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제주도 답산을 마친후에 정각님께서 숙제 내어준 곳을 현충일 날에 다녀 왔습니다.
그 곳은 효자 홍달한의 묘였습니다.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소수산봉(족은물메) ("족은"은 '작은'의 제주도 방언)
좌 향 : 巽坐乾向
형 국 : 금계포란형
용 맥 : 대수산봉-소수산봉
조안산 : 월랑봉(다랑쉬오름)과 두산봉, 식산봉이 주객, 군신의 관계로 호종함
제주의 대표적 효자,좌우가 완벽하게 장풍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침 6일에 비자림을 보고 소수산봉으로 가는길에 우연히 비석이 있어 사진을 찍고나서 소수산봉에 도착하여 묘를 확인하여 보니 조금전에 사진찍은 비석의 주인공이 묻힌 곳이었다.
안내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홍달한 공은 지극한 효자로 이름이나서 조정으로 부터 3차에 걸쳐 포상이 있었으며 왕명으로 통정대부 그후 가선대부, 그후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내렸다한다.
근세에 보기 드문 효자로 타의 귀감이 될만하다.
홍달한은 4형제의 막내임에도 부모(永吉,김해김씨)묘의 좌측에 모셔져 있다.
위치도
위치도
좌향도
홀달한충효정문
홍공달한 지려
앞에서 본 묘
앞에서 본 묘
후현무
우측에서 본 묘
좌전방에서 본 묘
우전방에서 본 묘
좌측에서 본 묘
뒤에서 본 묘 멀리 두산봉이 일자문성의 조산으로 보인다
뒤에서 본 묘
묘비
묘비
홍달한 부친(영길)묘비에 적힌 가계도 입니다.
(홍달한 관련 이야기)
효자 홍달한 이야기
옛날 성산읍 고성리에는 홍달한이라는 이름난 효자가 있었다. 이 효자는 효도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충성도 대단했으므로 뒷날 조정에서는 가선대부의 직함을 내렸고, 그가 죽은 후에는 효자비가 세워졌다. 지금도 그 비석은 성산읍 수산리경에 남아 내려오며, 성산읍 고성리 소수산봉 굼부리에는 또 그와 그의 부모의 무덤이 삼쌍묘로 지금까지 모셔지고 있다.
이효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을 무덤 옆을 하루도 떠나지 않고 지켰으며 지도옷, 즉 상복의 앞섶으로 돌을 날라다 부모님의 무덤에 산담을 쌓았는데 동네 아이들 마저 감동하여 함께 돌을 나르곤 했다.
홍효자는 살생을 무척 싫어해서 생선 장사가 고기를 팔러 오면 서기를 사서 바다에 넣어주곤 했는데 놓아진 고기는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다시 살아나 기쁜 듯이 헤엄쳐가곤 했다 한다. 부모의 제사가 낚시를 사용했고, 낚시에 걸려 올라온 고기도 꼬리를 잘라 다시 바다에 던졌다가 세 번째 올라와서야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제숙이야.'하고 비로소 제상에 올려 놓았다 한다.
또 한번은 그가 부모님 무덤 가를 지키고 있는데 노루 한 마리가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쯧쯧, 불쌍한 것. 어떵허단 다쳐시냐?"
홍효자는 다친 노루를 잡아 나뭇가지를 대고 싸맨 후 놓아주었다. 겨울이 되어 눈이 심하게 오자 홍효자는 아들에게 무덤가에 가서 곡식을 주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갔다가 이놈을 잡아먹을 양으로 붙잡아 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 불쌍한 것을 어떵 잡아먹을 수 있느냐?"
호통을 친 홍효자는 다시 그 노루를 놓아 살려주었다고 한다.
〈신양리 오문복씨〉
from : http://www.jeju.go.kr/
수산리 홍달한 孝子碑
위치 ; 성산읍 수산리 수산초등학교 서북쪽 200여m 지점. 수산초등학교 북쪽 길로 서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길로 들어가서 다시 왼쪽 길로 가면 길가에 보인다.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 후기
조선 제24대 헌종(1834-1849) 때 남제주군 성산읍 고성리에 효자로 이름난 홍달한(洪達漢)이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리 지극하고 남달리 부모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아버지는 홍달한이 어릴 때 돌아가셨다. 젊어서는 현청의 포졸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홍효자는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자 침식을 잊고 병구완에 힘썼다. 먼저 재력을 다하여 좋은 이부자리를 마련하여 드렸고, 아버지는 방안에 모시고 자신은 옷을 입은 채 마루에 자면서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리고, 매일매일 아버지의 변을 받아내고 직접 먹어 보았다. 날이 갈수록 단맛이 더해가자
"똥 냄새가 궂어야 오래 사는 법인데 똥 냄새가 단 것을 보니 속히 세상을 떠나실 것 같구나."
하면서 통곡하였다.
하루는 홍효자가 어머니의 병세도 나아지고 해서 이를 잡았는데 살생을 하지 않는 그는 가죽옷 털 속에 빽빽히 들어 있는 이를 하나씩 잡아내어 땅바닥에 놓아주는 것이었다. 육지서 온 말총장수가 지나다가 이잡는 꼴을 보고 놀려 주려고
"옷을 시루에 넣어 찌면 이가 한꺼번에 도망가리다."
하고 말해 주었다. 순진한 홍효자는 그 말을 믿고 가죽옷을 시루에 넣어 쪘다. 이는 다 죽었지만 옷이 구운 오징어처럼 비틀어져 입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 공연한 놈의 말을 들어서 이는 다 죽어 버리고 옷마저 못 입게 되었으니 어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실까?" 하고 탄식을 하였다.
한편 말총장수는 말총을 사가지고 육지로 가려고 배를 놓았다. 그러나 출발하려고 할 때마다 풍파가 세어서 돌아오기를 수십번 되풀이하였다. 하다못한 말총장수는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점쟁이는
"천하대효(天下大孝)의 마음을 거슬러 놓았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
고 꾸중을 하였다. 말총장수는 죄를 뉘우치고 홍효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 그 후에야 순풍이 일어 육지로 갈 수 있었다.
헌종이 승하하자 홍효자는 다랑쉬오름에 올라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며 통곡하였다. 이 때 향 냄새가 한양까지 퍼져서 제주 홍효자가 분향하는 것을 궁중에서도 알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성스럽게 상을 모셨으며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을 지켰다. 또한 사람들을 빌지 않고 혼자서 산담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모친상을 마친 후에는 다시 상복을 입고 어려서 치르지 못한 부친상을 치렀다. 식생활까지 절제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자식에게는 '네가 병이 나면 누가 조상님을 모시겠느냐?' 하며 고기를 먹게 하였다.
말년에는 '성인의 가르침을 터득하고 실천해야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며 책을 즐겨 읽었으며 날마다 강론을 하였고 새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고치기도 하였다.
그 후 효자비가 내려져서 고성리에서 수산리로 가는 길목에 남아 있고 그 넋을 높이 받들어 그곳을 '효자문거리'라고 부른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95-96쪽)
현재는 효자비는 수산리 수산초등학교 북쪽 500여m 지점 외진 곳에 있고, 후손들이 커다란 기념비를 세워 놓았고 남제주군수 명의로 세운 안내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22년(1746) 7월 28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命濟州人洪達漢加資 達漢有孝行且於庚子甲辰國喪俱行方喪之制 每朔望必登高而拜 牧使韓億增以聞有是命
〔제주인 홍달한(洪達漢)에게 가자(加資)하라고 하였다. 홍달한은 孝行이 있고 또 경자년과 갑진년 국상에 모두 방상지제(方喪之制)를 행하였다. 그리고 매번 삭망에는 반드시 높은 산에 올라가 북향재배하였다. 목사 한억증(韓億增)이 이를 아뢰어서 이 명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528쪽) 여기서 경자년은 1720년 숙종의 상이고, 갑진년은 1724년 경종의 상, 방상지제란 三年服喪을 뜻한다.
홍효자의 묘는 작은물뫼(소수산봉)에 고성리를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데, 1749년 세워진 비석에는 「留鄕座首濟州都訓長忠孝嘉善大夫洪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제민일보 1991년 2월 27일 '오름나그네')
홍달한 효자에 대한 오조리 사람 吳鳳祚의 시가 전한다.
敬次烏川洪孝子贊 오천이 홍효자를 찬양한 시에 붙여
千古卓然不朽名 오래도록 탁연하게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여
忠孝雙全日星幷 충과 효를 함께 닦아 해와 별 같이 빛이 나네
三年燃燭瞻宸淚 삼년동안 촛불 밝혀 북쪽 궁궐 우러러 눈물 흘렸고
六載居廬泣血情 육년 동안 시묘(侍墓)하여 정성이 눈물 겹네
人竪口碑揚實蹟 행적을 찬양하는 말 대대로 전해 오고
天褒旌楔樹風聲 나라에서 정려 세워 그 명성을 표창했네
餘慶有子循遺矩 후손이 대를 이어 그 가풍을 따르니
逖矣耽羅義理明 먼 지방 탐라섬에 의리가 밝혀졌다.
글자풀이
∙烏川:鄭實의 호. 대제학을 지냈다.
∙楔:문설주 설. 旌楔은 旌閭를 뜻함.
∙逖 : 멀 적.
※ 오봉조(吳鳳祚) 영조6년(4063:1730)~순조15년(4148:1815)
호는 항인(巷人). 현 성산읍 오조리에서 판관을 지낸 오후찰(吳厚札)과 김해 김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인 청주 한씨의 슬하에서 자랐다. 천성이 총명한데다가 모부인 한씨의 인자한 훈육으로 학문을 닦아 당대의 본도 유종(儒宗)으로 추앙되었다. 평생을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조사(造士)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중에 강성익(康聖翊), 고명학(高鳴鶴), 부종인(夫宗仁) 등이 유명하며 정의서당의 훈장으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오조리 오훈장으로 통칭된다.(http://blog.daum.net/ik3711/ 밝은토끼생의 글)
from : http://jejuhistory.co.kr/ 고영철의 역사교실
충효자 홍달한
1.효자비
조선조 숙종∼영조 시대에 이 마을에서 나서 살았던 충효자 홍달한에 관한 기록은 규장각 소장본의 〈濟州大 靜旌義邑誌(제주대정정의읍지)〉, 김석익의 〈탐라기년〉, 박용후의 〈남제주군지〉등과 전설로서 현용준의 〈제주도 전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의 〈제주설화집성(Ⅰ)〉, 제주도의 〈제주도전설지〉 등에 수많이 소개되는 빼어난 인물이다.
그의 높은 뜻을 기리는 충효비가 지금의 수산리 지경인 효자문거리(혹은 효자문 동산)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 비가 세워진 까닭은, 그가 숙종대왕이 승하하자 세화리 지경인 아랑쉬오름에 제단을 차리고 매달 초하루 보름에 나막신을 신고 그도에 올라 곡하며 삭망을 지내기를 친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며 다니던 길목인 까닭에서이다.
2.무 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부드럽고 어진 심성으로 극진히 봉양하다 돌아가심에 아버지의 묘가 있는 작은물뫼(小水山峰)의 북녘 기슭에 묘를 쓰고 그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했다.
복을 입은 동안 3년을 내내 그곳에 살면서 옷앞섶으로 돌덩이를 손수 날라다가 〈산담〉을 둘렀는데, 돌을 봐서 거기 벌레 한 마리라도 기어다니는 것은 벌레의 생명을 아껴서 도로 그 자리에 두고 다른 돌을 골랐다.
묘를 지키면서 또한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하늘이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그 나무들이 자라남에 따라 동쪽나무와 서쪽나무의 가지를 맞붙여 〈효자문〉을 세웠다. 나무효자문은 그 후 푸르르게 서 있다가 일제의 민족혼 말살 정책으로 인해 잘렸다.
홍 효자는 그 후 사망하여 그의 후손들에 의해 바로 부모의 곁에 묻혔다.
작은물뫼는 홍효자가 심은 나무로 하여 지금까지 울울창창한 숲을 이루어 그의 일가묘지를 에우고 있다.
3.효자록
조선조 영조 20년(서기 1744년)에 제주목사 김윤은 홍달한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상소하니 임금은 그의 충효행을 높이 기려 旌閭(정려)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오천 정실은 〈효자 홍달한영전〉을 적어 그의 덕행과 효심과 충성심을 후대에 전하게 된 것이다.
위의 기록의 원본은 그의 직계후손인 홍관우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가문에서도 족보와 더불어 필사본을 지니고 있으면서 후대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from : http://jejuvill.net/jejutown
조선왕조실록
영조 35권, 9년(1733 계축 / 청 옹정(雍正) 11년) 7월 14일(계사) 3번째기사
홍달한이 효성이 지극하여 포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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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현(旌義縣) 사람 홍달한(洪達漢)을 포상(褒賞)하였다. 홍달한은 효성으로 어미를 섬겼다. 어미가 종기를 앓자 입으로 빨아내고 병이 심하자 손가락을 베어〈피를 먹였으며〉 똥을 맛보았다. 국상(國喪)을 만나면 문득 술과 고기를 철폐(撤廢)하고 초하루·보름과 상제(祥祭)나 담제(禫祭)에는 북쪽을 바라보고 울부짖었으므로, 어사(御史) 심성희(沈聖希)가 그의 충효(忠孝)를 장계하여 포상하였다.
원문 : 褒賞旌義縣人洪達漢。 達漢事母孝, 母患腫吮之, 病㞃割指嘗糞。 遭國哀, 輒廢酒肉, 朔望、祥、禫, 北望號泣, 御史沈聖希狀褒其忠孝。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2책 364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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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64권, 22년(1746 병인 / 청 건륭(乾隆) 11년) 7월 28일(임술) 4번째기사
목사 한억증의 계문으로 제주 사람 홍달한이 효행과 충절로 가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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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 홍달한(洪達漢)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홍달한은 효행이 있고, 또 경자년11071) ·갑진년11072) 〈숙종·경종의〉 국상에 똑같이 방상(方喪)11073) 의 복제를 행하며 삭망(朔望)마다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 배례를 하였는데, 목사(牧使) 한억증(韓億增)이 이를 계문하므로 이 명이 내려진 것이었다.
원문 : 命濟州人洪達漢加資。 達漢有孝行, 且於庚子、甲辰國喪, 俱行方喪之制, 每朔望, 必登高而拜, 牧使韓億增以聞, 有是命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3책 220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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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071]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註 11072]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11073]방상(方喪) : 자식이 부모의 상(喪)에 3년 동안 복(服)을 입은 것에 비교하여 임금을 섬기는 신하가 임금이 죽은 후에 3년 복을 입는 것을 말함. ☞
from : http://sillok.history.go.kr/
첫댓글 지천님,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은 홍효자같은 사람 구경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세상이지요. 그 집안은 영구히 잘 나갔으면 합니다.
요즘처럼 충효가 무너져 가고 있는 이때 홍달한의 효행은 우리의 귀감이되며, 이 집안 후손들은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후손들도 좋은 자리를 차지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잊지 않으시고 다녀오시고, 사진과 더불어 자세한 설명을 덧 붙여주시니, 감사하고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더운날 수고하셨음다!~~뱀 조심하세요~~~^^
좋은 자료 잘 봅니다. 감사합니다.
자료잘보고가내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