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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동중제17회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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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스크랩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1/06
정인 추천 0 조회 35 10.01.13 08:5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우표로 본 오늘~ 1/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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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 부산 광안대로 개통
부산의 새로운 명물이 될 광안대로가 2003년 1월 6일 개통됐다. 지난 1994년 12월 착공 후 총사업비 7899억원을 들여 8년여의 대역사 끝에 완공된 것이다.

광안대로는 수영구 남천동과 해운대구 우동을 잇는 바다 위 2층 다리로 길이가 교량구간 6220m와 육상 램프구간 1200m 등 7420m에 이른다. 규모가 큰 만큼 이름도 교량구간은 광안대교로, 교량과 램프구간을 모두 합해서는 광안대로로 붙여졌다.

교량구간 중 광안리해수욕장 앞을 지나는 현수교 구간만 길이가 900m로 현수교중 국내 최장이다. 현수교 및 트러스교 구간 1680m에 설치된 화려한 경관조명을 자랑한다. 국내에서 처음 채택된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등 1184개와 조명제어시스템으로 구성돼있어 10만가지 이상의 각종 색상을 연출할 수 있다. 갈매기가 날아가는 형상의 다리 모습이 하루중 시간대, 요일, 평일·주말, 계절 등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로 광안리 해변의 야경을 멋지게 장식하게 된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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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nar Orbiter

 

1998 - 미국, '루나 프로스펙터' 무인 달 탐사선 발사  

미국이 1998년 1월 6일 케이프 커내버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무인 달 탐사선 '루나 프로스펙터'를 발사했다. '프로스펙터'의 달 탐사는 지난 1972년 12월 아폴로 17호의 우주인 유진 서먼과 해리슨 잭 슈미트가 마지막으로 달에 착륙한지 25년만의 일이었다. 프로스펙터는 지구를 떠난지 105시간 뒤인 11일 오후 8시(한국시간)에 달 궤도에 진입했다. 프로스펙터에 든 비용은 6천3백만 달러. 30년전 첫 달 탐사때 2억6천만달러에 비해 4분의 1밖에 안들었다.

길이 1.2m, 무게 2백96kg인 드럼통 모양의 '루나 프로스펙터'는 1년 간 달 1백km의 궤도를 돌며 달 표면지도를 작성했고, 극지(極地)의 얼어붙은 물, 가스 및 광물의 존재 여부를 보여줄 증거를 찾았다. '루나 프로스펙터'가 보내온 자료를 분석한 미국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와 달 연구소는 우주 탐사선 달에 최고 1백억t의 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달의 남­북극 근처 토양에 최소 10억∼최고 1백억t의 물이 얼음형태로 묻혀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달 탐사 역사는 1959년 1월 소련의 무인우주선 루나 1호 발사, 1959년 9월 소련의 무인 우주선 루나 2호 최초 달 착륙, 1962년 4월 미 우주선 최초인 레인저 4호의 달 착륙, 1968년 12월 미우주인 프랭크 보먼과 짐 로블, 빌 앤더스에 의한 인간최초의 달 상공 비행, 1969년 7월 미 우주인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에 의한 인간 최초의 달 착륙, 1972년 12월 미우주인 유진 서먼과 해리슨 잭 슈미트의 인간으로서는 마지막 달 착륙으로 이어져왔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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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세계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삼장문선] 발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은 고려의 직지심경(=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377년간)보다 30여년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본 '삼장문선'이 발견됐다. 1993년 1월 6일 상암문고가 "고려시대 서적원 간행의 '삼장문선'(원제 신간류편역거삼장대책)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며 이 책을 공개했다. 출간연대는 1341년에서 1370년 사이로 '직지심경' 보다 짧게는 7년, 길게는 36년 앞서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본의 활자들은 대-중-소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자 본문에 소자 두줄로 주석을 달아 인쇄할 수 있는 완벽한 체제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활자와 체제외에도 내용이 구본은 고려본, 신본은 조선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삼장문선'은 원나라에서 주관한 국제적인 과거시험(향시와 중서성 회시)의 대책문제를 뽑아 고시관의 비평을 곁들인 명답문집으로, 이 책에는 1314년에서 1335년까지의 출제가 들어있고 초간본은 1341년에 나왔다. 내용에 고려본인 구본은 경의를 표시하는 대두법을 사용, 원황제나 황실이 나오면 문장을 별행하고 있으나 조선본은 이를 무시, 출판국가가 다름을 확연하게 증거하고 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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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한국-앙골라 국교 수립

북한과는 1976년 4월 수교하였으나 1998년 공관을 폐쇄하였고, 한국과 1992년 1월 수교하였다. 1993년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에 가()서명하였다. 1994년 앙골라의 수산장관이 방한하였고, 1995년 한국이 평화유지군으로 공병대 198명을 파병하였다.

1998년 현재 대()한국 수출은 1억 631만 9000달러, 대()한국 수입은 1억 8184만 3000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광물 연료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세제, 고무제품, 전기기기, 섬유류 등이다. 1999년 현재 23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2001년 2월에는 앙골라 대통령 호세 에두아르도 도스 산토스(Jose Eduardo dos Santos)가 방한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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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서울-파리간 KAL여객기, 소련 시베리아 영공 첫 통과  

우리 국적기가 1990년 1월 6일 정기편으로는 최초로 소련 영공을 통과해 서울-파리간을 운항했다. 여객기는 이날 밤 10시30분 서울발 파리행 대한항공 901편이 니가타-하바로프스크-모스크바 항로를 거쳐 7일 오전 3시30분 파리에 도착했다. 여객기에는 승무원 20여명과 승객등 2백90여명이 탑승했다.

이 여객기의 정기항로는 서울을 떠나 앵커리지를 경유해 파리에 도착하는 것이지만 대한항공측은 앵커리지 남쪽 리다우트 화산의 폭발로 기존항로 운항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시베리아 항로를 택했다. 교통부 관계자는 앵커리지의 화산폭발 활동이 장기화되고 있는데다가 4월 한-소간 직항로 개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시험비행 차원에서 관계기관과 협조, 소련측의 영공 통과 허가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우리 국적기의 소련 영공 통과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동구권 선수단 수송을 위해 시베리아 영공을 통해 헬싱키까지 여객기를 운항한 일은 있으나 이때는 모두 전세기였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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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인도 총선에서 간디 재집권

인디라 간디(Gandhi, Indira, 1917~1984)는 독립 후 아버지 네루의 호스티스 역할을 하면서 정치가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1955년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1959년 당수가 되었다. 1964년 바하두르 샤스트리 내각에 입각, 1966년 샤스트리 사망으로 총리에 취임하였다. 경제안정에 힘썼으나 강권정치를 편다는 야당의 공격으로 1977년 총선거에서 야당에게 패배하여 한때 정계를 떠나 있었다. 그러나 인민당이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국민의 신임을 잃자, 1980년 총선거에서 승리, 총리에 복귀하였으나 1984년 시크교도인 경호원에 의하여 암살당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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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한국-기니 국교 수립

기니는 1960년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78년 수교에 합의하였으나 1980년에 관계를 중단하였고 북한만이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다. 1978∼1987년 사이에 한국은 77만 5000달러 상당의 기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1997년 기니 국회의장 하지보우바차르 비로 디알로가 방한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국 수입은 413만 6000달러이고, 수출은 5891만 3000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전기기기, 차량, 비금속 제품, 기계류, 어류 등이고, 수출품은 광물연료, 어류, 목제품, 커피, 차 , 종이제품 등이다. 2001년 6월 현재 교민수는 53명이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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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카터, 주한미군 철수 재고
주한미군 철수를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지미 카터!
1978년 오늘, 대통령에 당선된 지 1년 2개월만에 기자회견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재고한다고 발표했다.
카터 미 대통령은 북한의 군사력이 한국보다 우세하다는 극비 보고서에 따라 미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 시킬 필요가 있음을 시사했다.
카터는 원래 5년 내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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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시아누크, 캄보디아 대통령에 당선
1955년 이래 인민사회주의연합을 이끌며 거듭 내각수반으로서 정치의 중심을 감당하였고, 왕제()사회주의의 추진을 내세웠다.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군사동맹 불체결을 선언하고, 1957년 영세중립법을 공포하였다. 1961년 라오스국제회의를 제창, 그 중립화에 공헌하였다. 1970년 3월 외유 중에 우파()인 론놀 등에 의한 쿠데타로 국가원수직을 박탈당하고, 5월 베이징[]에서 캄보디아 민족연합정부를 세우고 망명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내전을 일으켰던 공산 크메르루주군()이 캄보디아를 장악함에 따라, 1975년 9월 귀국하여 그들의 지지을 받고 국가원수직에 복귀하였으나 1976년 4월 크메르루주의 독재 강화로 사임하고, 중국에 망명객으로 머물었다.

1979년 2월 헹 삼린 정권을 앞세우고 캄푸챠를 장악한 베트남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1982년 반()베트남파가 집결하여 수립한 민주캄보디아연합의 불안정한 망명연립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국외에서 국가회복운동의 지도자로서 투쟁을 계속해오다가, 1991년 귀국하여 과도정부인 캄보디아 민족평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93년 9월 입헌군주제로 환원하는 헌법개정으로 왕위에 복귀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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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중국 군부 원로 천이[陳毅(진의)] 사망  

천이[陳毅(진의), 1901.8.26~1972.1.6]

중국 혁명 공신인 '10원수'의 한 사람이며 외교부장을 역임한 진의가 1972년 1월 6일 밤 11시 55분 숨을 거두었다. 71세였다. 1901년 사천성에서 태어나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했던 진의는 그곳에서 데모하다 체포되어 1921년 강제로 송환되었다.
귀국 후 22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 1927년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에서 정치 공작을 담당한 후, 주덕의 부대에 들어가 초기 혁명의 근거지인 강서성, 호남성 경계선의 벽지 정강산에서 모택동과 합류, 군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신4군 창설에 관여했고, 화동 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 상해시장으로 활약했다.
건국 후인 1954년 주은래가 불러 국무원에 들어가 1958년에 외교부장에 취임했으나 문화대혁명 중인 1967년 군 원로들과 강청, 임표가 대립한 '2월 역류'사건으로 직무 정지를 당하고 급진파에게 거듭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진의는 비록 문혁으로 실각했으나 이날 추도식장에는 모택동이 직접 방문, 그의 죽음을 애도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

 

 

 

 
1953 - 이승만 대통령 일본 방문, 요시다 수상과 회담

일본에 대한 군정을 종료하고 일본을 자주독립 국가로 탄생시킨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 수립을 주선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국교 수립을 통해 극동의 안보 강화를 모색하려는 미국의 노력으로 한일 수교회담은 1951년에 시작됐다. 그러나 청구권 문제 등 이해관계 상충으로 회담이 결렬돼 있던 때였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양국 수뇌가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중단된 회담을 재개시키고 한일 수교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출발은 1953년 1월 5일이었다. 클라크 장군이 보내온 C-54 수송기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 수행원은 나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었다. 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장으로 도쿄에 주재하고 있던 김정렬 공군 소장이 현지에서 합세하게 돼 3군의 선임자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양새가 됐다.
하네다 공항에는 클라크 장군 부부와 일본 정부 측에서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南) 외무장관이 아시아국장을 대동하고 마중을 나왔다. 이 대통령은 클라크 장군과 인사를 나눈 뒤 전날 작고한 히로히토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秩父宮) 야스히토(雍仁) 친왕 상사에 조의를 표하고 회담장으로 직행했다.
유명한 반일 정치가의 일본 방문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정부 수립 직후였던 1948년 가을 이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방일 직후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터져 급거 귀국하는 바람에 일본 정치인들과의 만남은 없었다.
첫 한일 정상회담은 1월 6일 클라크 장군 숙소인 도쿄 마에다(前田) 하우스에서 열렸다. 신주쿠에 있는 마에다 하우스는 에도 시대 가가(加賀) 영주 마에다의 에도저택으로, 9000평이나 되는 호화주택이었다. 미군의 군정은 끝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엔군사령부가 도쿄에 개설돼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접수했던 시설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저택 종사자 수만 19명이라고 기억이 난다.
우리는 회담장에는 못 들어갔다. 한국 측에서는 이 대통령과 김용식 주일공사(외무장관 역임), 일본 측에서는 요시다 수상과 오카자키 외무장관, 미국 측에서는 클라크 장군과 머피(Murphy) 주일 미국대사, 이렇게 6명이었다.
7순의 양국 정상은 석양을 받으며 기념촬영하고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그리 우호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수교 회담은 결렬상태고, 이승만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 나포 문제 등으로 양국관계가 좋지 않았던 때다.
배석했던 김용식 공사에 따르면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는 주로 이 대통령이 발언을 했고, 요시다 총리는 듣는 편이었다고 한다. 양국 수교 교섭 등 현안이 잘 풀리기를 희망한다는 이 대통령 발언에 대해 요시다 수상은 앞으로 일본은 어느 나라도 침략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회담과 관련해 분명히 밝혀 둘 것이 있다. 항간에 나도는 ‘호랑이 이야기’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는데 아직도 많이 있느냐?”는 요시다 수상의 질문에, 이 대통령이 “없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다 잡아갔기 때문이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대화는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한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2008.11.20

<861>老兵이 걸어온 길-111-한일 정상회담 수행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kdd/ColumnTypeView.jsp?writeDate=20081120&menuCd=2001&menuSeq=16&kindSeq=1&menuCnt=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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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 루스벨트, 4가지 자유에 대한 연두교서 발표

1941년 1월 6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1882~1945)가 4가지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를 토대로 한 의회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연두교서에서 전세계적인 사회·정치 분야의 목표로 언론 및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종교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내세웠다. 루스벨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나라가 세계 어느 지역에 대해서도 물리력에 의한 침략행위를 할 수 없도록 모든 국가는 철저하게 군비축소를 이행하자"고 제의했다. 같은 해 8월 그는 윈스턴 처칠과 함께 발표한 대서양헌장에서 이 전세계적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후 이 목표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등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배경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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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조선총독부, 전(前) 중앙청 건물로 청사 이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의 흥례문 구역을 몽땅 헐어낸 것이 1914년 7월이고, 다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겠다고 지진제(地鎭祭)를 올린 것이 1916년 6월 25일이었다. 그로부터 건물을 완공하여 이른바 시용식(始用式)을 거행한 것이 1926년 1월 4일이었다. 그러니까 다 지어올리기까지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http://www.sacho.pe.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57&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C3%BB%BB%E7

 

기공식 - 1916.6.25

시용식 - 1926.1.4

청사 이전 - 1926.1.6

준공식 - 1926.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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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출생

김대중 [, 1924.1.6~ ]

1926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박정희()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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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엽서, 2000.3.4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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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엽서, 1990.3.26 발행

1920 - 조선총독부,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시사신문 발행 허가  

3ㆍ1독립만세 운동은 일제의 무단정치를 포기토록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며 식민지 조선 지도층에는 대오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같이 무단정치에 한계를 느낀 일제는 제3대 조선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 1919년 9월 10일 이른바 4개항의 ‘문화정책’을 발표했다. 민간지 발행허가도 그중 하나였다. 민간신문 허용방침이 알려지자 1919년 10월 장도빈이 ‘서울일보’를 신청하는 등 수십건의 발행허가 신청이 총독부로 몰려들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시사신문 등 3종의 민간 일간신문 발행을 허가했다.
조선일보는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 동아일보는 매일신보의 편집장을 지낸 이상협, 시사신문은 친일단체 국민협회의 민원식 명의로 허가받았다. 조선일보는 3월 5일에,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은 4월 1일에 창간됐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이 두 신문은 창간되자마자 식민지 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기사를 게재,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는 등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의 중추로 그 역할을 다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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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루스벨트(Roosevelt, Theodore) 사망  

루스벨트 [Roosevelt, Theodore, 1858.10.27~1919.1.6]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이었던 데오도르 루스벨트가 1919년 1월 6일 사망했다. 미국 뉴욕주 뉴욕시 출생으로 1900년 대통령 W. 매킨리 밑에서 부통령으로 있다가 매킨리의 암살로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04년 재선됐다.

대통령 재임시 내정면에서는 혁신주의를 내걸고 트러스트 규제, 철도통제, 노동자 보호입법, 자원보존 등에 공헌하였으며, 외교면에서는 먼로주의의 확대해석에 의하여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해 문제, 파나마운하 건설 등 강력한 외교를 추진했다. 특히 러-일전쟁의 조정, 모로코 문제 중재 등에도 적극 힘써 190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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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뉴멕시코, 미국의 47번 주로 편입

뉴멕시코주(New Mexico)는 미국 남서부에 있는 주로 주도()는 샌타페이이다. 동쪽은 그레이트플레인스, 남쪽은 멕시코, 북쪽은 로키산맥, 북서쪽은 콜로라도고원에 각각 접하며, 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로키산맥 남부가 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곳에서 발원하는 리오그란데강()과 페이커스강이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지형상으로는 휠러산(4,011m)을 최고봉으로 대부분이 해발고도 1,500m의 고원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연강수량 150∼650mm로 건조하며 스텝과 사막이 널리 전개되고 있으나, 산지에는 삼림이 무성한 곳도 있다. 그러나 남부의 사막지대에서 애리조나주와 멕시코에 걸친 지역에는 선인장이 많아 특이한 경관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옛날에는 인디언의 거주지였으나, 1840년 에스파냐인()이 탐험한 이래 백인들이 금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한 후부터 발달한 곳으로, 16세기 후반부터 에스파냐 식민지를 형성했다. 그후 1821년 멕시코령(), 1848년 멕시코전쟁으로 미국령이 되었고, 1912년 47번째 주로 미국에 편입되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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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몬테소리, '어린이의 집' 설립

1907년 1월 6일 이탈리아의 교육자 몬테소리(Montessori, Maria, 1870~1952)가 로마의 슬럼가 산로렌츠에서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처음으로 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자 의학박사로 로마대학병원에서 일하면서 정신지체 아동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지체 아동의 문제는 의학적인 면보다 교육적인 면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교육자로서의 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결국 그녀는 정신지체 아동들과 함께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3∼6세 노동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의 집'을 설립했다. 이후 몬테소리 교육방법을 적용한 기관들이 세계적으로 확대되어갔다. 몬테소리 교육이론의 중심은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교육을 지양하고 어린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교육, 즉 아동 자신의 자발적인 학습을 강조하는 데 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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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오스트리아의 유전학자 멘델(Mendel, Gregor Johann) 사망

멘델 [Mendel, Gregor Johann, 1822.7.22~1884.1.6]

실레지아 지방의 하인첸도르프(현 체코의 하이첸) 출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원예일을 도와 자연과 친숙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를 하면서 오르뮈츠의 철학연구소를 22세에 졸업, 브륀(현 체코의 브르노)의 성토마스교회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 1851년 교회의 후원으로 빈대학에 유학, 1853년까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수학 등을 청강, 1854년 브륀국립종합학교 교사가 되었다.

1856년부터 교회 뜰에서 완두로 유전의 실험을 하여 7년 후 ‘멘델법칙’을 발견하였다. 1865년 브륀의 자연과학협회 정기회의에서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이것을 발표하였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이 대발견은 20세기까지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1868년 성토마스수도원 원장에 선출되었다. 1874년 교회과세법으로 정부와 대립, 그의 재산이 차압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멘델법칙’은 크게 각광을 받아, 1910년 브륀에는 동상이 서고 그곳을 멘델광장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는 유전 ·진화의 문제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함으로써 유전학을 창시한 셈이다. 계획의 치밀성, 실험의 정확성, 자료처리의 탁월성, 논리의 명쾌성 등에서 뛰어났던 그의 실험은 생물학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꼽힌다. 주요저서에는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 있다. /naver

 

 

1883 - 레바논 태생의 철학자, 화가, 소설가,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출생

 


1882 - 미국의 민주당 지도자 레이번(Rayburn, Sam) 출생

 


1878 - 미국의 시인 샌드버그(Sandburg, Carl) 출생

 


1872 -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스크랴빈(Skryabin, Alexandr N.) 출생

 

 

1861 - 벨기에의 건축가 오르타(Horta, Victor) 출생

 


1852 - 프랑스의 맹인 교육자 브라유(Braille, Louis) 사망


 

1838 - 발명가 모스,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서 전신기 공개 시연


 

1832 - 프랑스의 판화제작자, 삽화가 도레(Dore, Gustave) 출생


 

1822 -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 출생

 

 

1766 - 파라과이의 독재자 프란시아(Francia, Jose Gaspar Rodriguez) 출생

 

 

1745 - 프랑스의 기구 제작자 작크 몽골피에(Montgolfier, Jacques-Etienne) 출생

 

 

1655 - 스위스의 수학자 베르누이(Bernoulli, Jakob) 출생

 

 

1412 - 프랑스의 성녀 잔 다르크(Jeanne d'Arc) 출생

 

 

1367 - 영국의 왕 리처드 2세(Richard Ⅱ)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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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14 14:52

    첫댓글 알찬 정보이네 잘지내고 있지>? 오늘 1.24일 12시 양승옥아들 결혼식날 얼굴이라도 한번 뵈여줘 추운날 건강조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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