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류가 강하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으면 만주 대륙이나 일본 열도가 아직껏 우리 민족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이민족 국가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당대성을 무시한 역사 해석은 후대인의 무지이거나 죽은 자에 대한 횡포다. 오히려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어떻게 두 강대국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통일의 주역이 될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바람직한 역사 해석 자세일 것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녔고, 이것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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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의 통일서원제(경주시 배반동 소재)
조선시대까지는 대체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신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나온 후 현재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류가 더욱 강하다.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으면 만주 대륙이나 일본 열도가 아직껏 우리 민족의 영토였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외에 이민족 국가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비판도 거세다.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으면 만주 대륙이나 일본 열도가 아직도 우리의 영향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일리가 있다. 그리고 역사에서 현대적 해석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당대성에 의해 제한받지 않을 수 없다. 삼국통일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채 현재 속에 그대로 이입시켜 해석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역사를 민족사의 단위로만 평가한다면 강자의 승리만이 정의라는 모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강자의 예정된 승리가 아니라 약자의 예상을 뒤엎는 승리의 드라마가 있기 때문에 후세에 교훈이 되는 것이다. 약자가 승리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수도 있었다. 식민지 치하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회한과 반성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 닿을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우리 나라가 약소국이 되는 결과를 낳아 침략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역사인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반세기를 넘어 세계 10대 교역국이 된 현재까지도 이런 시각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신라였던 것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약소국 신라가 고구려, 백제 두 강대국을 꺾고 승리한 원동력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데 있다.
더구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동족의 국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물론 여러가지 사서(史書)와 금석문(金石文) 기록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언어, 풍습, 문화가 비슷한 한예(韓濊)의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夫餘)에서 파생(派生)되어 분기(分岐)한 나라인 반면 신라는 그렇지 않았다. 신라의 지배집단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고구려, 백제와 계통이 달랐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국어의 이른 단계를 부여어(夫餘語)와 한어(韓語)라고 가정할 때, 삼국 후기 무렵 부여계(夫餘系)와 한계(韓係)의 분기를 1천년 이상으로 추측하는 국어학계의 연구 결과도 있다. 참고로 현재 일본어와 우리 국어의 분기(分岐)는 약 1천 5백년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시리즈의 제11강 '고대(古代)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의 이해'에서 5세기 무렵 한반도내 왜(倭) 세력의 일본 이주가 시작되었다는 견해와도 부합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는 당대의 역사 과정 속에 들어가 삼국의 항쟁을 살펴볼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 전쟁의 발단,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사망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도 여러 의문들이 존재한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를 먼저 공격한 사실도 그 중 하나다. 백제가 신라에게는 주적(主敵)이었지만 당나라의 주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당나라의 주적은커녕 항상 중국의 역대 왕조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백제는 여러 차례 중국의 역대 왕조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시도했다.
'대업(大業) 3년(서기 607년) 백제왕(百濟王) 장(璋)이 사자(使者) 연문진(燕文進)을 보내 조공했다. 그 해에 또 사자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 토벌을 요청했다. 양제(煬帝)는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했다. 그러나 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통화(通和)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다.
수서(隨書) 백제전(百濟傳)'
'간사한 마음으로 중국을 엿보았다.'는 구절은 백제의 고구려 정벌 요청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말해주지만, 적어도 백제는 수(隨), 당(唐)과 우호 관계를 맺게 위해 애를 썼다. 수서(隨書)는 위의 기록에 뒤이어 무왕(武王)이 611년에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출병 시기를 묻자 양제(煬帝)가 크게 기뻐하며 사신 석율(席律)을 보내 시기를 알게 했다고 적고 있다.
당나라 역시 백제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은 무왕이 641년 세상을 떠나자 '태종(太宗)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곡을 하고, 의자왕(義慈王)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했으며, 부물(賻物) 2백단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 때 태종이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한 후 보낸 조서를 적고 있다.
'먼 나라를 생각하는 도리는 왕명에 앞서는 것이 없으며 죽은 사람을 표창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 하여 막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故)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 부여장(扶餘璋)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멀리 와서 정삭(正朔)을 받고 공물과 표문을 올려 시종일관 성의를 다하다가 문득 돌아가니 깊이 애도하는도다. 마땅히 상례(常例)에 더하여 애도의 영예를 표하며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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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국통일의 주역(경주시 배반동 통일전 소재)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무왕(武王) 조'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조의 기록에 따르면,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백제에서 보낸 금휴개(金烋鎧)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에 백제에서 바친 갑옷을 입고 출정했다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에 속한 제후국임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수(隨), 당(唐)의 입장에서 볼 때 백제는 '두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등의 의심은 받고 있었지만 군사를 보내 정벌해야 할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33/35_cafe_2007_10_11_00_42_470cf2df31232) 김유신장군상(경주시 황성동 소재)
즉 수, 당의 주적은 고구려지 백제는 아니었다. 당나라의 이런 전략이 바뀐 이유는 신라의 노력 때문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당과 백제의 관계가 우호에서 적대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백제와 신라의 분쟁 격화가 있었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은 즉위 다음해인 642년 7월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미후성(彌候城)을 비롯한 40여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 다음달에는 당항성(黨項城)을 치는 것처럼 위장한 후 윤충(允忠) 장군을 보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도록 하여 역시 함락시켰다. 그런데 대야성 성주가 김품석(金品釋)이었던 것이 사태를 크게 만들었다. 김품석과 그 부인 고타소(古妥素)는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성을 빼앗기게 되자 자살했는데, 고타소는 바로 김춘추(金春秋)의 딸이었던 것이다. 화랑세기(花郞世記)에 김춘추가 딸 고타소를 "몹시 사랑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그는 딸을 사랑했다. 삼국사기는 고타소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기둥에 의지에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짐승이 그 앞을 지니가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적어 그 충격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김춘추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정도를 멸하지 못하랴."라고 말한 후 백제 멸망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었다. 이것이 두 나라가 전면전(全面戰)에 돌입하게 되는 始發이었다.
554년 이래 신라와 백제는 적대관계이기는 했으나 서로 멸망을 꿈꾸지는 않았다. 554년 백제 성왕(聖王)이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 유역의 영토를 진흥왕(眞興王)이 가로채자 성왕이 복수를 위해 달려가다가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패배, 전사한 후 두 나라는 적대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 때가지만 해도 서로 상대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32/13_cafe_2007_10_11_00_42_470cf2f5d8602) 문무대왕 수중릉(경주시 양남면 소재)
고대 왕조체제에서는 왕가(王家)의 사건들이 곧 국가사(國家事)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타소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 왕실은 백제를 한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怨讎)로 생각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가 발발한 642년은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권을 장악한 해이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642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었던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김춘추는 427년 장수태왕(長壽太王)의 평양천도(平壤遷都) 이후 실로 2백여년만에 신라 사절을 자청해 고구려를 방문했다.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한 것은 백제를 치기 위한 구원병을 빌리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도리어 김춘추에게 진흥왕(眞興王)대 이래 신라의 영토였던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의 반환을 요구했다. 김춘추가 영토는 신자(臣者)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투옥했다. 위기에 빠진 김춘추는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이용해 겨우 바져 나올 수 있었으나 목숨을 건 고구려 방문은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소득 없는 고구려 방문에 좌절하지 않고 647년에는 왜국을 방문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백제와 왜국, 신라와 왜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대체로 백제와 왜국 사이는 우호적이었던 반면, 신라와 왜국 사이는 적대적이었다. 왜국은 645년 타이카개신[大化改新] 즉, 나카노오에 왕자[中大兄王子]가 왜왕가(倭王家)의 상위에서 왕실을 좌지우지하던 백제계 호족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참살하는 태극전(太極殿)의 정변(政變)을 일으켰었다. 김춘추는 백제계 소가노가[蘇我家]를 제거하는 타이카개신을 주도한 나카노오에 왕자가 반백제계(反百濟系)라는 생각에서 왜국으로 건너 간 것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36/10_cafe_2007_10_11_00_43_470cf30e89bf6) 태종무열왕릉(경주시 서악동 소재)
일본서기(日本書紀) 효덕왕(孝德王) 조의 기록에는 "김춘추를 인질로 삼았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 '쾌활하고 담소했다.'라는 기술은 그가 인질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춘추는 백제 공격을 원조할 군사를 빌리거나 최소한 왜국과 백제의 동맹관계를 단절시키려는 목적에서 왜국에 건너 간 것이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두차례의 실패에도 김춘추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2년(서기 648년)에는 드디어 당나라로 갔다. 당나라로 갈 때 김춘추는 아들 문왕(文汪)까지 대동했다. 문왕을 인질로 맡기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3년 전의 고구려 정벌 실패로 상심해 있던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머나먼 중국 내륙의 장안성(長安城)으로 아들까지 대동하고 찾아온 김춘추의 연합작전(聯合作戰) 제의를 수락했다. 당나라는 김춘추의 이런 노력으로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었는데, 이는 당나라의 대(對)백제 우호관계가 적대관계로 전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記) 문무대왕(文武大王) 조는 당(唐) 태종(太宗)이 김춘추(金春秋)에게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신라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두 나라가 전쟁 이후의 영토분할협정(領土分割協定)을 체결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라는 영토분할협정은 민족사의 견지에서 볼 때 고구려 북방 영토 대부분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지만 이는 후대인들의 시각일 뿐이다. 멸망의 위협에 시달리던 당시 신라인들의 시각에서는 이 영토분할협정이 곧 영역의 3배 확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김춘추의 귀국길은 고구려의 순라선(巡邏船)을 만나 종자(從者) 온군해(溫君解)가 김춘추로 변장하여 순라병들과 싸우는 틈을 타서 작은 배에 의지해야 했을 정도로 위험한 길이었다. 이렇듯 왕자의 아들 김춘추가 딸을 죽인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잊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한 결과,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나당동맹(羅唐同盟)은 동아시아 정세에 폭풍우를 몰고 왔다. 나당동맹의 결과 동아시아 전역은 전쟁의 회오리에 빠져들었다.
신라의 김씨 왕실은 어디에서 왔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서기 65년) 조의 기록에는 금성 서쪽 시림(始林) 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금궤에서 나온 김알지(金閼智)를 김씨(金氏)의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제13대 국왕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바로 김알지의 5세손이다.
김알지의 탄생지 계림 김알지의 시조에 대해 백당(柏堂) 문정창(文定昌) 선생은 1978년에 쓴 가야사(加耶史)에서 흉노(匈奴)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사인 한서(漢書)를 들어 여기에 등장하는 김일제(金日提)가 시조라는 것이다. 김일제의 아버지는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다. 한서에 휴도왕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금인[祭天金人)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이 금인(金氏)이 김씨라는 성(姓)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휴도왕이 전사한 후 한나라 조정으로 끌려간 김일제는 세종(世宗) 유철(劉徹)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방지한 공으로 투후(透侯)로 봉함을 받고, 김씨 성을 사성(賜姓)받는다. '투후'와 '김씨'는 신라 제30대 국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훈적비문(勳積碑文)에서 자신을 '투후(透侯) 제천(祭天)의 자손'으로 언급한 내용과 연결되어 주목된다.
또한 김일제 모친의 성씨가 알씨(閼氏)라는 점과 김알지(金閼智)의 이름, 혁거세(赫居世)의 부인이 알영(閼英)이라는 점 등 '알(閼)'자가 공통으로 관련되는 것도 주목된다 더불어 흉노족의 무덤 형태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경주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신라 김씨 왕족의 기원이 흉노족(匈奴族)이라는 주장에 상당한 근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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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분열
이런 때 백제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무왕(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난 의자왕(義慈王)이 서기 632년에야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점은 그에 대한 내부의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어려움 끝에 641년에 즉위한 의자왕은 집권 초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제에 보낸 사신 대인(大仁)이 돌아와서 "저 나라는 지금 대란(大亂)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며 전하는 상황을 적고 있다.
'(일본 국왕이) 백제의 조사(弔使)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그 나라의 형편을 물었다. 조사는 "백제 국왕은 나에게 '색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 귀국하는 사자를 따라 백제로 돌아오도록 원해도 일본 국왕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금년 정월에는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고 제왕자(弟王子) 교기(翹岐)와 동모매(同母媒)의 여자 4인, 내좌평(內佐平)의 기미(岐味), 거기에 높은 가문의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당했다."고 말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왕(皇極王) 재위 1년(서기 642년) 조'
이 기록은 의자왕이 재위 이듬해 정월 모후가 사망하자마자 동생과 좌평 등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권력 기반을 다진 그는 그 해 7월 백제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해 40여성을 점령하고 8월에는 대야성까지 공격, 함락시키며 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를 죽게 했다. 대내외적인 이런 전격작전을 통해 의자왕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정복군주로서의 역량을 과시했다.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의자왕은 계속적인 왕권 강화에 매달렸다. 그 결과 외형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재위 14~15년 무렵부터는 내부 체제가 심각한 동요를 겪게 되었다.
왕권 강화는 곧 지배귀족들의 약화를 뜻하는 것으로, 의자왕의 왕권 강화 노력에 바로 이 귀족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백제에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는 전통적인 지배집단이 있었다. 수서(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大姓)이 있으니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協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목씨(木氏), 국씨(國氏), 백씨(白氏)다."라는 구절이 바로 이들에 대한 설명이다. 이들 호족은 각 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갖고 있었다.
한성시대의 지배호족들은 진씨, 해씨 등가 같은 왕비의 친족들이었고, 웅진시대에는 이들 외에 백씨, 연씨, 사씨, 목씨 등이 새롭게 대두했는데, 이들은 웅진 지역 토착 토호들이었다. 사비성시대에는 사씨, 즉 사택씨(沙宅氏)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었는데, 사택씨의 기반이 금강 유역이었다.
그런데 의자왕 재위 14(654년)~15년(655년) 무렵부터 의자왕 체제는 내부 과열음을 내게 되었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은퇴하는 갑인년(甲寅年)은 의자왕 재위 14년으로 추정되며 좌평(佐平) 임자(任子)가 김유신과 내통한 해는 의자왕 재위 15년이었다. 최고 관계(官階)인 좌평까지 신라와 내통하는 이런 상황이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는 의자왕의 관례를 무시한 왕권 강화가 있었다.
백제의 관직에 3품 은솔(恩率) 이하는 정원이 없었으나 1품 좌평과 2품 달솔(達率)은 정원이 있었다. 그 중 좌평은 5~6인, 달솔은 30인이어서 달솔에서 좌평으로 승진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 대성팔족 중에서도 좌평에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좌평이 신라와 내통했다는 사실은 이들 호족들이 의자왕의 왕권 강화책에 어느 정도로 반발했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
그러나 의자왕은 내부 반발을 무시한 채 왕권 강화책을 계속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의자왕(義慈王) 조는 재위 15년에 '봄 2월에 태자의 궁을 수리했는데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의자왕은 재위 17년(657년) 정월에 자신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제수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食邑)을 주었다. 이 조치는 호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의자왕으로서는 호족들이 차지했던 좌평에 자신의 서자들을 임명함으로써 친위체제를 강화하려 한 것이지만, 한꺼번에 그것도 정원까지 무너뜨려 가며 41명의 서자를 좌평에 임명한 처사는 호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의자왕의 강력한 왕권 구축은 호족들을 왕권에 편재함으로써 이룩한 것이 아니라 왕권의 무리한 행사를 통한 것이었다. 이에 호족들은 사택지적같이 은퇴로 저항하기도 하고 성충(成忠)같이 극간(極諫)을 통해 저항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좌평 흥수(興首)가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양 간 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 멸망 당시 여러 해 동안 고마미지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흥수도 이 무렵 같은 이유로 귀양 갔을 개연성이 크다.
김춘추가 백제 멸망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국왕이 된 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할 동안 백제는 이처럼 심각한 자기 붕괴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36/38_cafe_2007_10_11_01_00_470cf736a7089) 김유신장군묘(경주시 서악동 소재)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던 660년에도 의자왕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13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넌 소정방(蘇定方)이 덕물도(德物島)에서 김유신과 태자 김법민(金法敏)과 회동했을 때도 이들의 공격 목표를 고구려라고 낙관했다. 그러다가 막상 나당연합군이 백제 영토에 상륙하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좌평 의직(義直)이 먼 뱃길에 피곤한 당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할 때에도 달솔 상영(常永) 등은 사기충천한 당군을 피하고 신라군을 공격하자고 하는 등 공격 목표부터가 불분명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의자왕은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의 견해를 물었으나 정작 전력적 요충지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지키라는 그의 견해는 신하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그 사이 당군은 이미 백강으로 들어왔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었다. 왕성을 지키는 계백(階伯)의 결사대가 겨우 5천명이었다는 사실은, 의자왕 체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본격적 공격 이전에 이미 내부에서부터 붕괴했음을 뜻한다. 백제는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수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663년까지 백제 부흥운동이 강하게 일어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것이었다. 663년 2만 7천여명에 달하는 왜국의 지원군과 백제 부흥군이 백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과 맞붙은 것이 백제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이마저 패배하여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이렇게 백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거대왕국 고구려의 종언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백제가 망한 후에도 굳건히 버텼다. 664년 7월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이 동생 김인문(金仁問)과 장군 김품일(金品日), 그리고 군관 김문영(金文潁) 등에게 옛 백제 자리에 설치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군대와 함께 고구려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이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돌사성은 함락되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백제 부흥운동이 소멸된 663년부터 666년까지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모두에게 불안한 평화였으나 천책상장(天策上將) 당황(唐皇) 태종(太宗)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긴 연개소문이 지키고 있는 고구려를 쉽사리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666년 연개소문이 급서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이 죽자 그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찍고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을 맡겼던 33세의 장남 남생(男生)이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임했고, 곧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여러 부(部)를 순시하기 위해 지방에 나간 틈을 타서 두 아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이 남생에게 반기를 들면서 고구려 지배체제는 혼란스럽게 요동쳤다. 남건은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일으켜 남생을 공격했다. 동생들의 배신은 남생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남생은 옛 수도 국내성에 은거해 거란, 말갈족과 교결하는 한편,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원래 고구려 세력권이었던 거란, 말갈족과의 교결은 고구려의 전통적 이민족 통제정책이라고 볼 수 있으나,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을 의미했다. 거란, 말갈과 달리 당나라는 고구려를 자신들의 천하관에 편입시키려는 나라였다.
당황(唐皇) 고종(高宗)은 저절로 굴러들어온 복에 기뻐하면서 헌성을 곧바로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제수하고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남생과 당나라의 결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국제 정세가 조성되었음을 뜻했다. 단순한 결합도 아니고 고구려의 모든 고급 정보를 한 손에 쥐고 있던 대막리지가 당나라의 편에 붙은 것이었다. 고종은 남생에게 특진요동대도독(特進遼東大都督) 겸 평양주행군대총관(平壤州行軍大摠管) 지절안무대사(持節按撫大使) 현도군공(玄娠郡公)이라는 긴 관직을 제수했다. 남생은 남소성(南蘇城), 창암성(倉巖城) 등을 당나라에 바쳐 이에 부응했다.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을 확인한 고종은 이제야말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적기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그 해(666년) 12월, 73세의 노장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 겸 안무대사(安撫大使)로 삼아 고구려 정벌을 명령했다.
대막리지 출신이 적국의 향도(鄕導)로 나선 것은 고구려의 내부 분열을 촉진시켰다. 연개소문의 친족인 연정토(淵淨土)가 가 종관 24인은 물론 12개성, 7백 63호, 3천 5백 43명의 백성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 것이 이런 기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중 8개성은 성과 주민이 모두 온전한 상태로 항복한 것이어서 고구려의 타격은 더욱 컸다.
고구려 역시 백제처럼 내부가 분열된 상태에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과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고종은 문무대왕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출동을 준비시킨 후 667년 7월 신라군의 출병을 명령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이 다시 결성되어 고구려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해 9월 문무대왕과 김유신(金庾信)은 신라군을 이끌고 북상해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했다. 당나라는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육군은 요동의 고구려 성들을 격파하며 남하하고 수군은 뱃길로 평양성으로 직진했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 이적은 요하를 건너 전략적 요충지 신성(新城)을 함락시켰다. 신성은 당나라와의 역대 전쟁 중에서 한번도 점령되지 않은 불패의 성이었으나 성 안의 사부구(師夫仇) 등이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주장하는 성주를 결박한 후 성문을 열고 항복해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신성 함락은 고구려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려 삽시간에 16개 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남건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재차 금산(金山)을 대결 장소로 삼아 당군과 교전했지만 협격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몇개성을 제외한 요동 영토를 거의 배앗기고 압록강을 경계로 당군과 맞서야 했는데, 이런 상태에서 667년이 가고 운명의 해인 668년이 왔다.
668년 2월 다시 공세를 개시한 당군이 천리장성의 북쪽 경계인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주변 40여성이 모두 항복했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남건은 다시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탈환하려고 출전했으나 3만 군사를 잃는 대패를 당했다. 이렇게 배후를 잃어버리고 고립된 평양성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전면적인 공세를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다. 이적이 거느린 당나라 군사와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포위된 평양성에서는 한달 남짓 만에 남산이 수령 89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막리지 남건은 항복을 굳게 거부하며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싸우다 나당연합군이 성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체포되고 말았다.
보장왕(寶藏王)과 남건(男建), 남산(男産) 등이 모두 체포되면서 거대왕국 고구려는 멸망했다. 동아시아 북방의 패자(覇者)로 우뚝 서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던 고구려가 내부 분열 끝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남방의 패자 수(隨), 당(唐)과 당당하게 겨루면서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던 고구려의 최후는 이렇게 허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썼다.
보장왕과 그 아들 복남(福男), 덕남(德男)과 남건, 남산을 비롯한 지배층과 20여만명에 달하는 고구려 백성들은 장안으로 끌려가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때의 행정구역과 인구 수를 '5부, 1백 76성, 69만여호'라고 적고 있는데 3, 5 가구 중 한명씩을 끌고 가는 것이니 저항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가는 셈이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고구려 지배층들은 장안에 들어서기 전에 태종의 무덤에 절을 해야 했다.
고구려 멸망을 초래한 남생(男生)은 포로가 아니라 이적(李勣), 계필하력(契苾何力) 같은 당나라 장수, 신라 장수들과 함께 개선군 대열에 서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개선이라고 보는 사람은 남생 자신밖에 없었다.
● 신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37/48_cafe_2007_10_11_01_09_470cf91c7ac85) 선덕여왕시 완공한 첨성대(경주시 동부사적지구 소재)
이 시기 신라의 상황도 좋았다고 볼 수는 없다. 당나라는 신라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인평(仁平) 10년(서기 643년)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백제 연합군이 공격하려 한다며 지원군 파견을 다급하게 요청했을 때에도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이를 거절하며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한 때가 없다."며 자신의 친척 한명을 보내 신라의 국왕으로 삼겠다고 폭언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공격하는 마당에 당나라까지 등을 돌리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던 선덕여왕은 굴욕을 참고 이듬해 정월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647년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자 2년 전인 인평(仁平) 14년(서기 645년)에 상대등(上大等)이 된 이찬(伊贊)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 서라벌 중심의 구세력이 "여왕은 정사(政事)를 잘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서라벌 중심의 구세력이 태종의 여왕 비하 발언을 명분삼아 선덕여왕을 내쫓고 자신들이 나라를 장악하려 한 것이다. 이들의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 김유신이라는 점은 이후 신라사(新羅史)의 진행을 생각해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가야계 출신의 진골 김유신이 서라벌 출신의 진골 세력을 제압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신라 사회의 신주류로 격상시켰다. 이는 신라 사회의 성격이 전혀 다르게 변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신라 사회의 주도권이 서라벌 출신의 기득권층에서 소외받던 가야계로 넘어간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국의 후손 가야계 김유신과 하자 있는 왕손 김춘추가 신라 사회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단순히 신라 내부의 정세 변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 정세,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에 격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내부의 모든 역량을 응축해 외부로 뻗어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질 각오도 되어 있었다. 지배세력의 교체로 신라는 일종의 영적(靈的) 폭발 시기에 도달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심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는 동안 이렇게 신라는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았다.
이후 신라는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지배층이 먼저 몸을 던져 솔선수범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는 것이 주요 전략의 하나가 되었다.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그 해 10월 백제군이 갑자기 침공해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 등 세성을 포위하자 김유신은 보병과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敗戰)하고 말았다. 야간 기습 등 모든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패색이 짙은 전세(戰勢)를 뒤집은 것은 비령자(丕零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 그리고 종 합절(合節)의 희생이었다. 비령자와 거진, 합절이 잇따라 전사하자 신라군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백제군을 격퇴시켰다. 승리를 거둔 김유신은 세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옷으로 덮어주고 슬프게 호곡했다. 이런 죽음과 호곡은 신라의 상하를 하나의 마음으로 묶고 있었다.
654년 진덕여왕이 재위 8년만에 사망하자 서라벌 출신의 구세력은 이찬 알천(閼川)을 섭정으로 삼아 호족 연합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군권으로 이를 저지하고 김춘추를 임금으로 즉위시켰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은 "진덕왕(眞德王)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으니, 유신이 재상 알천과 의논하고 이찬 춘추를 맞아 즉위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당초 섭정으로 추대받았던 알천이 "나는 나이가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실로 세상을 건질 영웅이라 할 수 있다."며 양보한 것은 사실상 김유신의 군사력에 밀려 왕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반영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명실상부하게 명실상부하게 왕권과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백제, 고구려에 밀리던 신라는 대반격에 나서 전세를 뒤집는 역전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물론 김춘추가 즉위했다고 상황이 금방 나아지지는 않았으나 신라 지배층은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655년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군이 변방 33성을 빼앗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흠운(金歆運)은 국왕의 어명(御命)으로 백제 땅 양산(陽山) 깊숙한 곳까지 출진해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다가 백제군의 내습을 받았다. 김흠운이 적진으로 돌격하려 하자 대사(大舍) 전지(栓知)가 "공(公)은 신라의 귀족이며 대왕의 사랑하는 사위이니, 만약 적군의 칼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 되고 신라의 수치가 되는 겁니다."라며 말렸으나 김흠운은 듣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분전하다가 전사하였고, 이를 본 태감(太監) 예파(穢破)와 소감(小監) 적득(狄得)도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고 말았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는 김흠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김흠운은 권문세가(權門勢家)의 귀족인데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서 나라에 보탬 될 것이 없는데 죽은들 무슨 손실이 있겠는가?"라며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신라는 이처럼 위기에 닥칠 때마다 지도층이 먼저 솔선수범해 일반 병사들의 사기를 이끌어 내었다.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에서 김유신이 5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계백의 5천 결사대를 격파하지 못해 초전(初戰)에서 네번이나 타격을 받게 되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은 자신의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 나라의 중요한 일이 위태로운 이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효 모두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희생을 요구했고, 반굴은 서슴없이 백제군 진지로 달려나가 목숨을 바쳤다. 이를 본 좌장군 품일(品日)도 아들 관창(官昌)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그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지배층 희생전략은 결국 신라군의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 승전(勝戰)을 가져왔다.
신라가 중간급 지휘관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662년 정월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식량이 떨어진 당(唐)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에게 경주에서부터 평양까지 식량을 전달해야 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자청한 인물도 만 67세의 노장 김유신이었다. 그는 왕제(王弟)인 김인문 등과 함께 한겨울에 서라벌에서 평양까지 고구려군과 싸우며 식량을 전달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신라 지배층의 이런 자기 희생이 있었기에 신라군은 국가가 희생을 요구할 때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의 황제 태종과 김춘추가 맺은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 병합을 당나라와 싸워 이겨 현실로 만들었다. 신라는 당나라의 호의가 아니라 전쟁을 불사하며 자신들의 몫을 차지했다.
나당전쟁(羅唐戰爭) 때인 672년 신라군이 백수성(白水城)에서 당나라 군사들과 맞붙었다가 패배했을 때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은 적진에 뛰어들어 죽으려다가 부하인 담릉(淡凌)이 "대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 죽어서 성취함이 없을 바에는 살아서 훗날을 도모함과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유신은 문무대왕(文武大王)에게 "내 아들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훈을 저벼렸으니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청했다.
문무대왕의 배려로 석방되었으나 원술은 끝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김유신이 죽었을 때 그가 어머니 뵙기를 청하자 "네가 선군(先君)에게 아들 노릇을 못했으니 내가 어떻게 너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다. 결국 원술은 675년의 매초성전투(買肖城戰鬪)에서 선봉에 서서 싸워 전공(戰功)을 세우고 버림받은 한을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 때문에 끝내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 그만큼 이 시기의 신라 지배층은 자신에게 철저했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을 때 북쪽 영토는 호로하(瓠瀘河)에서 철관성(鐵關城)까지였다. 그 후 735년에 발해의 성장을 우려한 당나라가 신라의 평양성 이남 영유권을 공인함으로써 648년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과 합의한 조약은 현실화되었다. 비록 고구려가 차지했던 요동벌판과 백제가 관할했던 왜국에 대한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약소국 신라의 처지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이룩한 대승(大勝)이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좀 있다 차근차근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신라역사를 다시 알고 싶습니다, 좋은 자료 있으면 올려 주시면 감사..
감사합니다~
신라설화, 건국, 성장, 쇠멸 등에 관한 자료를 알고 계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