주제처럼 집정관이 모든 행정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의견에 의해 요구사항이 결정되면 그것을 집정관이 집행하는 정도의 형태였다. 또한 집정관은 전쟁이 일어나면 지휘관이 되어 시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해야 했다.

 하지만 근대민주정치가 평등한 자격을 소유한 보편적인 참정권을 바탕으로 한 국민에 의한 정치라면, 아테네 민주정은 제한적 참정권에 기초한 시민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살펴보면, 정치에 참여하는 보편성에 차이가 있어 아테네 시민을 일종의 정치적 특별계층으로 보아 아테네 민주정을 불평등하다고 보면서 이를 아테네 민주정의 한계점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반면에 오늘날의 민주제는 국토도 크고 국민들이 너무 많아짐에 따라 아테네의 직접민주제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그에 따라 오늘날은 대표자를 뽑아 그 사람들이 행정을 도맡아 하는 대의제 형태이다. 그리고 국방은 군인이 맡고 일선행정은 공무원들이 한다.

 정치과정에 있어서도 아테네의 민주정과 근대의 민주제는 차이가 있다. 현대 민주제에서는 의회와 정당을 중심으로 정체체제가 작동하는데 아테네 민주정 아래서는 정당이라는 조직이 아니라 시민들의 연설 혹은 토론과 컨센서스(박수, 호응도 등)에 의해 공직자 선출이나 중요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테네와 근대는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아테네 민주정 아래서 정치란 자유로운 시민들이 서로 토론하는 공론장 자체를 의미하며, 자신이 뛰어남을 과시하고 다른 자유인들(시민)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근대 민주제에 있어서 정치란, 정치권력의 획득, 유지, 배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관련한 경제·문화·사회 전반의 주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

 

 고대 그리스는 초기에 폴리스라는 작은 촌락 단위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폴리스 중 두 곳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이다. 또 그 중 아테네는 특히 민주정치가 발달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폴리스들은 아테네의 영향을 받아 민주정치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테네의 정치발달 과정을 살펴보면 왕정 -> 귀족정 -> 금권정 -> 참주정 -> 민주정 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초기 아테네는 왕이 있기는 했었으나 권력은 미약했고 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좀 지나 솔론이 등장하여 개혁을 실시했다. 바로 각각 재산에 따라 정치권을 주는 것인데 그것을 금권정치라 하며 이것을 솔론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방에서 차지하는 평민들의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그들의 정치적 권리도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6세기말 클레이스테네스가 나타나 개혁을 일으켜 정치체제를 참주정으로 바꾸었으며 이것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 도편추방법이 제정되어 민주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지나서 비로소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주정치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때 페르시아전쟁에서 아테네는 승리를 하여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정의 완성이 가능했다. 어쨌든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은 민회였다. 시민들은 폴리스의 아고라 광장에서 열리는 민회에 참가하여 전쟁이나 관리 선출과 같은 중요한 일에 대해 논의하였고, 투표로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처럼 시민들이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폴리스의 규모가 작은데다, 많은 수의 노예들이 생산활동을 대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민회는, 군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에게만 개방되었을 뿐, 부녀자나 외국인, 노예들은 민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아테네 민주정치는 자유로운 시민의 참여에 의한 조화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이상은 근대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고전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제한된 민주주의였다. 아테네 시민권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성인 남자 시민만이 참정권을 가졌고, 여자와 아테네 거주 외국인, 그리고 아테네를 지탱한 것은 노예들의 노동력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보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는 근대 민주 정치에서도 부르주아 계층에게만 인정된 제한된 것이었다. 시민 혁명 이후의 노동 운동과 시민 운동 등을 통하여 자유와 권리는 확대되었고, 오늘날에는 보통 선거 실시로 모든 성인 시민에게 참정권이 인정되게 되었다.

 이처럼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제한적이고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었지만, 고대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치체제로서 근대 민주주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Henry C. Boren, 西洋古代史, 探求堂, 1983

진원숙, (증보)서양사산책, 신서원, 1999

김진경 외, 서양고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6

이혜령 외, 문화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1995

에드워드 맥널 번즈·호버트 러너·스탠디시 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Ⅰ, 소나무, 1994

閔錫泓, 西洋史槪論, 三英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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