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심은 사과나무
김혜옥
양지바른 동산 언덕에서 130년 역사를 등에 업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삼 형제다. 비록 아버지는
깁스한 팔에 목발까지 짚고 있지만, 그들의 가정엔 행복이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다.
이 가족의 역사를 알아보면 130년 전 할아버지가 태평양을 건너온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할아버지 사과나무는 1800년대 말 미국 '미주리주'를 떠나 '존슨'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이곳 동산으로 오게 됐다. 할아버지 사과나무는 이 땅의 첫 사과나무가 되어 귀한 과일로 대접받았다.
이 땅에 처음으로 열매 맺은 사과나무의 역사는 우리나라 선교 역사와 함께했다.
최초에 이 땅을 밟았던 할아버지 나무는 이미 고사목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손인 아버지가 근근이 버티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19세기 말에서 21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모진 풍파를 겪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할아버지의 씨를 받아 발아한 아버지도 어느덧 칠십 년 세월을 견뎌냈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오면서 건강은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온전치 못한 건강 때문에 지금은 버팀목을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손들의 옹골찬 열매 앞에서는 모든 시름을 다 잊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련다."라던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 바로 ‘존슨’ 선교사였다.
그는 대구동산병원 초대 원장으로 130년 전 이역만리 서쪽 땅 미국에서 선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을 찾았다. 그는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때 사과나무 묘목 72그루와 복음의 씨앗도 함께 가지고 왔다.
그 사과나무를 동산병원 뒤에 있는 동산에 심었는데, 그때 그 사과나무들이 대구 사과의 효시가 됐다. 마침 분지인 대구의 기후가 사과 생육 조건과 맞아떨어져 대구가 오랫동안 사과의 고장이 됐다.
그 당시 사과나무의 품질을 유지하고 생존해 있는 것이 바로 아버지 나무와 세 그루의 자손 목이다. 130년 전의 시조 나무에 이어 지금은 3대로 내려온 셈이다. 올해 따라 옹골진 열매들이 튼실하게 자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75세 된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15세 된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듯하다.
130년 전 우리 민족은 고삐에 끌려다니는 소 같은 신세였다. 이 땅에는 먹구름이 덮여있었고, 가난과 무지가 누름돌처럼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희망의 등불을 켜고, 우리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미국 북 장로교회 사람들로 이들은 대구로 왔고, 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전라도 광주로 향했다고 한다.
절망이 콩깍지처럼 덮여있던 우리들의 눈에 희망의 빛을 비춰준 이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구가 있지 않았겠나?
'은혜의 정원'은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13개의 묘석이 있다. 이 중 '아담' 선교사의 부인 ‘젤 리릭 애덤스’의 묘비명이 눈길을 끈다. 거기에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라고 영문으로 씌어 있다.
대구 최초의 여학교인 신명여고를 설립한(1907년) '마르다' 여사는 '브루언' 목사의 아내다. 여사는 이 땅에서 여성 교육의 선구자가 됐다.
은혜의 정원 앞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돌비에 새겨진 글귀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이 잠들어 있다.'
이분들이 뿌린 희생으로 육신이 병든 자가 나음을 받았고, 꺼져가는 영혼이 구원받게 됐다.
지금도 그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블래어, 스윗츠, 챔니스 선교사의 사택을 둘러보며 그때로 돌아가 본다. 지금은 역사박물관, 의료 박물관, 선교 박물관으로 변해 당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당시는 벽 안(푸른 눈)에 금발을 한 미국 선교사들에게 백의의 조선 민족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들의 가슴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앙금이 남아있었던가? 아님, 일본, 중국 등의 시달림을 받은 민족으로서 타민족에 대한 반항인가?
선교사들은 지역민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복음 전파에 앞서 의술을 펴고, 학교를 설립하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서히 접근해 갔다.
'존슨' 선교사를 선두로 문을 연 미국약국은 민간 치료에 의존했던 백성들에게 양약의 위력을 보여줬다. 이에 따라 멀리서 외면했던 백성들이 거리를 좁혀오면서 서로를 신뢰하게 됐다.
드디어 '동산의료원'을 개원하기에 이른다. (1899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고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이라 각지에서 구경하러 왔다고 한다. 그들이 뿌린 의료 선교 덕분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목숨을 건지게 됐다.
다음으로 그들이 한 일은 이 땅을 철옹성처럼 막고 있는 무지의 장막을 걷는 일이었다.
신식 중등학교가 전혀 없는 대구 땅에 계성고등학교를 세워 학문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이때 선교사 '마르타 브루엔'여사는 여자들에게는 전혀 교육 시키지 않는 점을 주시했다. 남자들은 그래도 서당 공부를 하거나 가정에서라도 학문을 접할 수 있었지만, 여자들은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마르타 여사는 여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방법으로 뜨개질이나, 수예, 요리 등으로 접근해서 학생들을 모았다. 이래서 계성고등학교에 이어 대구지역 최초의 여학교 '신명여고'가 학문의 횃불을 들게 됐다.(1907)
이 두 학교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었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였다. 이어서 대구에서 유일하게 공립학교인 대구고보(현 경북고등학교)가 설립되자 이들 세 학교가 주축이 돼서 3.1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됐다.
독립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청라언덕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내려가면서 그때의 만세 소리를 듣는다. 곳곳에 녹음기를 설치해 놓고, 청라언덕이 끝날 때까지 만세 소리가 들렸다.
105년 전 그때 삼일 독립 만세 현장이 재현되고 있다.
독립 만세를 외치며 경찰에 끌려가는 어린 학생들의 사진을 본다. 만세운동 사진 가운데 여학생 속에 우뚝 선, 키 큰 미국인 '마르타' 여사의 모습도 보인다. 외국인인 그도 우리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냐!
이처럼 선교사들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우리 민족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조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덕분에 어둠의 장막이 조금씩 벗겨지게 됐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엎드려 큰절이라도 하고 싶다! 그들의 희생을 딛고 지금은 밝은 빛 아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침략자의 발에 짓밟히는 나약한 나라도 아니고, 남의 도움을 받을 만큼 불쌍한 나라도 아니다.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알아주는 강대국이 됐다. 세계를 누비는 우리 한국 관광객을 잡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문화를 배우며 한류 열풍에 흠뻑 빠지기도 한다.
어둠의 역사와 같이했던 사과나무 가족 앞에서 그분들이 사과나무를 심었던 그 마음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분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을 이제는 나눠야 한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그 옛날 우리가 받았던 그 은혜를 온 누리에 고루고루 나눠야 한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130년 전의 우리 모습과 같은 나라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사과나무 한 그루 심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봐야 한다.
동산병원을 품에 안은 동산과 청라언덕은 미국인이 우리 민족에게 베푼 은혜의 산실이 됐다.
김혜옥 약력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현: 방송작가
*2004년 KBS 시사투나잇으로 방송작가 데뷔
6시 내고향, 풍경이 있는 여행, 다큐 3일, 사랑의 리퀘스트 등
다수 작품 활동
*2014년 현대시선 수필 부문 신인상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로 105-15
118동 102호
전화번호 010-2527-0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