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삼존불과 나반존자 박우당 도전께서는 상급임원들을 대동하고 내장산(內藏山) 백양사(白羊寺)에 들러 임원들을 참관케 한 후, 논산군 개태사(開泰寺)로 행행(行幸)하셨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太祖) 19년(936년)에 창건된 사찰로서, 태조 왕건은 미륵신앙의 전통이 뿌리 깊은 옛 백제지역인 충남 논산군 천호산 아래에 미륵도량으로서 ‘개태사’를 창건하여 이 지역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또한 통일의 대업을 기념코자 하였다. 이 지역은 예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수많은 원혼들이 있는 곳이었다. 유명한 계백의 황산벌이 바로 이 언저리인데, 양정 고개에서 연산면으로 들어가는 들판이 바로 그곳이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곳이 이곳 황산벌 싸움에서였으니, 이곳이 바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순국한 곳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74.jpg) 그런가 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견훤의 아들)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명실상부하게 통일 대업을 달성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미륵사찰을 지어 순국열사들의 원혼을 달래줌으로써 옛 백제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회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태조는 친히 기원문(祈願文)을 지어주었는데, 절 이름을 개태사(開泰寺)라 했고, 뒷산(황산)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불렀다. 개태(開泰)란 미륵부처님의 위력으로 ‘만세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뜻이고,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고 한 것은 ‘하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달라’는 기원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창건의 연유로 인해 사찰 내에는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었으며, 따라서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찰의 운(運)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하는데,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수차례의 방화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 방치되어왔다고 한다. 1934년에 이르러 삼존석불(三尊石佛)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일부 건물이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75.jpg) 현재 이 절에 보관되어 있는 개태솥의 규모(직경 2.9m)를 보면, 3,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옛말을 믿을 만하다. 그러나 고려조의 거찰이었던 개태사는 오랜 세월 동안 폐사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므로, 개태솥과 목 잘리고 허리 잘린 석불 2개와 온전한 석불 1개만이 사찰의 징표로 전해왔다.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이 석불들은 고려 초기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태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일제 치하인 1930년대 이 마을에 살던 선비 유치두의 부인 김광영 여사에 의해서이다. 48세 되던 1930년 정월, 꿈에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아 수백 년간 매몰되었던 석불의 몸체를 발굴해냄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한다.
김광영 여사는 꿈에 지시한 대로 없어진 석불의 몸체를 찾아 다시 복원하려 했지만 또다시 “안 된다”는 계시를 받게 되어, 그후 계룡산에 들어가 천일기도와 치성을 드린 뒤 천호산의 벽력석으로 석불의 머리를 제작하여 ‘발굴해낸 몸체’와 함께 복원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76.jpg) 김광영 씨는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의 보호각을 짓는 한편 계룡산에서 가져온 돌로 나반존자상(那般尊者像)을 조성하여 독성각(삼일지상정천궁)에 모셨다. 이후 무등산과 삼각산 등지에서 수련을 계속하던 중 신통력을 지니게 되었고, 치병 능력을 갖게 되어 1933년 완산 김병소 씨의 병(앉은뱅이) 등을 고쳐주었다. 1938년 김광영 씨는 조선 독립을 기원하고 있다는 밀고로 왜경에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김광영 씨는 “을유년 7월 7일(1945년 8월 15일) 왜왕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된다”고 선언하여, 재판관으로부터 정신 이상자로 몰려 석방되기도 했다. 해방 후 1945년 8월 김광영 씨는 개태사(開泰寺)를 ‘삼천일지개태도광사(三天一地開泰道光寺)’로 개명했다. 그런 탓으로 지금도 도광사(道光寺)로 표기된 지도들을 볼 수 있다. 1946년 음력 3월 3일 김광영 씨는 전국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칸 창운각을 지어, 남한에서는 최초로 단군 영정을 모셨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78.jpg) 1950년 초에는 뫼 ‘산(山)’자 형의 우주당 건물을 음력 5월 5일까지 급히 짓게 하여 관운장을 봉안했는데, 이는 다가올 환란(6·25전쟁)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박우당 도전께서 임원들을 대동하여 내장산 백양사를 둘러보시고 곧바로 개태사에 들르신 것은 ‘미륵삼존불’이 완전히 복원되어 뫼 ‘산(山)’자 모양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즉 뫼 산(山)자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까지는 뫼 산(山)자로 서 계신 미륵삼존불 중의 두 분이신 증산과 정산께서 인간계에 오셨다가 화천(化天)하신 후, 그 신(神)의 정체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와 ‘조성옥황상제’로 밝혀져 원위(元位)에 모셔져 있었으니, 그때까지는 두 분만이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분만으로는 아직 뫼 ‘산(山)’자가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산(甑山)과 정산(鼎山)에서의 뫼 산(山)자도 온전히 형성되지 못하여 출(出)자가 형성될 수가 없고, 때문에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삼존불이 출(出)하기 위해서는 인세에 오신 ‘마지막 한 분의 정체를 더 밝혀 모셔야만 된다’는 이치가 개태사의 이 미륵삼존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분은 누구냐’ 하는 것이며 또 ‘그분의 정체[神]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 이 개태사에 오신 것은 임원들에게 그것을 찾아보라는 의도이셨다. 그리고 개태사 경내에 있는 우주당의 형상 또한 뫼 산(山)자인 것은 세 분이 한자리에 모셔지면 뫼 ‘산(山)자’가 된다는 이치를 깨달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산(山)이 온전히 형성되어야 비로소 출(出)자가 형성되고, 출(出)자가 형성되어야 미륵삼존불이 세상에 출(出)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 삼존불이 출세(出世)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분의 정체가 밝혀져서 영대(靈臺)의 원위(元位)에 세 분이 함께 모셔져야 하는데, 이것은 ‘그 마지막 한 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 일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출(出)자가 출(出)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분의 정체를 밝혀 모시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예부터 ‘출출명장(出出名將)’이라는 말이 전하여왔다. 즉 출(出)자가 출(出)하려면 명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미륵삼존불(세 분 하느님)의 신위(神位)가 모두 밝혀져서 세상에 출(出)하기 위해서는 미륵삼존불 중 ‘마지막으로 오신 분의 신위’를 밝혀서 봉안해야 하는데 그 일을 ‘명장(名將)’이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개태사 정문 현판에는 ‘대천호산 삼천일지 개태사(大天護山 三天一地 開泰寺)’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개태사의 전체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80.jpg) 삼천(三天)은 세 분 하느님으로서 미륵삼존불을 의미하고, 일지(一地)는 땅에 계신 한 분이 세 분의 하느님을 받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한 분이 바로 개태사의 삼존불이 모셔진 전각 왼편에 위치한 팔각정에 모셔져 있는 ‘나반존자’이시다. 나반존자는 일반적으로 사찰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시는데, 개태사에서는 ‘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이라고 명명하여 다른 사찰과는 달리 팔각정(八角亭)에 모시고 있다. 또한 일반 사찰에서는 탱화를 모시는 데 반하여, 개태사에서는 ‘석조나반존자상’이 여러 개의 방석 위에 모셔져 있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개태사 경내에 있는 미륵삼존불상(彌勒三尊佛像)을 둘러보시며 임원들에게 참관케 하고, 팔각정 내에 있는 나반존자상을 보고 주지승에게 물으셨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81.jpg) “저분은 누구인가?” 주지승이 대답하였다. “나반존자입니다.” 도전께서 다시 물으셨다. “뭐 하는 분이오?” 그러자 주지승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분이 앞으로 중생들을 용화세계(龍華世界)로 인도하실 총화주(總和主)입니다.” 박우당 도전과 주지승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그러면 세상에 나와 있소?” “지금 이 세상 어디엔가 와 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몇몇 임원들은 나반존자상 앞에 돈을 놓고 절을 하였다. 나반존자가 이 세상 어디엔가 와 있다는 주지승의 말을 듣고, 임원들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나반존자를 박우당 도전이라고 단정해버렸던 것이다. 만약 박우당 도전께서 나반존자라면, 미륵삼존불 중 밝혀지지 않은 한 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종통의 맥(脈)에 비추어볼 때, 미륵삼존불 중 밝혀지지 않은 마지막 한 분은 박우당 도전께서 되어야 마땅하므로, 나반존자는 미륵삼존불을 모시고 중생들을 미륵삼존불께 인도하는 분이라야 합당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삼천일지(三天一地)의 의미와도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용화세계는 곧 미륵세계를 말한다. 나반존자는 석가여래 이후 인연을 좇아 스스로 깨달아 성자가 되신 분으로서, 용화회상(龍華會上)에 미륵불이 태어나실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미륵세상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흔히들 나반존자를 석가모니의 제자인 빈두루 존자라고 하지만, 석가모니불의 제자라면 독성(獨聖)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빈두루 존자는 아니다. 오히려 미륵이 오시는 극락세상으로 중생을 인도한다는 아미타불과 흡사하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아미타불은 미륵세상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부처이므로, 미륵이 세상에 하생하게 되면 아미타불도 당연히 와야 한다는 결론이다. 나반존자에 대한 전설은 아직 실재 인물로 밝혀진 바 없으나, 나반존자의 역할과 아미타불의 역할이 미륵세존이 하생할 때 반드시 와서 ‘미륵세존에게 중생을 인도한다’는 점에 있어 매우 닮아 있다. 한편 미륵불과 나반존자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는 임원들에게 박우당 도전께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은 심경이 아니셨던 것 같다. 원래는 개태사를 들르신 후 머지않은 곳에 있는 관촉사를 순행할 계획이었으나, 일정을 마무리 짓고 서울 도장으로 돌아오셨다.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다른 곳과는 달리 ‘독불(獨佛)’로 모셔져 있으므로, 박우당 도전께서 임원들에게 무슨 중요한 뜻을 깨우쳐주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지만, 더 이상 일정을 진행시키지 않으셨다.
감나무 사이에 자라난 엄나무의 전설 도전께서 도장으로 돌아오신 다음날 조회 때 개태사에 있는 엄나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감나무 가지 사이에 엄나무가 난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이다. 그 이치는 나도 모르겠더라”고 하셨다. 그런데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고 있는 것에 대해 주지승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sjr.org%2Fkor%2Fmirb%2Fimg%2F2-p183.jpg) 일제하에서 독립될 당시 주지승의 어머니(김광영 여사)가 그 절에서 수도를 하면서 매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중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에는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한 것을 알라’고 했다는 것이다. 개태사 우주당 한쪽 옆에는 몇 십 년 묵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1970년대에 그 감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 감나무에 엄나무를 접목한 사실도 없고 또한 자라나는 그 부위에 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류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뿌리에서 동시에 자라고 있어 화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국가에서는 천연기념물 제66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륵의 출현을 예언한 엄나무는 1995년 12월 4일 박우당 도전께서 화천하신 얼마 후 죽고 말았다. 감나무의 두 가지 사이에 솟아난 엄나무의 출현은 마지막 밝혀지지 않은 한 분의 출현을 암시한 것이다.
미륵불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구원불로서, 말법시기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하생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중생을 구제하러 오시는 분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오신다고 하여 삼존불(三尊佛)로 모시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미륵삼존불이다. 한편 미륵삼존불 중 첫 번째로 오신 증산은 구천상제로 밝혀졌고, 두 번째로 오신 정산은 옥황상제로 밝혀졌다. 즉 두 분은 정작 석가모니가 예언하고 진표가 친견했다는 미륵(彌勒)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미륵 출현의 비밀이 바로 이곳 개태사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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