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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自傳的) 편력(偏歷) 60년 -나의 삶 나의 예술 장윤우
양천문인협회 의뢰받아서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보완하였다,
한하운 문학상 위원회 사무국장이라는 시인이 전화로 내게 묻는다, 현대 문학지를 살피다가 1964년도에 실린 시<청량리에서>를 읽었는데 나의 작품이 맞느냐는 거였다, 본인이 맞는다고 대답하면서도 쑥스러웠다, 벌써 그런 세월이 흘러갔는가! 50년이 훨씬 넘어가는데도 무얼 남기고 있는가! 불현듯 과거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각설(却說), 27세의 노총각, 볼품없는 자칭 보헤미안은 이날도 예외 없이 술에 절은 채 도회의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디에 싸구려 선술집이 없는가, 술친구들이 있을만한 곳이 어디일까. 사나이의 고독과 빈 가슴을 채워줄 거리의 여인이라도 어디 없을까-.
1960년대 초, 서울의 겨울은 그렇게 맵고 추웠다. 회색의 도시에, 골목과 거리에 땅거미가 내리면 나(장윤우) 총각 선생은 온몸이 군실거리고 마치 신이라도 들린 걸신처럼 명동(明洞) 거리로 서울 종로 무교동 낙지골목으로 발걸음은 주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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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컬어 무관(無冠)의 제왕인 시인으로 등단하고만 싶었다. 밥벌이 줄로 매달린 미술 선생으로도 자리를 굳게 잡고 싶었다, 한때 남대문시장 최고 상인이셨던 부친의 가업 부도(不渡)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과 다시 합쳐 단란한 가정을 일구고 장가도 들고 싶었다. 안정을 갈구하였다.
명동에는 지금 증권회사들 자리 뒷골목에 동방 살롱이 자릴 잡고 부근에<은성銀星>이란 대폿집이 있었다. 다방 <갈채>와 <靑銅> 음악 감상실<돌체>도 지하에 있어 많은 문학청년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 된다.
댓 평이나 돨까, <은성> 선술집을 들어서면 예외 없는 신사 소설가 이봉구(李鳳九) 씨가 이른바 '명동백작'으로 이미 취해 고개를 떨구고 여주인(연예인 최불암의 모친)은 표정 없이 서너 덧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거의 돈 없는 백수 예술인들이 목소리만 높았다. 늘 그렇게... 변화가 없는 그러나 밑으로 깔리는 진한 정감이 오가는 탁주 집에서 젊음을 불태워가는 너나없이 어렵게 살던 명동 시절이었다.
그 무렵 마산에서 올라온 이제하(李祭夏), 제주에서 온 김종원(金鐘元), 충북 영동의 구석봉, 목포에서 정규남, 광주에서 박봉우(朴鳳宇), 윤삼하, 목포의 권일송 등과 서울내기 장윤우, 유경환, 손기상 등은 쉽사리 어울려 나갔다. 남침전쟁 휴전 이후의 아픔과 가난을 씻어내며... 동족끼리의 相殘(상잔)은 비극이었다. 후유증은 너무 깊은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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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4후퇴 이후 피난지 항도 여수와 부산에서 서울로 수복한 나는 모교 서울 고등학교 문예반에 들었다. 문호를 꿈꾸고 있으나 당시 문학을 하면 춥고 배고프다는 인식이 팽배했기에 은사인 황순원, 안병욱, 김광섭, 조병화 스승께 상의를 하였다. 문학과 미술은 다른 게 아니고 능히 성공할 수도 있다고 말을 따라 서울대학교 미술대에 응용미술과를 지망하였다. 4년 재학 중에 군에 자원입대하고 3년 복무로 제대한 후 1961년 말에 복학하여 이듬해 2월에 미술과 졸업장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1962년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신설동 네거리부근 대광 중학에 미술 선생으로 추천을 받았으며 둥지를 틀었다. 제자 가운데는 마광수(작고 연세대 교수), 장소현(LA 거주)도 끼였다.
서울고 시절 동인 활동에 이화 여고, 박숙희, 진명 여고 홍애자, 경복고 송명호 고교생들이 <정촌鼎村>이란 동인 책을 몇 번에 걸쳐 냈다. 또한 <4인 부락>이라는 시집을 김규동, 조병화 시인의 격려사를 얹어 발간한 게 큰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중․고생들의 유일한 광장 <학원>잡지 학원 문단에 <길>, <선線>등을 실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지금껏 활동하는 이들과의 교우도 지속된다.
미술대학생으로서 4.19혁명을 겪고 입대한 이후에 5.16혁명을 만난다. 두 번의 4.19.와 5,16혁명 와중에 집안도 가세가 기울고 4남매의 장남이자 집안 장손(長孫)인 나의 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깊은 밤, 풀숲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하느님, 이대로 저를 버리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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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과 방황 가운데 술과 담배, 술집 방랑, 여인, 끝도 없는 터널은 드디어 1963년 1월 1일 끝이 났다. 광명한 천지로 나왔으니 서울신문사 신춘문예 詩 당선이란 영광을 떠안게 된 것이다. 서울신문에 응모작<겨울 동양화>와 <전설을 고발한 者>가 당선통지를 받았다. 서정주, 박남수 심사위원의 배려였다,
배를 곯치 않은 사람, 몇 날 몇 밤을 지새우며 울어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성취의 기쁨을 모른다. 난방이 꺼진 신설동 대광 중(大光中) 3층 텅 빈 미술실에서 받은 당선 통지!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이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存)인 오로지 나뿐이었다. 이제 나보다 먼저 데뷔한 친구들에게도 면목이 서고 당당한 시인으로서 남들의 주시 가운데 활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계기가 마련됨으로 훗날 가족들도 한데 모으고 늦장가도 32살에 가게 된다. 허나 혼자만의 객기였지 문인=가난이란 等式(등식)은 당시 현실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1965년도부터 평소 꿈을 차분히 실행에 옮겨갔다. 이른바 장윤우의 전국을 순화하는 자작 시화전(自作詩畵展)---
역마살이 끼인 나인지라 1회전을 서울 중앙 공보관에서 기진 후에 인천, 송도, 안양, 대전, 대구, 부산, 마산, 전주, 공주, 청주, 광주, 목포,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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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삼천포, 제주, 서귀포, 충주, 춘천, 속초, 강릉, 서귀포, 제주에까지 해마다 나아가 현해탄을 건너 동경 주일(駐日) 공보관(1972,1973)으로 연거푸 진출하여 전시하였다. 정식으로 데뷔한 미술가이며 당선 작가이기에 가능하고 좋은 평가도 얻었다. 전시장에 찾아온 미술대 입학 동기 이우환(미술 설치가, 평론)도 邂逅(해후) 하였다,
동경 전 전시 작품들은 재일 한국학교에 기증하였다. 우리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얼, 시정신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1965년간 첫 시집 <겨울 동양화>을 가지고 갔다.
"장윤우? 자작 시화전 많이 연 시인"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사람" 힐난과 격려의 와중에도 순회를 마쳤다. 연 100여 회를 가졌다.
시와 미술의 교감으로 1976년도에서 연재하기 시작한 <화실 주변>은 10년 동안 장안의 인기를 모우며 <現代詩學> 지에 매월 45매 씩 한호도 거르지 않고 100회를 마쳤다 고인인 전봉건 주간과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장윤우 옆에선 입조심하라구. 금시 잡지에 나올 꺼야." 신동한의 주석(酒席) 만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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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과 화단의 이면사는 훗날 크나큰 자료가 될 것이다. 인근 장흥의 신세계 공원묘지. 망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전봉건 시인은 잠들어 있다 그 옆자리에 나도 언젠가는 묻히리라고 묘지 한 자락을 마련하였다. 찾을 때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이며, 생자필멸(生者必滅) 임을 느끼게 한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인데 왜 헐뜯고 싸우는가, 이합집산(離合集散) 하며 왜 과욕을 부리는가.
스스로 위치를 갖기 위하여 1963년 각 일간신문에 당선된 젊은 신인들로 계간 동인 시지 <新春詩>를 자비를 모아서 펴내기 시작하였다. 19집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동인들은 강인섭(동아일보 기자, 국회의원), 권일송(작고) 윤삼하(작고), 황명(문협 이사장, 작고), 박봉우(작고), 박이도(경희대 교수) 신세훈(문협 이사장), 이근배, 김원호, 박응석, 박태문(작고), 신명석(작고), 이가림(작고, 교수) 조태일(작고), 장윤우(교수), 윤후명 등이 번갈아 맡아서 편집, 출판을 해냈다. 그 무렵은 종로 뒷골목 <복지> 광화문 조선일보 옆 <아리스> <월계수> <전원> <태을> 다방에 문인들이 진을 쳤다.
"60년대 사화집" "돌과 사랑" "현대시" "여류시"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1965년 첫 시집 <겨울 동양화>를 펴내고 이어서 2시집 <續. 겨울 동양화> 3시집 <그 겨울 전차의 砲身이 느린 그림자> 4시집 <시인과 기계> 5시집 <그림자들의 무도회> 6시집 <誤字인생> 7시집 <화가, 슬픈 城主의 손> 8시집 <세 번의 鐘> 9시집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10시집 <두 사람의 풍경과 리삼월>, <형해(形骸)의 삶>, <뚜벅이 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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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여자>,모두 13권을 상재하였다. 그 외에 수필집 <화실주변>과 <그림과 시의 팡세>,<장윤우 예술시 평집>, 번역서<인간 박물관-A.Rodin의 일생> 몇 권의 대학교재와 전국중학교 검정 미술교과서 중1. 2. 3권도 펴냈다. 인세도 적잖게 받아냈다,
우여곡절의 인생 도정 속에 여한(餘恨)이 없다고나 할까. 나무가 좋아서 내 스스로 지은 아호(雅號)도 "목훈"이다.
木은 청록파 3인중 박목월의 목(木)이며 薰은 조지훈의 훈(薰)에서 따온 것이니 신춘문예 투고 할 무렵 본명을 꺼려 급조한 호로서 평생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나무의 향기를 사랑하는 나의 뜻이다.
서울 대학로에 문화예술진흥원(1997.11.14-19)에서 열린 환갑 기념 <장윤우 금속 전> 주제가 바로 잘린 나무였잖은가! 60그루의 중대형 금속나무들은 내 곁에 거의 지금도 있다,
98년도 서울시 문화상 수상의 기쁨도 안았다. 아울러 미술 분야에도 손발을 맞춰서 국전, 민간교류전을 가지면서 해를 거듭하니 국제적인 교류로 넓혀갔다, 이미 1972년도 7월에 일본 동경 아까사까미스께 번화가 뉴 재판 호텔 내 주일 공보관에서 개인 시화전을 가졌고, 다음 해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서도 같은 공보관에서 시 공예전을 가졌다,
해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며 무려 36개국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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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국(하와이 포함), 멕시코, 중국, 몽골, 대만, 홍콩, 마카우,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호주, 뉴질랜드, 인도, 네팔, 이집트, 터키, 이스라엘. 요르단,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러시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 독일, 카타르, 폴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36개국 등지에 거의 우리 태극기를 심어놓았다,
한국 창작미술협회 회장으로서 미술인들을 앞장세워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지역들을 찾아가 교류행사를 가져왔다. 현재도 한편으로는 미술교류를 놓지 않고 실시하는 중이다,
나무를 사랑하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무와 같다. 나는 산을 좋아하고 매주 산에 오른다. 산에 오르면 잡념과 두통이 사라진다. 맑은 공기와 탁 트인 시계(視界)에 호연지기(好然之氣)가 넘쳐난다. 20여 년 전에 모인 "한국문인 산악회"에 3대 회장을 맡았고 지금 고문으로 문덕수, 함동선, 이명재, 한승욱 서울문학 발행인도 함께 근교 산악을 오른다. 산을 소재로 작품도 꽤 썼다.
1988년 10월 창립한 문인 산악회는 每週(매주) 산행을 거르지 않고 무려 1500회 이상 올랐으며 국내외 산행, 시화전, 문학상 시상, 봉사활동도 가져왔다, 1999년 <산문학>지도 창간하여 3집까지 발행하여왔다. 죽는 날까지 산을 놓치지 않으련다. 다음 홈페이지에 문인 산악회 카페도 운영 중이다. http://cafe.daum.net/muninsan 누구든지 방문과 동행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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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로 잃어버린 청춘, 건강은 산과 나무의 향(木薰)으로 씻어내고 여유를 찾겠다. 모든 걸 비우는 게 새롭게 채우는 것임을 이순(耳順)을 넘어 팔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터득한다.
1968년 1월 28일자 서울신문 강희근 시인(현 한국문협 부이사장, 경상 대학장)의 내 (싸인, 명(銘)인 시 일부를 인용한다.
Yoon Woo 장의 사슴 한 마리 거미 채 같은 나무 아래 물을 마신다 나는 서울신문사 앞 벽보판을 보고 지내며 65년의 눈얼음을 뚫는 電文의 꽃봉투를 또 한 겹 벗기며 Yoon Woo 장의 線을 Yoon Woo 장의 베레모를 거미 채에 비끌어 맨다. 새는 그의 물감을 마시며 목사(牧師) 대리 전도사의 시를 눈밭 교회당 함석지붕을 붓대처럼 서 있는 소나무 한 가지를 더듬고 내리는 눈 발, 그것 Yoon Woo 장은 육성의 얼굴,
그 외 죽은 김영태 시우의 시<내 친구 장윤우가 그린 나무들은> 거리에 누드로 서 있다,
베르나르 뷔페의 裸木(나목) 같다던 詩作(시작) 모습이 떠오른다. 모두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다. 가슴 깊은 곳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황량한 벌판에 문학만이 구원이고 이 시대의 아픔을 같이하는 "시인 공화국"이어야 한다고 부르짖지마는 문인이기에 참고 안빈낙도(安貧樂道)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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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의 역정 속에 1992-3년에 걸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체류하였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교환교수로 있는 동안 재미 한국 작가들과도 고향을 그리는 진한 추억을 남겼다. 모국 바라보기로 태평양 연안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살고 있는 송상옥, 김문희, 곽상희, 박효근, 문금숙, 이승희, 김영중, 하정아 등과 함께 벤츄라 해변 문학제에도 참석하고 시 낭송, 시화전, 방송 출연도 가졌다. 동인지 <외지>,<크리스챤 문학>등에 표지화도 계속 그려주었다. 훗날 권순창, 류장균, 전달문 시인이 타계함은 매우 애석하다. 돌이켜보면 내게 도움을 준 작가들이 많다.
또한 내 글에 의미를 주신 평자들을 어찌 잊겠는가.
고독의 목소리-- 이상섭(연세대 교수) 언어와 사색의 원체험--권일송(작고 시인) 다채로운 소재, 섬세한 감수성--이영걸(외대 학장) 문명사적 의식과 남성적 톤--오세영(서울대 교수) 자화상, 꼴라쥬의 미학--박진환(평론가) 영상과 구조 사이의 융합 혹은 분리--방근택(미술평론가), 일상의 일을 시화(詩化)--조윤제(前 고대 교수) 의미를 지워가는 여백의 미학--원형갑(前 한성대 총장) 강한 실험성과 짙은 서정성 -장윤우의 조형--오세권(미학) 균정(均整)의 시인 마카리오 장(張)--황명(前 문협 이사장) 감성 여행과 정신 질감--채수영(평론가, 교수) 로맨틱 리얼리스트의 시--이수화(시인, 문학평론) 금속조형에 담긴 시정--챨스 보만(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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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간 데 없는 감성의 지표--유석우(미술시대 주간, 시인) 시인 의식과 장인 의식의 미학--장윤익(인천대 총장, 문학평론) 자연 파괴의 현실 고발--이재운(미술 연감 발행인) 사람과 예술의 미적 뉘앙스--원영동(시인) 자신을 성찰하는 시적話者(화자)와 폭넓게 바라보는 세계--신광호(문예 비전 주간) 금속과 시의 공존 가능성을 실증--김남수(미술평론가)
김규동, 박양균, 허영자, 한영옥, 윤삼하, 함동선, 최만린, 김인환, 윤강로, 한광구, 김주연, 조병무, 오양호, 신동한, 이명재 제씨가 시평, 호평을 게재해주어 큰 힘이 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일제(日帝) 치하에서 1937년 서울 영천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겪고 1945년 8.15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의 남침인 6.25사변이 터졌다. 전쟁 사흘 만에 함락된 서울시였다, 이후 3년여에 걸친 전쟁의 慘禍(참화)로 피난지 부산과 항도 여수 바닷가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홀로 문학의 꿈을 키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서울--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 폐허 속에서 문학과 미술의 꿈을 키우고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4.19 혁명을 겪고 다시 5.16 군사혁명을 맞게 된다. 유신정권이 銃聲(총성)으로 막을 내리면서 12.12사태 이후 전두환 시대, 김영삼의 신 한국 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시대로 우리는 세계사에 유래 없는 혼선과 현상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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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바 '서울내기'별명을 듣고 산다.
서울 영천 전차 종점 부근에서 태어나서(1937,12,1) 금화 초등학교ㅡ서대문 국민학교로 이어서 졸업하고(1950) 그해 서울 중학교에 입학하여 서울 고등학교를 졸업(195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재학중에 입대하여 서울 국회연락장교단이 있는 세종로에서 근무하고 복학하여 1962년에 서울대졸업, 같은 대학원 미술교육석사(1965)를 받은 이후 성신여자대학교 미술교수로 부임(1970)하여 2013년까지 40년여를 근무하여 현재 명예교수로 서울시에서만 살아가는 중이다.
문학예술과 사회, 정치가 무슨 관련이 있나싶지만 그렇게 휘둘려온 얄궂은 운명과 현실을 개탄한다. 격동기에 사는 나와 우리는 종이책에서 전자책(e-Book)시대로 넘어간다. 때문에 요즘 인터넷으로 일기와 글을 쓴다, 현기증 나는 삶의 요철 속에서 잠시 나를 돌아본다.
인생 4幕인 유. 청. 장. 노(幼.靑.壯.老)년 기를 언제 내가 넘었던가!
"나는 누구인가" 예술을 핑계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셔왔던 음주도 요산과다에 당뇨라는 정기검진 결과로 돌아오고 뽐내던 영감(靈感)도 시들어 버렸다. 남들은 아직도 교수에, 시인에, 미술가에, 이사장에, 수상, 표창과 숱한 이력에, 넉넉함을 부러워하기도 하나 누더기처럼 걸쳐져 창피하고 불편하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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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에 참고로 나의 전력을 요약해보면-
일찍 조선일보<일사일언>, 동아일보<청론 탁설>, 서울신문<고임돌>과 부산 국제일보에 청탁 칼럼을 연재하였다, 더불어서 1970년대 현대시학(現代詩學) 지에 10년간, 계간 현대수필, 수필문학, 월간 시지 心象(심상), 순수문학, 한脈(맥)문학, 농민문학지(誌) 주간 한국문학신문 등에도 한동안 연재를 겸하여왔었다.
1993년 5월에 <장윤우 예술시 평집>은 당시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1년 동안 체류하면서 주립대학교와 미주 작가, 지인들에게 제공 목적으로 펴냈으며 20년이나 지금엔 그 이후의 활동과 도정(道程)을 엮어서 내 인생 편력기가 될법하다. 주변에 가깝게 지내던 문우, 화우들과 동료들이 떠나가거나 가는데 나도 얼마나 더 살건 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공수래 공수거의 무소유(無所有)에 임하고 싶다.
*교육자로서-
1968년 경기공업 전문대학 공예과 조교수(박정희 대통령 임명)를 거쳐 성신여자대학교에서 43년간 후학을 양성, 기간(1965~2013) 중에 서울대학교 미술대 및 대학원, 건국대, 경희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상명대, 강원대, 청주대, 원광대, 중앙대, 한양대 등에서 강사활동을 겸함. 1992`93년(1년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대에서 연구교수로 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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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로서-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등. 공공전에서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 (사) 한국미술협회 이사, 부이사장, 감사를 거쳐 현재 상임고문. 용산 전쟁기념관 조형물 설치(육. 해. 공. 해병. 전투경찰, 로툰다 부조 5점), 천안독립기념관에 임시정부 대통령(박은식, 양기탁) 어록비 석조형 설치, 중국 산동성 석도진 법화원에 장보고 기념비, 그 외 다수-.
1965년 국제 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 창립 1회부터 출제 및 심사위원으로 국제대회 입상, 국위선양하다, 1972년 (사) 한국 디자이너 협의회(KDC) 창립하여 이사장(현 고문)으로 연례 회원전, 공모전등 주관 2017,12,4 대한민국미술인 대상 수상 (서울 그랜드힐튼호텔).
*문학인 활동으로-
1963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인으로 당선 이래 20여 권의 시집과 평론집, (사)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부이사장 (2회 연임 당선), <월간문학> 발행인 6년을 거쳐 현 자문위원, 국제 Pen 한국위원회 이사, 감사를 거쳐 현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사회활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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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부 산하 (재)한국공예문화진흥원 이사장을 역임(2000,2~2005), 1998,7,1-민주평화통일 정책자문위원, 기본부터 바로 서야하는 제2 건국추진위원회 위원(양천구 위원장), 감사원 문화, 환경자문 위원, 1997년부터 양천문화원 부원장 14년 재임. 한국 로터리클럽 양천지역 회장. 3640 지구 총재보 겸임 국내외 지역사회봉사, 기부활동으로 표창 받았음.
*저서, 소장에-
중학교 검정미술교과서 중1,중2,중3 (1996, 도서출판 둥지교육) 발행
장윤우 예술시 평집(목훈 발행),공예 재료기법(1995, 목훈 문화사), 도학. 제도(열화당), 시집<겨울 동양화>, <오자 인생>, <그림자 등의 무도회>, <화가, 슬픈 성주의 손>, <그 겨울 전차의 포신이 느린 그림자>, <세 번의 종>, <시인과 기계>, <형해의 삶>, <두개의 풍경과 리삼월>,<종이로 만든 여자>, 등 13권의 시집, 수필집<화실주변>, <장윤우 예술평론집>, 도학과 제도, 공예재료학, 로댕의 일생, 그림과 시의 팡세, 대학 교재등 집필,
-제가 만든 조형 작품 소장처로-
1,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 서울시립미술관, 3, 성신여대박물관, 4, 호암미술관, 5, 독립기념관(천원), 6,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7, 충주호 조각공원, 8, 서울 양천구 분수 조형물, 양천공원 헌장비, 9, 안산 영풍빌딩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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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환경> 동 조형, 10, 서울 고등학교와 홍천 강재구 기념상. 11, 일본 북방 고촌동(東) 요시노 미술관, 12, 중국 산동성 법화원 내(장보고 조형), 외 다수가 국내외로 세워져 있다.
-13, 문인들의 기념비로서-
주요한 시비(서울 세종로 공원), 공초 오상순 시비 (우이동 빨래골), 장수철 노래비(과천 중앙공원), 원영동 시비(강릉), 권일송 시비(전북 순창), 장윤우 시, 조형비(경기도 양동 성서공원) 들도 세워놓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생애(生涯)를 넘나든 "나의 삶과 예술"리포트이다,
못다 한 얘기는 다음으로 덮어두고 가까운 이웃, 목동 지역 문우들과 더불어 여생을 은유자중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프로필// 木熏 장윤우
1963. 1. 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겨울 동양화>당선 저서 : 제1시집 <겨울동양화> 등 13권 서울시 문화상, 현대 시인상 등 수상 현) 성신여대 명예교수 박물관장, 대학원장, 연구소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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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9 “명동백작” , 12-1 "서울내기" -'명동백작' '서울내기' (큰 따옴표를 작은 따옴표로)
4-15 : 공보관에서 갖은 후에 - 공보관에서 가진 후에
4-끝 : 인천. 송도. 안양 5-1 충무. 삼천포. 제주 7-1일본. 미국. 멕시코 (마침표를 쉽표로)
마지막 약력 : 1963,1,1, - 1963.1.1(쉼표를 마침표로)
각각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