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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기드온협회 심볼 |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특히 기드온은 겸손, 믿음,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도 기드온을 본받아 겸손, 믿음,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 깊이 살펴보면, 이외에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 교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영적 신중함
삿 6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있습니다. 16-1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테니 미디안을 치라 네가 이기리라.” 여느 사람 같았으면 단박에 아멘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승리하실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신중했습니다. 정말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삿 6:18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청을 들으시고 표징을 보이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붓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태웠습니다. 이 일로 기드온은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삿 6:36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기드온이 사람을 보내 군사를 소집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싸우라 명하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면 공격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기드온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이번 이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자기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증을 받기 위해 표징을 구한 것입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둘테니 하나님께서 이슬이 이 양털 뭉치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았을까요? 39절을 보면 기드온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 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 이슬이 가득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그제야 군사들을 이끌고 미디안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드온이 의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멘하고 나서면 되지 왜 이렇게 표징을 구하며 확인을 하는가? 믿음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태도를 책망하시거나 문제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를 존중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이런 신앙적 태도를 의심이 많은 것으로 보시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자칫 내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 착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탄의 미혹을 하나님의 뜻이라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다음 몇 가지를 표징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며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시켜주실 때가 있습니다.
둘째, 마음속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주시고 또 담대함을 주실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 환경을 통한 표징입니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을 겪을 때, 그리고 뜻밖의 사람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실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할 때 이런 표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표징들이 중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전에 신중하게 그 뜻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담대함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삿 6:25-2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우상제단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입니다. 만일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릴 경우, 마을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을 따르기로 합니다. 밤에 종 열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마을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기드온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이 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나섰습니다. 아들을 변호했고, 마을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 일로 기드온은 죽음을 무릎 쓰고 우상들을 척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여룹바알” 즉 바알과 다툰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습니다. 그 후 이 이름은 바로 영적 담대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삿 7장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1절을 보면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담대함의 사람 기드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담대함의 승리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전쟁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우선 병력면에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미디안의 병력은 13만 5천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병력은 고작 300명입니다. 450대 1의 전쟁입니다. 다음으로 병장비면에서도 말이 안 됩니다. 미디안 군사들은 당시 막강한 전투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들은 전투 장비를 갖지 않고,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나팔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휘관인 기드온과 300명의 병사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자기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영적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담대함으로 결국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사건에서는 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수나 장비의 성능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담대함이 중요합니다. 환경과 상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적 담대함이 중요합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영적으로 개혁한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일생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년 7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여왕 메리 1세에게 극심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영적 담대함으로 마침내 자기의 조국을 믿음으로 지켜냈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낙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이 전해집니다. 낙스를 박해했던 영국 여왕 메리 1세의 말입니다. “존 낙스의 기도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더 두렵다.” 그리고 존 낙스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식에서 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이었던 모튼이 한 말입니다. “여기에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사람 낙스가 누워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담대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룹바알이라 불리던 기드온처럼,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사람이라고 불리던 낙스처럼 영적 담대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적 담대함을 가지고 계십니까? 무엇인가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어떤 상황도, 심지어 사탄 마귀까지도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해이
이렇게 위대한 신앙의 용사 기드온에게도 없었으면 좋았을 실수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소위 ‘에봇사건’으로 불리는 실수입니다.
삿 8:24 이하를 보면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듭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가슴에 받쳐 입던 옷입니다. 출 28:6을 보면 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1700세겔, 오늘의 무게로 환산해 보면 5200돈, 20Kg이나 되는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기드온은 왜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을까요? 분명히 사람이 입자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구약을 연구한 학자들은 고대시대에 우상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 가정이나 마을에 신상을 만들고 그 위에 에봇을 입혀서 섬기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드온은 이 에봇을 신상을 만들어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기드온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 상징적으로 에봇을 만들어 마을에 보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이 에봇을 마치 우상처럼 받들기 시작했습니다. 삿 8:27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은 물론이고 기드온의 가문까지도 이 금 에봇을 우상처럼 받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여호와라고 섬겼던 것처럼 이 에봇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드온은 또 다른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을 물리친 뒤 왕에게 버금가는 자리에 올라 무려 40년을 사사로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기드온은 자기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삿 8:30-31을 보면, 아내를 많이 두었고 그 아내들을 통해 낳은 아들만 70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겜이라는 곳에 첩도 두었고 그 첩을 통해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죽은 뒤에 이 아비멜렉이 배다른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세겜에서 왕 노릇하며 악행을 저질러서 결국 세겜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해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오랜 세월 사사로 왕처럼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가정을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여럿 두었고 첩까지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믿음으로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기드온이 죽은 뒤에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이스라엘도 다시 우상숭배의 길로 돌아서게 됐습니다.
왜 기드온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위대한 용사요 여룹바알이라 불리던 기드온이 왜 이렇게 끝이 좋지 않을까요? 바로 그가 승리의 자리에 오른 뒤에 영적으로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기드온은 돌다리도 두드려 가며 건너는 식으로 영적인 신중함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자리에 오른 뒤 그 신중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에봇을 만들 때 하나님의 뜻인지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얻을 때 역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위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입니다. 공기업에 공적자금이 수십조 투입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복지자금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술술 새나갑니다. 힘 있는 위치에서 성적인 문제를 저지릅니다. 다 그 양심에 도덕적 해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해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해이(Spiritual hazard)입니다. 원래 늘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한 삶을 살게 됐습니다. 점점 영적으로 해이해져갑니다.
최근 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요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고려말기의 타락한 불교나 이조 말기 나라를 망하게 한 유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돈과 명예와 성적으로 지탄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와 세상 속에서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손가락질 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영적인 해이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시 영적인 허리띠를 졸라매야하겠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것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영적 해이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기드온을 반면교사 삼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박봉수 목사(상도중앙교회
첫댓글 밀린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없지만 후원은 없습니다
결국 지난달 공과금을 못냈습니다 30만원이상 듭니다..
카페지기는 나이들고 건강문제로 돈을 못벌다보니 생활이
무척 어렵습니다 도와주시는 분이 계셔야 살 수 있습니다
지난 공과금..난방비.통신료,공과금.주거임대료.관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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