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ㅡ 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섬 남부 호놀룰루 군에 있는 만. 여기에는 미국 해군기지와
태평양 함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공군이 이곳을 기습공격하여 미국 함대가 일시적인 타격을 입고 그결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진주만 공격 ). 호놀룰루 서쪽 10㎞ 지점, 오아후 섬의 남쪽 해안에 있는 진주
만은 클로버 모양으로 인공개조한 항만이다. 이 항만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주위에는 에바·와이파후·펄시티·
아이에아·호놀룰루 등의 도시가 있다. 가항(可航) 수역이 26㎢이고, 수백 개의 정박지가 있으며, 육지 면적은
4,000㏊가 넘는다. 와이피오 반도와 펄시티 반도, 그리고 포드 섬으로 인해 4개의 호수가 생겼다. 진주만 수로는
본래의 내륙 만을 태평양과 연결시킨다.
한때 이곳에서 진주조개들이 자랐기 때문에 하와이 사람들은 진주만을 와이모미('진주 바다'라는 뜻)라고 불렀다.
1840년에 미국 해군 대위 찰스 윌크스가 처음 측지측량을 했고, 이 만까지 산호 사주 수로의 준설작업을 연장할
것을 주장했다. 약 30년 후 존 매캘리스터 스코필드 대령은 미국이 이 항만에 대한 권리를 획득할 것을 제의했다.
그뒤 1887년에 체결된 조약으로 미국은 이곳을 급탄항과 수리항으로 독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때 태평양 기지로서 이 항만이 갖는 전략적 가치가 입증되면서
부터였다. 1908년 해군기지가 세워졌고, 1919년에 건선거(乾船渠)가 완공되었다.
1941년 진주만 공격시 미국 군함 애리조나호가 침몰되어 1,102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가라앉은 배의
선체에 지금은 흰색의 콘크리트-강철 구조물이 걸쳐져 있는데, 이것은 1962년 5월 30일 국립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진주만에 있는 시설물로는 해군 조선소·보급소·기지 등이 있다. 와이피오 반도와 사우스이스트로크 지역에
있는 해군조선소에는 건선거, 2개의 해상철도, 보조(함정) 부양식 독(dock), 공장 등이 있다. 해군보급소는 펄시티
반도에 있다. 진주만 수로는 동쪽으로 히컴 공군기지, 서쪽으로 해군관측소, 에바비치 가까이에 있는 바버포인트
해군항공기지의 숙소 등과 접해 있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 이 항만 구조물들은 양국 전쟁지로 출정하는
부대와 장비의 집결장소였다.
태평양(대동아)전쟁 01
지난주 12월 8일은 일본군의 진주만(眞珠灣) 공격 70주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직접 전투 참가를 꺼려 온 미국은
이 기습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 왔습니다. 1937년에 시작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전은 소위 ‘대동아
(大東亞)전쟁’으로 확대되어, 태평양 전역에 걸쳐 미국 주도의 연합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일요일인 1941년 12월 7일 7시 55분에 시작하여 두 시간 계속된 일본 공군과 특수 잠수함의 공격으로
하와이 진주만기지에 있던 미국 태평양함대 군함 20척과 비행기 164대 그리고 병력 2천4백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시작된 육해군 공동작전으로 일본은 그로부터 3개월의 짧은 시간에 동남아 여러 나라의 연합국
중요 군사기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버마(미얀마) 등 식민지를 장악하는 전과를 올리고 기세가 등등하
였습니다.
당시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며칠에 한 번씩 ‘전승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며 시가지를 행렬했으며
밤에는 초롱불을 들고 거리를 누비기도 하였습니다. 싱가포르의 영국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마닐라에
주둔하던 미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I shall return(나는 돌아올 것이다)"이란 유명한 고별사를 남기고
호주로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한 일본 신문이 이번에 보도한 바와 같이, 개전 전의 미국은 항공기 생산에서 일본의 6배, 철강은 20배, 석유 생산
은 740배라는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전세(戰勢)는 곧 뒤바뀌고 개전 3년9개월 뒤인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은 항복하였습니다. 그렇게 맞선 두 나라가 진주만공격 70주년 기념일을 맞이한 표정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국에 조기를 걸게 하여 이 ‘치욕의 날’을 잊지 말도록 당부하고,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전국의 애국자가
“미국의 생활 방식을 수호하기 위한” 부름에 호응하여 나라를 지켰다고 찬양했습니다.
진주만 현지에서는 일본 기습이 시작된 7시 55분에 맞추어 기념식을 열어 100여 명의 생존자를 포함한 3천여 명의 인사가
희생자의 넋을 달랬습니다. 생존자 중 작년에 90세로 작고한 한 분은 유언을 남겨 기념식 전날 아직도 해저(海底)에 남아
있는 자기가 근무하던 군함 ‘유타(Utah)’호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예년과 같이 공식적 성명이나 행사는 전연 없었습니다. 다만 유력 일간지 아사히(朝日)신문만이 일본은
진주만에서 세 가지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그 사설은 국가는 위기 상황에서 “단순한 해결을
성급하게 구하지” 말고 둘째 위기 시대에는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세 번째로 세계로 눈을 돌릴 때 국제문제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좁은 시야(視野)의 외교논리를 피하여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로 지금, 강대화(强大化)하는 중국의 의도를 어떻게 보고,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축(再構築)하느냐가 이 나라의
사활(死活)문제로 떠올랐다”고 말한 이 신문은 어느 미국 역사가가 ‘전략적 우행(愚行)’이라고 말한 진주만공격 70주년에
이 세 가지 교훈을 새삼 가슴에 새긴다고 글을 마쳤습니다.
다만 일부 지역의 민간단체에 의하여 양국 희생자 위령제나 평화운동 등 모임이 있었다는 보도는 70주년이라는 매듭의 해
역사적 의의를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주만공격은 우리 민족의 광복을 재촉한 일제의 단말마적 우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전의 우세로
화평협상에서 고지를 점하겠다는 요행을 바란 그들의 승부수는 일본국민뿐 아니라 착취당할 대로 착취당한 우리 민족에
한층 더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인적자원 고갈로 수십만의 우리 젊은 남녀 노동력을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탄광에 강제징집한 일제는 끝내는 4천3백 명의
동포 대학생을 학도병으로 강제 입대시키고 수많은 장정을 징병으로 끌어가고, 심지어는 그들의 결사대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에 편입시킨 동포까지 있었습니다.
유리한 전황(戰況)만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이나 라디오는 국민을 완전히 오도하고 전쟁과 관계없는 국내 자연재해나
연합군 공습 피해조차도 보도관제 대상이 되어 세상은 정보의 암흑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전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 말기 3년 동안 매년 한 번씩 서부, 동남부, 중부의 순서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매번 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지만 일절 보도가 없었습니다. 지난 3월의 동일본 대지진의
경우를 생각할 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보도관제였습니다.
서양의 식민지를 해방하여 동양민족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수립한다는 미명으로 일제가 붙인 ‘대동아전쟁’
이란 이름은 전후 연합국 점령당국의 사용금지령으로 ‘태평양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우익 매체나 인사들은
아직도 이 이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민주 헌법은 채택되었지만 침략 전쟁에 대한 그들의 사과는 독일의 전쟁범죄 사과
와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중국 난징(南京)대학살사건, 종군 위안부문제, 교과서 개정문제, 독도 영유권문제 등을 생각할 때 개전 70주년을 맞은 태평
양전쟁의 전후처리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태평양(대동아)전쟁 02
중국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은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
를 강탈하기로 결심했다. 네덜란드령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
반도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원료(주석·고무·석유)가 있었다. 일본이 이 지역을 빼앗아 일본 제국에 병합할 수
있다면 사실상 경제 자립을 이룩할 수 있고, 그리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1940년말까지 일본 전략가들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도 일본이 상대할 적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1년이 되자, 영국·네덜란드·미국도 태평양 지역
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를 주축으로 한 일본 전략가들은 대담한 전쟁 계획을 새로 세웠다. 일본은 태평양 확전(擴戰)의 주된 상대국
으로 예측한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야마모토의 계획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 타격대는 미국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은 채 하와이 북쪽 440km 지점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이 항공모함에서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雷擊機) 및 약간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360여 대의 항공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뉘어 날아올랐다. 이 항공기들은 진주만에 있는 거대한 미국 해군 기지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이
기지에는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및 3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완전히 기습당했고, 정박중이던
전함 8척이 모두 공격받았다(그러나 이 가운데 6척은 수리되어 다시 해군에서 활약했음).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한 수많은 함정이 파손되었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손상되었다. 2,000명이
넘는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1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진주만 해안에 있는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면했다. 일본이 예고 없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고, 미국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말끔히 없앴다. 12월 8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반대한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완[臺灣]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군용비행장과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했다(현지 시각으로는 12월 8일). 미국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의 50% 이상이 파괴되었다. 2일 뒤,
일본은 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필리핀에 있는 카비테 해군기지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국 아시아 함대의 일부는 11월에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고, 살아남은 주요함정과 폭격기는 보호해 줄
전투기가 없어서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 2주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기지로 철수했다. 필리핀에는 지상군
이외에 전투기 몇 대와 잠수함 30여 척, 그리고 몇 척의 소형 선박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그때 이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타안
반도(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마닐라와 마주보고 있는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마닐라 만에 있는 섬)을 지킬 태세를 갖추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타안 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지만, 일본은 그후 8주간 계속 병력을 증강했다. 맥아더는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바타안 방어를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중장에게 맡겼다. 웨인라이트
중장과 그의 부하들은 4월 9일에 항복했다. 코레히도르 섬은 5월 5~6일 밤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남부는 3일 뒤에
항복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5,000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했고,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에 광둥
반도[廣東半島]에서 건너온 일본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에 방콕을 점령했고 12월 16일에는 미얀마(버마)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 곶을 점령했다.
12월 8일부터 일본군은 여느 때처럼 공습과 함께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소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인도군을 압도했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순양함 리펄스호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떠났지만, 12월 10일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1942년 1월말 일본군 2개 사단은 공군과 기갑부대의 지원을 얻어 싱가포르 섬을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2월 25일 일본군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이었다.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2월 27일 자바 해에서 벌어진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만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했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지시를 받는 미국·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다. 맥아더
는 남서태평양 지역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놓고,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하고,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당초 계획은 자바 섬 점령으로 실현되었지만, 미국 태평양 함대는 1942년 2월 1일에 마셜 제도를 공격했고 2월
23일에는 웨이크 제도를 공격했으며, 3월 1일에는 마커스 섬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2월 23일에는 라바울을 폭격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세워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병참선을 확립했다. 그러자 일본은 계획을 확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
까지 이어진 연합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뉴기니 동부도 차지하여 포트모르즈비에 비행기지를 만들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고 알류샨 열도에 비행기지를 만들 계획도 세웠다.
1942년 4월 18일에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東京]를 공격했다. 이 공습은 일본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렸을 뿐 진정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5월 7일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이 미군 구축함 1척과 유조선
1척을 격침했다. 그러나 미군 전투기들도 일본군의 소형 항공모함 쇼호호와 순양함 1척을 침몰시켰다. 이튿날 일본 전투기
들은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호를 격침하고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에 손상을 주었지만, 일본군의 대형 항공모함 쇼카쿠호는
심한 손상을 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투에서 너무 많은 항공기를 잃었기 때문에 포트모르즈비 점령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아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대형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그리고 잡다한 소형
함정들을 집결시켰다. 미국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만 갖고 있었지만,
함대를 지원해줄 항공기를 115대가량 보유하고 있었다. 6월 3일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한 일본 전함들이 목표
지점에서 800km 떨어진 곳에 이르자, 미국 폭격기들이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6월 4일 새벽에 항공기
를 보내어 미드웨이 섬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다. 6월 4~5일 밤에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던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6월 6일에 어뢰를 맞고 침몰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연합국이 미드웨이에서 거둔 승리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력은 사실상 대등해졌다. 일본은 전략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벨칼레도니와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의 침략 계획을 취소했다.
일본이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것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9일 장제스[蔣介石] 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을 뿐만 아니라(이는 오래 지체시킨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음),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했다. 이것은 군사적
의도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몰려갔다. 미얀마 공로(公路)는
서방 연합국이 중국에 보급품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육로였기 때문이다. 1942년 1월 3일 장제스는 중국 전투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되었다. 미국의 조지프 W. 스틸웰 장군이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 장제스와 스틸웰은 일본군의
미얀마 진격을 저지하는 일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