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탄생
유민의 전설
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논리성과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으면 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트로이 함락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 사람씩 땅으로 내려왔다. 화염과 아비규환에 휩싸인 트로이는 그날 밤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족도 서민도 가차없이 살해되고, 목숨을 건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같은 참극 속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스아스 일행은 몇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했다. 이들의 편력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끝나지 않고, 신들이 이끄는 대로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다. 그 땅의 왕이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은 드디어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이때부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많은 건설적인 왕들이 잇따라 등장하지만, 그 사연을 일일이 기술하는 곳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낯선 이름을 나열하여 독자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인이 억지로 꾸며낸 대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그래도 별로 난감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승과 전설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황당무계한 것이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전설은 그 공백기를 적당히 소화한 다음, 한 왕녀의 등장을 맞이했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 채 신을 섬기는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왕녀가 아들을 낳으면,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난처한 입장에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을 섬기는 틈에 잠깐 강가에서 잠이 든 왕녀한테 군신 마르스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마르스는 하늘에서 내려와 왕녀와 사랑을 나눈다. 왕녀가 잠에서 깨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니까, 이런 것을 두고 신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왕녀는 그 쌍둥이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숙부는 격분했다.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긴 채 테베레 강에 띄어졌다.
갓난아기가 든 바구니는 테베레 강 어귀까지 떠내려가, 강가의 갈대숲에 걸려 멈추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늑대가 안에서 나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 아기에게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이 어미 늑대였다.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젖을 먹고 자랐다면 곤란하게 되었겠지만, 늑대 다음에는 양치기가 쌍둥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길렀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양떼를 자주 볼 수 있지만, 2천 800년 전에는 양떼가 그 지역의 주인공이었다.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성장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과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차츰 세력권을 넓혀간 것이다. 세력권이 넓어지면 새로운 정보도 들어오게 마련, 이리하여 형제는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비밀도 알게 되었다. 형제는 부하들을 이끌고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싸움에 이겨서 왕을 죽였다. 어머니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형제는 알바롱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지에 있는 알바롱가는 비좁고,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발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두 사람이 자란 곳은 테베레 강 하류였다.
곧 로마라고 불리게 된 그 땅에 두 사람은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알바롱가의 왕을 처단한 뒤에는, 그때까지의 부하들 외에 부근의 양치기와 농민들까지 이들 형제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쌍둥이였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고, 이런 난점이 둘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었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싸움은 곧 재발한다.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로물루스가 판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였고, 로마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건설자 오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때는 기원전 753년 4월,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도 어느덧 6회를 지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벗어난 역사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는 북국과 남국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북국의 이점과 남국의 이점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이점은 상호작용으로 증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한복판에 자리잡은 로마의 지리적 이점은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신기와도 같은 인간의 지혜가 이렇게 유리한 지세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은 이 땅에 로마인의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지 800년 뒤인 제정로마 초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도시계획 전문가의 눈으로 위와 같이 말했다. 듣고 보니, 과연 로마의 입지조건은 매우 훌륭하다. 국가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수도 건설지로서 이탈리아에서는 로마를 따라갈 곳이 없다.
로물루스는 장군의 재능만이 아니라 도시 설계자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로마가 도시 건설지로서 이만큼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왜 로물루스 이전에는 이곳에 도시를 세운 사람이 없었을까.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잡한 무덤과 주거지가 발견되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시라고 부를 만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땅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은 역시 로물루스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물루스가 전설상의 인물이고 실존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면,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무개라고 해도 좋다.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입지조건만 좋으면 당당한 도시도 쉽게 건설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을 갖춘 민족이 적어도 두 개는 존재했다.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 그렇다. 그런데 이 두 민족은 로마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일곱 언덕을 제외한 저지대는 모두 습지대였지만, 에트루리아인은 간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하건대, 기원전 8세기 중엽뿐 아니라 그후에도 꽤 오랫동안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는 땅이었던 것 같다. 그리스인은 통상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해양민족이었다.
바다에 면한 항구를 도시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들에게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닿을 수 있는 로마는 도시 건설지로는 부적격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스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대표적인 식민도시는 시라쿠사이(오늘날의 시라쿠사)와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 및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인데, 이 도시들은 모두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에트루리아인도 산업과 통상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지만, 도시 건설에 관해서는 그리스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높직한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도 배후에 언덕이 없는 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언덕 위에 성벽을 두른 경고한 도시를 세워 거기에 틀어박히고 평지에는 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성향은 피렌체만 보아도 분명하다. 피렌체는 에트루이아인에게 기원을 둔 도시지만, 그들이 거주한 곳은 피에솔레 언덕이다. 아르노 강 연변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피렌체 시가지는 로마인의 건설할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이 보기에, 로마의 일곱 언덕은 한결같이 너무 작고 너무 낮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나쁜 점은 일곱 언덕이 서로 너무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꼭대기가 널찍한 언덕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재해 있는 중부 이탈리아 지방에 뿌리를 내린다. 오늘날에도 중간 정도의 도시로 건재해 있는 시에나, 볼테라, 페루자, 키우시, 오르비에토는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둔 도시들이다.
그래서 열차역에 내려도 금방 시내로, 적어도 구시가지로 나갈 수는 없다. 버스를 타고 능선을 따라 언덕마루까지 올라가야만 겨우 시가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들이다. 이런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어째서 일부러 이런 곳에다 도시를 세웠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도시를 건설하는 조건도 물이나 기후 같은 자연조건 외에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건설에 나타난 사고장식의 차이가 이 세 민족의 이후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방어에는 완벽하지만, 발전을 저해받기 쉬운 언덕을 좋아한 에트루리아인. 방어가 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 된 로마인. 통상에는 편리하지만, 자칫하면 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공과대학의 도시공학과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선 철학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 도시를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주민의 장래가 결정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인의 문자는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에트루리아인을 수수께끼의 민족이라고 불렀다. 에트루리아라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을 에트루스크라고 부르지만, 이것도 고유한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대에도 오늘날의 토스카나 움브리아 및 라치오 북부를 합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통틀어 에트루스크, 즉 에트루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미국에 사는 사람을 모두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에트루리아인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고, 내륙지방에서 남하해 왔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기원전 9세기에는 이미 철기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중부 이탈리아에는 광산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 지방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은 이 천연의 혜택을 활용한다. 그들은 당장 우수한 기술자가 되었다. 기술력의 향상은 경제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역시 경제력이 강한 그리스인과의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에트루리아의 유물 중에는 그리스제 항아리가 놀랄 만큼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남부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 본토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다. 언덕 위에 살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항구를 가지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인은 산업 외에 해상무역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풍부한 광산이 있는 엘바 섬은 물론, 코르시카 섬과 사으데냐 섬에도 발길을 뻗쳤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일대의 바다를 테레니아 해라고 부르는데, 티레니아 해는 '에트루리아인의 바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그들의 세력권은 북쪽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과 남쪽의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 강 사이의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는 도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도시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고대의 에트루리아는 12개 도시국가의 연방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2개 도시 국가 가운데 알려져 있는 것은 아레초, 볼테라, 키우시,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타르퀴니아, 체르베테리, 베이, 페루자 등 9개다. 이들 가운데 7개 도시가 지금도 건재하다. 에트루리아는 연방제였지만, 각 도시국가는 독립적인 경향이 강해서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 정도였고, 정치나 경제나 군사에서는 일치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2개 도시국가 가운데 어느 도시도 다른 도시들을 제압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고, 그 때문에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도시도 없었다. 이것이 나중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에트루리아인은 사람이 죽으면 땅 속에 매장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도 복잡하다. 땅 위에 있는 주택을 축소하여 그대로 땅 속에 세운 듯한 느낌이다. 유력자의 무덤은 벽화의 색채도 화려하고 부장품도 호화롭기 짝이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에트루리아인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평화를 사랑하며 기술과 통상만으로 번영을 이룩한 평화적인 민족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그들의 조각품이 보여주는 온화한 모습은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죽음 뒤의 삶이라는 꿈에 바쳐진 장식이다. 실제의 에트루리아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특별히 평화적이지도 않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에트루리아인은 티레니아 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및 그리스와 격전을 벌린 일도 있다.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고대 로마인은 사람과 맹수가 싸우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지만, 이 구경거리도 원래는 에트루리아인이 즐긴 경기였다. 또한 무덤 벽화에 그려진 향락적인 생활상을 보고, 그들이 쾌락에 탐닉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을 거라고 상상하면 잘못이다.
그들은 기술력을 자랑할 정도로 근면했고, 그런 면에서의 진취적인 기질은 단연 뛰어났다. 이런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인에게 미친 영향은 많은 점에서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따위는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막강했다. 전성기에는 남부 이탈리아에까지 세력을 떨쳤다. 이 시대에 포 강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남쪽의 그리스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로마는 이 양대 세력권 사이의 골짜기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던 왕정 시대에 비해 공업과 상업 및 해운업에까지 손을 뻗친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에 따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귀족정치의 숙명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도 계속 증가했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그리스에서 이런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는 것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그들의 특징인 진취적 정신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스인의 식민지 건설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골고루 미쳤다. 동쪽으로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의 말라가와 프랑스의 마르세유도 이 시기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식민도시 건설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왕성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기원은 몇몇 카르타고계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그리스계가 차지하고 있다. 나폴리, 타란토,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페스툼과 쿠마이,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시라쿠사, 아그리젠토 등등. 이런 도시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렀다. '대 그리스'라고 부른 이유는 이런 도시들이 급속히 발전하여 단기간에 풍요로운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미 높은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이 정착했으니까, 모든 면에서 시행착오가 없다. 또한 원주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원주민과의 관계로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조국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실패하면 돌아갈 곳도 없다. 급속한 번영의 요인은 지나칠 만큼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식민도시와 모국의 관계도 독립심이 왕성한 그리스인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타란토 사람들에게 스파르타는 타국이었고, 시라쿠사 사람들에게 코린트는 타국이었다. 그래도 교류는 활발했다.
그리스인은 육지를 가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배에 돛을 다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오 이주한 그리스인은 또 한 가지 점에서도 역시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결심과는 인연이 멀었다. '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도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갓 태어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라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은 물건을 사주지도 않고 팔 물건을 만들지도 못하는 사람한테는 처음부터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농업과 목축밖에 모르는 로마인은 아테네의 장인이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를 살 돈도 없었고, 에트루리아에서 만든 정교한 금속기구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요컨대 로마인은 상인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바다와 가깝지도 않고 방어에도 적합하지 않은 로마는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이 뿌리를 내리고 싶어할 매력도 없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에트루리아인은 해로를 택하지 않으면 육로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 근처에 와도 테베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지나 강을 건너서 그리스인이 있는 남쪽으로 갈 뿐이었다. 말하자면 로마는 강을 건너기 쉬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통과점에 불과했다. 통과점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보내주기만 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는 유년기에 강대한 적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바다를 겁내지 않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을 이어 주는 간선통상로는 그 당시에는 역시 바다였다.
건국의 왕 로물루스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은 모두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를 지나 30킬로미터쯤 흘러서, 오스티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비롯하여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흘러온 이 강은 대하라고 부를 수 있는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 근처에 이를 무렵에는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
수량이 풍부한 테베레 강은 로마 근처에 이르면 크게 서쪽으로 우회한 다음 동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우회하면서 로마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우회하던 물줄기도 홍수가 일어나면 당장 굵은 직선의 흐름으로 바뀌어, 곧장 지중해로 흘러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곱 언덕은 강근처에 있으면서도 홍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이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지점 언저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저지대에도 사람이 살 만큼 인구가 늘어났을 무렵에는 로마의 국가체제도 확고해져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홍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일곱 언덕은 모두 낮아서, 가장 높은 카피톨리노 언덕조차도 해발 50미터밖에 안된다.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세운 언덕은 모두 해발 300미터 내지 500미터 정도였다. 덧붙여 말하면, 현대 이탈리아의 대통령 관저는 퀴리날레 언덕에 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부는 비미날레 언덕 위에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도 대통령 관저에서 중계한다고 말하는 대신 퀴리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하고, 선거 속보를 알릴 때에도 내무부라고 말하지 않고 비미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한다. 다시 2천 8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 건설의 조건 가운데 방어를 가장 중시한다면, 일곱 언덕 중에서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어느 언덕보다도 테베레 강과 가까울 뿐 아니라, 삼면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대기의 평지가 너무 좁았다. 오늘날에도 로마 시청과 미술관 두 개와 교회가 들어서 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별로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의 면적이 10헥타르나 되고 테베레 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예정되었다.
역시 테베레 강과 가깝고 사람이 거주할 면적도 충분한 아벤티누스 언덕은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로물루스와 싸우다 죽은 레무스가 택한 것이 바로 이 아벤티누스 언덕이었다. 레무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 로마 건국기념일은 그후 2천 년이 넘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해마다 축하되는 명절이 되었다.
그 해에 로물루스의 나이는 열여덟, 이 약관의 젊은이와 그를 따라온 3천 명의 라틴족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이 되지는 않았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양치기와 농민의 우두머리였던 로물루스 자신이 제멋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뽑혀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민회에서 왕을 선출한다는 왕정답지 않은 이 제도도 당시 로마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는 100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가문의 어른을 모으면 그 정도 숫자가 되었던 게 아닐까.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원로원이라는 공적 기관에 속해 있었다. 유력자들의 조언을 수렴하는 것이 목적인 기관이지만, 정치체제 확립을 중시한다면 공적인 지위를 주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적 기관은 역할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조언을 받는 쪽-이 경우에는 왕 개인-의 기분에 좌우되기 쉽게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피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로마라는 국가의 기본 형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로마 실정에 적합하고 장래에도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고 무리가 적은 정치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이 되기 전의 로물루스가 이끌었던 양치기와 농민들이 라틴이라는 이름의 민족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라틴족은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 가운데 한 부족이 가족과 함께 테베레 강가로 이주해 와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탄생한 직후, 로마 시민의 대부분은 독신 남자였던 것 같다. 정치체제를 확립한 뒤, 로물루스가 수행한 두 번째 사업은 바로 이민족 여인들을 강탈하는 일이었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폭력까지 동원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여자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들의 집단이었다면, 그들의 정체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각자의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아니었을까. 부족단위의 이주라면, 처자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위대한 로마의 건국담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허술하고, 무엇보다도 자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편력담이 고안되고, 그것과 로물루스가 결부된 게 아닐까. 신화와 전설의 가치는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는가에 있다.
로마인은 줄곧 자기네가 트로이 영웅의 후예라고 믿었고, 그리스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행한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은 푸생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한테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되는데,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신에게 바쳐진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된다. 사비니족도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여 온 가족이 로마까지 찾아왔다. 축제 기분이 고조되었을 무렵, 로물루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은 사비니족 아가씨들에게 덤벼들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사비니족 남정네들은 아내와 자식과 노인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네 부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비니족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마인에게 강탈당한 여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로물루스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대답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로물루스 자신도 총각이었을 것이다. 사비니족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로마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통틀어 네 번 전투를 벌였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치렀다니까 사비니족이 로마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인들은 비록 강탈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로물루스 왕도 사비니족의 타티우스 왕도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로물루스가 후세의 로마인에게 남긴 관례는 남편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다. 사비니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이 네 번의 전투를 모두 이겼기 때문에, 사비니족으로서도 강자인 로마와 합칠 경우의 이익을 계산했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 합병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된 셈이다. 또한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비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로물루스로서는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겠지만, 이 방식은 당시 로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건국자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로물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곧 전사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대부분 로물루스가 지휘했다.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치세는 대부분 신생국가의 숙명이기도 한 인근 부족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 제도를 고안해낸 것도 바로 로물루스였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단위이자 핵으로써,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거듭된 전투로 전사자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로마의 인구와 전력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했다.
사비니족과 합친 것은 단기적으로 보아도 성공이었던 셈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9년째를 맞이한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는 여느 때처럼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그때 온 하늘이 별안간 흐려지면서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우레 소리가 주위를 압도했다. 겨우 비가 그치고 우레 소리도 사라진 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옥좌였다.
로물루스의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로물루스의 업적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갑작스러운 불행에 당황해하면서도 로물루스를 로마의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실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는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싫어한 원로원 의원들이 왕을 죽였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또한 라틴족은 자기네 가운데에서 왕이 선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비니족은 그들대로 이번에는 자기네 쪽에서 왕을 배출하고 싶어했다.
원로원 일파가 로물루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어쩌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로원은 로물루스 지지파와 그 반대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흔히 제삼자가 추대된다. 백성들의 이목은 인격자로 알려진 한 인물에게 쏠렸다.
제2대 왕 누마
알맞은 시기에 인재가 알맞은 자리에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예는 융성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로마 역사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예를 보여주지만, 누마의 즉위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마는 로물루스의 초빙을 받고 로마로 이주한 동포들과는 달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남은 사비니족이었다. 농사를 짓는 한편, 지식 탐구에도 힘쓰는 주경야독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높은 덕망과 깊은 교양은 로마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라틴파와 사비니파의 대립으로 경직 상태에 빠진 로마 원로원은 누마를 만장일치로 왕으로 추대했다. 사비니족의 땅까지 누마를 찾아간 장로들은 이 사실을 그에게 전하고, 왕위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누마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절했다. 그는 이미 나이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그 시기의 마흔 살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삼고초려의 요청을 받은 누마는 결국 장로들의 뜻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 들어간 누마는 헐렁하고 긴 겉옷(토가) 끝으로 도끼자루에 한 묶음의 막대기를 묶은 왕의 권표를 받쳐들고 그 뒤를 따르지도 않았다. 민회의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누마는 신권정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로마의 왕은 왕이 곧 신인 이집트의 파라오와는 다르다.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신관적 색채가 짙은 메소포타미아의 왕과도 다르다. 또한 부유하고 유력한 일족의 우두머리라는 느낌이 강한 그리스의 왕과도 달랐다. 로마의 왕은 신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다. 죽을 때까지 왕위에 앉기는 하지만, 왕위를 세습하지도 않는다. 또한 선거를 통해 뽑힌다. 로물루스한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로마의 왕은 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다.
역사가 이비우스는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 여기서 법이란 법률 제정이라기보다는 질서 확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락부락한 성격이 강한 당시의 로마인에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자기 힘의 한계를 아는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누마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기도 한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야누스 신은 입구와 출구라는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반대방향을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누마는 완성된 야누스 신전의 앞문과 뒷문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이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힌다고 말했다. 누마가 로마를 다스린 43년 동안, 이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말하면, 이 문은 누마가 죽은 뒤에는 줄곧 열린 채로 세월이 흘렀다. 기원전 240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잠시 닫혔지만 곧 다시 열렸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시작된 내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무찌른 기원전 31년에야 세 번째로 닫혔다고 한다. 누마는 이 시기를 로마에는 방어를 위한 전투말고는 어떤 싸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으레 따라 다니는 것이었지만, 구태여 약탈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하고, 모든 시민이 독자적인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되도록 했다.
목수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이 있었다. 직능별 단체를 결성한 것은 백성들에게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부족간 대립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로마에는 이 두 부족 외에도 여러 민족이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 공동체까지 결성되어 있었다. 건국 당시부터 로마는 다민족 국가였다. 이런 종류의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마찰을 미리 막지 않고는 국가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누마는 백성들의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달력도 개혁했다. 로물루스 시절의 로마에서는 1년의 날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누마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정하고, 일년의 날수를 355일로 결정했다. 남는 날수는 20년마다 결산한다. 누마가 정한 이 달력은 율리시스 카이사르가 1년을 365일로 개정할 때까지 650년 동안 로마인의 일상을 관장하게 된다. 또한 1년 동안 각 달의 배치도 3월이 첫달이었던 것을 세번째 달로 바꾸고, 11월과 12월이었던 달을 앞으로 가져와서 각각 1월과 2월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각 달의 명칭까지는 바꾸지 않았다. 사람들이 익숙해진 것까지 바꿈으로써 생기는 혼란을 피하게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9월 이후의 명칭이 본래의 의미와 어긋나게 되었다. 다음의 표는 각 달의 명칭인데, 우리말과 라틴어와 영어 순서로 되어 있다. 라틴어에서 직접 파생되지 않은 영어를 든 이유는 그 영어 역시 로마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누마는 1년 동안의 축제일과 휴일도 정비했다. 매달 아홉번째 날과 열다섯번째 날에는 장이 선다. 밭일에서 해방되어 저마다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이 날이 로마인의 휴일이었다. 그밖에 저마다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이 날이 로마인의 휴일이었다.
그밖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축제일이 있다. 축제일은 1년에 45일을 헤아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공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 축제일에는 모든 공무를 쉬었다. 제2대 왕 누마의 업적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종교에 관한 개혁일 것이다. 누마가 통치하기 전에도 로마인은 이미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누마는 그런 신들을 정리했다.
나중에는 그리스 신들과 혼동하게 되었지만,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 신(그리스에서는 제우스, 영어로는 주피터), 그의 아내인 유노 여신(그리스에서는 헤라, 영어로는 주노), 미와 사랑을 관장하는 베누스 여신(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영어로는 비너스), 수렵의 여신 디아나(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영어로는 다이애나),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신 아폴로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 전쟁의 신 마르스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중요한 신이었다. 그밖에 야누스 신을 비롯하여 예로부터 내려온 라틴족의 고유한 신들도 있다.
선왕 로물루스도 죽은 뒤에 신격화되어 신이 되었다. 누마는 이런 신들을 정리하여 계급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떤 신 하나를 정하여, 이것이야말로 로마의 신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들을 공경하는 일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리스와 로마로 대표되는 다신교와 유대교 및 기독교를 전형으로 하는 일신교의 차이는 다음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반면, 일신교에서는 그것이 바로 신의 전매특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윤리 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지 않기 때문에, 결점을 지니고 있어도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일신교의 신은 완전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버려두면 감당할 수 없게 바로잡는 것이 신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무엇에나 어디에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네 왕이었던 사람까지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로마인에게는 우선 첫 번째 계율부터 적합하지 않다. 또한 신망만이 아니라 선조의 조상을 새기는 것도 좋아한 로마인에게는 두 번째 계율도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계율 역시 로마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아뿔사!" 하고 말하는 대신, 유피테르 신이나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부르는 버릇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계율은 안식일에 관한 것인데, 로마인의 휴일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말고는 아무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하는 일만 하지 않는 날이었다. 다섯 번째부터 열번까지의 계율은 로마인도 지키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6개 항목은 윤리도덕에 속한다. 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짐승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인간답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시키지 않더라도 보통은 누구나 지키려고 애쓸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유대교에서 파생한 기독교에서는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율만은 유대교에 충실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신교지만, 그밖의 계율은 모두 다신교 방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상을 새기고, 신이나 주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른다. "아뿔사!"하고 말하는 대신, "오, 나의 하나님!"이나 "예수님!" 하고 외친다. 안식일에도 스포츠 같은 것을 하면서 즐긴다. 그렇게 때문에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섯 번째부터 열번째까지의 계율에 나타나 있는 입장, 즉 인간의 행위나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종교 분야에 속한다는 것은 기독교도 유대교와 전혀 다르지 않다. 타협의 명수였다는 것은 곧 인간 심리를 잘 통찰하는 명수였다는 뜻이지만, 그런 기독교도 어디까지나 일신교였다.
그런데 로마신은 신에게 자기네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은 대신 무엇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호신 역할이다. 수호를 요구한 것이다. 수도 로마를 지키는 것은 최고신 유피테르를 비롯한 신들이고, 싸움터에서는 군신 마르스나 야누스 신이 그들을 지켜주고, 농업은 케레스 여신이, 포도주 제조는 바쿠스 신이, 경제력 향상은 메르쿠리우스 신이, 병이 나면 아이스쿨라피우스 신이 지켜주고, 행복한 결혼과 여자를 지켜주는 것은 유노 여신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로마인은 이런 수많은 신들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로마에는 추상적 사고를 장기로 삼는 그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살게 된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인의 성향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로마인은 타민족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았다. 배척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신은 수호신이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구석구석까지 관심을 가지고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대 로마의 수호신은 아무 일도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까지 지켜주는 너그러운 신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옆에서 돕는 것이야말로 수호신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유쾌한 예가 바로 비리프라카 여신이다.이 여신은 부부 싸움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었다. 부부싸움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시작된다.
둘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목청도 점점 높아진다. 잠자코 있으면 진다고 생각하니까, 상대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떠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상대도 발끈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하지만, 꾹 참고 둘이서 비리프라카 여신을 모시는 사당에 간다. 거기서는 여신상이 있을 뿐, 신관도 없고 아무도 없다. 신전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신을 모시는 모든 성소에 신관을 배치하려면 로마 인구를 전부 다 동원해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신의 사당에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신을 믿는 로마인은 감시자가 없어도 그 규칙을 지켰다.
비리프라카 여신 앞에서 지켜야 할 규칙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양쪽이 되풀이하는 동안 흥분했던 목청도 조금씩 가라앉고, 결국에는 둘이서 사이좋게 사당을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신에게 수호를 요구하는 그리스-로마적인 사고방식은 생각해보면 인간성에 적합한 자연스러운 욕구다. 유대교보다는 유연성이 풍부한 기독교, 특히 카톨릭 교회가 이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일신교다.
그래서 수호신의 역할은 성자들이 대신 맡게 되었다. 이것도 쓰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어쨌든 오쟁이진 남편을 수호하는 성자까지 있었을 정도니까. 기독교에서는 '수호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호성신'이라고 불렀다. 덧붙여 말하면, 근대국가 이탈리아에도 수호성신이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바로 이탈리아의 수호성신이다. 하지만 절충에 뛰어난 기독교도 부부싸움을 담당하는 수호성신까지는 배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누마는 로마인을 지키는 신들에게 봉사하는 신관 조직을 정비했다. 신관계급의 우두머리는 최고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이 맡는다. 그 밑에 5명 내지 10명의 대신관이 있다. 그밖에 성화를 지키는 무녀(베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은 30년 동안 무녀로 근속하는데, 그 동안 처녀성을 지켜야 했다. 그밖에 새가 나는 모습이나 모이를 쪼아먹는 방법을 보고 공사의 길흉을 점치는 10명 정도의 사제가 있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흉하다는 점괘가 나오면 군단이 철수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적인 로마인에게 그런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우선, 흉하다는 점괘가 나온 경우에도 그것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제가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또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은 사제들의 임무였기 때문에, 그들이 점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길흉이 결정되는 실정이었다. 새가 군단 지휘관이 바라는 점괘를 내놓게 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요컨대 병사들이 길조라고 믿으면 그만이다. 윗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종교를 생각할 때 특히 주목해야 할 특징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로마에는 전임 신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로마인은 세속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았다. 로마의 대신관과 사제들은 신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을 대신하여 신의 존재를 지상에서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신관이나 사제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능력도 필요없고, 그 능력을 기르는 훈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녀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최고신관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직자는 민회에서 선거로 결정되었다.
집정관을 비롯한 정부 관리와 아무 차이가 없다. 말하자면 국가 공무원이다. 신관에 대한 고마움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이점도 적지 않았다. 고정된 계급이 아니니까, 다른 계급이나 관직에 대한 질투심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을 보전하기 위해 종교를 지나치게 존중하는 일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런 로마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불화나 유착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교 분리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정착시킨 것이야말로 누마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력 기원이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뀔 무렵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고대 로마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 로마인에게 종교는 지도원리가 아니라 버팀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종교를 믿음으로써 인간성까지 속박당하는 일도 없었다. 강력한 지도원리를 갖는 것(일신교)에는 이점도 있지만, 자기와 종교가 다른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광신적이 아니기 때문에 배타적이지도 않고 폐쇄적이지도 않은 로마인의 종교는 이교도나 이단이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다. 로마인은 전쟁을 하긴 했지만, 종교전쟁은 하지 않았다.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는 단순히 믿는 신의 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신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도 차이가 있다. 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누마의 시대부터 2천 7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일신교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도덕이나 행위를 바로잡는 역할을 맡아주는 형태의 종교를 갖지 않을 경우,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지고 싶지 않으면 개인이든 국가라는 공동체든 간에 자기정화 체제를 가져야 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가부장의 권한이 매우 강한 가정이었고, 로마인이 창조한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로마를 싫어하는 사람도 좋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법률이었다.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아니,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하다. 로마인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법의 필요성에 눈을 뜬것도 그들의 종교가 가진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덧붙여 말하면,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은 그리스인은 그 역할을 철학에 요구했다.
철학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 철학의 흐름은 그리스인의 이런 사고 경향이 맺은 열매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성이 떠오를 정도다. 그거야 어쨌든, 누마는 다양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왕위에 올랐을 때의 누마는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또한 로물루스 시대에 로마로 이주하여 라틴족과 로마의 기둥이 된 사비니족한테서 전폭적인 지원를 받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마는 지지세력도 없고 혈연관계도 없는 한 이방인으로서 왕이 된 것이다. 비록 원로원의 요청에 따라 왕위에 올랐고 민회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원로원은 누마가 못마땅하면 로물루스처럼 암살할 수도 있었고, 민중의 지지도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사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별로 많지 않으니까, 말로 설득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로물루스는 민중이 쉬운 군사적 성공이라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누마에게는 이것마저도 없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 로물루스의 호위대였던 300명의 병사를 해임했다.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이 아니라 신관이 입는 하얀 토가를 걸치고, 혼자서 자주 숲속에 틀어박혔다. 누마가 숲속에서 님프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 사람들은 누마가 님프를 통해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누마는 숲에서 나올 때마다 새로운 개혁안을 민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민회는 그 개혁안을 모두 승인했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동의를 표했다. 권력이란 거칠고 우락부락한 형태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이 누마는 43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 뒤, 님프들의 마중을 받으며 평온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제3대 왕 톨루스 호스틸리우스
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다.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던 그는 로물루스처럼 공격형이었다. 그가 이끌게 된 로마도 내부를 충실히 다진 누마 시대를 거쳐 이제는 외부로 발전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전쟁의 명분을 찾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양국의 접경 지역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발생한 약탈행위의 변상을 알바롱가가 거부한 것이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80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로마에 비해, 알바롱가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립국이다.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툴루스 왕은 강대한 에트루리아가 바로 옆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출혈은 양국에 모두 이롭지 않다는 이유로, 대표자끼리 결투를 벌여서 승부를 결정짓자고 제안했다. 양군에는 각각 3명의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과 클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 이들이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싸우게 되었다. 결투에 이긴 나라가 진 나라를 평화적으로 다스린다는 협정도 이루어졌다. 6명의 젊은이들은 전투대형을 해체하고 대기중인 양군 진영 앞으로 나섰다. 신호가 떨어지자, 양군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든 여섯 전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뒤, 마침내 로마 쪽 전사 가운데 하나가 쓰러졌다. 또 한 사람이 알바롱가 전사의 칼에 쓰러졌다. 혼자 남은 로마 전사의 가슴은 공포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본 그는 쫓아오는 알바롱가 전사들 사이의 거리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맨 먼저 쫓아온 알바롱가 전사를 우선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 적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뿐. 이긴 것은 결국 로마 전사인 호라티우스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바롱가의 왕은 나라의 운명이 단 한 번의 결투로 결정되어 버린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부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맞서게 했다. 로마는 알바롱가의 왕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이웃 부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알바롱가는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전황을 주시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저질렀다.
싸움은 로마 쪽이 우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던 툴루스 왕은 진짜 목표는 눈앞에 있는 부족들이 아니라 알바롱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여러 부족을 상대로 일단 승리를 거두어 그들을 꼼짝못하게 하는데 성공한 로마군은 물밀듯이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알바롱가는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함락되었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톨루스는 로마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을 알바롱가 왕에게 모두 뒤집어 씌었다. 그는 두 필의 말에 알바롱가 왕의 다리를 하나씩 묶은 다음,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여 제각기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로마인이 집행한 최초의 능지처참이었다. 알바롱가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서였다.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의 주거지로 키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되었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그 대표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만약 이때 알바롱가 백성이 몰살당했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나중에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바롱가 공략은 단순한 이웃 부족의 공략과는 의미가 달랐다. 이것은 앞으로는 로마가 라틴족의 조국이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제 자기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여 세운 분가가 아니라, 라틴족의 본가가 되었다.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 시대 이래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했다.
사비니족의 동화로 이미 크게 늘어나 있던 로마 인구는 알바롱가인의 동화로 더욱 늘어났다.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곧 동등한 의무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시민의 첫 번째 의무는 병역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전력도 더 한층 증강되었다. 이 군사력을 이끌고 싸움을 거듭하여, 로물루스보다 더 찬란한 군사적 영광에 빛나던 툴루스의 치세도 32년으로 끝났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톨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할아버지 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섯 살이었다니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서른 일곱 살이었다. 그 역시 누마와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왕이 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지 모르나, 시대는 안쿠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왕의 32년 치세는 라틴족의 모국인 알바롱가 공략과 사비니족과의 전투로 시종했지만, 안쿠스 역시 다른 라틴 부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로마가 서서히 힘을 축적하여 부족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병력이 없어도 주목받을 만한 힘을 갖지 않은 자에게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에 사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라틴족과 사비니족이었다. 로마가 동족에게 밀려난 자들이나 이주 희망자들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마 근처에는 라틴족과 본가라고는 하지만, 라틴족이 세운 하나의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이런 이웃 부족들과 로마의 관계는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혀 있게 내버려둘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3대 왕 툴루스가 라틴족이었기 때문에 사비니족과의 전투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제4대 왕 안쿠스가 사비니족이었기 때문에 라틴족을 상대로 싸운 것도 아니다. 사실 툴루스는 자신과 핏줄이 이어져 있는 알바롱가를 공략했다. 그들은 이제 로마인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굳이 차이를 요구한다면, '라틴계 로마인'이나 '사비니계 로마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싸움에 진 라틴족이나 사비니족만이 아니라 그밖의 민족도 피정복민으로 예속시키지 않고, 물론 노예로 삼지도 않고 '로마화'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패배자는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들에게는 선주민과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유력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다만 이 무렵부터 싸움에 진 도시는 파괴되기 시작했다. 애국자 리비우스는 이것이 이주자를 로마에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애국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도 촌락까지는 파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후에도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독립된 부족으로 존속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아니, 성급하게 굴고 싶어도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로마의 일곱 언덕은 주민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는 로물루스 시대부터 라틴계 로마인이 모여 살았고, 사비니계 로마인은 오래 전에 퀴리날리스 언덕에 본거지를 두었다. 알바롱가인에게는 카일리우스 언덕이 주어졌고, 가장 새로운 이주민들한테는 아벤티누스 언덕이 제공되었다. 여기서 신들의 거처가 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더하면, 일곱 언덕 가운데 다섯 개가 주민을 가진 셈이 된다. 적당한 높이와 넓이를 가진 언덕부터 활용했을 것이다. 비미날리스 언덕과 에스퀼리누스 언덕은 꼭대기의 평지가 좁은데다 높이도 낮아서 배수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제4대 왕 안쿠스는 25년에 걸친 치세 동안 전투 외에도 몇 가지 사업을 완수했다.
첫째는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자니콜로 언덕을 요새화했기 때문에, 그것과 테베레 강 동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을 이을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다리는 방어상의 이유도 있어서 목조로 만들었다.
두 번째 사업은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한 것이다. 오스티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와 마주보게 되었다. 또한 오스티아 주변의 모래밭에서는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염전 사업도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인에게 화폐 아닌 화폐를 주었다.
소금은 누구한테나 필수불가결한 물품이다.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다. 게다가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로마에서는 이점이 훨씬 컸다. 소금을 갖는 것은 곧 화폐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출발하는 도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로의 하나는 '비아살라리아'라는 길이다. 이 이름을 직역하면 '소금길'이 된다. 이 길은 테베레 강 어귀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내륙지방의 여러 도시로 운반하기 위한 길이었다. 로마는 농경민족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완만하면서도 착실하게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한 걸음씩 천천히 지반을 굳혀가는 방식은 나름대로 칭찬해도 좋은 생활방식이지만, 조직에 이질적인 분자가 섞여 들어온 것이 비약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이따금 일어난다. 마치 화학반응 같은 현상인데, 건국한 지 139년째 되던 해에 로마에도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제5대왕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안쿠스가 아직 왕위에 있던 시절, 우마차를 몇 대나 거느린 이방인 일가가 로마로 들어왔다. 화려한 차림새와 길게 기른 머리를 보면, 이들이 에트루리아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일가의 가장인 타르퀴니우스는 순수한 에트루스크가 아니라, 그리스 코린트에서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에트루스크였다.
어머니는 에트루리아에서도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에트루리아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경제적인 관계라면 민족을 따지지 않지만, 자기들 사회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에트루리아에서는 평생 동안 이방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위 향상은 절망적이라는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 밖에서 팔자를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코린트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코린트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식민지 시라쿠사로 가도 좋았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시라쿠사가 로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도 순수한 혈통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곳으로 로마를 선택했다. 로마에서는 정착할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는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누마와 안쿠스가 보여주듯이, 건국 당사자인 라틴족이 아니더라도 왕이 될 수 있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이런 점도 매력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전재산을 가지고 에트루리아를 떠난 그는 일족과 가신들을 거느리고 로마에 정착했다. 이 외국인은 그 무렵 로마에 있었던 여러 군데의 에트루리아인 공동체에는 의존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보다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의 구별도 차츰 없어져가던 로마인 사회에 침투하려고 했다. 부모한테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이 재력과 재능으로 로마인 사회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이 이방인은 안쿠스 왕의 유언 집행자로 지명될 만큼 출세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공증인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왕이 죽은 뒤 스스로 왕에 입후보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선거운동을 한 최초의 로마인이기도 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를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선거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타국에서 이주한 사람이지만, 타국인이 로마 왕이 된 선례가 있다. 처자와 함께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왔으니까, 이 로마에 뼈를 묻을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이도 책임있는 공직에 앉기에 적당하고, 선왕의 신뢰도 두터웠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고 로마 법을 존중하는 점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민회는 이 타르퀴니우스를 압도적 다수로 왕에 선출했다. 원로원도 두말없이 승인했다. 라틴계, 사비니계로 이어져 내려온 로마 왕의 계보에 처음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이 등장한 것이다.제5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참으로 유능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37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의 세력권은 더욱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내부도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변모했다.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룩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로물루스 이래 줄곧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다.
인구가 늘어난 것이 이유였지만, 그의 참뜻은 자신의 권력 확립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로원 의원만은 왕이 지명할 수 있다. 타르퀴니우스가 자신의 입김이 닿는 사람을 원로원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참자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력의 아성인 원로원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민중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민중의 지지에만 의존할 경우의 위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왕은 주변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다.
왕들의 적절한 지휘와 병사들의 용맹으로 당시의 로마군은 서서히 명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상대가 비록 강적은 아니더라도 로마 역시 사람으로 치면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로마군은 아직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싸움에 진 사람들을 로마로 이주시키고 시민권을 주어 동화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패배자한테서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 시민들은 그 수많은 전리품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후에도 로마가 이민족의 로마 이주를 여전히 환영한 것을 보면, 타르퀴니우스의 노선 변경은 개인적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변을 위협하고 있던 이웃 부족들은 당분간이나마 얌전해졌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로마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로마인이 일곱 언덕에만 살고 있으면 로마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넓은 습지대로 눈을 돌렸다. 팔라티누스 언덕 북쪽에 있는 저지대는 그때까지 도랑이 그물처럼 뻗어 있는 습지대였다.
거기에 지하수로를 내면 저지대 전체의 물을 모을 수 있다. 지하수로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면 모인 물의 배수 문제는 해결된다. 이리하여 대규모 지하수로 공사가 착수되었다. 오늘날에도 테베레 강가에서는 거대한 배수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각 부족끼리 모여 사는 일곱 언덕에 비하면, 이 일대는 중립지대가 된다. 그리고 지하수로의 위쪽을 덮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만 돌로 포장하였다. 그래서 공공 건축물이 서서히 이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의 심장부라고까지 부르게 된 '포룸 로마눔', 즉 '포로 로마노'가 탄생한 것이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던 습지대도 같은 방법으로 저지대로 탈바꿈했다.
여기도 공공 목적으로 사용되어 대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주변의 간척사업으로 왕래가 편해진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는 로마의 최고신 우피테르의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신들도 역시 그들에게 어울리는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이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이 도시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로마도 오스티아를 정복하여 테베레 강 어귀에 항구를 갖게 되고 지하수로를 이용한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 그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높이가 너무 낮고 수도 너무 많다고 여겨진 일곱 언덕도 복수 민족의 집합체인 로마에서는 각 민족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점으로 바뀌었다.
타르퀴니우스의 간척사업은 활용할 수 있는 토지를 늘렸을 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로마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또한 일곱 언덕과 그 주변을 흐르는 테베레 강으로 이루어진 로마는 단조로운 평야보다 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경치를 갖는다. 그 아름다움이 이 시대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개발사업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은 로마 군단의 병사들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왕이 병사들을 이용한 것은 "평시에도 병사들을 전시와 똑같이 활동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후에도 로마에서는 이런 종류의 건설작업을 군단 병사들에게 맡긴 예가 많은데, 이 전통도 간척사업에 그 발단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발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토지도 있고, 실제 작업에 종사할 사람이 있어도,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로마인은 아직 이만한 대역사를 추진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에트루리아에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 모든 기술이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왔다. 기술 지도자로 에트루리아인도 들어온다. 로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에트루리아인이 갑자기 부쩍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에트루리아 기술의 도입은 단순한 도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인 토목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기술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로마에 대한 에트루리아 문명의 영향은 기술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규모 토목사업에는 자재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분야를 담당하는 것도 당시의 로마인에게는 무리였던 만큼, 이것을 맡을 사람도 역시 에트루리아인밖에 없었다. 이전의 로마에는 가내공업 규모의 산업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업과 수공업이 시내 전역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당연히 경제가 활발해졌다. 상공업의 활성화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로마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국가로서 균형잡힌 구조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르퀴니우스 왕은 우연히 한 에트루리아인 소년을 만났다. 이 소년의 출신은 확실하지 않았다. 노예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왕은 왠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어 친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다.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았다. 타르퀴니우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은 타르퀴니우스가 이처럼 세르비우스를 후대하자 불안해졌다. 현재의 왕이 사위를 후계자로 결정하면, 그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타르퀴니우스는 치세가 37년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여전히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원로원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 타르퀴니우스의 추천은 곧 당선을 의미했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선수를 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쪽도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르비우스를 소년 시절부터 키워온 타르퀴니우스의 아내가 남편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자마자 세르비니우스를 불러서, 재빨리 왕위를 차지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왕비한테는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왕이 암살당한 직후에 왕비가 부른 것은 사위였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제6대 왕이 세르비우스는 민회에서의 선거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위에 올랐다. 로마는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가짐으로써 또 한 번의 도약을 기약하게 되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제6대 왕이 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높은 평가를 받은 전임자의 뒤를 이은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선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착수한 사업을 마무리짓는 일부터 서둘렀다. 습지대의 간척사업과 유피테르 신전 건립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2천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르비우스의 성벽'이라 불리고, 현대 로마에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이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 전부를 에워싸는 대규모 성벽이다.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지대에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곱 언덕과 그 사이의 평지로 이루어진 로마 전체를 에워싸는 것은 방어 면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세르비우스가 완성한 성벽의 보호를 받고 군사적인 성공도 거듭되어, 이 무렵에 로마는 주변 부족들 중에서도 우뚝 솟은 존재가 되었다. 세르비우스는 아벤티누스 언덕 위에 수렵의 여신 디아나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이 여신은 목축업을 주로 하는 주변 부족들의 수호신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디아나 신전을 로마 안에 세운 것은, 이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면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로마에 들어올 수 있고, 신전에 참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전을 참배하는 것이니까 무기는 지니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세르비우스 왕은 남을 거부하는 성벽과 남도 받아들이는 신전을 동시에 건설하여 완성시켰다. 제법 꾀바른 짓이다.
그러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 개혁일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군제 개혁인 동시에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기도 했다. 국민의 의무는 세금을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의무는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고대에는 로마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군역으로 직접세를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제구실을 하는 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어엿한 시민이라면 당연히 권리를 갖는다. 시민의 권리는 바로 투표권이다. 따라서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는 도식이 성립된다. 세르비우스는 테베레 강을 향해 펼쳐져 있는 습지대를 간척하고, 이 넓은 평지를 '마르스의 광장'이라고 불렀다.
군신 마르스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군신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잇듯이, 이 평지는 군단의 집결지로 이용되었다. 또한 민회의 투표장으로 이용되었다.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고 생각한 로마인이 보기에, 이것은 결코 이상한 배합이 아니었다. 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앞서, 세르비우스는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주목적은 로마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최초의 인구조사에서 당시 로마의 총인구까지는 알 수 없다. 조사 결과 알게 된 시민의 수와 경제력을 토대로 하여 세르비우스가 만들어낸 새로운 제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세르비우스의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의 구별없이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이를 도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이 도표를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우선, 유복한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인데, 그들만으로 이만한 수의 병력이 모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 무산자를 고용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누구나 품을 것이다.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로마에는 말기가 될 때까지 용병제도가 없었다.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의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의문은 표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겠지만, 이것은 로마의 독특한 투표 방식 때문이었다. 로마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 않는다. 군단의 최소단위이기도 한 백인대가 각각 한 표를 갖는다. 백인대 내부에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뜻을 모으고, 그렇게 하여 나온 통일된 뜻이 한 표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소선거구제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만, 로마에서는 100명이 한 표를 갖는 방식을 고수했다. 앞의 도표를 본 사람은 당장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래서는 제1계급 만으로도 과반수를 차지해 버릴 거라고. 사실 그렇다. 다만 기원전 6세기의 로마에서는 많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시민의 의무, 즉 직접세인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16세 미만인 미성년 남자와 이미 오랫동안 의무를 수행한 60세 이상의 고령자, 여자와 노예,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사람을 뜻하는 '프롤레타리', 즉 무산자뿐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여자라도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그런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기병이 타는 말의 유지비로 매년 200아세를 낼 의무가 있었다. 또한 기원전 6세기에 이미 로마는 2만 명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겠지만, 이것은 예비역까지 포함한 수다. 25세부터 45세까지의 시민으로 구성된 실제 병력을 세르비우스 왕은 1만 명으로 계산한다. 물론 지휘관은 연령 제한이 없었다. 왕 자신도 종신제였다. 같은 보병이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장비가 무거워진다.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중무장 보병이 된다.
계급이 내려갈수록 장비도 가벼워져, 5계급의 보병은 군복도 각자 자유였고, 무기도 몽둥이와 투석기, 그러니까 새총 정도가 의무화되어 있었을 뿐이다. 군역은 직접세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장에서 무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각자 부담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이 책에서 다루게 될 500년 동안 프롤레타리까지 소집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반대로 예비역 소집은 자주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병법을 확정했다.
로마군은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된다. 전위는 맨 먼저 적과 부딪쳐 적의 전선을 흩뜨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대기하고 있던 군단의 주력부대인 중무장 보병이 승부를 결정짓고, 여차하면 세 번째인 후위가 지원하러 들어가는 전술이다. 기병은 기동대 역할을 맡았다. 그저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그때, 세르비우스의 병법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쳐들어가는 로마 군단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세르비우스 왕의 치세도 평화롭게 끝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불평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또한 성과가 많았던 그의 치세도 어언 44년이라는 긴 세월에 이르러 있었다.
마지막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암살당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뒤를 이은 것은 타르퀴니우스의 사위인 세르비우스였지만, 선왕한테는 친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세르비우스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실적도 올렸기 때문에, 불평분자가 있다 해도 백성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44년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런데 불평분자의 아들 세대가 되면, 부모의 그런 양식은 단순한 비겁함으로 보이게 된다. 또한 세르비우스 왕도 길고 다망한 치세 뒤의 피로와 노화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우스한테는 두 딸이 있었다. 두 딸은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드세고 또 하나는 얌전한 성격이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쪽에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담찬 야심가였고 또 하나는 온건한 성격이었다. 세르비우스 왕은 이 넷을 결혼시켰는데,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끼리는 결혼시키지 않았다.
성미가 드센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사촌 오빠에게, 얌전한 왕녀는 야심만만한 사촌 오빠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결혼 생활을 통해 각자의 성격이 중화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리라. 이것은 실패였다. 성미가 드센 툴리아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남편을 사사건건 멸시했다.
당신 같은 겁쟁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한 행운의 여신은 나한테 미소도 짓지 않으리라는 게 그녀의 입버릇이었다.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제부를 유혹했다. 곧이어 온화한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왠지 모르게 급사한다. 과부와 홀아비가 된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는 결혼했다. 세르비우스 왕은 이 결혼에 찬성하지도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상냥했던 딸의 죽음이 준 타격으로 우울증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다. 로마의 왕은 종신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은 왕위에 앉아 있다.
또한 왕위는 세습이 아니기 때문에, 왕의 딸이라도 반드시 다음 번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툴리아는 남편의 마음에 불을 댕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에 당신이 내가 생각한 그런 대장부라면,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섬기고 남자로서도 존경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운명은 나빠질 뿐이예요. 왜 결단을 내리지 않는 거예요? 코린트나 타르퀴니아 같은 타국에 나가서 행동하라는 건 결코 아니예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코린트나 타르퀴니아로 가버리면 돼요. 그리고 당신도 옛날 신분으로 돌아가면 돼요."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야망에 불이 붙은 타르퀴니우스는 우선 로마에 사는 에트루리아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그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 로마의 초빙을 받고 왔다가 그대로 로마에 눌러앉은 사람들이다. 원로원에서도 로마의 개발사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신흥계급의 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타르퀴니우스는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다.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자를 모시는 것은 로마의 수치라고 그는 말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타르퀴니우스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때, 세르비우스 왕이 변고를 알고 달려왔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왕에게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왕의 몸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원로원 출입구 계단 위에서 왕을 내던졌다. 세르비우스가 굴욕감을 씹으며 대궐로 돌아오자, 타르퀴니우스가 보낸 자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칼을 맞고 쓰러졌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딸 툴리아가 모는 마차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버지를 덮쳤다. 이리하여 타르퀴니우스는 왕이 되었고, 툴리아는 왕비가 되었다. 제7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선왕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했다. 그리고 선왕파로 알려진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무장한 호위병에 둘러싸이지 않곤 밖에도 나가지 않은 그는 민회에서의 선거도 원로원의 승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그후에도 줄곧 원로원에 조언을 청하지도 않았고, 민회에 찬반을 묻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뒤에서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렀다. 국내에서는 독재적 전제군주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거만한 타르퀴니우스)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다. 주면 부족들과의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은 늘 로마쪽이었다.
화친과 전쟁의 양면 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은 교묘했지만 음험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불안을 느끼는 지배자는 항상 대외관계를 확실하게 해두려고 애쓴다. 타르퀴니우스는 첫 번째로는 인근에 사는 라틴족한테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 상대를 찾았다. 100년 전인 제4대 왕 안쿠스 시대부터 로마는 이웃 라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기는 동포였기 때문에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기도 했다. 이 '라틴 동맹'은 축제일을 함께 기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전투도 힘을 합쳐 치르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완전히 대등한 동맹관계였다.
하지만 로마가 강성해지자 세력관계도 달라졌다. 함께 힘을 합쳐 전투를 치를 때에도, 병력은 평등하지만 지휘는 로마쪽에서 맡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전리품은 평등하게 분배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라틴 동맹을 경신했다. 라틴족보다 훨씬 강력했던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여 동맹을 경신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 중에는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가 에트루리아한테 끌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기원전 6세기 후반인 그 무렵, 로마 안에서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로마에서는 제5대 왕부터 시작하여 제6대와 제7대 왕까지 잇따라 세 명이나 에트루리아계 왕이 나왔다. 그래서 후세의 연구자들 중에는 이 시기의 로마가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안에서는 막강했지만, 로마 밖에서는 이 시기를 고비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불운은 이 변화를 보지 못한 데 있다. 그는 계속 후퇴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줄도 모르고 의지해 버린 것이다. 급속히 발전한 민족은 쇠퇴할 때도 급속히 쇠퇴한다. 한때는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 근처까지 세력을 넓혔던 에트루리아인은 100년도 지나기 전에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추문은 힘이 강할 때는 공격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점이 드러나면 당장에 쳐들어온다.
그 추문이 당사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해도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왕의 아들 가운데 섹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있었다. 이 섹스투스가 친척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짝사랑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가슴 속이 불처럼 뜨거워진 젊은이는 콜라티누스가 집을 비운 밤에 사랑하는 여인의 저택으로 갔다. 시종은 한 명도 거느리지 않았고, 콜라티누스와는 친척 사이이기도 했다. 루크레티아를 비롯한 콜라티누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뜻이 환대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손님용 침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밤이 깊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섹스투스는 단검을 가슴에 품고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단검을 들이대고 위협한 결과겠지만, 어쨌든 젊은이는 여자를 욕보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젊은이는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남겨둔 채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날 밤, 루크레티아는 로마에 있는 아버지와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하인을 보냈다. 하인은 변고가 일어났으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급히 와 달라는 루크레티아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인 루크레티우스는 발레리우스를 데리고 달려왔다. 남편인 콜라티누스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왔다. 침대에 앉은 채 비탄에 잠겨 있던 루크레티아는 도착한 네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숨겨 가지고 있던 은장도를 가슴에 꽂았다.
그녀는 괴롭게 숨을 몰아 쉬면서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를 맹세시킨 다음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루크레티아의 유해는 로마로 운반되어, '포로 로마노'의 연설대 위에 안치되었다. 시민들은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왕과 그 일족의 야만성과 오만함을 저마다 비난했다. 브루투스는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정숙하고 행실이 올바른 여자들이 두 번 다시 이런 만행에 희생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타르퀴니우스 왕이 선왕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임을 시민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왕과 그의 일가를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로마인의 마음 속에 맺혀 있던 타르퀴니우스에 대한 불만에 마침내 폭발했다.
브루투스의 제안에 커다란 함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한 민중은 민병대를 결성하자는 브루투스의 호소에도 열렬히 응했다. 이때쯤에는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타르퀴니우스도 변고를 알았다. 왕은 당장 휘하부대만 이끌고 로마로 돌아왔다.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추방하기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만 데리고 에트루리아의 도시 카이레를 찾아갔다. 왕비 툴리아는 이미 로마에서 달아났기 때문에 무사했다.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망명한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했다. 이같은 사태의 원인이 된 셋째 아들 섹스투스는 다른 도시로 도망쳤지만, 전에 그에게 모욕당한 적이 있는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는 25년 만에 끝났다. 제7대 왕이었던 그와 함께 로마의 왕정도 끝났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다. 그후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들어간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종신제인 왕의 시대가 끝나고, 임기가 1년 밖에 안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체제라는 이유만으로 왕정 시대의 로마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
공동체도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편이 효율적이다. 조직이 아직 여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가 결정하고 앞장서서 실행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로마의 일곱 왕의 역사를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등용한다는 원칙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 역사였다. 로마는 이런 왕들 덕택에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 수 있었다.
왕들이 모두 장수한 것도 다행이었다. 왕들이 저마다 자신의 포부를 실행에 옮기고, 그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왕이 바뀌어도 새 왕은 선왕의 업적 위에 안심하고 새로운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사업의 중단이 초래하는 활력의 낭비도 피할 수 있었다. 아마 로마 왕정은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사명을 끝냈을것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hyh1822/20122555763 201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