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으’ `솨아’….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청명한 울림이 적막한 소쇄원을 쓸어내려 간다. 이 소리다. 바람소리에 따라 마음이 차분해진다. 시원스레 뻗친 메타세쿼이아가 일렬로 서있는 길을 가고 싶었다. 광주호가 보고 싶었다.
125번 버스를 탔던 이유다.
버스가 좀체 오지 않는다. 기다린 지 벌써 40여 분. 알아두시라. 125번은 시외로 운행하는 버스라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는 것을. 배차간격이 무려 70분 간격이다. 그나마 운행시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대인광장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어느새 여름을 닮은 햇살이 따갑다. 쓰레기통은 `깨끗한 거리’를 위한다는 구호가 머쓱해질 정도로 지저분하다. 정류장 옆 오락실에서 요란한 전자음 속에 철권의 “YOU WIN” 소리만 들린다. 빌딩군 층층이 켜진 사무실 형광등에 잠시 아찔해진다. 빌딩들은 규격화된 틀 속에, 반복적인 일상을 담아가며 그렇게 도시 속에 놓여있다.
발장난이 지루해질 때쯤 버스가 나타난다. 일반 시내버스와 달리 체형이 작다. 대형이 아니라 중형인 125번은 제 시간에 정류장에 멈춘다. 수창초교 후문으로 방향을 틀던 버스 차창 너머로 화단 사이에 자리한 (구)시외버스터미널을 가리키는 5·18사적지가 옹색하게 보인다.
광주역을 지나 서방시장에 이르자 꽁꽁 동여맨 보따리를 짊어맨 어르신들이 버스에 오른다.
그늘을 만들 정류장이 없어 다들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다. 길가에 자리잡고 나물거리를 팔려는 할머니가 파리를 내쫓고 있다. 가격을 물어보는 이도 없다. 말바우시장을 거쳐 농산물공판장을 빠져나가는 버스가 조심스레 속력을 낸다.
담양으로 들어선 버스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길을 따라 조심스레 코너를 돌다 광주호에서 잠시 속력을 줄인다. 차창 너머 보이는 광주호의 은빛 물결에 눈이 부신다. 저만치 가사문학관이 보인다. 소쇄원이 가까워진다.
늦봄의 소쇄원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을 제외하곤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다. 네살박이 동생의 손을 잡고 문을 빼꼼히 열어보이며 큰 눈을 굴리던 `어린’ 객(客)은 소쇄원 밖 경운기를 보곤 같은 표정을 짓는다. 자동차에만 익숙하던 아이들에게 1530년에 지어졌다는 소쇄원이나 경운기는 동일한 호기심의 대상인가 보다.
소쇄원은 조선시대 정암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돼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의 제자 양산보(1503∼1557)가 만든 원림(園林)이다.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 만든 공간.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 내원을 감싸는 담장 그리고 온갖 나무들과 시원스런 계곡물로 조성되었다.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은 주인을 위한 집이며, 광풍각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의미가 있는,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다.
주인 양산보와 이종사촌인 송순을 비롯, 사돈간인 김인후와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송시열, 이후백, 송인수, 유희춘 그리고 이웃 환벽당 주인이던 김윤제 등 풍류객들이 드나들었던 소쇄원.
“차분히도 속세를 벗어난 마음으로/ 소요하며 섬돌 위를 구애 없이 걷네/ 노래할 땐 갖가지 생각들 한가해지고/ 읊고 나면 또 희로애락의 속정 잊혀지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중 한대목을 되뇌어 본다.
고즈넉한 소쇄원을 뒤로하며 돌아선 발걸음에 아스팔트만 깔린 소쇄원 주차장이 아쉬움을 남긴다.
정현주 기자 ibox@gjdream.com
"내 맘까지 너그러워지는 길"
-125번 기사 이영수씨
“125번 운전한 지 이제 일년째가 되네요. 아침 출퇴근 시간에 승객들이 많고, 장 서는 날에 버스가 바빠지죠. 그래도 시내버스처럼은 아니죠.”
새벽 4시30분 집에서 나와 첫차를 운전하는 이영수(53) 기사. 집에 가면 밤 11시를 훌쩍 넘는 고된 하루 일정에도 125번 운행을 고집한 이유로 그는 `여유’를 든다.
“광주댐에서 소쇄원까지 가는 길을 달리다 보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너그러워져요. 빡빡하고 밀리는 시내 도로를 달릴 때와 다르죠. 특히 어스름한 시간에 운전할 때면 드라이브 기분도 납니다. 껄껄.”
그는 “하루에 운행횟수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특히 나이드신 분들이 담양에서 광주 나갈 때 타는 버스라 행여 속 태우며 기다리지 않도록 그 점을 신경써야 되죠”라고 말한다.
운행노선=대인광장→수창초교 후문→문병원→현대백화쥘광주역→순복음교회→시청→계림사거리→서방시장→동신고→말바우시장→우산소방파출소→동광주병원→동광주 진입로→농산물공판장→문흥지구 입구→도동고개→도선사→ 망향동산→변전소→장등→용호→공원묘지 입구→보촌삼거리→보촌2구→보촌1구→해평리→고서사거리→성산→도촌→광산→고흥리→잣정→학선입구 →학선→지곡1구→지곡2구→광주호→소쇄원→충의교육원 입구→반석→연천
운행시간=오전6:10/7:10/8:20/9:20/10:30/11:30/오후12:40/1:40/2:50/3:50/5:00/6:00/7:10/8:1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