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의 새로운 시도. 벽돌쌓기 이론.
부제: 이놈아! 그게 최선이야? 확실해?
<6편>
이야기 4.(2잡, 3잡을 하고 닥치는 대로 배워라.)
“건설기계를 생산하는 한 대기업의 연구소에 파견 나와 있던 우리 회사 직원은 17명 정도였는데 그곳에 근무한 4년 6개월 동안 난 그 17명 중에 가장 먼저 출근했으며 단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 가장 일찍 출근해서 영어 공부하고 점심시간과 퇴근 후에도 공부하는 생활은 계속되었지. 아니 학원이 둘 더 늘었다. 퇴근 후 난 영어, 헬스클럽에 컴퓨터학원까지 다녔지.”
“지독하셨네요.”
“곧 워드 2,3급 자격증을 땄다. 이것은 나중에 야간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당시 근로자들을 위해서 야간 전문대 무시험 진학 제도가 생겼는데 내가 신청했을 때 난 근무 기한이 15일 부족해서 다음해로 미뤄야 했고 기다리는 1년 동안 학교 수업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워드 자격증을 따려고 계획하고 그렇게 했다. 벽돌을 더 쌓은 것이지.”
<벽돌쌓기8, 워드>
“잠깐만요! 형님. 그동안 여자는 안 사귀었어요?”
“왜 없었겠니. 해주련?”
“예~!”
“카센타에 처음 들어갔을 때 월급 50만원 받기로 했는데 사모님이 다른 사람 모르게 10만원을 더 주시더라.”
“왜요?”
“난 쫄병정신으로 무장했었거든”
“쫄병정신요?”
“쫄병정신이란 속한 조직에서 내가 제일 신참이라면 가장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이지”
“그런데 쫄병정신과 여자가 무슨 상관이예요?”
“내가 워낙 열심히 일하니까 10만원을 더 준 게 끝이 아니고 사모님이 자기 친 여동생을 소개시켜주는 거야. 그런데 자기 남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남편 그러니까- 카센타 사장님한테는 비밀로 하고 말야. 그런데 나중에 사장님도 아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그때 다들 긴장해서 있는데 첫 마디가 ‘XXX 정도면 처제 줄 수도 있지’ 한 거야”
“우와~ 굉장히 잘 봤다는 말이네요? 그래서 맺어졌어요?”
“아니. 내가 자신감이 없었어. 그때가 내 인생 첫 데이트였고 난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자신있게 프로포즈 할 수 없었지.”
“아쉽다.”
“그때 TV에서는 서울의 오렌지족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직장인의 3대 조건으로 운전면허증, 컴퓨터, 외국어를 말하곤 했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운전면허증 밖에 없었던 거야. 난 가장이 되기에는 너무 무능력 했던거지. 그때 내 꿈이 뭔지 알아?”
“뭔데요?”
“자가용 승용차 뒤편 손잡이에 양복 윗옷을 걸고 출근하는 거.”
“그냥 사무직 다니는 거잖아요? 그래서 꿈을 이뤘어요?”
“이뤘지. 몇 년 후에.”
“여튼, 그럼, 그 여자 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 잠깐 사귀었던 여자가 있었지. 좋은 여자였지만 결혼까진 발전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를 슬프게 했던 한 여자가 있었고”
“슬프게 했던 여자요?”
“내 친구에게 여자를 뺐겼지.”
“그 얘기도 해주세요.”
“그건 나중에 별도로 말해줄게.(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올릴 예정) 그리고 내가 설계 일을 갓 시작했을 때 선을 한번 봤어. 월급 50만원을 받을 때였는데 데이트 때 여자가 그러더군. ‘월급이 100만원은 넘지?’ 그래서 포기했어. 80만원만 되어도 거짓말을 했겠지만 50만원 짜리가 어찌 100만원이라고 하겠냐? 가슴이 미어지더군.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는데”
“딱 지금 88만원 세대 얘기네요.”
“4년 반이 지나서 그 설계 회사를 그만둘 때가 되서야 월급이 100만원에 도달했으니 결혼했으면 비참하게 살았을 거야”
“그랬겠네요.”
“자 다시 벽돌쌓기로 넘어가자.”
“예~”
“그 설계 회사에서의 첫 월급은 50만원이었는데 난 40만원을 저축하고, 6만 5천원 영어학원비, 3만원 차 기름 값, 그리고 용돈으로 5천원을 썼다. 나중에 월급이 조금 오르고 나서는 학원을 2개 추가했지. 20대 중반의 남자에게 한 달 5천원의 용돈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난 술 담배를 안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해서는 그것도 필요 없었지만 영어 수업 동료들이 회식이라도 하자고 하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지. 5천원을 넘기면 다음 달 영어 수업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니......., 쉽지 않았지만 견딜 만 했다.”
“형님~”
“몇달 후,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회사에서는 덤프, 카고, 콘크리트 믹서, 추레라 등 대형 트럭도 생산했는데 트럭을 구매한 고객이 집에서 차량을 인도 받기 위해서는 탁송 대행을 신청하는데 난 그 대형 트럭 탁송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S사의 대형 상용 트럭을 한 대씩 운전해서 차주에게 인도하고, 돌아올 때는 고속버스 안에서 자면서 오고, 다시 한 대씩 운전하는 식의 일이었는데 운전하면서 쏟아지는 잠을 참기위해 계속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격주 토요일 휴무 때는 이틀 동안 창원<->서울 왕복 3차례, 창원<->부산 1차례를 다녀와서 30여 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틀 동안 전혀 쉬지 않고 하는 일이었지만 한 달 수입이 50만원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주말 아르바이트로는 상당한 수입이었지.”
<벽돌쌓기9>
“그랬겠네요. 50만원 월급인데 부수입이 30만원이었으니”
“졸업시즌에 꽃 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또 군항제 기간에 오징어 장사도 했다. 당시에는 거리에서 먹을 것을 파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지. 군대 가기 전 햄버거 장사 실패 후 다른 아이템을 찾던 나는 오징어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분으로부터 팔지 못한 재고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10축(1축=20마리)을 샀다. 오징어를 안 굽고 그냥 먹으면 맛이 없으니 굽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 접이식 석쇠와 토치를 이용한 즉석 훈제방법이었다. 토치에는 손가락을 걸 수 있는 고리와 허리띠에 걸 수 있는 걸이를 만들어서 총처럼 허리에 차고 있다가 사용하고 끝나면 손가락으로 권총 돌리듯 2바퀴 돌리고 허리에 다시 찼다.”
“오징어도 품질이 좋은 것을 사용하고 가격도 한 마리에 1,000원으로 저렴했으며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없던 시절이라 장사는 잘 되었다. 어찌나 잘 팔리는지 굽기도 전에 가져가고 뒤에서 기다리지 못해서 달려와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 옆에서 굽는 모습을 보던 일부 사람들은 나의 기발한 생각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지.”
“오징어도 팔았어요?”
“첫날 10축을 다 팔고 20축을 더 주문했으며 허리에 매는 작은 가방에 돈이 차서 더 이상 넣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 어머니는 내게 조언을 하시길; 1마리는 2천원, 2마리는 3천원에 팔면 이익이 더 클 것이라고 했고 바뀐 가격으로 장사를 한 이틀째는 허리 가방을 2번이나 비워야 했다. 오징어 원가를 제하고 난 순익이 28만원이 넘었다. 겨우 주말 2일 일하고 말이다. 90년대에 이 돈이면 적은 게 아니다.”
“형님은 안 해본 게 뭐예요?”
“도둑질”
“그 대기업 소속으로 내게 설계를 가르친 사람은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도면 하나는 정말 FM 이었지. 그때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니가 이기나 내 인내심이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고 이를 악물었고 그래서 내 실력은 일취월장하게 되었지. 지금 내 설계 실력도 그분한테 배운 거다.”
- 7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