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4일(일) 09:40 인천출발, (OZ 301) 09:55 대련도착,
2014년 8월 28일(목) 10:55 대련출발, (OZ 302) 13:10 인천도착,
(한국보다 중국이 1시간 늦음),
민족의 영산 백두산(서파) 대련/고구려유적/단동 5일 여행.
요번에 여행할 주변(대련, 단동)의 지도
[성해광장, 성해공원]
대련시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7년 건립하였다.
아시아에서 가장큰 규모로 총면적 176만㎡이고, 광장안 지름은 199.9m 이다.
광장에는 커다란 책을 펼쳐 놓은 듯한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는데,
도시의 개방성과 100년동안 변화해온 다렌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단동 압록강 철교 앞에 도착하여, 설래는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단동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국경도시이다.
동쪽으로 압록강, 북쪽으로 장백산맥, 남쪽으로 황해에 둘러쌰여 있으며,
풍부한 사적들이 남아 있다.
압록강 공원 : 신의주, 위화도, 월량도, 등 북한을 한 눈에 조망
압록강 단교조망 : 6.25전쟁의 상흔이 짙게 배어있는 아픔의 현장 압록강 단교 조망
요녕성의 단동시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올라가면서 작은 마을 몇개 통과(약5시간소요)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 관광한다.
파혀쳐진 고구려 고분들이 주변에 여러개 방치된 상태로있다.
[집안시]
집안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다. 집안은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가장 오랜기간 수도로서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고구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국내성 성터]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24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길이 2,686m, 높이 1~5m로 총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을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동서남북에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때 소실되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7m였으나, 거의 훼손되고, 현재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 3~4m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 4~5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만포마을 조망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만포마을 조망
비가 내려서 유람선 승선 후 찰칵!....... 그래도 아직까지 약간의 이슬비 내린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사면석 비(四面石 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호태왕비라고 함.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소재,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4면에 1,802자가 기록되어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연대순으로 기록하였다. 왜구를 물리친 내용과 북쪽으로 동부여를 정복하였고,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을 차지하였으며, 남으로는 한강선까지 진출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광개토대왕릉 앞
장수왕릉(장군총)
집안에 남아 있는 12,000천 여개의 묘지 중에서 외형이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돌무지무덤으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7단 피라미드형으로 축조되었으며, 밑변의 길이가 32m, 높이는 약 13m 로, '동양의 피라미드' 라고 불리기도 한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의 대정벌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릉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오회묘5호묘
1호묘부터 5호묘까지 나란히 있는데, 현재는 5호묘만 개방하여 안에 들러가 관람할수 있으나 사진촬영은 할 수없고, 구구려시대에 어느왕의 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용과 호랑이등 그 시대의 풍습 등을 벽과 천장에 조각하고, 천연 색상의 많은 그림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우산촌에 있다. 1945년 이전 일본인 학자에 의한 1차 조사 때의 명칭은 통구17호분이었으며, 서강62호묘, 혹은 사협총으로도 불렸다. 북한측의 표기로는 집안 다섯무덤의 5호 무덤이며, 중국측의 공식 명칭은 집안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제2105호묘(JYM2105)이다. 무덤의 외형은 절두방추형이며,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무덤칸의 방향은 동으로 22도 기운 남향이다. 널방은 동서의 너비가 4.37m, 남북의 길이가 3.56m인 장방형이며,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3.94m이다. 널방 천장 구조는 크기가 다른 삼각석을 겹으로 쌓아 올린 2단의 삼각고임으로 다른 무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이한 구조이다. 널방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으며, 바닥에 세 개의 돌관대가 놓였다. 석면 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이다.
백두산 천지
백두산(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한다.) 서파 입구
백두산 서파 계단(1,442개) 올라 가면서, 뒤돌아서 찍은것
백두산 올라가는 길은 서파(西坡), 북파(北坡), 남파(南坡) 3 코스가 있고, 가장 많이 찾는 코스가 북파(北坡)이며, 등산으로 종주를 하고자 하면 서파(西坡)로 가야 한다. 지금은 등산으로 종주를 못하게 한다. '坡(파)'란 언덕이란 뜻이다.
백두산의 봄은 6월부터이며, 여름 없이 가을로 접어들고, 9월부터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겨울이 9개월이나 계속 된다.
일 년 중 비 오지 않고 맑은 날이 20일뿐이라는 것이 백두산의 기후다. 연평균 안개 낀 날이 242일이라 하며, 여름에는 큰 바람이 불면서 맑다가도 갑자기 운무가 끼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다.
그래서 백두산을 찾은 관광객이 천지(天池)를 볼 수 있는 확률은 2/10밖에 안 된다고 하는 말이있다.
우스갯소리로 백두산을 백 번 올라와도 천지를 두 번 이상 보기 어려워서 백두산이라 하였고, 백두산에 와서도 천지를 보지 못한 사람이 천지여서 천지라고 한단다.
우리는 산신님께서 보살펴주시어 2일전부터 어제까지 계속 내리던 비가 오늘은 밝게 개었다. 그리고 천지를 보고 내려올려고 하는때에 운무가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천지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천지를 보았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백두산은 많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시절에 왜놈들은 남만주 철도부설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間島)를 청나라에게 넘겨 주는 협약을 자기들 멋대로 체결하였으며, 북한(北韓) 위정자들은 1962년 경 6.25의 중공군 참전 대가로, 한민족의 상징인 백두산과 천지의 절반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백두산(白頭山) 명칭
단군신화가 깃들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요, 조산(祖山)인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와 중국 길림성 국경선에 있는 한국에서 2,744m로 제일 높은 산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이름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문헌에 나오는 백두산(白頭山)의 최초의 이름은 중국 옛날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서다.
“넓은 광야 한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 부르는데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불함산(不咸山)'이란 속뜻은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말이다. 최근 중국의 1 인자인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갔다는 것을 그 예로 들을 수 있다.
불함문화(不咸文化)라는 말도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배달계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고대 문화를 말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 8 가지를 들고 있다.
연대별로는 한대(漢代)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하다가, 개마산(蓋馬山:남북조 魏), 도태산(徒太山: 魏), 태백산(太白山: 唐)이라 부르다가 금(金)나라 때부터 장백산(長白山: 창파이산)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장백산(長白山)이라 할 때 여기서의 장(長)의 뜻은 어른이란 뜻으로 새겨야 한다.
백두산은 여러 가지의 영웅 탄생 설화가 전하여 온다.
왕건 아비 도선(道詵)이 집터 얻어 아들을 잉태하니 그 왕건 쑥쑥 자라, 궁예를 물리치고서 고려 태조 됐다는 왕건 탄생 설화도있다.
백두산은 신성한 사람들이 태어난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은 산상(山上)에서 함부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산에서 용변을 보더라도 그릇에 담아갔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 북사(北史)에 전하여 온다.
우리들의 선조들도 예로부터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낸 후에야 백두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문헌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조에는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는 말이 나오다가, 고려사(高麗史)에서 비로소 “압록강 밖으로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白頭山) 바깥쪽에서 살게 하였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란 말이 처음 나온다.
그런데 왜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을까?
어떤 까닭으로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의 이름에 왜 ‘白(백)’자가 들어가는 것일까?
7월에도 눈이 쌓여 있다. 게다가 이산의 산정(山頂)은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눈[雪]과 부석(浮石)으로 인하여 하얗게 보여서 백두산(白頭山)나 장백산(長白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백두산과 천지 이야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두산과 천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은 곧 장백산이다. 산이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혀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 리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이요,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화강과 속평강,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천지에 대한 기록은 영조40년(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에서다.
봉(石峰)이 늘어선 것이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君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 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 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여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
백두산의 넓이는 8,000㎢로 우리나라 전라북도(8,052 ㎢)와 비슷하고, 천지의 넓이는 여의도보다 약간 더 넓다.
그 높이나 넓이는 중국과 북한 자료가 서로 차이가 난다.
그것은 한국은 인천 앞 바다를, 북한은 원산을, 중국은 천진을, 일제(日帝)는 동경만 앞바다를 해발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왕이면 우리 동족인 북한의 자료를 주로 따르기로 한다.
백두산의 높이가 2,750m(한국 2,744m, 중국 2.749.6m)인데 천지 수면은 2,190m로 백두산 서파 종주 길에서 500m 정도 아래에 있다.
카메라 한 컷으로는 잡히지 않는 천지 둘레는 14.399km, 평균 수심은 213m이고, 최고 수심은 384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산정(山頂) 호수가 바로 우리 천지다.
저수량은 19억5천500만㎥로, 만약 어느 누가 1초에 1톤씩 퍼낸다면 60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이 물은 어디서 온 물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북쪽 화구벽을 뚫고 저 달문(達門)을 통하여 사시사철 장백폭포(長白瀑 일명 飛龍瀑)를 이루어 떨어지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만이라고는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천지의 물 60% 이상이 지하에서 솟아나는 용출수라고 하는데 16봉과 천지 수면의 고도차가 4~5백m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깊은 산 정상에 호수를 이루다니 신비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1931~1932년에 천지를 답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는 천지의 깊이를 442m 이상으로 보고 천지를 세계 10대 호수 중 하나로 꼽았다.
유명한 곳은 이름 하나로 말할 수 없음인가. 천지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대지(大池)’라 하는 것을 위시해서 '천상의 호수', '대택(大澤)', '용왕담(龍王潭)','용궁지(龍宮池)', '신수분(神水盆)', '천상수(天上水)', '달문지(達門池)' 등이다.
천지 빼놓고 백두산을 말할 수 없듯이, 천지를 말하려면 천지를 병풍처럼 빙 둘러 있는 16봉우리를 말해야 한다. 이 천지와 16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옛날 옛적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이 산 한 마을에 흉년이 들었답니다. 심술궂은 흑룡(黑龍) 한 마리가 있어 불칼(벼락)을 휘두르며 물곬을 막아 놓은 탓이지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백(白) 장수와 합심하여 물줄기를 찾아놓았더니, 그 위에다가 백두산 돌을 굴려 돌산을 만들어 버렸답니다. 물론 흑룡의 심술이었지요.
하릴없어 마을 사람이 다 떠난 자리에 앉아 백장사가 탄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리따운 공주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간밤에 꿈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어요. 그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신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장수와 마을 사람들의 지성에 감천하여 왔노라. 백 장수에게 옥장천의 샘물을 석 달 열흘 마시게 하여 힘을 길러 흑룡과 싸워 이기게 하라. 이건 네 나라의 일이니 네가 직접 알려야 하느니라.”
지금의 백운봉 정상에 있는 옥장천을 찾아가서 석 달 열흘 동안 샘물을 마셔 기를 키운 백 장수는 가장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삽이 얼마나 컸던지, 그 기운이 얼마나 세었던지 한 삽을 파내서 던지면 봉우리 하나씩이 생기더랍니다. 백 장수는 이렇게 동서남북을 향하여 16삽을 파 던졌더니 그 흙을 버린 자리에 16봉이 생겨나고 움푹 팬 밑바닥에서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아나더랍니다.
이때 검은 구름을 타고 달려와서 훼방하는 흑룡을, 흰 구름을 탄 백 장수가 공주와 합심하여 물리치고 나서보니 방금 파놓은 흙구덩이에 물이 지금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백장사와 공주는 흑룡이 다시 또 와서 심술을 부리지 못하게 천지 속에 수정궁을 지어놓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전설을 가만히 살펴보니 백장사의 흰 ‘白(백)’과 산머리를 팠다 해서 머리 '頭('두)로 白頭山(백두산)이라 했다고 하는 옛날 사람들의 민간어원설이 그럴 듯하게 여겨지고 천지를 용왕담(龍王潭)이라고 한다는 것에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전설 따라 어원 따라 가본 16봉들
천지를 둘러싼 2,500m 이상의 높이라는 16봉들의 이름은 중국과 북한이 다르고, 그 이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 산 높이 역시 북한과 중국이 말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
우리가 서파 5호경계비로부터 북파 쪽으로 가면서 볼 수 있다는 산을 차례로 들어보면
2,664m 청석봉(일명 옥주봉), 2,691m 백운봉, 2,603m 녹명봉(일명 지반봉), 2,510m 관일봉, 2,595m 용문봉(일명 차일봉), 2,595m 철벽봉, 2670m 천문봉(일명 백암봉) 2,618m 자하봉, 2,625m 쌍무지개봉으로 9개가 있다.
북한 쪽으로는 2,711m향도봉(일명 삼기봉, 망천후), 2,749.2m 장군봉(일명 병사봉, 중국 백두봉), 2,549m 제비봉, 2,533m 관면봉, 2,566m 와호봉, 2,543m 제운봉, 2,691m 마천우 7봉이 있다.
더 자세히 말해 보면 18봉 중 6개는 북한에, 7개는 중국에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이 16봉은 천지 쪽으로는 거의 90도 경사로 도저히 내려 갈 수 없는 경사로 이를 내륜(內輪: 안둘레)이라고 한다. ,
그 반대쪽에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초원보다 더 아름다운 들꽃이 막 피기 시작한 '천국의 화원' 같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외륜(外輪:바깥 둘레)이라고 한다.
서파에서 북파까지의 백두산 외륜 종주는 13km로 9시간 정도 소요된다.
백두산을 남산북야(南山北野)라 하는 말 그대로 남쪽의 우리 북한 땅은 백두대간으로 수많은 산들이 남을 향하여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이루는데, 장백산은 북으로 한반도의 7배가 넘는 드넓은 만주 평야로 열려있다.
그 중 저 멀리 구름 속에 쌓인 제일 높은 산봉우리 중 젖꼭지처럼 뾰족한 봉이 백두산의 주봉인 2,749.2m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일명 병사봉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백두봉이라고 한다.
1927년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백두산근참기'에도 '장군봉'이라고 나온다니 말이다.
장군봉을 오르려면 도로를 통할 수도 있으나 끌차(잉크라인 철도)가 있다 한다.
대한민족의 최大성지인 영산, 백두산은 한국인이 살아생전에 꼭 가보아야할 한민족 근원의 모태성지이다. 고려시대 충렬왕11년인 1285년에 스님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서 우리민족의 기원인 단군신화가 나온다. 하나님의 작은아들인 환웅이 인간세계에 나가고자를 원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이롭게 할지역인 태백(백두산)에 환웅을 보냈다. 환웅은 3천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내려와 그곳에 神市를 만들고 환웅 천왕이되어 한민족의 그 유구한 大역사를 잉태하고 발원하고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백두산이다- 만주평야를 아우르며 2744미터로 우뚝솟아 한반도의 백두대간 최고의 정점에서 태백의 준령을 넘어 한반도의 남쪽 끝 한라산까지 우리땅의 맥을 지켜주면서 개국의 터전으로서 숭배받는 신령스럽고 영원한 한민족의 대영산이자 대한민족 어머니의 자궁, 이곳이 바로 대한국인, 모두의 고향이며 상징인 백두산이 아닌가! 이백두산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1597년, 1668년, 1702년에 걸처 세 번이나 웅장하게 지축을 울리며 大폭팔하면서 엄청난 화산재와 용암을 하늘높이 뿜어 올렸다고 한다, 그전인 고려시대에도 대폭팔이 있어 당시 한양까지 그 섬광의 빛이 번쩍번쩍하였고 그 화산재가 동해안 바다속 지층과 일본 단층에서 현재 발견되고 있고 그단층이 발해가 망한 년도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 고구려 후손국인 발해국이 화산폭팔로 망했다는 역사학자의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다. 이 화산 대폭팔로 인해서 엄청난 크기의 천지가 생겨났고 그둘레는 무려 14.4키로미터이며, 최대수심은 384미터(평균수심204미터)로서 천지를 둘러싸고있는 2500미터이상의 16개봉우리 안에 만들어진 화산호수로는 세계에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곳이며 이 대장관은 기막히고 놀랍고 넋을 이를정도로 아름다우며 장퀘하고 신성스러운 곳이아닐수 없다할것이다. 또한 이곳은 식물 1400여종, 백두산 호랑이-반달곰등 동물 400여종, 조류 200여종, 침엽수-활엽수가 공존하는 산림지역으로서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자연 생태문화의 탁월한 보존지역으로서 위대한 지구촌 청정 자연유산의 세계적인 대보고로 세계 생물학계와 지질학계로부터 공인되고 있다할것이다.
2일전부터 어제까지 계속 내리던 비가 오늘은 밝게 개었다. 그리고 천지를 보고 내려올려고 하는때에 운무가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천지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천지를 보았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쌍제자하(雙梯子河) :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면이 양쪽으로 갈라져 형성된 지형으로 깊은 지하에 강이 흐릅니다. 제자(梯子)라는 말은 '사다리' 라는 뜻으로 윗부분이 넓고 윗부분이 좁아 그 모양이 사다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금강 대협곡
천지가 용암을 분출할 때 만들어진 V자 형태의 협곡으로 폭 100~200m, 깊이 70m, 길이 15km 규모로 기묘한 형태의 송곳바위와 천길 낭떠러지사이로 에메랄드빛 계곡수가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관광버스 좌측에 있는 오녀산성(졸본) 통과중이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고구려 산성.
환런현[桓仁縣] 중심에서 8km 떨어져 있다. 해발 820m에 있다.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장벽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만 성벽을 쌓았다. 오녀산성의 전체 평면은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130~300m이다. 1996년부터 1998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 유물 2천여 점이 발굴되었으며,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天池)라고 하는 샘이 있다. 2004년 다른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압록강 유람선 탑승장
압록강은 우리나라 북부와 중국 동북부 지방과의 국경을 이루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흐르다가 허천강, 장진강, 자성강, 장자강과 합쳐지며, 다시 북쪽으로 여러갈래를 이루면서 흐르다가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길이는 790km 이며, 6.25전쟁당시 피격으로 중국과 북한을 잇는 끊어진 철교와 신의주, 위화도, 북한마을을 볼 수 있다.
압록강 유람선 탑승(어적도, 북한마을실상 조망)
압록강 유람선 탑승(어적도, 북한마을실상 조망)
이곳 시냇물 처럼 보이는 곳은 압록강의 한 지류인데, 이곳을 건너면 북한 소유의 압록강 안의 섬이다.
호산장성 : 중국 수, 당의 침략에 대비해 고구려가 세운 천리장성의 일부 박장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으로, 단동시내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30km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대에 중국에서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후 지금은 만리장성의 동단이라 주장하고있다. 성곽의 축조 지형으로 단동쪽 서쪽 방향을 방어하기 위해 호산의 서쪽 지형으로 축성되어 있음에도 북구하고, 현재 성곽의 모양은 동녁을 방어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다만, 성안에 고구려의 옛 우물 유적지가 남아있는 것은 중국측도 인정하고 있다. 한면은 산으로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 형세가 마치 누워있는 호랑이 모습과 같다 하여, 호산장성(虎山長城) 이라 불리어 진다.
호산장성 저 앞에 시냇물 처럼 보이는 것이 조금전에 다녀온 바위에 지척(咫尺)이라 새겨진 근처이다. 좌측은 중국, 우측은 북한이다.
호산장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압록강 속의 북한마을
관광버스가 호산장성을 출발하여 운행중인 압록강변인데, 압록강 건너 보이는 곳이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섬)이다. 위화도는 북한땅이다.
비사성(우측에 보이는 대흑산)부근 통과중............
비사성 : 중국에서는 대흑산(6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에서 대흑산성으로 부른다. 고구려 때 축조된 성이지만,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요녕성 동쪽의 대흑산 주위에 석회암으로 쌓은 거대한 석성(石城)으로,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산성 역할을 하였다.
첫댓글 석정님 즐감하고갑니다...!
사모님과 행복한 여행하셨군요...
덕분에 역사 공부도 잘하고 갑니다~!
저~땅을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명분하에 모두다 빼앗겼으니... 원~~~
에구 에구 슬픈 역사여~~~!!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축하합니다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날씨가 많이 도왔네요 ~~
감사합니다. 역사와 지리 모두 공부합니다.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