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정보화사회에 살고 있다.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직업과 종교, 사상을 가지고 많은 인류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과연 어떠한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지니고 있는 종교와 의식을 가지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 현실에서의 많은 사람들은 흔히 하는 말로 "먹고살기 위해서" 직업을 가진다고 하는데 말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라는 책을 통해 베버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종교개혁이후 생겨난 청교도 정신 속에서 자본주의의 시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버는 종교개혁에 의해 초래된 칼뱅주의의 정신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종교적 이념의 변화 속에서 자본주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자본주의 정신과 고된 노동 및 부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태도간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청교도윤리에는 의무와 금욕적 행위를 강조하고, 경제적 근면을 격려하고, 나태와 낭비를 책망하고, 검약과 생산의 덕목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간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가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전자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의 세속적 계승자이며,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베버의 가정이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근대 서구자본주의의 발흥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이 과정의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베버는 부의 축적이 제공해 줄 물질적 보상보다는 부 그 자체를 위한 지속적인 축적이다. "인간은 돈을 버는 것, 그의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취득에 의하여 지배된다. 경제적 취득은 더 이상 물질적 욕구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베버에 따르면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요체이고, 저자 서문에서는 그는 자본주의 시작을 이렇게 본다.
이제 자본주의의 특별히 근대 서구적인 형태는 일견하기에 기술적 가능성의 발달에 강한 영향을 받아 온 것 같다. 그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오늘날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적 요인들의 계산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 자본주의가 근대 과학의 독특한 특히 수학에 근거한 자연과학과 정밀하고 합리적인 실험 등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과학, 그리고 그 과학에 의존해 있는 기술의 발달은 다시 중요한 자극을 실제상으로 적용된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로부터 받는다. 물론 서구과학의 기원이 그러한 이해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십진법을 갖춘 계산......수학이나 역학의 기원이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중의 생활조건에 그렇게도 중요한 과학적 지식의 '기술적' 사용은 분명 서양에서 우호적이었던 경제적 고려에 의하여 촉진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촉진은 서양의 사회구조가 가진 특이함에서 도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조의 어떤 부분으로부터 그것이 도출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구조의 모든 부분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시작의 답을 "소명" 이라는 개념을 통해 초점이 맞추어진 청교도 주의의 "현세적 금욕주의"에서 찾았다. 베버에 따르면 소명개념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도입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의무의 최고 형태는 현세적 일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칭한다. 소명개념은 이미 루터의 이론에 있었지만 그것은 다양한 청교도 분파들인 칼뱅주의, 경건주의, 침례교 등에서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칼뱅주의 운동 내의 후기적 전개에 관심을 두었지만 베버의 많은 논의들이 실제로 이들 중 칼뱅주의에 집중되었다. 베버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정설인데 예정설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을 받고 나머지는 저주받았다는 사실뿐이다. 베버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자본주의 정신이 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에 앞서서 다른 어떤 곳에서 보다 서구에서 많이 진전되었던 가내경영과 생산경영간의 분리. 예를 들어서 중국에서는 확장된 인척단위가 경제적 협동의 주요 형태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동업조합과 개별적인 기업활동의 영향력이 제한을 받았다. 둘째 서구도시의 발전. 중세 이후에 유럽에서 도시공동체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율성에 도달하였고 따라서 농업봉건제로부터 '시민'사회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동양 문명에서는 부분적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분화를 가로지르는 인척관계의 영향 때문에 도시는 농업적 지역경제에 파묻혀 있었다. 셋째 유럽에서는 전래된 로마법의 전통이 존재하였기에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것보다 훨씬 통합되고 발달된 법률 실제의 합리화가 이루어졌다. 넷째 그에 따라 이것이 동양 문명에서 성취된 그 어느 것도 능가하는 전문관료에 의해 관리되는 국민국가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한 요인이었다. 서구 국가의 합리적인 법체계는 어느 정도 경영조직 자체에서도 채택되었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협조체제를 위한 전반적인 틀을 제공하였다. 다섯째 유럽에서의 복식부기의 발전. 베버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자본주의적 경영의 규칙성 확립을 위한 길을 여는 데에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 현상이었다. 여섯째 임노동자 대중의 형성을 준비하는 일련의 변화들. 이는 봉건적 의무라는 형태로 존재하던 노동통제의 독점 권이 먼저 부식됨을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이 통틀어 청교도주의의 도덕적 에너지와 결합되어 근대적인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본다. 또한 직업이 근대자본주의를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루터에 의해 직업의 개념이 종교개혁 전과는 달라진 것이 사실이지만, 청교도와는 차이가 있다. 루터 교에서의 직업은 신이 준 운명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청교도에서는 더 나아가 합리적 직업노동까지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렇듯 청교도인 들에게는 재산의 축적보다는 높은 정신적인 목표를 위한 수단이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속에 작용하기 시작하자 그러한 정신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이런 내용 없는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면 인간은 '가슴 없는 향락자'로 전략할 수밖에 없다고 마지막 부분에서 경고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와 금욕의 관계는 사적인 재산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금욕은 부정이나 충동적인 탐욕을 배척했다. 탐욕으로서 배척된 것, 즉 배금주의 등은 부 그 자체를 위한 부의 추구였다. 왜냐 하면 부 그 자체가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금욕은 '늘 선을 구하면서도 늘 악을 창조하는' 힘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뿐만이 아니라 근대 문화 전반의 구성적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직업관념에 의거한 합리적 생활태도는 기독교적 금욕 정신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부른 태도의 본질적 요소는 우리가 지금까지 규명해 온 퓨리턴의 현세적 금욕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퓨리턴은 직업 속에서 일하기를 원했고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금욕이 일상 생활 속으로 옮겨져 세속 내적 도덕을 지배함과 동시에, 근대 경제 조직의 강력한 질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와 같은 그의 전반적인 연구에 대해 나아가 반대로 청교도적 금욕이 그 발전이나 성격에 있어서 사회경제적 조건들의 총체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가 검토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제시하면서 아직은 끝나지 않은 그의 작업을 마무리짓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더 빨리 문호를 개방했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90년대 들어 생겨난 사회문제들 과소비풍조, 비자금문제, 정경유착등 현실에서의 지배권 층이 만들어 내고 있는 사회문제들이 과연 일어날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한심하면서도 안타까운 생각들이 많이 들었다. 그 중 특히 가치관의 상실도 또한 현재의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로 인한 혼란과 타락으로 외환위기까지 처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치료제가 필요하다. 잃어버린 가치관에로의 '회복'을 의미하고 결국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가치관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이것은 꼭 베버가 주장한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만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사상 또는 불교사상이든 나름대로 정신적인 가치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이러한 가치관을 상실한 채, 오로지 현실 속의 나만을 위해 그렇게 살아온 거 같다. 현재 나 자신부터라도 과거를 반성하고, 좀 달라져야 갰다는 생각이 앞선다. 나아가 우리 국민들 모두가 이에 대하여 공감하고 또한 달라질 때, 우리 사회는 보다 아름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