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미술시험 준비를 하면서 후기인상파를 외우다가 고흐, 고갱, 세잔느하면서 고흐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40대에 들어서 인생이 무엇인지 뒤를 돌아보게 되면서, 세월이 우울할 때 노래방에서 불렀던 국민가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다시 고흐를 만났다. 그 때만해도 고흐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고독한 사나이의 대명사로 고흐처럼 살다간 사나이도 있다는 그 말에 고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당시 좀 논다(?)는 형하고 산에 놀러갔다가, 그 양반이 나에게 “고독한 넘”(solitary man)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면서, 고독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더 애정을 갖게 되었는데...물론 그 형은 당시 유행하던 팝송 중에서 solitary man이라는 노래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이름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노래가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그 형은 모자를 눌러쓰고 쫄바지를 쫙 다려입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춤도 잘추는 이른바 “노는 형”이었다. 예전에 그 멜로디는 알았건만, Vincent라는 팝송에서 나오는 starry night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르에서 그린 그 '별이 빛나는 밤" 바로 그 작품을 소재로 한 줄을 바로 얼마 전에서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을 찾아 고흐의 그 그림 앞에서 서고서야 알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8.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Irvt%26fldid%3DCHR%26dataid%3D48%26fileid%3D1%26regdt%3D%26disk%3D36%26grpcode%3Dnamdotour%26dncnt%3DN%26.JPG)
파리 오르세 미술관 5층에 걸린 '별이 빛나는 밤' 옆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고흐(1853-1890)는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랐다. 암스테르담에 고흐 박물관이 있다. 고흐는 목사님의 아들이었다. 한 때는 화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접하게 되었고, 성실해서 런던지점에 파견나가 근무하면서 그는 하숙집 주인딸에 마음을 주지만 실연을 당하게 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는 신학교입학시험을 준비하지만, 도중에 포기하고, 아버지(목사님)의 도움으로 신학교를 나와 소외된 탄광지역에서 전도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열정적으로 헌신하였던 그였지만, 윗사람들에게 잘못 보여서인지(?) 그만 재임용되지 못한다. 이후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난한 화가는 파리로 가서 뒤늦게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는 8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그는 경멸당했고 조롱받았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동생이 화방을 갖고 있었지만, 그림 한점 팔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을 그렸다. 6(?)남매이던가 가족 중에서도 동생 테오 외에는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그림으로만 살았던 고흐...
고흐는 일생동안 동생 테오(Theo)에게 편지를 보냈다. 무려 650통이 넘는다. 편지에서 그는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두려움을 표현하였다. 고흐는 편지에서 자기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작가 자신의 해설서를 남긴 셈이라, 미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다. 동생은 형의 예술적 역량을 알아보았고, 늘 곁에서 형을 지원하였다. 고흐가 권총 자살한 후 기어서 자기 집에 들어와서 마지막 죽을 때, 그의 곁에는 동생 태오가 있었다. 얼마전에는 파리 근교의 오르세를 물어물어 한적한 시골 공동묘지에 잠든 그의 무덤을 찼았다. 고흐의 무덤 옆에는 동생 테오가 있었다. 고흐가 죽은지 두달만에 발작을 일으켜 동생도 죽었다. 2년뒤 형과 동생의 사이를 고려해서, 테오의 부인은 테오의 무덤을 현 오르세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일생 고독했던 고흐에게 그래도 밝고 설레는 시절이 있었다. 아를르에 있는 '노란집'(Yellow House)에서 그는 밝은 분위기의 그림도 그렸다. 1885년 5월 고흐는 아를르 역 근처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노란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보고 가구를 들여놓았다. 새색시가 설렘 속에서 신접살림나듯이.. 여기서 고흐는 고갱을 기다렸다. 육사의 시에서처럼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백마타고 오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시인의 손은 젖어도 좋건만은... 기다림과 설레임.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편지를 주고받았다. 자연의 사물이 화가에게 주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었던 모양이다. 고흐는 처음에는 목탄이나 연필 등을 사용했다고 하나, 1882년부터 유화로 그리기 사작했다고 한다. 그런 고흐는 색체의 예술가가 되었다. 살면서 우리는 때로 꿈과 비전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인생 나그네 길에 그 얼마나 반가운가 ? 고흐의 '노란집'에는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을 맞이하는 셀레임이 가득 묻어있었을 것 같다.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면서 방안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 때 그린 그림이 바로 해바라기다.노란집 벽에 걸린 노란 해바라기.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만해도 여러 점이다. 늘 태양을 그리워 하는 해바라기. 기차를 타고 동유럽을 돌면서 기찻길 옆의 끝도 없는 해바라기 밭에 질식(?)될뻔 했는데...
짙은 노랑색의 책상위에 연한 노랑 바탕색을 배경으로 화병에 꽃힌 노란 해바라기 열 몇송이 나는 런던 내셔날 갤러리 35번 방에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만나러 갈 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설레임이 있었다. 늘 맘에 그리는 님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고 할까. 고흐와 고갱의 관계를 배려했음인지 해바리기 그림 그 옆에는 고갱의 그림들이 몇작품이 걸려있었다. 고흐는 고갱에게 자신의 자화상을 헌정했고,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고흐를 그려주었다. 물론 그렇게 그리워했고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이건만, 이 두사람은 만나고 같이 그림작업을 하면서 그림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면서 그렇게 많이도 부딪혔다고 한다. 결국 고흐는 왼쪽 귀를 잘라버리기도 한다.
고흐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노랑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가수는 노란손수건을 불렀다. 감옥에 갖힌 남편(빙고)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로 기차가 지나가는 창밖 가로수에는 수없이 많은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았다고 하던데....
첫댓글 세미나 끝내고 이제 좀 숨좀 돌렸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 더위에 고생이 많으시다면서요 ?
서교수님 사람은 고독해야 개미가 있나 봅니다. 글이 깊어지고 감동이 옵니다. 이제 서양문화의 진원에서 파장을 보내니 어찌 그 올가미에 사로 잡히지 않겠습니까? 나는 고흐와 고갱을 네델란드에서 만났었지요. 글 고맙습니다.
기다림의 노란 손수건으로 우리 인생이 물들어가는건 아닌가요? 우리가 노란 손수건인 것 같기도 하고...
어라?? 교수님 머리 묶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