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1. 11. 26.~27.(금, 토) - 음력(10. 22.~23.), 일출 07:16~일몰 17:09
●산행지: 영월지맥 3구간 졸업(피재점-각동리)
●산행코스: 피재-피재점-오미재-MTB모노레일-송한재-용두산-681.3m봉-동막고개-모산재-개나리공원묘원도로-다랑고개-뱃재-삭고개/삽고개-38번도로암거-왕박산갈림/시루봉-조을재-문영월재-설매산갈림봉-광산터-가창산-갑산지맥분기점-589.4m봉-삼각점봉(549.5m)-중산재/참나무쟁이재-475m봉-어상천고개-399.5m봉-산불초소봉-무두리고개-477.3m봉-누에머리봉갈림봉-누에머리봉왕복-삼태산-821.1m봉-포장농로-해고개-430.1m봉-497.4m봉-사거리임도-관암당고개-헬기장(490m)-국지산(626.4m)-암봉전망대-조전고개-한재산(606.8m-산불초소봉(563.7m)-흥지개고개-당집-흥교갈림능선-1,023.4m봉-태화산(1,027.5m-전망대봉(1,030.9m)-산성터갈림봉(916.1m)-고씨동굴갈림-620.8m봉-시멘트포장농로-갈림-각동리 중말마을
●먹거리: 생수1.5리터, 호떡빵1, 떡2, 양갱2, 단백질바2, 자유시간2, 사탕10
●준비물: 하계텐트, 동계침낭, 바람막이, 침낭커버, 은박매트2, 스틱, 헤드랜턴, 비니, 버프, 장갑,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스패츠, 팔토시, 말방울, 세라컵, 경광점멸등,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마스크2, 양말, 여분의류, 띠지25
●거리: 약 64.94Km
●소요시간: 34.26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기차15,400, 택시12,100, 민박30,000, 뒤풀10,000, 기차11,400
●날씨: -4~9, 바람불면 추운 날씨
●산행경과 :
* 11. 26.(금)
- 07:27 : 피재/ 피재골
- 07:54 : 피재점(784m)/ 삼면봉(제천시 송학면, 봉양읍 → 모산동)
- 09:02 : 용두산(龍頭山, 870.1m)/ 제천의 진산/ 전망데크
- 10:00 : 동막고개(東幕峙)/ 도화리고개
- 11:02 : 뱃재/ 패재
- 11:29 : 38번국도
- 12:02~18 : 삭고개/ 행동식, 물보충
- 12:56~13:26 : 왕박산시루(527.8m)갈림봉/ 도계(충북 제천시 → 강원 영월군)/ 무인산불감시카메라
- 13:10 : 왕박산(王朴山, 597.5m)/ 도계(충북 제천시 송학면 → 강원 영월군 남면)
- 13:42 : 조을재
- 14:14 : 문영월재
- 14:39 : 설매산갈림봉
- 15:27~35 : 가창산(歌唱山, 818.6m)/ 도계/ 군계
- 16:40 : 삼군시봉(제천시 두학동, 영월군 남면 → 단양군 어상천면)/ 행동식
- 16:05 : 갑산지맥분기점(605m봉)/ 제천시 → 단양군
- 17:58 : 중산재/ 532번지방도
- 18:36~42 : 행동식
- 19:25 : 어상천고개/ 519번지방도
- 20:27 : 무두리고개/ 군도 9호선
- 21:57 : 누에머리봉갈림봉(842.6m)/ 면계(어상천면-영춘면)/ 누에머리봉 100m
- 22:04 : 삼태산(三台山, 864.2m)/ 누에머리봉
- 22:27 : 삼태산(三台山, 875.8m)/ 면계(단양군 어상천면 → 영춘면)/ 전망데크
- 22:53~23:02 : 행동식
- 23:13 : 818m봉/ 삼리봉(영춘면 유암리, 만종리 → 사이곡리)/ 상자봉
- 00:27 : 해고개(日峴, 330m)/ 59번국도
* 11. 27.(토)
- 07:30 : 해고개(日峴, 330m)/ 갈고개/ 59번국도
- 07:40 : 430.1m봉/ 도계/ 삼리봉(단양군 영춘면 사이곡리, 영춘면 유암리 → 영월군 남면 연당리)
- 07:55 : 495m봉/ 도계/ 삼리봉(영월군 남면 연당리, 영춘면 사이곡리 → 남면 조전리)
- 09:32 : 관음당고개(觀音堂峙, 352m)/ 조전리고개
- 10:36~44 : 헬기장/ 행동식
- 11:13 : 국지산(菊芝山, 626.4m)/ 삼리봉(영월군 남면 조전리, 연당리 → 영월읍 흥월리)
- 11:37 : 조전고개/ 문고개
- 12:12 : 한재산(606.8m)/ 달돋이봉/ 삼각점봉
- 12:48~56 : 노란산불감시초소
- 13:03 : 흥지개고개/ 흥교재(휜깃재)/ 나그네 쉼터(정자)
- 14:37 : 태화산 전위봉(1,023.4m)/ 도계, 군읍계, 면계/ 삼리봉(영월읍 흥월리, 영춘면 상리 → 오사리)
- 14:56~06 : 태화산(太華山, 1027.5m)/ 도계, 군계/ 행동식
- 15:24 : 전망봉(1,020.9m)/ 삼리봉(영춘면 오사리, 영월읍 흥월리 → 팔괴리)
- 15:?5 : 삼면봉(영월읍, 단양군 영춘면 → 영월군 김삿갓면)/ 군계/면계
- 15:58 : 태화산성갈림길
- 16:06 : 각동리내림길 이정표/ 고씨동굴갈림길
- 16:53 : 620.8m봉/ 삼각점봉
- 17:31 : 사거리(나무주사 표지판)
- 17:54 : 각동리 중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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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148.2km)
피재-1.3km-피재점-1km-못재/오미재-2.2km-용두산-2.6km-동막고개-2.8km-386m봉-2.4km-배재(38번국도)-2.5km-(삭고개)-527m봉(왕박산갈림봉)-1.6km-567.7m봉-1.4km-(조을재)-설매산갈림봉-2.6km-가창산-3.1km-(갑산지맥분기점)-505.5m봉-2.6km-중산재-1.4km-519번도로-1.9km-무두리고개-2.5km-(누에머리봉)-삼태산-2.7km-해고개(59번국도)-3.9km-관암당고개(조전리입구, 6번도로)-3.3km-국지산-(조전고개)-2.1km-한재산/606.8m봉-1.9km-(흥지고개)-흥교(갈림길)-2.4km-태화산-2.4km-911m봉-(고씨동굴갈림길)-2km-620.8m봉-2.2km-각동마을
* 구간거리
- 피재~해고개 37.4km
- 피재점~삭고개 14.1km
-. 피재~피재점 1.3km
-. 피재점~동막고개 6.2km
- 뱃재~해고개(59번국도) 23.8km
-. 뱃재~삭고개 1.6km
-. 뱃재(38번국도)~가창산 8.1km
-. 가창산~어상천고개(519번도로) 7.1km
-. 뱃재~중산재(532번도로) 12.7km
-. 중산재(532번도로)/ 참나무쟁이재~해고개(59번국도) 11.1km
-. 중산재~어상천고개 2.5km
-. 어상천고개(519번도로)~해고개(59번국도) 8.6km
- 해고개(59번국도)~각동마을(595번도로) 20.2km
-. 해고개(59번국도)~태화산 13.6km
-. 관암당고개(6번군도)~각동리 15.8km
-. 태화산~각동마을 6.6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제천 동막고개/도화리고개: 세명대입구 편의점
- 제천 다랑고개: 금강식당
- 배재: 백제기사식당- 왕박산: 0.7km
- 삭고개: 우측 아래 첫번째 공장 입구 수도
- 무도리임도: 좌측 아래 인가 수도
- 조전1리: 비닐하우스 아래 인가
- 흥교마을: 태화산입구 인가 물보충
- 각동리: 황토민박슈퍼
- 영월시외버스터미널: 033-374-2451
- 영월콜택시: 010-8918-7105
* 서울에서 피재점 가는 길
- 청량리역~제천역 ktx: 06시, 06:50, 07:35, 09시~ 13,100, 01:05h
- 제천~명암리 마을버스:
* 각동리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각동리~영월읍 서부시장: 18:50, 구인사출발 영월행 15번버스(주말4회),10번 버스
- 각동리~영월터미널: 택시 2만원, 0.15h
* 영월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영월터미널: 13:10, 18시, 19:10, 2.20h, 15,900~20,700
- 영월역: 17:44, 20:36, 11,400, 2:04h
* 단양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단양공용버스터미널~동서울: 17:30, 18:30, 14,500, 2.10h
- 단양역~청량리역: 18:36, 19:36, 18,300, 1.19h
* 구인사공용터미널- 구인사~동서울: 16:50, 17:50, 18,000
* 제천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제천고속버스터미널~서울강남터미널: 19:10, 15,00, 1.50h
- 제천역~청량리역: 16:08, 17:27, 18:17, 19:28, 20:01, 21:10, 22:19, 9,200~15,400, 1.03~1.48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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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한 구간이라도 더 갈려고 합니다. 12월 금오지맥, 1월 보현지맥, 2월 호미지맥을 하면 팔공지맥은 날씨가 좀 풀리는 봄에 들어서지 않을까 계획을 잡아 봅니다. 도솔지맥에서 도움을 줬던 춘천의 친구가 독실한 불교신자인데 주말에 영춘 구인사에 들른다면서 저와 일정을 맞춰보자고 하네요.^^ 해고개에서 밤 12시에 만나기로 하고, 배낭에서 텐트와 매트를 덜어냅니다. 물과 양식을 지원받을 수 있으니 그만해도 어딥니까. 시간계획 대로라면 갑산지맥분기점에서부터 야간산행을 하여 삼태산을 넘어야 하네요. 기다리는 친구를 위해 뱃재에서 매식할렸는데 행동식으로 대체해야 할까봅니다.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텐트에서 보내기 어려울것 같아 인근에 민박을 하나 구했답니다. 잘 했다고 하며 다시 배낭에서 침낭마저 덜어냈습니다.
계획대로 영월 졸업하고 올라왔습니다.
해고개에서 15km 떨어진 곳에 민박을 잡아두고 픽업해준 친구가 있어 가능했답니다. 여름텐트와 동계침낭을 가지고 진행했더라면 중산재까지도 어렵지않았을까요? 한번 더 가는 길로 계획을 변경했을 일입니다. 먼저 그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제천까지의 영월지맥은 잡목도 그다지 없는 편이고 순조로웠습니다.
그렇게 순조로울 것만 같았는데 모산재부터 잡목이 나타나고, 낙엽에 쓸려내려가는 급경사가 많았습니다.
기억나는 내리막 세군데,,
갑산지맥분기점 이후 중산재로 가다가 591m봉 내림길, 그리고 상자봉에서 해고개 상유암마을로 내려서는 데에도 급경사 내리막이 있습니다. 주위에 잡을 것도 없는 낙엽 미끄럼틀이더군요. 마지막으로 각동리로 내려서기 전에 안테나봉에서 급경사 내리막입니다.
오름 길은 한밤중에 오른 삼태산...
길도 보이지 않고 깍아지른 급경사라 시간도 많이 지체되고 아주 고생스러웠습니다. ㅋ
조망은 가창산이 거창했습니다. 북으론 영월 쌍용리 굴뚝 뒤로 백덕산까지, 남으론 소백산의 천문대도 보였으니깐요. 가창산에서 바라본 삼태산은 산 자체가 누애모양이더군요. 영월지맥의 마지막 태화산은 산이 웅장하게 컸습니다. 특히 다 내려서서 각동리 중말마을에서 바라보는 태화산이 화면에 꽉 차 보였습니다.
일각에서 영월지맥을 섬강지맥이니 제천지맥이니 합수점을 기준으로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며 신산경표를 훼손하고 산꾼들에게 혼란을 부추기는 일이 있단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월지맥은 합수점을 향하지 않더라도 좌우 유역구분으로도 충분히 큰 물줄기를 가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맥에서 합수점은 정맥에 해당되는 산경표의 산자분수령원칙을 지나치게 확장한 오류에서 비롯한 공명심입니다. 일부 지맥이 합수점을 향할지라도 산자분수령원칙을 주장할 경우 모든 지맥이 합수점을 향해야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애써 지맥에서 합수점을 말하며 산꾼들에게 혼란을 부추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영월지맥을 걸으며 이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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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시
충청북도 동북부에 있는 시로 강원도·경상북도·충청북도 3개도의 접경지역으로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관광지로는 의림지와 충주호, 월악산국립공원이 대표적이며, 매년 여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개최된다. 제천시는 본래 고구려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청풍으로 고쳐 내제군(奈提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충주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1317년(충숙왕 4) 이 고을의 중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1660년(현종 1)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제천군에 병합시켜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였다가 1917년에 청풍면으로 고쳤다. 지명의 유래는 이곳의 산천경개가 빼어나 남도의 으뜸으로 쳐, 이에 따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한 데에서 따온 것이며 조선시대에는 진산(鎭山)인 인지산(因地山) 부근의 남한강유역에 한벽루(寒碧樓)가 있어 많은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군사적으로는 오현봉수(吾峴烽燧)가 있어 동쪽으로 단양군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와 서쪽의 충주 심항산봉수(心項山烽燧)에 연결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내토군으로 불렸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으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에 제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제천현이 되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제천의 별호는 대제·의천·의원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 충청북도 제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때 근좌면·근우면·읍내면·백운면·성산면·송학면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충주군 덕산면과, 청풍군이 폐지되면서 청풍군 8개면이 5개면으로 통폐합되어 제천군에 편입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이 시기에 통합된 읍내면이 1917년 제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0년에 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중앙선과 태백선이 통과하여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강원도와 충청북도 내륙을 연결하는 제천의 역할이 더욱 커져 1980년 시로 승격, 분리되고 나머지 지역은 제원군으로 바뀌었다가 1991년에 다시 제천군으로 환원했다. 1983년 제천시는 당시 제원군의 금성면 일부를 편입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천군과 제천시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제천시를 이루었다. 시의 전체적인 지세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다. 영월지맥이 시의 북부를 지나고, 백두대간이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시의 남부를 지나고 있어 북쪽과 남쪽이 높고 서쪽과 동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시의 동쪽에는 금수산(錦繡山, 1016m)을 비롯하여 동산(東山, 896m)·가창산(歌唱山, 820m)·작성산(鵲城山, 771m)·마당재산(661m)·무등산(無謄山, 620m) 등이 솟아 있으며, 서쪽에는 십자봉(985m)·시루봉(734m)·오청산(五靑山, 655m)·천등산(天登山, 807m)·대덕산(大德山, 580m)·마미산(馬尾山, 601m)·등곡산(嶝谷山, 589m) 등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백운산(白雲山, 1,087m)·구학산(九鶴山, 983m)·감악봉(紺岳峰, 886m)·석기암(石機巖, 906m)·청룡산(靑龍山, 575m)·송학산(松鶴山, 819m) 등이, 남쪽에는 월악산(月岳山, 1,093m)·대미산(大美山, 1,115m)·문수봉(1,162m)·매두막(1,100m)·만수봉(萬壽峰, 983m) 등의 높은 산들이 감싸고 있으며, 중앙에는 국사봉(國師峰, 632m)이 있다. 단양군에서 흘러든 남한강이 시의 중앙을 동서로 흐르며 많은 지류를 합하여 충주시로 흘러간다. 봉양읍을 흐르는 용암천이 장평천과 합류하여 주포천을 이루고 고교천이 금성면을 흘러 구룡천과 합류하여 각각 충주호로 흘러든다. 이밖에 송한천·시곡천·원서천·화당천·광천·하소천·용두천 등이 흐른다. 특히 하소천과 고암천의 하천유역은 상당히 넓어 청전동에서 두학동까지 펼쳐져 있으며 신월동 하안에 하안단구가 발달해 있다. 이들 하천들은 대부분 깊은 협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평야의 발달이 미약하여 장평천과 용암천이 흐르는 봉양읍 지역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이 지역에는 관개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와 소류지가 많은 편으로 의림지(義林池)를 비롯해 백마저수지·월림저수지·안말제·광암제 등이 있다.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청풍면을 중심으로 한 5개면 61개 동리가 수몰되었다. 단양-제천-태백산지역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콩·팥·수수·옥수수 등이며, 고추·잎담배·마늘·약초·인삼 등이 생산된다. 특히 석회암질 토양에서 재배되는 마늘은 단단하고 맛이 좋다. 우리나라 기후구로 볼 때 중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하는 이 지역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해양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내륙으로 한서의 차가 심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철도 및 도로 교통의 중심지로, 시가지를 중심으로 철도와 국도 및 지방도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중앙선이 용암천·장평천을 따라 시의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봉양읍 봉양역에서 충북선과 이어진다. 또한 제천역에서 분기한 태백선이 고암천을 따라 시의 북동부를 지난다. 원주·안동·안성·태백·충주·울진을 잇는 국도가 있다.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어 도로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포탈에서 발췌 정리]
* 단양군
충청북도 북동부 최동단에 있는 군으로 군내 산지가 많고 석회암 지대의 카르스트 지형으로 인해 자연관광지가 발달했다. 군내에는 단양팔경 등 아름다운 계곡이 많으며, 시멘트 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특히 고수·온달·천동동굴등의 동굴지대가 유명하다. 2012년 아쿠아리움 다누리센터가 개장하면서 단양군 관광지로 자리잡았다.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지금의 단양군은 옛 단양군에 영춘현이 병합된 곳이다. 단양읍·매포읍·대강면·적성면은 옛 단양군 지역에,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 일대는 옛 영춘현 지역에 해당한다. 옛 단양군은 신라의 적산현으로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 영현이 되었다. 단양은 삼국시대에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지역으로, 551년(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진흥왕이 순시할 때 세운 적성비가 남아 있다. 940년 단산현으로 고치고, 1018년에는 원주, 뒤에 충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291년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1318년(충숙왕 5) 단양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군사로 승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단양군으로 있었다. 단양군과 영춘현은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이 되어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춘군이 단양군에 통합되었다. 오지였던 이곳도 1970년대 이후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개발이 진전되었다. 1979년 단양면이, 그리고 1980년 매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5년 충주 댐 건설로 단양군의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되자 도전리·별곡리에 신단양이 새로 건설되어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 군 전체 지역이 동쪽의 백두대간과 영월지맥 사이에 놓여서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룬다. 군을 북북동-남남서로 관류하는 남한강을 경계로 남동쪽에는 백두대간의 두솔봉(1,314m)·국망봉(1,421m)·죽령(竹嶺, 1,096m)·연화봉(蓮花峰, 1,394m)·형제봉(1,178m)·용두산(龍頭山, 994m) 등이 솟아 있고, 북동쪽에는 금수지맥의 설매산(雪梅山)·금수산(錦繡山, 1,015m) 등 높이 1,000m 내외의 산이 중첩되어 있다. 장년기 산맥의 모습을 띤 험한 지세 때문에 인접한 경상북도와의 소통은 예로부터 죽령 고갯길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왔다. 경상북도 학성산(鶴城山)에서 발원한 단양천(丹陽川)을 비롯하여 죽령과 두솔봉에서 발원한 죽령천(竹嶺川), 설매산과 금수산에서 발원한 매포천(梅浦川), 연화봉에서 발원한 금곡천(金谷川) 등은 모두 단양읍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들며, 국망봉에서 발원한 국망천(國望川)도 가곡면 신평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그밖에 동대천·임현천·남조천 등 20여 개의 하천이 산간계곡을 흐르고 있으며 하천유역의 평야는 매우 협소하다. 산과 하천의 아름다운 조화로 명승지가 많아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이곳의 관광자원은 단양팔경, 제2단양팔경, 충주 댐, 석회암지형 등 주로 자연경관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1985년에 완공된 충주 댐의 영향으로 군내의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으나 뱃길과 낚시터가 이루어져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단양팔경은 매포읍에 있는 도담삼봉·석문, 단양읍에 있는 옥순봉, 단양천 골짜기의 하천암·중선암·상선암·사인암·구담봉(제천시에 위치)을 말하며, 제2단양팔경은 대강면의 죽령폭포·칠성암·다리안산, 영춘면의 북벽·온달성, 가곡면의 구봉팔문, 어상천면의 일광굴, 적성면의 금수산을 일컫는다. 영춘면에는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있어 해마다 많은 불교신자들이 찾고 있다. 중앙선이 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제천-영주, 단양-청주 간을 잇는 국도가 지난다. 충주 댐 건설 이후 충주와 뱃길이 통하게 되어 관광개발에 이용되고 있으며, 중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된다. [포탈에서 발췌 정리]
* 영월군(寧越郡)
강원도 남부에 있는 읍으로 강원도에서도 산세가 수려하고 삼림이 울창하기로 이름나 있으며,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많다. 2개읍 7개면 57개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로이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일부였고 4세기 초부터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광주)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백제의 세력이 커져 한강 하류지역 일대를 차지함에 따라 이때부터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이 고장은 100가구가 넘는다는 뜻으로 백제의 백월(百越) 땅이라 불렸다. 그러나 북쪽의 고구려 세력이 낙랑군을 정복하면서 남하하게 되고 또한 반도 동남부에서 일어난 신라의 세력이 팽창하여 북상해 오면서 한강 이남의 중부 지방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사이에 치열한 경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장수왕 때에 고구려는 국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그 세력을 남으로 뻗쳐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어 백월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내생현(奈生縣)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통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내생현을 내성군(奈城郡)으로 개칭하였으며, 9주 5소경 중 명주(溟州)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기에 이 지역은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태조 23) 영월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주천현(酒泉縣)을 폐하면서 원주(原州)에 이속시켰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원주와 같이 중원도에 속하였고, 5도양계 이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편입되었다가 1372년(공민왕 21)에 영월 출신 환자(宦者)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여 영월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1401년(태종 1)에 이 지역은 강원도에 귀속되면서 지군사(知郡事)가 다스렸다. 1457년(세종 3)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어 왔다. 1698년(숙종 24)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편 때 군이 되었으며, 원주·평창·정선 등과 함께 충주부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에 다시 강원도로 복귀하게 되었다. 1914년 원주에 속해 있던 수주면(水周面)과 좌변면(左邊面)이 이 지역으로 귀속되었으며, 1915년에는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가 편입되었다. 1931년 천상면(川上面)이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7월 군내면이 영월면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영월면이 상동면 연하리를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 1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의 천평리·덕구리가 상동면에 편입되고, 수주면 강림리·부곡리·월현리가 횡성군 안흥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상동면이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의 편입을 받아 읍으로 승격되었고, 하동면(지금의 김삿갓면) 정양리와 남면 흥월리가 영월읍에, 서면(지금의 한반도면)의 북쌍리가 남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상동읍의 녹전(碌田)·석항(石項) 2개 출장소를 통합, 중동면을 설치하였다. 2009년에는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서면이 한반도면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6년 11월에는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변경되었다. 북쪽으로 정성군, 평창군, 서쪽으로 횡성군, 원주시, 남쪽으로 충북 제천시, 단양군 및 경북 영주시, 봉화군, 동쪽으로 강원도 태백시에 접한다. 북동부에서 남동부로 영월지맥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남동부에는 백두대간 동서로 뻗어 그 산맥의 여파가 군내 각지에 미쳐 산악이 중첩하며, 북서부에 백덕산(1,350m), 북동부에 백운산(1,426m), 두위봉(1,466m), 망경대산(1,088m) 남부에 태화산(1,027m), 옥석산(1,232m) 등이 솟아있다. 중앙부를 한강 지류인 평창강과 주천강이 한반도면 신천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류하다가, 영월읍 하송리에서 한강 본류와 합류하고, 다시 각동리 부근에서 옥동천이 합류하며, 평지는 주천리와 영월분지 외에는 별로 없다. 군내에 석회암층이 곳곳에 있어 쌍룡,옹정,연당,영월 부근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해 있고, 진별리에는 고씨동굴 등 석회동굴도 여러 개 발달해 있다.내륙산간지대에 있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지하자원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 제천-태백을 잇는 산업철도인 태백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지난다. 평창-태백, 제천-정선을 잇는 국도가 영월읍을 지나며, 군내 각 지역은 지방도로 연결된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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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재에 시그널로 보아 많은 분들이 피재에서 끊어가는것 같습니다. 죽천대선배님 띠지도 확인되었습니다.^^
♤ 피재갈림길(784m)/ 피재점/ 삼면봉(제천시 송학면, 봉양읍 → 모산동)
피재 갈림길에 피지점이란 이정표가 서있고 이곳에서 피재까지는 1.3km의 거리다. 정상에는 멋진 금강송 세 그루가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피재는 “직티”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제천시 모산동에서 봉양읍으로 넘어가는 9번 도로상에 있다. 지맥길은 피재점에서 우측이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에서 모산동으로 바뀌어 동향한다.
- 이정표(←용두산 4.1km, ↑피재 1.3km, 감악산 5.6km→)가 서 있다. 피재갈림길인 피재점에 올랐다가 좌측 용두산 방향으로 내려선다.
♤ 제천시
조선조 영조 때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청담 이중환은 제천땅에 대한 기록을 저술하기를 “만첩 산중에 있는 깊은 산골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동사강목』을 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제천에서 태어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한 곳이며 직제학을 지냈던 원호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 벼슬을 내놓고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번자리에 살면서 관란정(觀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원호는 날마다 이 정자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고 탄식하다가 날이 저물면 비로소 돌아가고는 하였으며, 철 따라 나는 과물(果物)을 나무 상자에 넣어 정자 밑을 흐르는 시냇물에 띄워서 단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 오미재/ 못재/ 면계(모산동 → 송학면)
제천시 송학면 오미리에서 모산동 용두산 산림욕장으로 내려서는 고개로 오미리의 지명을 따서 오미재라 부르며 의림지 윗쪽의 고개라 하여 못제라고도 불린다. 사거리 갈림길로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오미리(점골)에서 오미천을 만들고 오미저수지를 지나 황둔천이 되고 다시 서마니강이 된다. 서마니강은 주천강이 되었다가 다시 평창강이 되고 드디어는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벤치가 놓인 공터에 수명을 다한 고목나무 둥치가 그 세월을 짐작케 한다. 오미리의 지명유래는 야생 오미자가 많이 자생해서 오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또 다섯 골의 물맛이 골마다 달라 다섯 가지 맛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자연마을로 나랭이, 나막신골, 선바우, 소바우, 우암, 일오곡 등이 있다. 특산물로는 고추, 담배가 있다. 넓은 공터에 쉼터 벤치가 여러 개 놓여있는 오미재(못재)에 내려선다. 이곳 못재(오미재)에서 지맥길은 온전히 제천시 송학면으로 들어서서 동막고개 이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싸리치에서 10.9km 거리다.
- 좌측편에 이정표 [오미재, ↑용두산 2.9km, ↓피재점 1.1km, 산림욕장 1.3km→, ←점골(오미) 1.5km]가 있다.
♤ 송한재(松寒峙, 725m)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와 모산동 물한이 마을 갈림길로 지명은 송한리에서 따온듯 하다. 넓은 공터와 이정표, 벤치와 삼각점이 있는 송한재에 내려선다.
- 이정표(송한재, ↑피재점 3.2km, ←물안이 1.9km, 송한리 4km→, ↓용두산정상 0.8km)가 있다.
♤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松寒里)
송학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송한리의 송학산(松鶴山)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송한리에는 절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우리나라에 대거 침입하여 조정에서 강화도로 천도할 무렵, 서울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에 온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낮이고 밤이고 부처님 앞에 나가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중 절 근처에 살던 젊은 머슴이 이 아름다운 부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날마다 불공드리는 부인을 멀리서 엿보며 가슴의 연정을 달래었다. 그러던 어느 달 밝은 밤, 부인이 불공을 마치고 절 뒤편으로 잠시 나온 것을 보고 뒤를 따라가 부인에게 달려들어 부인을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얼마 후 절로 돌아온 부인은 자기가 기거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자진(自盡)을 하였다.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절은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람의 눈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부인이 기거하는 방이 있던 자리에서 바위가 하나 솟아 나왔다. 사람들은 부인의 한이 사무쳐 바위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바위를 ‘설통바위’라고 불렀는데, 부인의 화신(化身)이라고 믿었다.
이정표상으로 감악산에서 10km 거립니다. 좌측 끝에 정상석을 만나고 우측 끝으로 나가면 제천시가지가 다 내려다 보이고 의림지 옆으로 땅바닥을 기는 지맥 능선을 내려다보면 다시 왕박산, 가창산으로 올라갈 일이 걱정이 됩니다. 부산 용두산공원, 호남정맥, 문수지맥에도 용두산이 있습니다.
♤ 용두산(龍頭山, 870.1m)/ 제천의 진산/ 전망데크
용두산은 충북 제천시의 북쪽, 모산동과 송학면 도화리, 포전리, 송한리에 걸쳐 있으며 제천의 진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용두산이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진산이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제천)에는 "용두산은 감암산(紺巖山)의 줄기이다.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산 정상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외에도 여러 옛 지도에 용두산이 표시되어 있다. 용두산이라는 지명은 전통적인 민속 신앙의 한 흐름인 용 신앙과 관련된 대표적인 지명으로,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 형상을 한 형국으로 보아서 산이 높은 만큼 용을 우러러 보는 용에 대한 외경을 드러낸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용두산이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용두산은 감악산의 줄기이다.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산 정상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동쪽으로 가라곡현(加羅谷峴)·이치(梨峙)·삽현(揷峴)·조흘치(助屹峙)가 되며 동남쪽으로 솟아나 오작산(烏鵲山)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두산은 북서쪽으로 석기암, 감악산과 이어지고, 용두산에서 발원한 물이 용두천을 이룬 뒤 의림지로 흘러든다. 용두산 서쪽 862m 봉우리는 황소가 드러누운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 석기암과 감악산, 멀리 치악산 남대봉 줄기가 보인다. 용두산은 의림지로 흘러드는 수원의 발원지로 제천시의 상징적 진산으로 따라서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의림지를 지나 제2의림지 오른쪽 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오르면 용담사 대웅전 앞에 이르고, 용담사에서 약 100m 올라가면 동릉과 서릉으로 갈리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서릉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고, 동릉 코스는 경사가 가팔라서 용두산 깔딱고개로 불린다.
- 좌측 끝 지점에 정상석과 3등삼각점(307 재설 / 77.6 건설부)이 있고, 그 옆에 넓은 평상과 전망대가 있다. 용두산에서 제2 의림지 방향 데크 계단길을 따라 내려서는데 이후 동막고개까지 계속 내리막길이다.
신설 주택가 도로로 내려서서 이후 동막고개까지 도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마루금을 고수해도 충분합니다. 송전철탑을 연이어 두개 지나고 다시 10여분 후, 좋은 길을 우측으로 내려가면 용담사가 지척입니다. 정면 숲으로 들어가면 녹쓴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그 우측으로 희미한 길이 나있고, 철조망을 왼편에 낀 채 바짝 붙어 내려가면 우측으로 넓게 터지는 밭이 나오고 노송이 멋진 청송심공과 밀양박씨 합장묘가 있는 안부가 나옵니다. 우측으로 용담사 진입도로가 보이고.... 그대로 숲속으로 들면 길은 뚜렷하게 이어지고 첫 갈림길에서 우측, 두번째 갈림길에서 좌틀합니다. 묘가 나오고 진입로 따라 내려가면 넓은 밭입니다. 건너편에 이동식화장실도 보이고 멀리 십자가 있는 교회건물을 향해 밭을 가로질러 건너가니 양어장 시설과 벚꽃나무 이어지는 임도길입니. 에스골 수양관 시설입니다. 마당에 수도꼭지가 보이며, 길 따라 정문으로 나오면 [에스골수양관] 간판이 서있습니다.
♤ 동막고개(東幕峙)/ 도화리고개
동막고개는 제천시 모화동에서 송학면 도화리를 잇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도로 동쪽에 동막마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현지 택시기사들은 도화리고개로 통한다. 고개 우측으로 세명대학교와 솔밭공원, 의림지로 통하는 곳이다.
- 들머리는 2차선 포장도로 우측으로 오르는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 효자 박전(朴瀍)이야기
동막마을에 「효자 박전(朴瀍)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효자 박전 이야기의 전반부는 효박전(朴澱)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병환이 든 아버지를 살리고, 후반부는 아버지가 음력 6월에 배를 드시고 싶다 하자 죽음을 무릅쓴 지극 정성으로 배가 든 작은 상자 궤짝을 구하여 드렸다는 효행담이다. 세명대학교에서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동막마을이 있고, 이 마을을 지나는 길옆에 박전효자문이 위치하고 있다.
통덕랑경주이공과 그 배의 묘소를 지난다. 통덕랑(通德郎)은 조선시대 문신 정5품 상계(上階)의 품계명이다. 정5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검상(檢詳)· 정랑· 지평(持平)· 사의(司議)· 헌납(獻納)· 시독관(侍讀官)· 교리(校理)· 직장(直長)· 기주관(記注官)· 찬의(贊儀)· 별좌· 문학 등이 있다. 통덕랑은 향리들의 한품(限品)으로서도 중요한데, 향리의 호장(戶長)들이 스스로 통덕랑이라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 모산재(茅山峙)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에서 고암동으로 통하는 조그만 고개로 이 곳은 예전에 모산동이었는데 행정개편으로 인해 고암동에 편입된 곳으로 모산재의 지명 유래는 의림지의 안쪽이라는 뜻에서 못안이라고 불리다가 발음하기 쉬운 모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즉 모산은 못 안의 이두식 지명이다. 양회임도가 이어져 오다 능선 마루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비포장으로 바뀌는 모산재에 내려선다. 고개마루 우측으로 의림지가 보인다. 좌측편 고개 너머로 개사육장이 있는지 개짖는 소리가 엄청나다.
- 모산재에 내려서서 임도를 가로질러 바로 숲길로 올라선다.
♤ 제천 의림지(義林池)
의림지는 충북 제천시 모산동 일대에 있는 삼한시대 축조된 상주 공검지(恭儉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와 함께 역사가 오랜 인공 저수지로 관개의 제기능을 수행하는 유일한 저수지이다. 호서(湖西)지방의 호(湖)가 이 의림지를 가리킨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12월 4일 대한민국 명승 제20호로 제천의림지와 제림이 승격,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의림지는 우륵이 축조했다는 설과 현감 박의림이 축조했다는 설도 있으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1972년 둑방 붕괴때의 조사에서 의림지 바닥에 큰 샘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부잣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찾아온 스님에게 탐욕스럽고 심술 사나운 집주인이 거름 한 삽을 스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며느리가 쌀을 한 바가지 퍼서 스님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은 조금 있으면 천둥과 비바람이 칠 터이니 빨리 산속으로 피하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뒤를 돌아본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했다. 집이 있던 자리는 땅속으로 꺼져 버렸는데 그곳에 물이 고여 의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연자암)라고 한다. 의림지를 중심으로 경호루 · 와소정 · 의림정 · 영호정 · 용폭포 · 임폭정 · 홍류정 · 청폭정 · 후선정터 등이 있다.
동막고개에서 한 시간이면 개나리공원묘지 상단부를 지나는데, 여기부터 한국전력 변전소가 넓게 마루금을 차지하고 있어 우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 개나리공원묘원/ 제천지역 유일의 공원묘원
#4번 송전탑을 지나면 바로 좌측으로 개나리공원묘원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공원묘원 우측 능선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좌측 묘원 너머로 송학면 포전리와 도화리 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충북과 강원도 경계를 이루는 송학산(818.2m) 능선이 높게 솟아있다.
♤ 다랑고개/ 금강식당
제천시 고암동과 송학면 도화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거화 엔지니어링 건물을 지나서 약간 더 오르면 82번 도로가 지나는 다랑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고개 좌측에는 농약 전문 생산업체인 인바이오㈜가 넓게 자리잡고 있고 원지맥길은 제천변전소가 자리잡고 있고 제천변전소 버스정류소가 위치하고 있다.
♤ 제천시 고암동
고암동은 제천시에 있는 법정 동으로 예부터 고인돌과 같은 큰 바위가 있어 고라미, 고래미, 고암이라고 하였다. 한자의 뜻으로 보아도 '옛 돌'이지만 이두식으로 읽어도 '고인돌'의 '고'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연마을로 양구터, 고척, 고래미, 당머루, 벌말, 거루, 무덤실, 대곡도티(垈谷道치, 뒤터, 둔전골 등이 있으며 무덤실은 당머로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장으로 추측되는 묘지가 있다.
♤ 제천 에콜리안(Ecolian) 퍼브릭 골프장
제천쓰레기매립장 청동판이 붙어있지만, 이미 골프장으로 바뀐 곳을 지난다. 제천 에콜리안(Ecolian: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라는 조어) 퍼브릭 골프장이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골프 대중화 기여를 목적으로 조성하여 2012년 9월 개장한 친환경대중골프장이라는데, 지자체가 부지를 제공하여 공단에서 150억원의 기금으로 골프장을 짓고 지자체에 기부체납한 뒤, 20년간 최소한의 투자비 회수를 위해 운영하는 골프장이라 한다. 전국에는 이곳 제천 골프장 외 광산, 정선, 영광, 거창 등 총 5개의 에콜리안 퍼브릭 골프장을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배재를 지나고도 고암정수장을 비켜 진행하고 여름에는 환삼넝쿨, 칡넝쿨과 가시잡목이 심한 지역이 계속됩니다. 이후로도 계속하여 벌목잔해가 뒤엉켜 진행을 방해합니다.
♤ 뱃재(梨峴, 278.5m)/ 팻재(敗峴)/ 38번국도/ 백제기사식당
뱃재는 태백선 철길과 나란히 진행하여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를 잇는 38번 국도의 4차선 구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이 뱃재는 팻재, 배고개라고도 부르는데 그 연유는 이 고개 형상이 배(船)와 같을 뿐 아니라 예전에 이 곳에서 배[梨]장수가 배를 많이 팔았다고 하여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팻재(敗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이곳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우리 관군과 의병이 이곳에서 맞서 일전을 벌였으나, 우리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중과부족으로 그만 패(敗)했다 하여서 이 고개를 팻재(敗峴) 또는 패현이라고 하게 됐다는 것이다.
- 차량통행이 아주 많은 반면, 도로를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나 암거가 가까운 곳에 보이지 않는다. 뱃재고개 표지석이 있고 뒷면에는 한글로 청풍명월이 박혀 있다. 동막고개에서 5.6km 거리이다.
구 태백선 철로를 건너서 앞쪽 숲 능선으로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고암정수장이 마루금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다시 우회하여야 한다.
♤ 태백선
예전에 태백선이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태백산 직선화 공사로 지금은 폐선이 된 곳이다. 태백선은 태백산 지구의 지하자원 개발에 따라 생산된 석탄과 중석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개설된 철도이다. 1949년 5월 3일 영월선과 함백선 건설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11월 5일 영월선 제천~송학간 9.8km를 개통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건설공사에 재착수하여 1956년 1월 제천~영월간 38.1km를 준공하였다. 1955년 12월 31일 제천~영월간 38.1km의 영월선을 개통한 후, 1957년 3월 9일 영월~함백간 22.6km를 개통하면서 함백선이라 불렀고, 1966년 1월 19일 다시 예미~고한간 30km를 개통하면서 고한선이라 하였고, 1973년 10월 16일 고한~태백간 15km를 추가 개통하고, 마지막으로 1975년 12월 5일 태백~백산간 9.3km를 개통하였다. 이로써 제천~백산을 연결하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부터 태백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백선은 충북 제천시의 제천역과 강원도 태백시의 백산역을 잇는 총길이 103.8km의 산업철도로, 영월발전소를 위해 만든 영월선과 영동선에서 황지(현 태백시)일대의 탄광 개발을 위해 만든 황지지선을 기반으로 하여, 석탄과 양회를 운반하는 화물열차가 주로 운행된다.
♤ 고암정수장
영월지맥길 정 가운데 고암정수장이 자리를 잡고있다. 개나리추모공원에서 고암정수장까지는 고암테크노공단, 제천변전소가 영월지맥을 점령한 바람에 정규 코스로 갈 수 없고 철조망 좌우를 따라 우회하여야 한다.
삭고개~해고개 구간은 잡목이 많고, 벌목지라 치우지 않은 벌목 잔해가 등로를 막아 길이 거의 보이지 않아 주의를 요합니다.
♤ 삭고개/ 삽고개/ 2차선포장도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 있는 고개로 제천시 송학면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옛 서면)으로 가는 고개로 양 옆으로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철망으로 높은 축대를 쌓아 놓았는데 축대 끝지점으로 삭고개에 내려서서 우측 대한ENG 방향으로 간다. 좌측 고개마루 방향으로 잠시 도로따라 올라 우측 산불조심 안내판과 프랑카드가 있는 들머리로 올라선다. 바로 옆에 있는 38번 국도의 영향으로 차량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
♤ 38번국도
제천 송학면에서 느릅재터널을 통해 영월군 한반도면(옛 서면) 쌍용리로 향하는 38번국도를 굴다리로 지난다.
0.7km 왕박산을 다녀와서 지맥은 제천시와 영월군 시군도계를 따라 가창산 아래 삼군봉까지 이어 갑니다.
♤ 왕박산시루(527.8m)/ 왕박산 갈림봉/ 도계(충북 제천시 송학면 → 강원 영월군 남면)/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송학면,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개념도상에는 527m봉 또는 왕박산갈림길로 되어있고 "왕박산 시루"라고 한다. 왕박산 분기봉을 지나면서 부터 좌측이 제천시 송학면 무교리에서 영월군 남면 토교리로 바뀌어 이후 충북과 강원도 도계를 가르며 좌 강원도, 우 충북을 가르며 남동향하여 가창산을 지나 818.6m봉까지 진행한다.
- 이정표 (← 왕박산 0.7km, ↑ 조을치 1.0km, 서문리 →)와 제천시에서 설치한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서 있다.
♤ 무도리(務道里) 왕박(王朴)시루 유래
왕박시루는 고려 왕족이 왕(王)씨에서 박(朴)씨로 성을 바꾸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 유래담이다.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만지실 뒷산을 왕박산(王朴山) 또는 왕박시루라고 한다. 1982년 충북도에서 발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다. 다만, 「전설지」에 고려 충렬왕의 후손인 박경신(朴景信)이 병자호란을 피해 살았다고 해서 왕박산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주를 달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고려 유신들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왕박산에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은신하고, 성을 박씨(朴氏)로 고쳐 살았다. 성을 바꾸어 박씨가 된 고려 왕족은 그 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바꿔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왕박산’ 또는 ‘왕박시루’라 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왕박씨’라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 왕족들이 성을 왕씨에서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수필집 「추강냉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의흥박씨세보」에 따르면 시조 박을규(朴乙規)는 본래 왕씨[王乙規]로 승지(承旨) 벼슬을 지냈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멸족의 화를 피해 그의 형 왕갑규(王甲規)와 함께 중국으로 가려 하였지만,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한다는데 회의를 느껴 중국으로 간 그의 형과는 달리 단양의 영춘 차의곡[지금의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에 숨어 살았다. 이곳에서 본디 성씨인 왕씨를 버리고 외가의 성을 따서 의흥박씨(義興朴氏)로 고쳤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왕박씨라 하였다. 이후 4세손 박근이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음지 만지실로 옮겨와 은거하면서 뒷산을 자신의 성을 따서 왕박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 영월군 남면 토교리(土橋里)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위치한 토교리는 산자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주로 밭농사를 행하고 있으며 무동산과 가창산에서 시작된 토교천이 흐르는 마을이라 하여 토교리다. 자연부락으로는 무도리, 두릉, 점말, 음지말, 물여울, 양지말, 사기장골, 조리재 등이 있다. 『여지도서』에도 토교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흙으로 놓은 다리가 있어서 흙다리 또는 토교라고 하였다.
멸망한 고려 왕씨들의 수난사입니다. 한강기맥 발귀현을 지나며도 고려 왕씨의 은거지와 관련한 망덕산이 있었습니다.
♤ 왕박산(王朴山, 597.5m)
충북 제천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 일가를 처형하자 고려의 왕족으로 승지(承旨)벼슬을 지낸 왕을규(王乙規)가 화를 피하기 위해 이 산으로 숨어들어 성씨를 그의 외갓집 성씨인 의흥 박씨(義興 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하여 그 후로 이 산을 왕박산이라 부른다.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곡하여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권문세족들을 무너뜨리고 온건개혁파인 사대부들을 축출하는 과저에서 고려의 왕족이었던 왕을규도 멸족을 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그의 형인 이부상서(吏部尙書) 왕갑규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고려에 남은 왕을규는 외갓집 성을 따라 의흥박씨, 즉 박을규로 행세하며 영춘현 차의곡(현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에 피난와 살았다. 그래서 의흥박씨를 흔히 왕박씨라고 하며 3대까지 영춘에 살았으나 영춘에는 현청이 있고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신변의 불안을 느끼자 4세손 박근부터 왕박산 아래인 제천시 송학면 만디동(음지 만지실)에 은거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의흥박씨의 관향인 박을규의 본성은 왕씨로 고려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을 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춘성(春城)[현재 단양군 영춘면] 거의동에 둔거하였다가 조선 태종 때 외가의 성인 박씨를 따랐다. 그 후 후손들은 관향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중간 계대가 실전되어 후손인 박득서로부터 대를 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조 때 좌익공신인 박근, 중종 때 박승종 등이 저명하다.
♤ 무등산(無謄山, 620m)/ 무담산
충북 제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경계에 솟아있는 무등산은 '없을 무(無)'에 '베낄 등(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산으로 무등산의 가까운 남쪽에 위치한 왕박산은 고려의 한 왕이 왕비와 대신들과 함께 이성계를 피해 들어와 피신한 곳이라고 한다. 무등산은 1914년 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에는 무동산(舞童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이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지는 무등산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피난 온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자 신하들이 목말(무등)을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에 가탁하여 목말의 방언인 '무등'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왕씨 성을 가진 왕은 성을 박씨로 바꿔 살았는데 당시 본관은 의흥으로 현재까지 의흥박씨는 존재하고 있다. 주변 산군을 이루는 무등산과 한편 왕박산보다는 좀더 남쪽 아래에 솟은 가창산의 이름 또한 이 유래와 관련있다.
♤ 조을재(助乙峙, 490m)/ 흑석동 갈림길/ 돌무덤, 서낭당터
조선시대에 영월로 가는 관행(官行)길 이었다고 한다. 왕박산(王朴山) 줄기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 점제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그 지형이 조리형국이라 조리재라고 부르며 곡식이 많이 모여 들어서 큰 부자가 나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리재 명당 자리에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이 발견되어 1995년 8월 이를 제거하는 행사가 있었다. 조을치는 조움재, 조리재[일명 조을티·조올티]라고도 하는데, 이 재를『여지도서』(제천)에는 「조을치(助圪峙)」로, 국지원 지도에는 「조을재」로 표기하고 있다.
- 동막고개에서 9.6km 지점으로 조을재 이정표(↓왕박산 1.7km, ↑가창산, 흑석동→)가 서 있다.
♤ 조을재의 전설
옛날 충청도 지방에 김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키도 작고 성품이 몹시 경망스러워 주위 사람들은 이름 대신 '조리"라늠 별명을 만들어서 불렀다. 그런데 김조리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조리는 혹시 아버지의 묘를 잘못 써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유골을 괴나리봇짐에 소중히 모신 다음 명당이 많다는 강원도를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김조리가 충북과 강원도의 경계인 왕박산밑 점제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그는 주막집의 목로방(木盧房)에서 장사꾼들과 함께 자면서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잠자리에 들 때에야 머리맡에 모셔놓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은 없어지고 참빗 장사꾼의 큰 보따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유골 봇짐을 잃어버린 그는 대성통곡을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김조리는 유골 봇짐과 바꾸어진 참빗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참빗이 잘 팔려 큰 돈을 벌었다. 그 후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어 몇 년 안가서 장가도 들고 땅도 많이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한편 그 주막집에서 함께 자던 참빗 장수는 김조리가 봇짐을 소중하게 여기므로 혹시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욕심으로 그날 새벽 봇짐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쳐서 조리재 중턱에서 봇짐을 풀어보니 뜻밖에도 사람 유골이 나왔던 것이다. 참빗장수는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나서 그 유골봇짐을 큰 참나무 밑에다 확 던져버리고 조리재를 내려오다가 아! 나도 조상을 모시는 사람인데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참나무 밑에 유골을 묻어준 후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충청도의 큰 부자집 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은 하지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머슴은 숫돌에다 낫을 갈면서 "주인 어른, 올해도 벌초를 안 가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나도 예전에는 자네처럼 머슴살이도 하고 행상도 했다네, 그러나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아버님 유골을 강원도의 명당 자리로 모시고 가던 중에 어느 참빗장사가 실수로 봇짐을 바꾸어 가는 바람에 아버님의 유골을 잃어버렸다네" 주인의 말을 들은 머슴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가 바로 그 때 유골을 훔쳐간 참빗장사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주인은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아버님의 유골을 찾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김조리는 이름난 지관을 모시고 머슴과 함께 이곳 왕박산 줄기의 큰 참나무 밑에 있는 아버님의 묘를 찾아냈고 지관은 패침을 놓고 유골이 묻힌 묘를 한참 주시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어느 유명한 지관 어른이 당대에 발복하는 조리형국의 혈에다 묘를 잡아주었소?"라면서 놀라는 것이었다. 그 후 김부자는 참빗장사였던 머슴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고 친형제처럼 의좋게 살았다고 한다.
♤ 서문리 갈림길
십자안부로 서문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서문리는 제천시 흑석동에 있는 조그만 자연마을로 서무니 소류지가 있는 곳이다. 서문리(서무니)가 있는 흑석동은 마을에 검은 빛깔의 오석(烏石)이 많고 진주강씨 세거지에 '현암(玄巖)'이라는 글자를 새긴 오석이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새김글은 조선 명종 때 진주강씨 후손이 기묘사화 때 모해를 받아 흑석동에 낙향하여 새긴 것으로 전해오며 『한국지명총람』에 "흑석리는 검은 빛깔이 돌이 많으므로 검은돌 또는 흑석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 문영월재
충북 제천시 흑석동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우측 괴골 방향은 조망이 없지만, 좌측 토교리 기동마을 계곡 쪽으로는 조망이 트인다.
- 괴골 갈림길 이정표(↓ 왕박산, ↑가창산 3.6km, 괴골→)가 서 있다.
♤ 설매산분기봉(606m)
이정표(↓ 문영월재 1.0km, ←가창산 2.6km, 설매산 1.7km→)와 사각말뚝이 서있다. 좌측 가창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 일자봉갈림봉(692m)
일자봉 정상은 우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설매산(486m)과 일자봉(692m)은 충북 제천시 두학동, 단양군 어상천면에 소재한 산이다. 국립지리원지도에 나오지 않는 산이나 제천군에서 이정표를 만들면서 그 이름을 붙힌 산이다. 일자봉(692m)정상에는 정상표지판도. 삼각점도 아무것도 없고 선답자 표지기마저 적다
♤ 제천시 두학동
제천시 두학동은 옛날에 제천향교 뒷산 독순봉에서 학 두 마리가 날아오다가 한 마리는 학다리에서 떨어져 죽고, 한 마리는 바람부리 서쪽에 있는 학들에 떨어져 죽었다 전하는데, 학들 동쪽의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自作里)를 편입하면서 학의 머리 쪽이 되므로 두학(頭鶴)이라 하였다. 학들은 두루미 서식처로 작은황새골, 큰황새골, 오리골 등의 지명이 전하며 학들 옆에 있는 마을은 학평(鶴坪)으로 불린다.
북쪽으로 영월 쌍용시멘트 굴뚝이 바라다 보이고 능선 우측으로 제천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이곳 제천, 단양일대는 우리나라 대표적 석회석 지대로 땅속의 석회석이 물에 녹으면서 땅이 함몰되는 카르스트 지형의 '돌리네'가 많이 발달되어 있다. 가창산 아래에도 과거 석회석을 채굴했던 폐광산 시설물이 안전 장치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 가창산(歌唱山, 818.6m)/ 도계, 군계
가창산은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土橋里)와 충북 제천시 두학동(頭鶴洞)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일명 '까창산'이라고도 한다. 석회암으로 형성된 산으로 태영석회 · 장자광업소 · 석교광업소 등 석회광산이 많다. 옛날 신선이 내려와 이곳에서 가무를 즐겼다 하여 가창산이라 이름붙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가창산 봉우리에는 신선이 바둑을 두던 너럭바위가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 신라 때 어느 승려가 이 산에 머물면서 불도에는 등한히 하고 시주하러 찾아오는 부녀자들과 노래나 부르며 놀았다고 하여 가창산이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다른 유래로, 조선시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부모를 잃은 서울 명문가 출신의 두 친구가 양평 용문산에서 10년 넘게 수학하였다. 어느 삼짇날 스승의 권유로 속세로 돌아온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자는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친구는 대장부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펼치고 싶어 알성시를 보아 장원급제 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우정을 배신하였음을 깨닫고 옛 친구에게 사과하고자 각 지방관들에게 친구를 찾아 달라 부탁하였다. 얼마 뒤 강원감사를 지내던 친구에게 옛 친구의 소식을 듣고, 제천현에 있는 산에 은거하는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가니,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던 친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두 사람이 소박한 저녁을 먹은 뒤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어 화답하며 우정을 나누자 친구의 아내도 동화되어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껏 가야금을 타니, 친구는 아름다운 가야금 가락에 넋을 잃었다. 이처럼 한 여인의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이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후에 사람들이 이 산을 가창산(歌唱山)이라 하였다. 또한 피난살이로 고달픈 왕이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 정상에는 이정목(가창산 / 해발 819m, ← 장치미, ↑ 문영월재 3.6km)이 있습니다.
삼군시봉은 아무런 표식도 없습니다. 띠지 하나 걸어두고 길이없는 비탈 사면으로 내려섭니다.
♤ 삼군시봉(제천시 두학동, 영월군 남면 → 단양군 어상천면)
가창산 정상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따라 4분여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약 200m 거리로, 50고지 정도를 내려선다), 삼군봉(영월군, 제천시, 단양군) 분기점에서 좌측(동북향)으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와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석교리를 경계짓는 도계능선을 흘려보내고, 지맥길은 우측(동남향)으로 이어져 좌 단양군 어상천면 석교리, 우 제천시 두학동을 가르며 급사면으로 내려선다.
능선을 찾아 내려서면 갑산지맥갈림길이 나오네요. 여기서 직진으로 능선길을 놓아두고 좌틀하여 또 길없는 사면으로 내려서야 합니다.
♤ 갑산지맥 갈림길(605m봉)/ 제천시 → 단양군
삼군시봉에서 내려서서 바위가 정상에 여러 개 박혀있는 674.2m봉을 넘어 다시 급경사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다 완만한 등로를 잠시 따르면 갑산지맥 갈림길(605m봉)이다. 좌측 어수선한 등로가 영월지맥길이고, 직진 방향이 갑산지맥이다. 갑산지맥분기점에서 지맥은 우측이 제천시와 이별하고 온전히 단양군 어상천면 안으로 들어서서 석교리와 연곡리의 경계를 따르고 중산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 갑산지맥(甲山枝脈)이란
갑산지맥은 영월지맥(寧越枝脈) 가창산(歌唱山, 818.6m) 남동쪽 약 0.9km에 위치한 분기봉(605m)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갑산(甲山, 732.4m), 호명산(虎鳴山, 479.3m→0.4km), 금수지맥분기점(295.1m), 성산(城山, 425m), 한티재, 중앙고속도로 제천휴게소, 국사봉(國師峰, 632m), 대덕산(大德山, 577.3m→1.5km벗어남), 마미산(馬尾山, 602m), 부산(婦山, 780.2m→1.4km벗어남)을 지나서 제천천이 아닌 충주시 동량면 사기리 남한강 충주호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6.2km의 산줄기로서 제천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 갑산지맥 개념도
임도따라 나오면 농막이 나옵니다. ASF철망이 둘러져 있는데 저는 길을 따라 올라가 철망을 상단으로 넘었습니다. 봉 하나를 좌편으로 우회하기도 하던데 철망너머가 잡목숲이지만 그대로 능선을 따라 봉을 하나 넘으니 힘들지 않습니다.
♤ 임도
좌측 어상천면 석교리에서 올라와 우측 어상천면 연곡리 술미마을로 이어지는 임도에 내려서서 지맥길은 도로 맞은편 숲길로 올라서지만 특용작물 재배로 울타리가 쳐져있어 임도따라 좌측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석교리는 돌다리가 있어 석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 석교, 배락바웃골, 십일시장터, 절골, 장밭, 장안마을 등이 있다. 술미는 '순산'이라고도 부르며 중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수리매가 이곳에 있는 느티나무에 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갑자기 눈발이 날립니다. 엇! 삼태산 정상은 눈이 더 많이 오는것 같습니다. 큰일이네... 눈이 쌓이면 안되는데...
♤ 598.5m봉
589.4m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598.5m봉에 올라서면 내려서는 등로는 잡목과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전혀 보이지 않고 정면으로 가야 할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우측 앞쪽부터 차례로 549.5m봉/삼각점봉, 520m, 522.1m봉이다.
야간이라 들머리 찾는데에도 약간 헤맸습니다. 차도 가끔 지나다니고 왼편 아래로는 참나무쟁이마을 불빛이 환하게 보입니다.
♤ 중산재(中山峙)/ 참나무쟁이재/ 532번 지방도
이 재 북동쪽에 참나무쟁이마을이 위치하고 있어서 참나무쟁이재라고도 한다. 중산재(참나무쟁이재)는 남서쪽의 어상천면 연곡리 굴앞마을ㆍ웃말과 북동쪽의 어상천면 대전리 참나무쟁이마을ㆍ아랫말 사이의 재로, 532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난다. 제천에서 영월과 쌍용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지나고 우측 아래로 대전리에 참나무쟁이 마을이 보인다. 중산재라는 지명은 산과 산사이 중간에 위치한 고개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장재(場峙)라고 부른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 이곳 어상천 사람들이 제천에 있는 장에 다닐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장재 또는 장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 우측에 콘테이너 농가 건물이 있고 맞은편 도로 축대가 끝나는 곳 동그란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서 밭 가장자리를 따라 능선으로 오른다.
♤ 468.5m봉/ 삼각점봉/ 백마산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느르메기(黃鶴洞)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표식을 인식할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백마산이 있는 대전리(大田里)는 넓은 들이 있는데 그래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당도가 높은 어상천 수박과 사과가 생산되고 단양마늘 시험장이 있는 곳이다.
- 삼각점은 글씨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 어상천고개/ 519번 지방도로
이 고개는 북서쪽의 어상천면 대전리 느르매기 마을과 남동쪽의 임현리 절골마을을 잇는 고개다. 519번 지방도로인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어상천(漁上川)이란 고기가 사는 최상류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영춘군에 속한 어상천현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춘군이 폐지되고 단양군으로 흡수되면서 단양군 어상천면으로 바뀌었다.
- 도로따라 좌측으로 약간 가서 맞은편 ‘결빙구간’ 간판 뒤로 오르는 길이 들머리이고, 도로 우측으로 조금 내려서면 황학동버스정류소가 있다.
♤ 어상천면 임현리 절골
임현리 절골은 옛날 을아현 관아가 영춘현으로 옮겨 갈때까지 절이 있었다고 하여 을아현 관아가 있던 양지말은 여자의 성기 모양을 하고있고, 그곳에서 마주 보이는 중바위(僧巖)는 남자의 성기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두 모양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절에 있는 승려는 불공을 올리거나 수도를 하려 하여도 지세에 눌려 맑은 마음의 경지에 이르기가 어렵고 늘 음란한 기운이 일어나곤 하였다. 마침 신임 현감이 부인과 권속을 이끌고 을아현으로 부임해 왔다. 그 현감의 부인은 신앙심이 깊어서 가끔 절에 불공을 드리러 다녔는데 이 절의 승려는 그만 평소의 수양을 잃고 현감부인의 미색에 홀리게 되었고, 부인도 역시 승려의 꾀임에 빠져 은밀한 내통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현감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대노한 현감은 승려를 절에서 멀리 내쫒고 절을 헐어 버렸다. 사람들은 절에서 바라보이는 두 곳의 지세 때문에 그런 일이 있게 되었다 믿었다. 지금은 절골이라는 마을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절터는 찾아 볼 수 없다.
♤ 군사봉(軍事峰, 396m봉)/ 군사봉
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 고수골 서쪽에 있는 밋밋한 봉우리로 봉우리의 지세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형'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 367m봉/ 산불감시초소
돌탑이 네개 있다. 수입촌(水入村)이라 불리는 무두리 마을리 보이고, 누에가 기어가는 모습의 삼태산의 지세가 바라다 보인다. 어상천면 임현리 고수골마을이다.
♤ 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任縣里)
임현리는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소재지인 산골마을이다. 평균 300~600m의 고산지대로 어상천 수박이 유명하다. 이조말에 임현창을 두어 임현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고시골(고수골), 딱박골, 무두리, 서당골 등이 있다. 고시골은 고시동이라고도 부르며 절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에 서당이 있어 많은 선비들이 글을 짓고 읊었다고 한다. 무두리는 수입촌이라고도 하며 고시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접시처럼 생겨서 물이 들기만 하지 빠져 나갈곳이 없으므로 밑으로 스며 빠진다. 전에 소치부곡이 있었다고 한다.
산불초소에서 무도리임도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가까이 농막이 보이는데 앞에 수도가 있어 물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개는 짖는데 주인이 집을 비웠는지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 무두리고개/ 군도 9호선
산불감시초소에서 임현3리(무두리마을; 고수골 북쪽, 대전2리 황학동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 방향으로 내려서서 새로 난 도로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 고시골 북쪽에 있는 고개로 대전리와 임현리를 잇는 뱀처럼 꼬불꼬불한 새로 생긴 도로가 지나가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지형이 접시처럼 생겨서 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빠져나갈 곳이 없으므로 결국은 밑으로 스며들어 빠지는 분지(盆地)형태의 지세라서 붙혀진 지명으로 그래서 무두리 마을을 수입천(水入川)이라 부른다고 한다.
- 절개지앞 파란색물통 뒤로 들어서자 마자 좌측 산길로 올라선다.
♤ 투구봉(鬪具峰, 478m)
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 고수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이곳이 지대가 높아선지 478m라는 높이가 실감나지 않으면 그저 밭 가운데 자리잡은 밋밋한 봉우리이다.
삼태산으로 달라붙는 임도 맨 위쪽에 비닐하우스 같은 농가가 있습니다.
♤ 방살미-용바위골 임도/ 농가주택
방살미마을은 사기막 동쪽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삼태산의 중턱에 있어서 경치가 아름답다. 용바위골은 단산중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삼태산의 골짜기로 바위에 천연적으로 용의 무늬가 새겨져 있어 용바위골이라 부르는데 이 방살미마을과 용바위골을 잇는 임도에 올라선다. 임도 끝 좌측에 공사중인 농가주택이 있다.
- 임도에서 우측 용바위골 방향으로 약간 나가다 보면 좌측 급경사 면에 시그날이 길 안내를 한다.
누에머리봉 오름 구간은 엄청난 경사로 많은 체력을 요구합니다. 누에머리봉 오름 길은 마루금 보다는 임도로 오르면 편하다는데 임도도 따르기가 쉽지 않은듯....
♤ 누에머리봉갈림봉(842.6m)/ 면계(어상천면-영춘면)/ 누에머리봉 100m
지금까지 단양군 어상천면 안을 지그재그로 이어오던 지맥길은, 이 갈림봉(842.6m봉)에서 단양군 영춘면과 만나 좌틀하는데 우측편으로 약 100m 벗어나 있는 누에머리봉을 다녀온 뒤, 좌 어상천면 임현리ㆍ 우 영춘면 만종리를 가르며 삼태산까지 북향으로 이어간다.
- 누에머리봉에는 원탁 쉼터와 이정표(←삼태산 875.8m봉, 고수골 1.7km→)가 있다.
능선에 올라서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 급하게 고아텍스를 꺼내 입어야 했습니다.
♤ 삼태산(三台山, 864.2m)/ 누에머리봉/ 삼타산(三朶山)
삼태산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과 영춘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어상천면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춘)에 "삼타산(三朶山)이 현의 서쪽 38리 제천현 경계에 있다."는 기록에서 관련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여지도서」(영춘)에는 "삼타산이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영춘현의 차의곡면에 '삼태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때부터 지명이 사용된 것 같다. 「단양군지」에는 ‘큰 삼태기 세 개를 엎어놓은 듯이 보이기 때문에 삼태기산으로 불리기도 했고, 산세가 마치 누에가 기어가는 형상이라 해서 누에머리산이라고 불렸다’고 수록되어 있다. 산허리에 단양 제2팔경인 일광굴이 뚫려 있으며 산자락 곳곳마다 많은 전설이 얽혀 있다. 어상천면 소재지인 임현리는 옛날 을아현의 관아가 있던 곳인데, 새로 부임해온 현감의 아내가 이 절골의 중과 바람을 피우자 현감이 절을 헐어버리고 현청을 지금의 영춘면으로 옮겨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정상석이 세개나 있다. 가장 큰 오석 정상석[삼태산 / 누에머리봉정상 / 864.2m / 충청북도 단양군]과 두개의 화강암 정상석[좌: 삼태산 / 누에머리봉정상 / 해발 864.2m, 우: 삼태산/ 해발 876m / 93. 4. 5 / 어상천 용바우산악회]이 있다.
♤ 일광굴
일광굴은 어상천면 임현3리 고수동에 있는 거대한 석회석 자연동굴로 굴 입구는 좁으나 굴속은 매우 넓어 면적이 수백평이나 되고 높이는 60여m에 이른다고 한다. 굴 천정의 높은 곳에 구멍이 뚫려있어 햇빛이 굴 안을 비추고 있다. 이 굴은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굴 속으로 피신을 하였고 며칠 후 한 노인이 바깥 사정을 알아보려고 마을에 나갔다가 왜군에게 잡혔다. 왜군은 노인을 고문한 결과 마을 사람들이 굴 속에 피신하여 있는 것을 알고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굴 안에 있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하여 모두 죽고 말았다. 이 참혹한 일이 있은 후 7일이 지나서 연기가 삼태산 정상 부근으로 솟아올랐다고 하며 지금도 굴 속에 당시 사람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 삼태산(三台山, 875.8m)/ 면계(단양군 어상천면 → 영춘면)/ 전망데크
삼태산에 오르는데, 앞의 누에머리봉과는 달리 정상석 하나 없이 이정표와 삼각점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큰 삼태기 세개를 엎어 놓은 모습이라 하여 삼태기산, 마치 산세가 누에가 기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누에머리산’이라고도 부른다. 어상천면과 영춘면 사이를 이어주며,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허리에 단양 제2팔경인 일광굴이 뚫려 있으며 산자락 곳곳마다 많은 전설이 얽혀 있다. 이정표[←방산미 1.2km, ↓누에머리봉 300m, ↑ ?]에서 방향 표시가 떨어져 나간 누에머리봉 반대 방향이 지맥길이다. 좌측 직진 방향의 방살미 방향 능선은 어상천면과 영춘면을 가르며 이어지는 능선이다.
- 삼태산 2등삼각점(영월 24 / 1995 재설)이 있다.
♤ 단양군 영춘면(永春面)
고구려시대 을아단현에 속하였고, 신라시대에는 자춘현으로 내성군(영월)에 속하였다. 고려시대 영춘군에 속하고 1399년 (조선 정종 1년) :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현감이 파견되었고 1895년 영춘군으로 승격되었다. 1898년 단양군 기록에 의하면 영춘군은 군내면, 동면, 대곡면, 가야면, 어상천면, 차의곡면의 6개면이 있었으며, 이중에서 지금의 영춘면에 속한 지역은 군내면에 상리, 하리, 백자동, 향산리, 보발리, 남천리 6개리, 동면에 의풍리, 대리, 용진리, 오사리 4개리, 차의곡면에 유암리, 사이곡리, 만종리, 장발리, 별방리, 사지원리 6개리였다.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통폐합으로 영춘군이 단양군에 합병되었다. 이때 영춘면에 오사리, 용진리, 동대리, 의풍리, 상리, 하리(소재지), 백자리, 남천리 8개리를, 차의곡면에 유암리, 사이곡리, 만종리(소재지), 별방리, 장발리, 사지원리, 향산리 7개리를 관할했다. 이때 군내면과 동면이 폐지되고 보발리가 가곡면으로 편입되었다. 1917년 9월 25일 차의곡면과 통합하여 오사리, 용진리, 동대리, 의풍리, 상리, 하리, 백자리, 남천리, 유암리, 사이곡리, 만종리, 별방리, 장발리, 사지원리, 향산리 15개리를 관할했다. 1946년 1월 향산리가 가곡면으로 편입되었고 1976년 10월 1일 별방출장소가 개설되었다. 1985년 하리, 유암리, 별방리, 장발리, 남천리가 각각 1~2리로 분구되었으며 1989년 9월 23일 별방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삼태산에서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서 방살미 갈림길 이정표[↓삼태산 정상 60m, ←방살미, ↑삼태산주차장1.56km]에서 아무 표시가 없는 우측 방향이 지맥길이다. 지맥길은 삼태산에서 우측의 영춘면 안으로 온전히 들어서서 해고개를 지나 430.1m봉까지 이어진다. 방살미 마을은 어상천면 대전리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사기막골 동쪽 삼태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자연 경관이 뛰어나며 웃방살미와 아랫방살미가 있다.
♤ 만종리갈림길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는 삼태산 동남쪽에 자리잡은 농촌마을로 삼태산 밑이 되므로 만마루 또는 만종(滿宗)이라 한데서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울미, 절골, 평말 등이 있다. 울미는 효자문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돌토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큰절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평말은 평촌이라고도 하며 만종리의 중심 벌판에 있는 마을이고 효자문으로 평말 남쪽에 있는 조시영의 효자정문이 있다.
- 이정표 [← 0.6km 정상, (만종)주차장 1.2km]가 서있다.
♤ 오기산(五溪山/玉鷄山, 754m)/ 옥녀봉
삼태산 남쪽으로 어상천면과 영춘면 경계에 있는 농우재(노은재)고개가 삼태산과 오기산을 이어주는데, 예로부터 주민들은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삼태산을 남자산, 산세가 부드러운 오기산은 여자산으로 불러왔으며, 삼태산이 옥계산을 짝사랑 하는지, 옥계산이 삼태산(三台山)을 사모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둘은 그렇게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을 하는 산이라고 전해온다. 두 산은 그렇게 억만년 세월을 서로 바라만 보고 살아왔다고 한다. 서로 바라만 보며 그리워 하는 그렇고그런 사이라고 한다.
♤ 818m봉/ 삼리봉(영춘면 유암리, 만종리 → 사이곡리)/ 상자봉
상자봉은 정감록 비결에 영춘 삼태산 아래 십승지라고 기재되어 있다. 사이곡리는 삼타산(三朶山)과 백련산(白蓮山) 사이가 되므로 사이골 또는 사이곡(沙而谷)이라 하였다.
♤ 371m봉
이동통신 중계탑이 있는 봉우리이다. 좌틀로 꺽어 내려서면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상유암 마을이 보인다.
펩시콜라 2병, 물 1리터, 빵 1개를 보충해 출발했습니다. 배낭에는 항상 제가 비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스넥바와 양갱이가 있었고, 각동리에 다다를 동안 물은 그대로 유지를 했습니다.^^
♤ 해고개(日峴, 330m)/ 해현/ 갈고개/ 59번국도
단양군 영춘면 유암리와 사이곡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59번국도는 단양읍내에서 영월군 남면으로 넘나드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해현 또는 갈고개라 부르며 지대가 높아 해뜨는 것을 제일 먼저 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고개에서의 들머리는 절개지 사면 시멘트 수로를 따라 절개지 상단까지 올라서 등로에 합류한다.
♤ 단양군 영춘면 유암리
본래 영춘군 차의곡면의 지역으로서 놀암 또는 유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폐합에 따라 어상천면의 대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유암리라 해서 단양군 차의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에 차의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영춘면에 편입되었다.
구인사는 단양보다는 오히려 영월에서 더 접근성이 좋다고도 하더군요.
♤ 단양 영춘면 구인사(救仁寺)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의 소백산 기슭에 있는 절이며 구인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본산 사찰로서, 전국에 140개나 되는 절을 관장하고 있다. 1945년에 건립되었으며, 1966년 현대식 콘크리트조(造)로 지은 이색적인 건물이다.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장엄하게 늘어선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연화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월원각 스님이 1945년에 이곳에 손수 칡덩굴을 얽어 삼간초암을 짓고 정진 끝에 대도를 성취하여 구인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구인사는 현대식 건물의 대가람 (총건축면적 15.014㎡)으로 절 안에는 5층 대법당을 비롯하여 삼보당, 설선당, 총무원, 인광당, 장문실, 향적당, 도향당 등 50여 동의 건물들이 경내를 꽉 메우고 있으며 만여 명이 취사할 수 있는 현대식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구인사를 방문할 때 두 가지 볼거리를 빼놓으면 안 되는데, 이는 바로 국내 최대 규모의 대법당과 법어비이다. 대법당은1980년 4월 29일 준공된 5층 건물로 국내 최대 규모의 법당이다. 5층의 대법당은 상월원각 대조사가 삼간초암을 얽어 처음 구인사를 창건하고 수행하 시던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이는 남대충 대종사께서 대조사님의 생전 유지를 받들어 전통양식과 현대적 공법으로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대법당을 지은 것이다. 상월원각 대조사 법어비는 상월원각 대조사님께서 일생동안 종도들에게 가르쳐 오신 모든 법문을 총집약시켜 간략하고 명료하게 요약하여 설법하신 법어를 새겨놓은 비석이다. 이 법어 안에는 부처님 팔만대장경의 모든 진리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넓고 미묘한 불법의 이치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계곡 하나를 모두 차지하여 건물이 빼곡이 늘어섰고, 계곡을 안은 영주봉(수리봉) 정상에 있는 적멸궁까지 포함하면, 산자락에 소백산 구인사라고 씐 큰 바윗돌에서부터 계곡 전체와 산 정상까지가 모두 경내에 들어간다. 사찰의 건물로는 1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 설법보전(說法寶殿)과 목조 대강당인 광명당(光明堂), 관음전, 천태역대조사전, 수도시설인 판도암, 특별 강원인 설선당(說禪堂), 침식 공간인 향적당(香寂堂), 총무원 청사, 대중들의 수행공간인 인광당, 관성당, 광명당, 향적당, 도향당 등 50여 동이 있다. 현재 구인사 전각에서는 동시에 5만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설법보전과 대조사전, 관음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기도실 내지 대중생활실이라 전각을 주로 불공 드리는 기능으로 사용하는 조계종 사찰과 구조가 다르다. 조계종과 다른 이러한 모습은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설법보전에서 행하는 새벽 예불에 참관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찰 내 모든 승려들이 참례하지는 않고, 단지 당번 돌듯 불공 의식을 담당한 승려들이 돌아가며 새벽 예불을 본다. 다른 승려들은 농사나 자기 업무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데,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어지는 기도와 참선시간이 있지만, 모든 승려들이 기도 시간을 엄수하지는 않는다. 구인사는 승려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실천을 통해 자립적으로 사원경제를 운영하고 있다. 단일 사찰로는 국내 최대의 신도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관음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 430.1m봉/ 도계/ 삼리봉(단양군 영춘면 사이곡리, 영춘면 유암리 → 영월군 남면 연당리)
지맥은 이 봉에서 좌측이 충북 단양군 영춘면 유암리에서 영월군 남면 연당리로 바뀌고, 영월군 남면 연당리를 만나, 우 충북ㆍ 좌 강원도의 도계를 가르며 잠시 동향한다. 통상 430.1m봉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과 만나 이후 동쪽 방향으로 강원도와 충북의 도계를 가르며 맥길이 이어진다고 하나, 국지원 지도상에는 430.1m봉에서 조금 진행한 지점에서 영월군 남면과 만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 495m봉/ 도계/ 삼리봉(영월군 남면 연당리, 영춘면 사이곡리 → 남면 조전리)
지맥은 이 봉에서 영월군 남면 조전리를 만나고, 북향으로 방향을 바꿔 온전히 영월군 남면 안으로 들어서서 연당리와 조전리의 경계를 따라 관음당고개 이후 영월읍과 만나는 국지산까지 이어지게 된다.
♤ 영월군 남면 연당리(淵堂里)
연당리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있는 리(里)로, 양연(楊淵)과 승당(昇堂)에서 한 자씩을 따서 연당(淵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보안도(保安道) 소속의 역촌(驛村)인 양연역(楊淵驛)이 있었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또한 삼국, 고려시대에 걸처 수공업에 종사하며 키나 고리짝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천민 집단 구역인 양등소(楊等所)가 있었다.
좌측으론 지붕만 남겨진 폐가옥도 보이네요. 창고로 쓰는지...
♤ 영월군 남면 조전1리(지시골)/ 식수보충
특이한 모양의 상수도취수원을 지나고 사거리 임도로 내려 직진하면 지맥 능선에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비닐하우스를 통과하여 앞쪽 봉우리로 오른다.
♤ 고사골
영월군 남면 조전리 상촌 북쪽인 지당골 꼭대기에 있는 고개로 24절기 중에 하나인 소만이 되면, 보리가 익어가고 냉기는 꽃씨가 달리며 모내기와 함께 심한 가뭄이 계속된다. 이때 비가 안오고 가물면 조전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기우제를 올렸으므로 '고사골' 또는 '천제당골'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돈을 추렴하여 돼지를 잡고 삼색 과일과 술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는데 제관은 마을에서 존경받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 영월군 남면 조전리(助田里)
조전리는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리(里)로, 예부터 지명(地名)의 근원이 되는 이레밭이 워낙 크고 길어서 누런 황소로 이레 동안이나 갈아야 하는 '긴밭 → 진밭'이라 불러오다 한자말로 조전리라 바꿔 불려져 왔다. 상촌과 하촌으로 나뉘는데 하촌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골짜기가 쉰패랭이골이다. 1965년경 이 쉰패랭이골에는 철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 나무로 버팀목을 쓰고 기술도 그리 발달되지 못한 터라 사람들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시절 이야기다. 갑자기 무너진 갱도에서 단 한사람도 살아 나오지 못했고, 그 후 몇 사람이 죽은 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광부들이 썼던 이 패랭이의 숫자로 숨진 사람들 수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 관음당고개(觀音堂峙, 352m)/ 조전리고개/ 6번군도
관음당재는 영월군 남면 연당리 승당(昇堂)에서 조전리(진밭)의 상촌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로 영월에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으로 통하는 2차선 도로가 지나가면 고개 정상에 '조전리'라는 표시석이 서있는 조그만 소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고려 인종의 아들인 충희(沖曦)대사가 태화산 서쪽의 흥교사에 있을 때, 그 절에 봉안할 부처님(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가다 이 고개를 넘으며 쉬어갔다 하여 관음당재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산마루에 당(堂)을 세웠는데, 지금도 관음당재로 오르는 당마루 밑의 마을을 오를 승(昇)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승당 → 신댕이 → 신댈이라고 부른다.
- 대형 조전리 표지석이 있는 소공원으로 6번군도가 지난다. 관음당고개는 지시골로 들어가는 입구로 '지시골'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조전리 표지석이 있는 소공원 우측 앞 소로 건너에 지시골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좌측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볼록거울 옆에 있는 전신주가 들머리다.
♤ 449.7m봉/ 삼각점봉
sk텔레콤 조전중계기를 지난 관음당고개에서 1.6km 거리이고, 이끼가 껴 판독이 어려운 4등삼각점이 있다.
♤ 487m봉
좌측으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삼거리갈림봉이다. 지맥 마루금은 우틀한다.
♤ 면계(영월군 남면 - 영월읍)
국지산 정상 직전의 [←등산로] 팻말이 가리키는 좌측으로 내려서는 뚜렷한 길은, 좌측 영월군 남면(연당리)과 우측 영월읍(흥월리)을 가르며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지맥길은 이 곳 국지산에서 영월읍을 만나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좌 영월읍, 우 영월군 남면으로 나뉘면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정맥의 입해처에 맞춰 지맥의 끝지점도 합수점에 이른다고 본다면, 현재의 영월지맥의 끝 지점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국지산에서 동남향하여 ‘S’자 형태로 이어져 각동리 중말 남한강에서 그 맥을 다한다는 맥길은 원리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에 대체하는 합리적인 주장으로, 이 국지산에서 북쪽으로 영월군 남면과 영월읍을 가르며 이어져 536.6m봉에서 면계를 벗어나 북동향하여 팔괴리의 평창강과 한강(동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로 이어지는 맥길로 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정맥에 해당하는 산자분수령원칙을 지나치게 지맥까지 확장해석한 때문에 빚어진 무리한 억측일 뿐이다. 굳이 합수점을 향한다면 후자의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이 또한 완전한 두물머리로 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두물머리 맞은편에 해당하고,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인 영월 태화산이 빠지면서 맥길 또한 상당히 단축되므로 신산경표에 정한 길을 따른다.
이와 관련하여, 보충설명을 하자면 지맥이 합수점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산경표』의 산자분수령원칙을 내세우나 원칙이란 공히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일부 몇개가 합수점으로 향하는 지맥에 임의대로 산자분수령원칙을 끌어당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모든 지맥이 다 합수점으로 향할 경우 산자분수령원칙에 저촉되나 지맥 중 일부가 합수점을 향하는 것을 두고 산자분수령원칙을 지맥까지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로 『산경표』에서 정맥에 해당하는 산자분수령원칙이 지맥까지 일괄적으로 적용된다는 주장은 무지가 빚은 무리한 억측일 뿐이다.
영월에서 청령포에 들어가 노산대와 망향탑으로 오르면 이곳 국지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단종이 앞쪽 청령포를 건너지 않고 뒤쪽 산으로 도주를 했다면 국지산으로 향했겠죠.
♤ 국지산(菊芝山, 626.4m)/ 삼리봉(영월군 남면 조전리, 연당리 → 영월읍 흥월리)
국지산은 영월군 남면 광천리와 조전리 경계에 위치한, 조선조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남쪽 약 5km에 솟은 산이다. 국화와 지치가 많아서 국지산이라고도 부른다. 국지골은 매화동 입구에서 남향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광천리 마을은 산수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큰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큰 쇠못을 박아 장수의 혈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참나무 숲에 가려 전망이 좋지 않으므로 이전 망바위에서 조망을 감상하는 것이 좋다. 전망바위에서 정상에서 바라본 동남쪽 조망 50여미터 올라서면 삼각점이 있는 정상이다. 북으로는 영월읍을 감싸고 있는 봉래산과 계족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완택산, 고고산 정상이 하늘금을 그리고, 계족산 오른쪽으로는 응봉산과 망경대산이 긴 능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다. 남동쪽 흥월리 건너 태화산의 모습이 병풍처럼 듬직하게 자리잡고 오른쪽 멀리 신선봉, 국망봉,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소백산 주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영월군에서 세운 독특한 삼각형 모양의 정상석(국지산/ 해발 626m)이 있고, 국지산 정상에서 약 100m 정도 내려서면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는 암봉 전망대다.
국지산에서 조전리고개로 내려서는 길에 바라본 영월 시내는 봉래산이 대세였습니다. 발산은 보이지 않더라구요. 우측 계족산도 환히 보이고... 두위, 죽렴지맥을 하신 분들은 좀더 멀리까지 시야가 닿겠죠.
♤ 조전고개/ 문고개
조전고개/ 문고개는 조전리(진밭)의 국지골에서 흥월리 달이말(다릿말[月休里])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다. 이곳에는 사람의 키 크기 정도의 큰 바위 두개가 삽짝문 모양으로 서 있고 그 사이로 행인들이 지나 다닌다하여 이 바위를 문바위라 하고, 문바위가 있는 이 고개를 문고개라고 한다. 국지산에서 내려서면 임도가 나오는데 개념도상 조전고개이다. 직진해서 야산을 넘어가야 되지만 임도가 마루금을 따라 가니 좌측 임도따라 (350m, 약 5분) 진행하기도 한다.
- 성황당 흔적의 돌무덤과 특이한 형태의 고압선 송전탑이 있는 고개이다. 이 고압 선로는 근래 세워진 영월태양광발전소의 고압선 선로라고 한다.
♤ 달이말/ 다릿말(月休里)
달이말(다릿말)은 흥월리의 중심 마을로 지금은 폐교된 흥월초등학교가 있다. '달'은 '산' 또는 '들'이라는 우리의 순수한 말인데, 달이 연철현상에 의해서 '다라 → 다리'로 변했다. 이 마을 뒤에 있는 '달골'도 '산골짜기'라는 우리 고유의 땅 이름이다. 그러나 '달(산)'이 한자식 표기법인 '월(月)'로 잘못 의역되어, 원래 산골마을이라는 뜻의 '달(山) + 이(의) + 마을'이 '다릿말, 달지말'로 변했으며,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릿말을 월휴리(月休里)로 표기하여 달(月)과 연관시키거나, 옛날 이 마을에 큰 다리가 있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 참고로 강원도 방언의 ‘연철현상’은 ‘한 음절의 종성을 다음 자의 초성으로 내려서 쓰는 것을 말하는데, 그 예로 뱀→배미, 털→터리, 사발→사바리, 얼굴→얼구리 등이 있다.
한재산 정상 등로 옆으로 함몰 동굴인 돌리네(doline)가 자주 눈에 띈다.
♤ 카르스트지형(Karst topography)의 돌리네(doline)
지난 삼태산에서도 본 카르스트지형(Karst topography)의 돌리네(doline)가 석회암 지대인 영월에는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 곳에는 위험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 방심하거나 야간산행의 경우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다. 돌리네(doline)란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으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빗물이 스며들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녹아서 깔때기 모양 또는 작은 양념절구 모양의 오목하게 패인 웅덩이를 형성하는데, 크기는 지름 1m 내외에서 100m에 이르는 등 다양하다.
♤ 한재산(606.8m)/ 달돋이봉/ 삼각점봉
국가정보원 지도에는 한재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개념도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서래야 박건석님의 코팅지에는 '달돋이봉 / 606.8m'이라고 했다. 정상석은 없으며 판독이 불가한 삼각점이 있다.
- 정상에는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고 내리막 등로 우측에 철조망과 원형철조망이 쳐져 있다.
♤ 중골 임도
송전탑을 지나 만나는 임도에서 정면 산불초소봉을 생략하고 좌측으로 임도를 따르면 바로 흥지개고개/ 흥교재로 진행하게 된다. 송이 채취지역으로 등로에 철망이 둘러쳐져 있다.
초소 아저씨와 이바구좀 나누고....
♤ 노란색 산불초소봉(563.7m)
임도에서 약 10분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멋진 소나무가 어우러진 산불초소봉이 나온다. 벌목지를 헤치고 올라서야 한다. 급하게 좌틀로 급경사를 내려서면 다시 임도와 만난다.
이제 본격적으로 태화산으로 달라붙는 곳입니다.
♤ 흥지개고개/ 흥교재(휜깃재)/ 나그네 쉼터(정자)
흥지리고개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곳 우측 아래에 흥교리(행정지명 흥월리) 휜깃마을 있어서 휜깃재라고도 부른다.
- '태화산 등산로 입구' 표지판 따라 흥교마을로 들어선다.
♤ 흥교사(興敎寺)
흥교(興敎)는 북쪽 달골에서 휜깃재(흥교재)를 넘어 흥교분교가 있는 동네로, 학교터에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興敎寺)가 있었으므로 흥교라 하였다. 흥교사(興敎寺)는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 태화산 서쪽에 있었던 대사찰로, 681년(신라 신문왕 1)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대사찰로 번창하였다가, 조선 전기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화산 서쪽에 고려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가 있었다. 이 절에 고려 인종(仁宗)의 아들인 충희(冲曦)대사의 비석이 있었는데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이자 우사간이었던 최선(崔詵)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비석의 비문을 썼다. 글씨는 벗겨져서 한 자도 알 수 없으나 승통을 지낸 충희의 제자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흥교에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흥교사는 아홉 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공양미를 씻을 때는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랭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의 부패가 심해져, 돈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오면 돈과 물건을 빼앗은 뒤 마을 뒤에 있는 사굿구덩이에 처박아 죽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곳 흥교사는 빈대가 많이 꼬여서 결국은 절에다가 불을 질렀는데 절집이 보름간을 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최근 객토를 위해 땅을 팔 때 절터에 타다 남은 기둥과 숯이 나왔다. 그 절터인 흥교분교 운동장에서 1984년 높이가 6.5cm, 둘레가 2.5cm인 석가여래입상이 발굴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영월지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개와(蓋瓦)가 발견되었는데,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와 귀면와(鬼面瓦), 그리고 용 두 마리가 좌우에 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구슬띠무늬(蓮侏文)가 그려진 암막새(암키와 끝에 드림새를 붙이는 개와)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부도나 고려 청자 파편, 석탑조각들이 그 흔적을 남긴 채 널려있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弓裔: ?~918)는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서 중이 되었는데, 『삼국사기열전』에 ‘弓裔 便去世達寺 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自號善宗, 궁예는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가 있는 곳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이름을 선종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 3권에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장사(莊舍)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내리군은 본래 내성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교사의 전신이 세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궁예는 환속하여 892년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를 중심으로 진(陳)을 치고 내성(奈城, 영월), 주천(酒泉), 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진부)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주천에 있는 법흥산성, 도원산성 그리고 북면의 공기산성이 그 당시에 쌓았던 성(城)으로 추정된다.
우측으로 흥교마을이 바라다 보이고, 웬 허름한 판잣집이 나타나 뭘까 하고 문을 열어보니 선반위에 "성황지신위"위패가 모셔져 있네요. 완만한 길을 따라 당집을 지납니다.
♤ 당집/ 신당(神堂)/ 부군당(府君堂)
당집은 다른 말로 신당이라고도한다. 각각의 특색에 따라 몇 종류로 구분되는데, 굿판을 벌이는 굿당, 약수터나 영천(靈泉)에 세워진 용신당(龍神堂), 산신도를 모셔놓은 산신각(山神閣), 무당의 무구(巫具)나 무신도(巫神圖)를 모셔놓은 장소, 촌락공동체의 수호신당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호신당의 비중이 가장 커서 신당이라고 하면 흔히 이것을 가리킨다. 수호신당은 8·15광복 이후 동제당(洞祭堂)으로 통칭하였으나 지방마다 차이가 있어 경기·충청지방에서는 산신당 또는 서낭당이라 하며 강원지방은 서낭당, 영호남지방에서는 당산, 서울 한강변 마을에서는 부군당(府君堂)이라고 한다. 동제당은 대개 신목(神木)만 있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나 간혹 신목 옆에 작은 사당을 지어놓은 경우도 있다. 주로 수령이 많은 거대한 소나무나 느티나무가 신목으로 모셔지는데, 여기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 나무를 베거나 해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신당에 모셔진 신 가운데에는 남신보다 여신이 월등히 많은데 이는 대지의 풍요로움을 빌던 오래 전 농경사회의 풍요 여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흥교마을 태화산입구에서 저렇게 삼태산이 빤히 바라다보입니다.
♤ 영월읍 흥월리 흥교마을
흥교(흥월2리) 마을을 지나며 맥길이 마을 농로와 논밭으로 끊어져 정면 산마루를 짐작하여 이어가야 한다. 마을 포장 농로를 따라 정면의 전원주택 방향으로 진행하다 흥교마을을 우측으로 두고 지나 삼거리 갈림길에서 원래의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져 산능선으로 올라야 하나, 도로 앞에 출입을 금하는 표지판과 금줄이 쳐져 있고, '←등산로' 표지판이 좌측으로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좌측 2층 주택 방향으로 몇 발자욱 들어서다, 다시 우측의 비포장 임도로 몇 발자욱 들어서서 임도는 정면으로 계속 이어지지만, 초입 우측편 시그날이 많이 달려있는 능선길로 올라서서 능선길에 합류한다. 능선 초입에서 우측 숲길로 올라서서 들머리 방향을 뒤돌아 내려다 보고, 본격적으로 태화산 전위봉(1,023.4m봉)까지 오름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이후 400고지 이상을 줄기차게 쳐 올려야 한다.
밭으로 내려서 포장임도의 등산로 안내표지를 따라가니 태화산입구가 나옵니다. 다시 나와 그 옆 우측능선으로 올랐습니다.
♤ 638m봉/ 능선갈림봉/ 도계(강원도 영월읍 흥월리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
잠시 흥교마을 안길을 따르다 좌측 펜스를 넘어 영월읍 안을 달리다 능선갈림봉(638m)에서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를 만나 동향하다 동북향으로 바뀌어 태화산과 전망대봉(1030.9m)을 지나 982m봉까지 이어진다.
치악산을 감상하며 매화산, 천지봉, 비로봉, 남대봉을 대입시키는데,,, 하마트면 전위봉을 지나칠 뻔 했네요. 태화산 능선마루금 오르는데 다 오를듯 오를듯 하면서도 한참 걸립니다.
♤ 태화산 전위봉(1,023.4m)/ 도계, 면계/ 삼리봉(영월읍 흥월리, 영춘면 상리 → 영춘면 오사리)
길없는 곳으로 치고 올라야 한다. 잡목 사이로 멀리 소백산 능선이 건너다 보인다. 갈림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으로 오르면 1,023.4m봉이고, 우측 능선길은 흥교로 내려서는 등로인데 등산로가 폐쇄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관음당고개에서 10.5km 거리이다.
태화산은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중의 하나로, 북동쪽 남한강 기슭에는 고씨동굴(高氏洞窟, 천년기념물 219)이 있고, 부근에 단종(端宗)이 유배되었다가 묻힌 청령포와 장릉(莊陵, 사적 196) 외에 선돌 등 명소가 많습니다.
♤ 태화산(太華山, 1027.5m)/ 도계, 군계
태화산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고 쓰는 한편, 대화산(大華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영월 사람들은 「화산」이라고도 부른다.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서 산세는 대체로 완만한 편이며, 서쪽을 제외한 삼면을 남한강이 ⊃자형으로 에워싸고 곡류하여 주능에서 조망되는 강 풍광이 남다르게 아름답다. 「영월군읍지」에는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읍의 안산(案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월부읍지」와 「여지도서」에는 "부의 남서쪽 16리에 있다. 원주 사자산 동쪽으로부터 뻗어 나온 읍치의 안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태화산에서 잠시 내려서면 통나무 벤치가 놓여있는 쉼터를 지나고, 정상에는 정상석이 두개 있으며 정상석 사이에 2등삼각점(영월 23 / 1995 복구)이 있다.
♤ 큰골갈림길이정표
큰골갈림길 이정표(국가지점번호 라사 8774 0287/ ← 큰골2.4km, ↓태화산정상 0.4km)에서 정면 방향의 암봉으로 맥길이 이어져 있으나 위험하여 좌측 큰골 방향으로 우회한다. 위험지역에 설치된 데크길을 지나고 큰골갈림길 이정표(국가지점번호 라사 8788 0300/ ↓ 큰골 2.2km, ← 고씨굴 5.1km, 태화산정상 0.6km)에서 고씨굴 방향이다.
♤ 큰골(大谷)
큰골은 흥월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약물골을 통하여 태화산(太華山)으로 갈 수 있는데 길옆에서 솟아나는 굴물은 차고 깨끗하여 옛날에는 나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 왔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물을 이용하여 송어 부화를 하고 있고 흥월리 간이상수도의 수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 전망봉(1,020.9m)/ 삼리봉(영춘면 오사리, 영월읍 흥월리 → 팔괴리)
지맥의 좌측이 영월읍 흥월리에서 팔괴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통나무 벤치 2개가 놓여있다. 전방 우측 아래로 영월지맥이 끝나는 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 중말마을과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남한강의 S라인이 조망되고 각동리 중말 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는 지맥 능선에 여러개의 볼록한 봉우리가 이어지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 있다. 남한강 너머로 마대산, 그 뒤로 선달산 백두대간 마루금과 좌측 멀리 태백산까지 조망된다.
♤ 삼면봉(영월읍, 단양군 영춘면 → 영월군 김삿갓면)/ 군계/면계
지맥의 우측이 단양군 영춘면 오사리에서 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로 바뀌는 삼면봉이다. 암반길로 내려서서 이정표 [국가지점번호 라사 8807 0328/ ← 고씨굴 4.73km, 큰골 2.57km/태화산정상 0.97km →]를 지나고 또 다른 이정표 [국가지점번호 라사 8821 0334/ ← 큰골 2.70km/태화산정상 1.10km, 고씨굴 4.60km →]를 지나는데 이 곳이 단양군 영춘면에서 영월군 김삿갓면으로 바뀌는 지점 쯤인듯 하다.
- 삼면봉에서 우측이 김삿갓면으로 바뀌어 지맥은 단양군과의 경계를 벗어나 영월군으로 접어들어 영월읍과 김삿갓면을 경계를 따라 고씨굴갈림길까지 이어진다.
♤ 영월군 김삿갓면
강원도 최남단에 자리한 영월군 김삿갓면은 고려시대에는 밀주(密州)라 불렀으며 1698년(숙종 24)에 하동면으로 개칭되었다. 강원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에 지정된 이 지역은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의 묘가 하동면 와석리에서 발견되어, 영월군은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9년 10월 면의 명칭을 김삿갓면으로 변경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 덕분에 고장 이름이 김삿갓면으로 바뀐 이곳은 청정한 자연환경을 지키고 있어 청정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 24개의 박물관이 이 지역에 있는데 슬로시티 김삿갓면에 난고김삿갓문학관과 영월동굴생태관, 조선민화박물관 등 총 8개의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 전망대(962m)
좌측 아래 날머리 각동리 마을과 수장산 아래로 굽이굽이 흐르는 남한강... 각동리로 이어지는 능선과 각동리 우측 남한강 너머로는 삼봉(664.8m), 수리봉(752.6m), 맞대산(1,051.0m)이 이어지고, 우측 멀리에는 소백산 능선이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조망된다. 영월지맥의 마무리 각동교와 옥동천이 흘러나오는 뱃나드리도 조망된다.
♤ 태화산성(泰華山城) 갈림봉(915.1m)
태화산성은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 태화산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태화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해발고도 약 900m의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너비 약 400m, 둘레 약 1,200m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성 내부에 골짜기를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으로 영월에 있는 대야성ㆍ 정양산성ㆍ 영춘산성과 동일한 시기(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산성들이 돌로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실전용으로 사용된 반면, 4개 산성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태화산성은 토성(土城)으로 적정을 감시하고 그 상황을 우군에게 전하는 사령탑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부분적으로 여장(女墻;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과 망을 보는 망대(望臺)의 흔적이 확인된다. 성 안에는 약 300㎡의 평지가 있으며, 깊이 6m·폭 4.2m의 우물도 있었다. 태화산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느 집안에 남매(男妹) 장수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성(城) 쌓는 내기를 시켜서 이기는 자식을 키우기로 하였다. 아들인 왕검에게는 정양리에 돌성을 쌓게 하고, 딸은 태화산에 흙성을 쌓게 했는데 어머니가 보니 딸이 아들보다 먼저 완성할 것 같으므로 흙성을 무너뜨리자 딸은 흙더미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왕검성은 지금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으나 태화산성은 무너졌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전해 온다. 산의 기슭에는 문짝처럼 생겼다 하여 '문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뒤에는 둥글고 넓은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대여섯 사람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방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잘바우'라 한다.
- 지맥은 고씨굴 3.30km 방향이다.
여기서부터는 영월읍과 헤어져 온전하게 김삿갓면 안으로 들어가 지맥길을 진행하게 됩니다.
♤ 각동리 갈림이정표 [국가지점번호 라사 8945 0422/ ← 고씨굴 3.00km, 큰골 4.30km/ 태화산정상 2.70m →]에서 우틀하여 급경사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고씨굴갈림길에서 온전히 김삿갓면 각동리 안으로 들어서서 남동향하여 남한강변 중말에서 그 맥을 다한다.
♤ 영월고씨굴(寧越高氏窟)/ 천연기념물 제219호
영월고씨굴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에 위치한 석회동굴이다.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이 동굴은 약 4억 년 전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주굴의 길이는 1.8km이고, 지굴을 합하면 총연장 6㎞에 달한다. 굴 안에는 4개의 커다란 협곡과 호수를 비롯하여 3개의 폭포, 10개의 광장 등이 있으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종유석ㆍ석순ㆍ석주ㆍ동굴진주ㆍ동굴산호 들이 조화있게 배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동굴 안의 기온은 항상 16℃를 유지하며, 특히, 지구상에서 없어졌다고 하였던 화석곤충인 갈로와벌레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나방ㆍ지네ㆍ박쥐ㆍ톡톡이ㆍ장님옆새우ㆍ거미 등 41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데, 신속(新屬) 1, 신종(新種) 7, 신아종(新亞種) 7의 동물이 새로 판명되었다. 고려장터와 수도장으로 이용되어오다가, 1969년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부터 관광동굴로 개발되었다.
♤ 괴목고개(672m)
등로 우측으로 희미한 산길이 보이는 안부(672m)를 지나는데, 각동리 샘골과 새터사이에 있는 괴목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마을에 큰 괴목(槐木)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확실하지는 않고 마을 앞에는 커다란 거북바위가 있어 구암(龜岩)이라고도 한다.
♤ 620.8m봉/ 삼각점봉
나무에 621m봉 산패와 선답자들의 띠지가 많이 걸려있다.
- 4등삼각점(예미 441/ 2004재설)이 있다.
안테나봉 가파른 경사를 땀을 삐질 흘리며 온몸의 신경을 집중하여 내려서니 방장님 오래된 띠지가 보이네요. 마지막이라 다리에 힘도 풀린 상태에서 가파른 경사를 내려설려니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임도 사거리가 나와 산에서 다 내려섰나 했더니 직진으로 들어가 밭을 통과하고 30분 정도 임도를 걸어나가야 마을회관 종착지에 이릅니다.
♤ 315m봉
나무주사 표지판이 걸린 사거리에서 직진 방향 산불조심표지판 방향으로 들어서서 315m봉을 넘어서 중말마을로 595번 도로에 내려선다. 황토민박 슈퍼 주차장에서 각동마을 표지석을 건너다 보고 마을회관 앞, 황토민박슈퍼 옆마당 옆으로 나가 남한강(동강)에서 영월지맥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영월지맥의 끝점은 합수점, 두물머리를 향하는 마루금은 아니다. 즉, 국지산과 태화산을 지나온 영월지맥의 끝점을 어디로 정하든 강의 하구도 아니고 좌우로 구분짓는 강도 없다. 때문에 그냥 내려온 방향에서 물을 만질 수 있는 곳에서 마무리를 하면 될터인데, 그래도 가장 비슷한 합수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을 찾자면 중말의 각동마을회관에서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학생수련장이 위치하고 있는 각동의 나루터인 「뱃나드리」라 불렸던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곳은 남한강 반대편으로 옥동천이 흘러나와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인 맞밭나루와 마주보는 곳이다.
영월지맥의 종착점 각동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대야산성을 알아봐야 하는거였군요.^^
♤ 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角洞里)
충북 영춘면(永春面) 오사리(吾賜里)와 접경을 이루는 곳으로 각동교(角洞橋)가 완공되기 전에는 맞밭에서 나룻배(찻배)를 이용했으므로 교통이 불편하였다. 봉우재 밑으로 오른쪽 편으로 석성(石城)인 대야산성[大野山城 : 대야리 본동과 가재골로 넘어가는 큰 재 정상에 있는데 삼국 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한 성으로 온달성과 정양산성(왕검성) 사이에 축조되었다.]이 있으므로 삼국시대의 왕검성, 완택산성, 태화산성 그리고 단양의 온달 성을 연결시키는 봉수터(烽燧基)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각동리마을 강 건너편에 있는 대야산성(大野山城)에서 각동리를 내려다보면 마을 형상이 큰 소가 물을 마시는 형국이다. 서쪽으로 태화산 줄기가 길게 뻗어 소의 등을 형성하고, 마을 뒤에 우뚝 솟은 혈구뎅이는 소 머리이며, 그 밑에 있는 바디리 굴은 눈, 그리고 큰 골짜기인 골말은 소의 입에 해당하여 남한강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므로 '뿔 각(角)'자와 '고을 동(洞)'자를 써서 각동리라 하였다.
지맥에서 합수점을 말씀하시는 분들, 국지산에서 동강과 서강의 합수점 건너편으로라도 가야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라면 영월지맥의 끝머리도 옥동천의 합수점 건너편으로 위안삼을 수 있을까요. 저는 지맥에서 합수점을 말하는건 터무니 없는 일인지라 가지 않았습니다.^^ 여기 각동마을 표지석에서 끝냈습니다.
♤ 뱃나드리
뱃나드리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대야리(大野里) 맞밭과 각동(角洞)으로 이어지는 나루터이다. 대야리에서는 각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요 영춘에서는 각동의 마지막 마을이다. 각동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옥동으로해서 상동 황지로 이어지고 좌로는 진별리 정양으로 해서 영월과 정선으로 이어지고 아래로는 오사리를 거처 영춘 단양 충주를 거처 서울로 이어지는 각동의 나루터이다. 1950년 이전만 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군의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이동하여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 석유 등의 생필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60∼70년 전만 해도 상선이 드나들며 어물 소금 등의 생활필수품과 곡식을 물물 교환하던 곳으로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던 곳이다. 한강과 옥동천의 합수지점으로 수심이 깊어 배가 드나들기에 좋다.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강물이 굽어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첫댓글 여기 숨가뿐분 또 계시네..
긴긴 인생...뭐가 그리 바뻐서 단숨에..??
쉬엄쉬엄 다니셔요. 그러시다가 하늘나라도 단숨에 가실수 있어요.
조위원장님!
산행 방식이야 젊은이와 노인이 다르듯 스타일에 따라 달를 수도 있겠죠.^^
여러 사람이 갈 수도 있고, 홀산일 수도 있고,
주간에 갈 수도 있고, 야간에 갈 수도 있습니다.
제각각 본인에 맞게 각자 취향대로 다르게 갈 뿐이지 그게 틀린거라고 보아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게 오히려 더 짐일 수도 있습니다.
요지는 내용도 보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혹시 꼭 봐야 할 곳을 빼먹지는 않았는지,
알고 가야 하는데 그낭 지나치진 않았는지...
바삐 가지만, 한꺼번에 많이 가지만, 빼먹지 않고 짚어보고 가느라 고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월지맥 3구간 고생하셨습니다~
항상 열정적으로 산행하신 산행기에 흠뻑 빠져봅니다~
안.줄산을 응원드립니다~
법광선배님!^^
이번에도 선배님 띠지 확인하며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 띠지는 아직 장만하지 않았는데요. 대신에,,,
가다가 있어야 할곳에 떨어진 띠지가 보이면 주워달고,
한 곳이나 정상에 모여 있는 띠지 가야할 방향으로 분산시키고,
위치선정이 잘못되었다 싶으면 이동시켜 다시 매달아두고 간답니다.
홀대모 띠지는 21장인가 가져가서 모두 다 소진하고 왔습니다.^^ 이제 뵐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감사합니다.
이기뭐꼬~~
그림은 어디로 탈출해불고,
퐁라라님이 영월에서 헤멜때 비실이는 월아지맥에서 가을이랑 단풍놀이 했었는데,
갑산지맥이랑, 태화산이랑, 고씨동굴에서 놀다 왔었는데,
퐁라라~~
다니다가 무릎팍 원형보존관리법에 잡히면 과태료 엄청 비쌀 것인데요,
날씨 쌀쌀할때에는 특히 조심하시것죠?
비실이대선배님!
다음에 사진을 올리면 꼭 두번일 하게 만들더군요.
처음은 꼭 사진이 사라지네요. 한번 사라지고 다시 올려야 제대로 남습니다.
작업하는데 시간좀 걸립니다.^^ 30분쯤... ㅋ
다음이 더 좋아 졌어야 하는데 왜? 이럴까요.
올릴때마다 우쌰~~ 하게 되더라구요,
비실이가 돌팔이라서 그렇것죠?
홀산으로 장거리 뛰시는 분 하면
요즘 칠갑산님하고 퐁라라님...
공통점이 지맥을 타시는건데
위 두분이 참 절 고민되게 만듭니다.
홀산이 참 매력있게 다가오는데(물론 아들을 고려하면 그 준비과정이나 준비물이 갑절일테니-- 상상만으로 매력있게 ㅋ)
포스팅을 찬찬히 읽다보면
구간에 대한 사전 학습이며(머 이거야 빼버리거나 위 두분 자료를 성명과 출처에 색인표 달아 인용하면 되니까.)
머리 넘어설 배낭 무게며
산행맵도 싫어하는 성격에 밤길이며
또 거리는 피할 수 없이 장거리일거며...
결론은 제 갈 길이 아니다! 이거네요^^
실로 대단한 분들의 산행기로 이미 충분히 대리만족하고 있으니까요.
라라님 대찬 산행길
항상 안전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제 눈엔 '다 필요 없고 안전과 건강만 지키면 다 좋다!'
안전건강주의를 부르짖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슬하선배님!
칠갑산선배님은 이제 162지맥 마무리에 드셨구요. 저는 이제 12개 끝냈습니다.^^
지맥산행을 누가 시켜서 하면 안 합니다. 못 합니다.
전 등산여행이 취미였거든요.
모르는 세계와 부딪쳐 보고, 마음껏 돌아다니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과정 또한 재미있습니다.
전문 지식은 아닐지라도
모르는걸 알아간다는 재미, 모르는 세계에 대해 새로 알아간다는 작은 재미가 있습니다.
발이 넓지 못해 국외로 나가진 못하지만
일상의 여건을 활용해 틈틈이 국내만이라도 지맥을 핑계삼아 돌아다니는 겁니다.
제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엔 그나마 제일 고상한 방법이고,
현재로선 지맥 만큼 재미있게 심취할 다른 취미가 없습니다. ㅋ
인생은 유한하고 나이 먹어가며 건강하게 먹고 싸기 위한 문제가 젤 중요합니다.
어떻게든지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기껏 힘들게 산줄기를 타는게 취미로 잡혔네요.^^ 사실 더 나은 방법도 찾으면 있을법 한데....
그러다가 골빙듭니다이.
무릎팍 원형보존관리법위반죄,
단속하는 보초는 본인이라는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ㅎ
씨리치부터 3구간으로 진행한 구간이니 제가 진행한 내용으로 보면 2.5 구간쯤 될 것 같은데 원샷에 마무리를 하셨군요
용두산에서의 조망이 기억나고 한국전력 변전소 때문에 길게 우회한 도로가 생각나며 가창산과 갑산지맥 분기점은 다시 올일이 없다며 강원도 산친구들과 농담도 했었는데 몇년 지나지 않다 다시 한번 더 올라갔네요
삼태봉 누에머리봉 오름길과 하산길이 죽음이었다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눈이 쌓여 있는 태화산 정상에서 각동리 남한강으로 내려오면서는 완주했다는 기쁨에 만세를 불렀던 기억도 납니다.
몇 년이 지나 풍라라님의 산행기를 읽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산줄기임을 다시 한번 느끼며 잠시 옛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추운 날씨에 장거리 산행으로 영월지맥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 드림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칠갑산선배님!
글고보니 제가 옛 영춘지맥을 마무리하였네요.^^
초창기 영춘지맥을 하신 분들은 각동리에서 출발하셨을터
그 가파른 내림길을 오르는것 또한 어려웠을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개나리공원묘지에서 내려서서 변전소와 정수장도 우회하면서 삭고개까지 진행하는데
다시한번 가게되면 수월하게 길을 잘 찾으리란 생각이 들던데... 길이 끊어져 있어서
길 잇기도 어려웠지만 여름이면 그 일대에 잡목때문에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배가되겠더군요.
단양 어상천면과 영춘면을 지나며 임현리 절골과 관계된 이야기며,
왕박산과 조을재에 서려있는 이야기 등 사무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삼태산 직전 무도리임도에서 잠깐 1.5km 정도를 우회했는데,,,
야간이라 들입구도 잘 보이지 않고, 삼태산을 바삐 넘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여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삼태산 가파른 오름과 가파른 내림을 선배님도 기억하고 계시군요.
게다가 눈까지 내렸다니 태화산 마지막 안테나 있는 곳에서 내림길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저도 갑산지맥을 하게될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로는 그곳에 다시갈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힘든 영월지맥을 3구간으로 끝장을 보셨네요.
우리는 여름에 시작해서 무지하게 힘들엇던 영월지맥 이었습니다.
힘들엇던 구간은 어디라구 말할수도 없고 마지막에 6백 몇봉 인지는 생각도하기 싫습니다.
그래도 태기산에서 치악산을 멋지게 보았고 치악산에서 사방팔방이 멋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싸리치는 지금도 자주 올라가서 쉬는 곳이구요.
영월지맥 졸업 축하드림니다.
부뜰성님!^^
성님이 자주 찾아 차박을 하시는 싸리치재를 지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바로 옆에 민가 있잖아요. 유공자의집...
그집에 물 얻으러 들어가보니깐...
그 산불감시초소 올라가는 옆으로 윤형철조망이 쳐져 있죠...
그 곳에 특용작물 산양삼(장뇌삼)을 재배하는 주인인가 보드라구요.
집 안에 담금주가 잔뜩 진열되어 있더군요.
다음에 가실 때는 고기를 넉넉하게 준비해 가셔서 한잔 하자고 해보십시요.^^
저는 치악산에서 조망을 살피지 못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전재에서 매화산 올라갈 때부터 매화산 정상이 시커맸습니다.
비가 온다는 날씨였는데 비가 내리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수레너미재에서 치악산 비로봉 오르며...
천지봉, 수렴재, 배너미재 등등을 지나는데 준희선생님 산패가 없으니 뭔가 빼먹은 것처럼 영 허전하더군요.
산패작업을 하신다는게 번거롭고 힘든 일이지만 후답자들에게 얼마나 도움되는지 그 고마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겨울날씨가 준비되어 있는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가을모임에서 반갑게 뵙겠습니다.^^
큰 산줄기 하나 무탈하게 마무리하신 것 축하 드립니다.
그냥 산줄기 하나 걸었다는 의미를 넘어서
산줄기 하나를 통째로 삶아 먹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시켜
그 자료와 산자락 속에 푹 빠지는 과정이 눈에 선하게 잡힙니다.
장거리 산행을 홀산으로 하다보면
배낭 무게가 제일의 문제로 대두되기 마련인데,
친구분 덕분에 무게를 확 줄였으니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싶네요.
날씨 덕분에 맑은 풍경을 즐기신 것 같습니다.
특히 용두산, 가창산, 삼태산 조망이 압권이었을 텐데,
삼태산 구간은 야간이었기에 아쉬움으로 남았을 테고....
일반적으로 야간산행은
GPS가 앞장서고 사람은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형태여서
산행의 주체성이 상실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아주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야간산행을 삼가합니다만....
야간산행으로 잃는 게 있으면 그 반면에서 얻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산에 푹 빠졌다가 산화되어 가는 퐁라라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바람직해 보여 감상하는 사람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이 산사랑의 모습이 인생 끝까지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범산선배님!
하나의 산줄기를 준비하기 위해 대략 현재까지 열일곱 분의 산행기를 살피는것 같습니다.
때로는 시간에 쫒겨 대여섯 분의 산행기만 읽어보기도 시간이 벅찰 때가 있지만 가급적 많은 자료를 얻기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하나의 산행기를 작성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선답자님들을 본받고 싶답니다.
하나하나 산행기를 읽고 취합하면 희미하던 시야가 밝게 비추둣 환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또한 후답자들이 번거로움을 덜고 더 완성도 높은 산행기를 작성하도록 많은 자료를 남겨드리고 싶은 마음이랍니다.
영월, 춘천,,, 영춘지맥을 졸업하고,,,
산경표를 발전시키고 보완하여 산꾼들에게 보다 풍족한 산줄기를 제공하려는
신산경표의 의중을 폄훼하려는 분들의 의도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산경표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순수한 신산경표의 의도와는 다르게
신산경표를 폄훼하고 산꾼들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가벼운 분들의 의도에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신산경표의 학문적인 업적은 지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먹물과 가방끈을 넘어선 성과였습니다.
아직도 일제시대 조사에서 한발자욱도 진전하지 못한 국내 학계에 경종을 울린 금자탑이기도 하답니다.
퐁라라운영자님
이틀동안에 65km, 34시간의 악전고투 속에 마무리하신 영월지맥 졸업을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첫날은 삼태산을.. 다음날은 태화산을 넘어 각동리에서 마무리하셨습니다.
삼태산 오름길에 지치던 기억도 아련하게 남아 있네요.
안테나봉 내림길에 빛 바랜 제 흔적도 상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아쉬운 한줄기를 마치시고, 또 다른 산줄기로 향하시겠지요?(금오지맥)
겨울철 건강 유념하시는 산행되시길 바랍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