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목회자신문
하나님의 뜻, 교회의 뜻, 사람의 뜻
사람의 뜻이 빗나갔다. 다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할 것이라고들 예상했다. 천안함 사태로 북풍이 몰아쳐서 북측과 대립각을 세우는 여당을 국민이 지지하리라 보았다. 그러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대승했다. 선거 다음날 동아일보는 천안함 북풍이 오히려 여당에게 악재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읽는 전문가이다.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단1:17).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나는 이번 선거의 결과를 잘못 예상했다. 낯이 뜨겁다. 부끄럽다. 성경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선거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거짓예언자들의 예상은 다 빗나가기 마련이었다(신18:22).
서울 시장에 나온 한명숙씨도 야당 후보로서 많은 표를 얻었다. 서울의 거의 모든 구역에서 미세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강남지역에서는 오세훈 후보에게 표가 몰렸다. 한명숙씨는 서울의 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강남지역의 상류사회에서는 거부를 당했다. 교회는 강남지역에 대형교회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현상은 목회자에게 심각하게 보인다. 대형교회가 밀집한 지역이 현저하게 보수주의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보수주의는 사회의 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다. 개혁을 싫어하는 체질을 가진 분들이 상류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다(status quo). 이에 반대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날마다 개혁을 외친다. 이 또한 가난한 서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대립된 사상을 통해서 사람의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이러한 충돌의 현장에 평화가 없다. 화해도 없다. 이것을 성경은 ‘세상’(코스모스)라 부르며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길을 알려 주셨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진보주의도 보수주의도 교회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교회 안에서 보수주의 목회자들과 진보주의 목회자들의 격돌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갈라진 교회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셨다.
성결교단의 총회장으로 일하는 원팔연 목사님께서 CBS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WCC 부산대회 유치에 대해서 사회자가 질문했다. 원목사님은 노선의 차이 때문에 협조하기 어렵다는 뜻을 비쳤다. 성결교는 보수주의 진영에 속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의 노선에 벗어나는 진보주의 성향의 WCC에는 협조할 수 없다고 말씀했다. 한 예를 들면서 WCC가 종교다원주의의 노선을 걷고 있음을 그는 지적했다. 타종교에서 어떠한 구원도 인정할 수 없다고 원팔연 총회장 목사는 못을 박았다.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뜻이 아니기에 혹시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교우들이 있다면 회개할 일이다. 그러나 타종교와 대화를 거부하여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기독교 배타주의도 사랑 없음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배타주의로 나아가는 목회자는 회개할 일이다. 성경에는 배타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해와 비를 골고루 내려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탄의 역할을 하는 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야 마땅하다.
엘리야는 바알 제사장 사백오십 명과 대립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야훼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물에 잠긴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는 기적이 일어났다. 대승을 거둔 엘리야는 백성의 힘을 빌어서 바알의 선지자를 기손 시내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왕상18:40). 이 이야기에 놀랍게도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이 야훼 하나님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언급이 없다. 엘리야는 믿음의 영웅으로 나서서 우상숭배자들과 대결하였고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의 편을 들어 주셨다. 그러나 이 대결이 애당초 야훼 하나님의 지시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승리한 엘리야는 아합왕을 이끌고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한다. 야훼의 능력에 이끌린 엘리야는 아합의 병거 보다 더 빨리 비를 뚫고 앞서 달리는 괴력을 보였다(왕상18:46).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다음에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야훼 하나님은 그 위대한 폭력의 승리 속에 계신 분이 아니었음을 엘리야에게 보이기 시작하셨다. 도망가던 엘리야는 사막의 로뎀나무 밑에 누어서 죽기를 구하였다(왕상19:4~5). 세상의 종교와 정치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내 비참한 도망자로 전락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하였다(deus absconditus). 세상의 투쟁 속에 하나님의 계시지 않았다.
야훼는 위대한 인간의 능력 속에 현존하여 계신 하나님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야훼의 산에 선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폭풍 속에나 땅을 가르는 지진이나 화산 불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엘리야는 놀랍게도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왕상19:12). 이후로 벌어진 아합의 모든 정치적 격랑 속에서 엘리야의 활동은 보도되지 않는다. 아합이 죽고 왕을 계승한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추락하여 병들어 죽는 사건에서 비로소 엘리야는 등장한다(왕하1장). 이어서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를 회오리로 휘감아 하늘로 데려가셨다. 엘리야는 승천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죽을 병이 들어서 죽었다(왕하13:14). 승천한 엘리야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엘리사는 왜 죽을 병이 들어 죽었는가? 엘리사는 본디 열두 겨리 소로 밭을 갈 정도로 힘이 센 용사였고 집안도 부유했다. 엘리야의 겉옷을 받고 능력에 충만한 엘리야는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곰에게 물려 죽게 만들었다. 엘리사는 예후 장군에게 기름을 부어 정변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예후는 과격한 개혁으로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학살하였다. 그러나 본디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야훼의 명령은 엘리야에게 내려진 것이었다(왕상19:16).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지만 그 명령을 제자인 엘리사가 수행하였다. 엘리사는 자신의 청년 제자를 시켜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었다(왕하9:6).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백성 가운데서 조용히 말씀을 전하면서 살았음이 분명하다. 이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스승이 승천한 후에 그의 능력을 받아 정치적 개혁 사업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스라엘의 권력을 찬탈하는 일에 적극 개입하였으나, 살인을 일삼는 예후의 폭력 앞에서 그의 꿈도 사정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정치적 선지자 엘리사는 죽을 병이 들어서 죽었다.
세상의 권력과는 다른 길을 가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이야기가 예언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다니엘은 그의 동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더불어 왕의 음식을 거부하고 채소와 물만으로 식사하였으나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 보다 저 좋아 보였다(단1:15). 여호야김 왕이 포로가 되던 때부터 고레스가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활동한 다니엘은 격동하는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을 환상으로 보고 예언하였다. 죄많은 세상의 일들에 시달려 다니엘은 피곤하여 지치고 놀라는 일을 거듭하다가 여러 날 병으로 앓기를 거듭하였다(단8:27).
오늘날에도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 선포한다. 시대와 함께 목회자도 앓아 눕기를 거듭한다.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높은 곳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교회와 세상이 그 말씀을 듣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말씀의 선포의 직무를 벗어나 몸을 던져 실천하며, 각종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는 목회자는 피곤하고 지치고 놀라서 앓아 눕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세상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교회의 길은 완성될 것이다. 목회자여, 인내하고 끝까지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