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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창80년사:중고태동시대(3) 대창중학원 설립-대창고 설립추진
2) 재단법인 대창중학원(財團法人大昌中學園)의 설립
(1) 재단법인 설립 취지 : 광복된 교학(敎學)의 진정한 진흥 발전을 꾀하고, 침체 억압당한 민족 문화의 정상한 발달을 도모하고, 아울러 향토 교육의 강력 추진과 육영 사업의 적정 활발한 실시로 조국 재건의 최고 과제인 육영도에 공헌할 취지 하에서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를 유지 경영할 재단법인 대창중학원(大昌中學園)을 설립하고자 한다.
(2) 재단법인 대창중학원(財團法人大昌中學園) 설립인가 : 1948년 12월 20일에 학교 설립자 김석희(金碩熙) 선생이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를 유지 경영할 재단법인 대창중학원(財團法人大昌中學園)의 설립 승인을 문교부장관에게 신청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17일에 대창초급중학교의 설립인가와 더불어 그 인가서가 왔다.
3) 이사진(理事陣)의 변경
재단법인 대창중학원(財團法人大昌中學園) 정관(定款)에 의한 정원 규정에 재단 이사(財團理事)는 7명, 감사(監事)는 2명을 두게 되어 있고, 이들은 이사회(理事會)에서 선거하여 문교부장관의 인가에 의하여 취임하고, 학교장은 재임 중 이사로 하고, 이사장은 호선(互選)으로 1명을 선정하여 문교부장관의 인가에 의하여 취임하도록 되어 있다. 이사의 임기는 3년, 감사의 임기는 2년이었다. 재단법인 대창중학원(大昌中學園)이 설립(1949.1.17)된 이후 현재(1997)까지 이사장은 박철구(朴哲九), 권동하(權東河), 조동휘(趙東輝), 김교용(金敎容) 선생 등으로 4명이 바뀌었고, 이사는 김석희(金碩熙), 김교용(金敎容), 이만녕(李萬寧), 김정식(金貞植), 김원석(金元錫), 김응문(金應文), 박봉수(朴奉洙), 권동하(權東河), 김한영(金漢泳), 김성환(金誠煥), 정홍(鄭泓), 장시환(張時煥), 김기영(金基永), 이목현(李穆鉉), 현석진 (玄錫珍), 김동수(金東洙), 김정후(金政厚), 김현종(金炫鍾), 백용해(白龍海), 김정준(金正晙), 김경한(金慶漢), 황재홍(黃在洪), 박용일(朴容逸) 선생 등 23명이었다. 감사는 장명환(張命煥), 권동하(權東河), 박봉수(朴奉洙), 조동휘(趙東輝), 박준우(朴晙佑), 권혁대(權赫大), 황중태(黃重泰), 황달수(黃達洙), 윤태혁(尹泰赫), 김학병(金學柄), 김기영(金基永), 박운하(朴運河) 선생 등 12명이었다.
4) 재단법인 대창학원(財團法人大昌學園)의 정관(定款) : 본 법인의 재산 중 기본재산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매매(賣買), 기부(寄附), 양도(讓渡) 또는 담보(擔保) 등을 할 수 없도록 하였고, 임원은 이사 7명, 감사(監事) 2명을 두어야 하는데, 모두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하였다. 이 때의 임원은 이사장 박철구(朴哲九), 이사 김석희(金碩熙), 이만녕(李萬寧), 박봉수(朴奉洙), 장시환(張時煥), 권동하(權東河), 김경한(金慶漢), 감사 황달수(黃達洙), 장명환(張命煥) 선생이었다. 이사회에서 의결할 사항은 예산 결산 및 재산 소득 관리, 학교장 및 교직원 임명, 일시 차입금(借入金), 기타 본 법인에 관한 중요 사항 등이다.
5) 재단법인(財團法人)의 재산 : 본 법인에 귀속된 재산은 총 20,771,702원이었다. 그 중 기본 재산인 논, 밭, 대지(垈地), 부지(敷地), 임야(林野), 가옥 등이 17,981,570원이고, 보통 재산인 비품 369점, 도서 232권, 현금 등이 2,791,132원이었다.
이 중에서 과거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의 재산이었던 부지(798坪), 가옥 등의 부동산과 비품, 도서 등의 동산은 대창중학원장 김석희(大昌中學院長金碩熙) 선생이 재단법인(財團法人)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논, 밭, 임야는 김석희(金碩熙), 김교용(金敎容), 김옥윤(金玉潤), 현창무(玄昌武), 현종일(玄鍾一), 김교광(金敎光) 선생 등이 재단(財團)에 기부하였는데, 그 중 김석희(金碩熙) 선생의 재산이 제일 많았다.
학교 운동장 용지인 노상동 2번지의 임야 4,560평은 이미 1926년 1월 1일부터 예천군청(醴泉郡廳)으로부터 대부(貸付)하여 사용하여 왔었고, 노상동 1번지의 대지(垈地) 570평은 예천향교(醴泉鄕校)로부터 무료로 대부받았다. 교사 부지 중 노상동1-1번지의 대지 798평은 예천읍으로부터 1948년 12월 20일에 이미 기증받았던 것이다.
재단 기본재산 중 부족이 생길 때는 설립자 김석희(金碩熙) 선생이 모든 책임을 지고 소요 재산을 증가하겠다고 문교부장관에게 서약을 하였다.
9. 향교 대지 무료 사용 인가를 다시 받음
1946년 8월 29일에 경상북도 도지사는, 1926년 1월 1일부터 사용하여 왔던 대창학원(大昌學院)에 예천군청의 부지(敷地)와 운동장 부지를 해방 후에도 1956년 7월 26일까지 변함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인가하였다.
10. 학교 뒷산인 흑응산의 공동 관리를 계약함
1948년 4월 1일에 학교 뒷산인 흑응산(黑鷹山)을 예천서부국민학교(醴泉西部國民學校, 現 醴泉初等學校)와 함께 공동 관리(共同管理)한다는 계약(契約)을 체결하였다. 또한 1948년 4월 20일에 학교 뒷산 흑응산의 국유림(國有林) 관리 허가 신청을
하였는데, 같은 해 5월 24일에 예천 군수로부터 그 허가서가 왔다.
11. 노상동 1-1번지의 대지를 무상 기부받음
1949년 1월 5일 대창중학 기성회장(大昌中學期成會長)이 예천 군수에게 노상동 1-1번지의 대지(垈地) 798평을 무상 기부(無償寄附)받기를 신청하여 같은 예천군수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12. 재단법인 설립을 등기함
1949년 1월 30일 재단법인 대창중학원(財團法人大昌中學園)에서는 대구지방법원
(大邱地方法院)에 재단법인(財團法人) 설립을 등기(登記)하였다.
13. 예천향교의 풍영루 건물을 매수함
1949년 7월 26일 예천향교(醴泉鄕校)의 풍영루(諷詠樓) 건물을 3만 원에 사들이었다.
14. 대창중학교 제2대 교장으로 김교용 선생이 취임함
초대 교장 김석희(金碩熙) 선생이 전 재산을 희사하면서 오로지 육영 사업에만 일념하다가, 교사 신축자재 구입차(校舍新築資材購入次) 상경하였다. 귀교 중 1950년8월 23일 예천읍 백전2동에서 순직(殉職)하여 그 애통함은 무엇에 비하리오. 1950년 10월 20일 임시 휴교의 개학과 더불어 제2대 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이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사회(理事會)에서는 1950년 11월 1일에 김교용(金敎容) 선생을 제2대 교장, 교사 김경한(金慶漢)을 교감(校監)으로 추인(追認)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선친(先親)인 김석희(金碩熙) 교장의 불의의 순직으로 비통한 심정 속에 취임한 제2대 김교용 교장은 첫째로 파괴된 교사(校舍)의 복구 및 교사 증축(增築)으로 교육 환경의 조성에 주력하는 한편 교육의 내실을 기하기 위하여 부단한 직원 연수 등을 추진하였고, 이는 차츰 효과를 거양하기 시작하여 실력 대창(大昌)의 이미지가 인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중학교 졸업생의 고교(高校) 진학 성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경북고(慶北高), 사대부고(師大附高), 안동사범(安東師範) 등으로 많은 학생이 진학하였다. 일약 경북 북부지구의 명문교(名門校)로 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으니, 2대 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과 전 교사들의 노력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었다. 교육의 지표(指標)로서 민주 시민(民主市民)의 육성에 두고 철저한 반공 민주 사상(反共民主思想)의 고취와 아울러 과학적인 생활 태도 및 협동 단결의 정신을 앙양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문교 행정의 방향에 따라 교육 목표가 다소의 차이를 보여왔으나, 교장의 굳은 신념은 민주시민교육(民主市民敎育)의 달성이었다.
15. 새로운 교훈의 설정
1950년 10월 20일에 부임한 제2대 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은 새로운 교훈(敎訓)을 부임 즉시 제정하였다.
(1) 인류 공동생활을 올바르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2) 자연과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3) 모든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로 정하여 민주 사회 도의의 확립 및 과학적인 사고, 민주 생활에 역점을 두고 있다.
16. 교명을 대창중학교로 변경함
교육법의 개정에 따라 1951년 8월 31일에 문교부로부터 교명(校名)이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에서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로 변경된 인가서가 왔다.
학제 개편에 따라 1951년 8월 31일부터 교명이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로 변경되어 중학교로서 기반을 다져 나아갔다. 그러나 사회적인 혼란은 학교 교육에도 그 영향을 미쳐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감돌았고, 급기야 한국전쟁(1950)으로 동족
상쟁(同族相爭)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일어나고, 우리 군(軍)의 후퇴로 동년 7월 12일 임시 휴교(休校)로 들어갔고, 총 학생 300여 명은 각자 부모와 함께 피난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7. 재단법인 대창중학원의 정관 변경
1952년 5월 26일 문교부에서는 재단법인(財團法人)의 정관(定款)을 변경 인가하고, 임원들은 모두 종전대로 인가하였다.
18. 교사의 수리와 복교
개교 당시 객사(客舍)를 이건(移建, 1927.3.2)하여 교사(校舍)로 쓰던 건물은 한국전쟁(1950)의 폭격으로 그 일부가 폭파되었다.
즉 혼란과 슬픔 속에서 다시 교문(校門)을 열고, 신임 김교용(金敎容) 교장을 중심으로 전 직원과 학생이 일치단결하여 파손된 교사(校舍, 客舍)의 수리 복구에 전력을 투입하여 1951년 5월 30일에는 그 수리를 완료하여 원형 그대로 창연(愴然)한고색미(古色美)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여세(餘勢)를 몰아 1952년 3월 27일에는 학생 노동 작업에 의한 흙벽돌 강당 70평의 준공을 보았으니, 경북 도내 최초의 교육 성과이고, 지금도 이 강당은 체육 도장으로 남아 우리들의 심신 수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시 1952년 9월 10일에는 제2차 교사 증축 공사(校舍增築工事)의 준공을 보아 토조 교실(土造敎室) 2개를 확보하여 장래 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모두가 흙벽돌로 건축하고 학생, 학부형, 교사가 3위1체(三位一體)가 되어 흙벽돌을 만들고 운반하였으니, 철근콘크리트로 지워진 현 교사(校舍)와 비교할 때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우리 손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감격 속에 모두가 미소지으며 전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학생들 중에서는 군(軍)에 입대 또는 행방불명(行方不明) 등으로 30여 명이 줄어드는 시련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51년 7월 20일 중학교 제1회 졸업생 56명을 떠나보냈다. 학칙 변경으로 9월 신학기(新學期)가 4월 신학기로 변경됨에 따라 1952년 3월 28일 제2회 졸업생 82명, 1953년 3월 21일 제3회 졸업생 121명이 모교(母校)를 떠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학생들은 경향 각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19. 한국전쟁 직후의 학생들의 활동
좌우익(左右翼)의 사상적 소용돌이 속에 어지러웠던 교내 분위기는 한국전쟁이란 거대한 비극 속에 사라지고 아직도 전방에서는 총성이 울리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속에서도 학교에서는 질서를 바로 잡고, 또한 학력 향상을 위해 무엇인가 노력하는 기풍이 감도는 때였다. 전교생 7학급 410여 명으로 인가 학급 9학급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현재 중학교 무시험(無試驗)으로 초등학교(初等學校) 졸업생 전원이 진학하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다. 정원을 채우기 위해 전 직원과 재교생(在校生)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던 시절로 이 때의 사회상을 말해 주고 있다. 1948년 12월에 조직된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은 전쟁을 거쳐 민주주의 사상 교육 및 민족의 통일 교육의 강화를 위해 호국단(護國團)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다시 기초 군사 교육의 한 방편으로 운영되고, 본교에서도 호국단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된 시기였다. 한 마디로 당시의 학생들은 가난하고 혼란한 속에서도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투쟁한 불운의 시기였다.
20. 대창고등학교 설립의 추진
중학교를 졸업한 많은 학생들이 인문계 고등학교(人文系高等學校) 진학을 위해 안동, 대구, 서울 등지로 가게 되어 당시의 경제적 여건과 사회적 조건으로 보아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더욱 지역 사회 발전과 교세(校勢) 확장을 위해서도 인문계 고등학교의 설립은 지상 과제(至上課題)로 등장되었다. 1951년 7월 20일 중학교 1회 졸업식을 기점으로 고교(高校) 설립 추진을 위해 기초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고,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田畓)과 임야(林野)를 재단 기금(財團基金)으로 희사하고, 1952년 11월 30일에는 박철구(朴哲九) 이사장이 백전동 135번지의 대창제재소(大昌製材所, 130坪, 木造瓦葺平家建)와 대심동 63번지의 대창정미소(大昌精米所, 50坪, 木造瓦葺平家建)을 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대창학원(大昌學院) 졸업생 및 지방 유지들의 물심양면(物心兩面)의 호응을 받아 마침내 1952년 12월 9일 재단 증자(增資)와 함께 대창고등학교(大昌高等學校) 설립 인가를 얻었다. 이는 이 고장의 발전을 약속하고 대창(大昌)의 전진을 축복해 주는 서곡(序曲)이라 하겠다. 재단 이사장으로는 본 학원 1회 졸업생인 박철구(朴哲九) 선생이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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