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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모음 스크랩 양팽손과 조광조 -무등일보 (연재 2)
해인 추천 0 조회 47 11.06.01 19:10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 죽어서도 향기로운 만남, 조광조와 양팽손
입력시간 : 2009. 05.07. 00:00


사약받은 정암 시신 손수 수습

사마시에 함께 합격 후 개혁정치로 함께 파직

자신에게 미칠 화를 감수하며 의리 지킨 학포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1519년 11월 기묘사화로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에 유배 온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위 시를 쓴다. 능성 유배 중에 쓴 시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는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마음은 말 잃은 마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중종 임금이 자기를 다시 부를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는 하고 있지만 지금은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체념을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아래 절명시를 쓴다.



愛君如愛夫 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이 두 수의 시는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愛憂堂)에 걸려 있다. 애우당은 절명시 1구 첫 글자인 임금 사랑의 애 愛와 2구 첫 글자인 나라 걱정의 우(憂)를 딴 강당 이름이다.

애우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적중거가라고 써진 초가집과 영정각이라고 써진 기와집이 있다. 적중거가는 방2칸 부엌 한 칸의 초라한 집인데 조광조의 귀양살이 모습을 알 수 있다. 영정각에는 비교적 온후한 모습으로 관복을 입은 조광조 영정이 있고 여섯 일곱 송이의 하얀 국화가 놓여 있다.

한편 적려유허비는 정문에서 바로 추모비각이라고 써진 쪽문을 들어가면 있다. 비석은 거북이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총 12자의 해서체 글씨가 세로 두 줄로 6자씩 적혀 있고, 뒷면에는 추모내역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이 비는 조광조 사후 150여년 후인 1667년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글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그런데 비통하게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학포 양팽손(1488-1545)이다. 그는 능성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일곱 살 때 이 고을을 순시한 전라감사가 양팽손에게 천지일월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는 “천지는 나의 도량이요,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라고 지었다 한다. 이에 전라감사가 “이는 해학의 모습이요 추월(秋月)의 정기라 훗날 용문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그는 그의 나이 22세인 1510년(중종 5년)에 조광조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사간원 정원, 홍문관 교리등을 하면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기묘사화로 파직 당하여 화순으로 내려온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한다.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 길에 돌아가기 어려우므로 아주 얇은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초가집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한 다음 학포 양팽손을 찾았다고 한다.

양팽손이 안으로 들어오자 “양공, 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나이까. 태산이 무너지는가. 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은 시드는가” 라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한다. 그런데 조광조는 한 사발의 사약에 쉽게 죽지 않아 다시 한 사발 더 마셨다 한다.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밝히려 했던 조광조가 죽자 양팽손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마을 골짜기인 쌍봉사 근처 중조산 조대감골 서원터 (화순군 이양면 중리 서원동 마을)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다음 해에 조광조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을 한다.

세상이 평안할 때 의리를 말하기는 쉬우나 난세에 의리를 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감수하고 조광조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양팽손의 행동은 정말 의롭다. 그리고 보니 양팽손은 조광조에게 하늘이 내려준 지인이다. 학포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묘는 아마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이 들판에 버려졌을 지도 모르니까.

그 후 양팽손은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에 학포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시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과 등진다. 2003년 4월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이 달의 문화인물’로 뽑힌 그가 그린 그림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도'가 유명하다.

이 그림은 절벽이 있는 강산에 배가 한 척 있다. 멈추어진 배에 뱃사공이 있고 절벽에는 나무 몇 그루와 집이 있으며 먼 곳에 구름이 자욱하다.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같다. 이 그림에는 이러한 화제(畵題)가 붙어 있다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 그림자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세상 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 온 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 낚시 걷어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 구경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할 수 있고

여울 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돛 단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말라.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렵다.



이 시에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하는 심정이 가득 담겨 있다.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려워서 고깃배도 오고 가지 말라’고 한 표현은 은일(隱逸)의 극치이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인연은 죽어서도 향기로운 지란지교이다.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죽수서원과 경기도 용인시의 심곡서원에는 지초, 난초 향기가 풍기는 두 사람의 신위가 같이 모시어져 있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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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6.01 19:51

    첫댓글 정암 조광조는 양팽손을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 하면
    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후의 가을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맑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

    꽃에서만 향기가 나는 것은 아니겠죠?
    나는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는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한번쯤은 곰곰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갖을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그 향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지내야겠습니다.

  • 11.06.01 22:25

    살아가면서 이심전심인줄 알았다가 동상이몽임을 알았을때 느끼는 허탈함 때문에 뭐든지에 깊이 들어가기 싫어지니 큰일이지요... 본인한테 나는 악취를 향기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나도 많아 항상 생각하고 반성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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