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 참전해 캄보디아 폭격을 거부하다 군사법정에 기소됐던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은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라고 증언을 한 바가 있다.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9, 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0,000 만 t의 3 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 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 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출처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쓴 "킬링필드의 진실")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사용어가 ‘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은 폭격을 무차별으로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인 것이다.
미국이 월남에서 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 1.5배를 사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7,200억 달러 (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0억 달러 정도)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렸다.
전쟁에도 생산성이라는 것을 따진다면 월남전은 역사상 가장 비생산적 전쟁이었다. 베트남 측 사망자 수만 약 360만 명, 미국 측 사망자는 약 5만 8000명이, 한국군 5000명, 호주군 500명이었다. 이런 막대한 사망자를 내면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월남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월남전에서 미군의 보급은 무제한이었다. 미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적에 비해 무려 600배 빠른 속도로 탄약을 소비했다. 예를 들어 1969년에는 이들은 지상탄약을 매달 10만톤 사용한 반면, 공산군은 150톤만 사용했다. 미군이 전투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남베트남 지휘관들이 미국의 군사 지원이 줄어들어 보급이 부족하다고 쉴새 없이 개탄했던 1974년에도, 남베트남측은 상대보다 65배 많은 탄약을 사용했다.
이 수치에 폭격까지 포함하면 비율은 더더욱 한쪽으로 치우친다. 베트남전에서 미 폭격기가 북베트남,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독일과 일본이 세계 2차 대전 때 투하한 폭탄의 양을 합친 것보다 약 두 배가 많았다.
월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전쟁배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즉 미국의 자존심을 구긴 대가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 1971년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그때까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 중지조치를 취하자 국제통화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국제 금융 혼란이 닥쳐서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월남전의 피해는 월남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이웃에 있는 캄보디아에게도 혹독했다. 캄보디아의 학살은 69 년~73년간 벌어진 미국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제 1 학살과 크메르 루주 집권기간인 75년~79년까지 벌어진 '킬링필드'로 알려진 제 2 학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국방연구원의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에는 캄보디아 땅에 단지 베트콩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4 년간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자가 60 만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미국의 학살책임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적대적 경제 봉쇄 속에서 베트남의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붕괴하는 건 불가피했다.
견디다 못한 공산당은 1980년대 초에 도이모이 즉 "사회주의 지향의 시장 경제"라는 노선을 공식 채택하고 비밀리에 워싱턴에 타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재건 원조금 35억 달러, 고엽제 피해와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 요구를 중단했다. 그러나 미국은 고엽제 피해 보상금으로 자국 참전군인들에게 20억 달러를 썼지만 200만이 넘는 베트남 희생자들에게는 아무 보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트남 공산 정권은 심지어 구(舊) 사이공 정권의 전쟁 부채 1억 4600만 달러 상환에도 동의했다. 양보를 받은 미국은 1994년 거의 20년 동안 베트남을 질식시켰던 무역 봉쇄를 해제했다. 비로소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기금 공여 기관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경제는 한 해 8.4% 성장했고, 곧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쌀 수출국의 하나가 됐다.
그러나 천하무적이 아니라 천하가 적인 미국을 이긴 베트남도 부패는 이길 수 없었다. 사실은 구월남 정부의 패배도 부폐 때문이었다. 구월남 정부는 군부세력끼리 정권 쟁탈전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부폐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민중들뿐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을 핑계로 군수산업이라도 일으켰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아쉬울 일이 없는 한국군이 하는 일은 도둑질뿐이었다. 군대 안에서 상납을 하는 풍토가 고질화된 것도 월남전 참전 이후부터라고 한다. 하다못해 내가 직접 겪은 것처럼 때가 되면 일등병이 상병으로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는 것-월급은 어차피 미군이 주는 것인데도-에서도 진급한 첫 달 월급은 사병계에 상납을 해야 되는 판이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각자가 조금이라도 가진 힘을 이용하여 08(헌병 주특기가 80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연유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군대 은어, 즉 헌병은 ’도둑‘이라는 의미)을 쳤다.
미군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대민사업을 진행하였지만 소수 부정부패한 권력층에게만 혜택이 집중적으로 돌아갔다. 한국군도 대민사업을 했지만 가난한 사정을 알기에 주로 초등학교 설립, 교량/배수구 공사, 도로건설, 의료사업 등 주로 지역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이 가는 것으로 위주로 대민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아무렇게 해도 이러한 대민사업에서 ‘떨어지는’ 각종 콩고물(?)을 챙겨보고자, 몇몇 베트남 관료나 지방 유지들은 끊임없이 한국군 요새를 드나들었다. 콩고물을 챙겨먹기 위해서라도 이들 베트남인들은 한국군에게 무조건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요새에 드나드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한국 병사들에게 나이와 계급을 불문하고 계속 “Chao Ong! (안녕하세요 어르신!)”이라는 인사를 던졌다.
대민사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담당자에게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 지긋한 아버지뻘 되는 베트남 사람이 20대 초반 한국 병사들에게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기분을 맞추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병사들은 “저 쌔기 또 짜웅하러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해서 각종 아첨, 부패, 비리, 뇌물의 상징어인 ‘짜웅’이란 말은 월남에서 돈을 만지다 돌아온 한국 군대에 급속하게 퍼진 부패와 함께 ‘공용어’(?)로 확산이 된 것이다.
전후 세워진 공산 월남 정부도 예를 들어 공공 프로젝트에 10 달러가 배정됐다면, 7 달러는 누군가의 주머니로 흘러간다고 해서 베트남 국가 예산의 70%가 도둑질당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 국제투명성기구는 베트남을 100점 만점에 31점을 주어 118 번째로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한 바가 있다.
사이공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고아들과 넘쳐나던 마약은 미국이 남긴 유산의 일부였다. 전국적으로 피난민 1000만 명, 전쟁미망인 100만 명, 고아 88만 명, 불구자 36만 2000명, 그리고 실업자가 300만 명에 달했다. 해방의 날이 왔을 때, 인플레이션은 900%로 치솟았다.
미국은 베트남을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도로와 철도, 교량과 운하를 파괴했다. 불발탄과 지뢰가 시골 곳곳에 널렸다. 심지어 농부들이 일하는 논에서도 발견됐다. 고성능 폭약과 에이전트오렌지로 오백만 헥타르의 숲이 불모지가 됐다. 월남이 통일된 이후 공산 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촌락 3분의 2가 파괴됐다고 추정했다.
그 결과 논의 나라인 베트남이 쌀을 수입해야만 했다. 파리 평화 회의에서 미국은 박살난 인프라 재건에 35억 달러를 제공키로 합의했지만 지불하지 않았다. 미국은 오히려 공산당 정부의 적인 사이공 정권에게 빌려주었던 수백만 달러를 갚으라고 요구함으로써 빈궁한 나라를 모욕했다. 베트남 경제는 세계와의 무역과 원조를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쟁에서 지자마자, 미국은 전쟁으로 파산한 나라와의 수출입을 금지함으로써 무역 봉쇄를 강요했다. 또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해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했다. 같은 방식으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들이 베트남에 원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과 1995년 국교를 정상화했고, 2013년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미·베트남 관계의 극적인 변화는 미·중 갈등 속에 양국의 셈법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중국 견제를 최우선 외교 과제로 내건 미국은 인도·태평양 역내에서도 중국의 입김이 큰 아세안을 파트너로 확보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 사회주의 국가로 중국과 친선을 유지해 온 베트남도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 등으로 인한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과 안보 협력을 확대해왔다.
2016년 10월 5일 존 케리 미국무장관이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팜 빈 민 베트남 외무장관에게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군무기 베트남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이미 2014년 9월 마틴 뎀프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협력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사회적 입장은 미국과 한국에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은 ‘선한 전쟁’으로 평가되는 반면, 베트남전쟁은 ‘부당한 전쟁’으로 평가된다. 1975년 갤럽(Gallup)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참전군인의 51%만이 베트남전쟁이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응답했으며, 49%는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이미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 참전군인회(Vietnam Veterans Against the War)’가 결성되었고 현재에도 많은 참전군인 단체가 베트남과의 화해와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참전군인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전·평화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보수 이데올로기와 강력한 연대를 과시하지 못해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에 대항하여 군사협력을 하고 있는 시대에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한국 참전자들은 죽어야 고치는 집단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