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5주일(6.25민족화해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6월 23일(주일)
열왕기상 14:15-28
“통일이 따뜻한 솜이불처럼 오기를!”
지금 예수님이 한반도에 오시면 뭐라 하실까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이런 말씀을 남겼지요.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표준새번역)
여기서 ‘평화'는 헬라어로 ’에이레네‘(εἰρήνη)입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결합하다’는 뜻의 ‘에이로’(εἵρω)에서 나온 단어로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다시 하나가 되다’는 뜻이지요.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완전, 건강함, 행복, 번영, 고요, 안전’이란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단순히 서로가 평화로운 관계나 평화를 유지하려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평화 그 자체를 뜻해요. 온전한 상태의 평화를 말하지요. 곧 결합이 되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에이레네(εἰρήνη)”, 평안 헬라어 원어 해석:김준남 목사), 늘푸른하늘이다)
예수님이 분단된 이 땅 한반도에 오시면 요한복음에서 그랬듯이 온전한 상태의 평화를 말씀하지 않을까요? 곧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가 둘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그 평화 말입니다.
그 평화는 힘으로 이루는 평화가 아닙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남과 북이 이룬 자주적 평화입니다. 이것은 강대국이 둘러싼 현 국제정세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지요.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하여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던 거예요.
내일모레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4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은 미∙소∙중과 남북한 지도자의 오판이 빚은 전쟁이지요. 이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자 동서 냉전을 더욱 심화시킨 사건입니다.
평소 전쟁을 통한 통일을 꿈꾸어온 북한의 김일성은 각각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뚱(1949/1950년 봄)을 만나 전쟁지원과 동의를 약속받아 남침을 감행하지요. 김일성의 자신감은 남한의 남로당 잔여 세력 20만여 명의 봉기로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한 달 안에 남해안까지 진격해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어요. 그러나 미군의 개입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의 예상은 빗나가지요.
그러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뚱의 판단은 어땠을까요?
우선 스탈린은 미 국무장관 에치슨의 선언(일본-오키나와-필리핀 방어선/불후퇴방어선/*이 방어선에 남한 제외함)으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여겼지요. 스탈린은 신생국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뚱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의 정세가 공산주의 국가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 여긴 거예요. 그리고 북한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면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을 거라 보았어요. 만일 전쟁에서 북한이 불리할 경우 중국의 군대를 지원하겠다는 속셈이었지요. 그러나 미군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스탈린의 판단은 여지없이 빗나갑니다.
그리고 이제 막 중국을 통일한 신생 국가인 중국의 마오쩌뚱은 당시 여러 면에서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그러니 마오쩌뚱은 스탈린의 눈치를 살피게 된 거지요. 그는 전쟁에 동의했기에 50년 10월 북한에 26만 명의 군대를 보냅니다. 마오쩌뚱의 예상 역시 오판이 되고 말았지요.
마지막으로 미국은 당시 북한에서 소련군의 철수로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시킵니다. 북한의 남침을 간과한 탓도 있지요. 미국은 남한의 군사원조보다는 경제원조에만 신경 썼어요. 더욱이 미 국무장관 애치슨선언이 오히려 소련과 북한을 자극한 꼴이 되고 말았어요. 이 기회를 틈타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전면 남침을 단행한 거예요. 이 또한 미군의 오판이에요.
이에 남한의 이승만은 미국의 군사 지원을 요청하며 심심하면 ‘북진통일’이란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요.-(“오판이 부른 한국전쟁…비극 되풀이 말아야” [박찬승 칼럼], 한겨레, 2024. 06. 20)
이승만은 “한국은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참을 수없는 분단상태는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1949. 11. 3/무초와의 대담)고 분명히 했어요.
또한 그는 북진을 위해 필요한 비행기, 군함, 탱크 등 중무기를 공급해 달라고 미국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지요? 당시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지 못하면서 북진통일이라고 외치는 이승만은 단단히 오판한 거예요.-([한국전쟁사의 쟁점], 『해방전후사의 인식6』, 박명림 외 지음, 한길사, P.178)
사실, 한국전쟁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왔습니다.
한국전쟁의 사상자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많았을 겁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한국군은 사상자가 58만여 명(사망자/13만여 명, 부상자 45만여 명), 북한군은 52만여 명, 유엔군은 13만여 명(사망자/3만여 명, 부상자 10만여 명), 중국군은 33만여 명(사망자/13만여 명, 부상자 20만여 명) 등입니다. 더욱이 민간인 피해가 컸습니다. 남북한 민간인의 사망자가 64만여 명(남한/24만, 학살민간인/12만여 명-북한/28만여 명)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위의 한겨레 칼럼)
특히 주목해 볼 대목은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이라는 ‘민간인 학살’ 중에서 ‘보도연맹사건’이 있었습니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 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예요. 하여 정부는 보도 연맹원을 ‘요시찰대상자’로 분류했지요. 전쟁이 나자 정부는 국가 위기와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을 학살했지요. 이 사건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에요.-(“한국전쟁”, 『세계사 속의 한국근현대사』,박찬승 외 지음, 경인문화사, P.372)
그렇습니다. 전쟁은 더 이상 있어서도 안 되고 아니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미국의 역사학자 부르스 커밍스가 한 말이 큰 울림을 줍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이 북한의 두 가지 요구, 곧 최종적인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라는 요구에 응한다면 핵 위기는 빠르게 끝날 것으로 믿는다.”-『부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부르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현실문화, P.13)
그러니 한반도에서 전쟁은 남북한의 공멸을 의미해요.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남북한이 하나 되는 통일로 가야겠지요. 말하자면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 곧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이레네’를 이루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 평화와 통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평화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스 왕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사 7:9)
그렇습니다.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 곧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선물과 같은 거예요. 믿음은 실제 생활 속에서 행동하고 살아내는 삶의 변화를 말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니 마음에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던 거예요(요 14:27). 이게 하나님을 보여주신 예수를 믿는 믿음인 거예요.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징조를 통해 태어날 아이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아하스와 유다가 경험하게 될 거라고 예언합니다(사 7:14~17). 곧 두 왕국(아람과 에브라임)의 쇠퇴를 볼 것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을 선포해요. 마침내 하나님은 아시리아를 통해 아람과 에브라임을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사 7:4) 일렀던 거예요. 그러니 르신과 베가의 동맹군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다리라고 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싸우는 겁니다.
말하자면 믿음의 무기로 한미일 연합 군사 훈련에 저항하며 행동할 때 한반도의 평화는 세대가 지남에 따라 온전히 우리 곁에 성큼 찾아올 거예요. 왜냐하면 이 땅 한반도에 평화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을 두려워하거나 겁낼 필요가 없어요. 전쟁을 일삼는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전쟁 위기가 고조될수록 믿음은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가시기 때문이지요. 삶이 힘들수록 사람과 물질에 의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물질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해요. 전쟁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지점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유다 왕 아하스처럼 하나님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사 7:13).
사실, 지금 한반도는 전쟁이 멈춘 것이지 아직 끝난 게 아녜요.
정전협정(停戰協定/53. 7. 27)이 체결된 지 70년이 넘었거든요. 정전협정이 종전협정으로, 평화협정으로 체결되어야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한반도는 준전시 상황에 놓여 있는 거예요. 게다가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은 유다 왕 아하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은 당시 남북으로 분단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을 말해줍니다. 당시 아람과 에브라임은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어 남 유다가 동참하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거부합니다. 그러자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군은 유다를 침공해요. 이 전쟁은 분단 200년 동안 이어진 남과 북의 마지막 전쟁입니다(B.C 732년).
아하스와 유다는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아하스와 유다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불어닥친 전쟁 위기로 아하스와 유다 백성의 마음이 마치 바람 앞에 수풀이 흔들리듯 떨었다고 했어요(2절). 왕은 전쟁의 공포에 질려버린 거예요. 이에 아하스는 아시리아 왕(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해요(왕하 16:7~8). 그런 아하스에게 이사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촉구하지요.
사실, 유다는 두 왕국의 침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어요. 오히려 이사야는 아하스를 만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4절) 일러주었거든요.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어요.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는 타다가 만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타다 만 부지깽이의 연기는 금방 꺼져버리지요. 하지만 그 부지깽이를 자칫 잘못 다루면 혹시라도 바람에 불이 되살아나 큰 불행을 당할 수 있지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거기서 나왔을까요?
어쨌든 현실은 두 동맹국의 침공이 유다 백성을 공포에 몰아놓기에 충분했어요.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하여 그는 아하스를 향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던 거예요.
예언자는 보이는 것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상황에도 예언자는 다른 것을 봅니다. 거기에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이지요. 이사야는 보이는 현실을 다르게 보는 믿음이 있었고, 그에 따라 다르게 행동했어요.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게 아녜요. 믿음은 그 사람의 세계관과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전쟁 위기에서 나라를 굳게 지키는 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거라고 봤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개인적인 믿음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이사야의 말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개인적인 믿음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이사야는 아하스를 향해 다음과 같이 권면해요.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을 강조하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강조한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이 더욱 견고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실제로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거지요.
남북 왕조 시대의 예언자들은 남북을 넘나들면서 각 정권의 이념에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들은 분단된 남북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았어요. 특히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믿고 예언했지요.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자도 하나님만 믿고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거예요. 남 유다 출신 아모스 예언자가 대표적이에요.
이사야가 아하스를 향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4절) 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과 맥락이 같은 거예요.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아하스 당신이 정치적 힘과 군사적 계획을 믿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맡겨 두시오.”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라는 거예요. 전쟁 위기에 내몰린 아하스가 이사야에게 요구받은 과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어요.
하여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10절) 하는 말씀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아하스의 신뢰를 견고히 하기 위해 제시된 겁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12절) 그래요. 아하스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징조를 구하지 않았어요. 거절한 거예요. 그는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듯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대답해요. 겉으로 보기에 아하스가 경건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긴박한 현실을 외면한 거예요.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도우시겠다는 약속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부한 겁니다.-(“임마누엘”, 『이사야 특강』,김근주 지음, 한국기독학생회출판사, P.189)
아하스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신뢰하기보다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강대국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열왕기 하 16장 7절을 보면 아하스가 아시리아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얼마나 비굴하게 굴종했는지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나는 임금님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셔서 나를 공격하고 있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표준새번역)
아하스는 아시리아와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한 채 비굴하게 나라를 송두리째 바친 거예요.-(“이사야-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하면”, 『왕국시대예언자』,김경호 지음, 대장간, P.216)
이런 아하스의 비굴한 행동이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괴롭히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이사야는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다윗의 집‘을 언급해요. 이는 아하스 한 사람이 아니라 다윗 왕가 전체를 향한 약속이자 책망이요 심판 선포예요.
그래서 14절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서 ’보라‘로 옮긴 히브리어 ’힌네‘(הִנֵּה)는 곧 다가올 미래를 가리켜요. 곧 ’보라‘란 감탄사는 ’낳을 것이요‘를 강조한 거예요. 그리고 ’처녀‘로 번역한 히브리어 ’알마‘(עלמה)는 단지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기보다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성숙한 젊은 여인으로 보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문의 초점은 이 여인이 처녀인가 젊은 여인인가에 있지 않아요. 다만 알마가 ’처녀‘인지 여부가 문제 된 건 마태복음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 공동체, 곧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사야 예언(사 7:14)을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이가 처녀를 통해 탄생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를 통해 탄생할 것으로 이해한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를 낳는 여인의 정체성에 방점이 찍힌 건 아닙니다. 신약의 말씀 이해로 구약을 이해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서는 아이의 성장과 연관된 시간이 ’징조‘라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사야 예언의 초점은 태어난 아이가 누군지, 아이를 낳을 어머니가 누군지 보다는 아이의 출생과 성장에 걸리는 시간에 있습니다. 앞에서 본 ’보라‘란 감탄사가 말해주듯 15~16절의 의미는 가까운 미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어요. 가까운 미래는 때를 가리키는 데, 어쩌면 아이들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나이는 어림잡아도 20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아이가 우유와 꿀을 먹고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 가까운 미래에 두 왕국, 곧 아람과 에브라임은 패망할 거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나라가 견고해질 거라고 선포했어요. 그런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징조를 아하스는 거부했잖아요. 그런 아하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임마누엘 징조를 통해 아람과 에브라임의 패망이 임박해 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태어날 아이가 임마누엘이라 불릴 텐데 아이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유대를 침공한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군은 패배를 곧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하스와 유다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거예요. 이게 이사야 예언의 초점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본래 희망이었지만 아하스의 불신앙 탓에 시리아와 에브라임 두 왕국에 불어닥친 재앙이 유다에도 임하게 되지요(17절). 사실, 아시리아의 침략은 두 왕국을 벌한 하나님의 도구였지만 유다 역시 심판받게 된 거예요. 아하스의 요청으로 아시리아는 유다를 점령하고 유다는 아시리아의 식민지가 되어요.
그렇습니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동맹군과 유다의 마지막 전쟁은 결국 남는 거라곤 패망뿐입니다(B.C 732년). 하나님의 신뢰를 거부한 아하스의 불신 탓으로 유다 역시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 거예요.
그래요. 전쟁의 비극과 참상(慘狀)은 74년 전 한국전쟁으로 끝나야 합니다. 더 이상 한반도에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은 있어서도 안 될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보듯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를 거부한 아하스와 유다 왕국이 어떻게 되었나요?
그렇습니다. 결국 그로부터 140여 년 뒤 남 유다는 멸망하고 맙니다(B.C 587년). 오늘 21세기 한반도에 전쟁이 고조되고 있는 현 정세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74년 전 한국전쟁의 교훈을 반면교사(反面敎師)보다는 정면교사(正面敎師)로 삼읍시다. 정면교사는 내가 본이 되어 배운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무엇인지 아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전쟁 연습에 반대하고 힘에 의한 평화에 침묵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적극 저항해야지요. 이 땅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를 심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자주적으로 평화의 행동에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다고 비굴하게 강대국에 의존하거나 동맹을 맺는 일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부했던 아하스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굳게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곧 평화의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행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이선관 시인의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는 시가 있습니다.
여보야 // 이불 같이 덮자 // 춥다 //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 따뜻한 솜이불처럼 // 왔으면 좋겠다
분단된 지 79년, 한국전쟁 74년, 분단이 언제까지일지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언제 체결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노래처럼 가까운 미래에 평화통일이 ’따뜻한 솜이불처럼‘ 그렇게 오기를 꿈꿉시다. 정말 그리 멀지 않은 날에 반가운 손님처럼 평화통일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기도 /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 땅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찾아올 수 있도록 행동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한국전쟁의 교훈을 정면교사로 삼아 내가 먼저 평화를 말하고 통일의 길로 달려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분단 79년!
한국전쟁 74년!
정전 협정 71년!
평화 협정은 언제 체결될까?
평화 통일은 언제 찾아올까?
아~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가 먼저 평화 행동으로!
통일을 꿈꾸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