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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불교사>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12)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1930년대 활동한 고더드와
1960 ~70년대 활동한 엘렌와츠
드와이트 고더드((Dwight Goddard)와 미국식 승가
드와이트 고더드는 1861년 미국의 메세츠세츠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에 크게 실망한 그는 선교사가 되었고 중국 푸차오에 파견되었다. 그는 중국땅에서 처음으로 쿠산에 있는 불교사원을 방문하였다. 이후 그는 불교관련 서적을 읽고, 일본으로 시험삼아 여행을 갔다가 1925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난징에 있는 칼 루드위그 레이챌트 그리스도교-불교 수도원에서 얼마간 보냈다. 1928년 그는 불교공부를 더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8개월간 타이코 야마자키 로시는 그가 교토에 있는 쇼코쿠지에 머물면서 스님들과 저녁 좌선을 함께 할 것을 허락했으며, 그에게 ‘신참스님’ 표지가 수여되었다.
고더드의 저서, 불교성전
고더드는 일본과 중국에서 수도원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케이안과 센자키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수행지도는 잘못된 포교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
1934년 드와이트 고더드란 이름의 미국인이 센자키와 소케이안의 포교방식의 약점과 한계를 열거하면서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Buddha)'라는 미국인 불자모임을 결성했다.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조직은 이 문제에 대한 고더드의 해결책이었다. 즉 미국에 수도승 승가를 하나 세우려는 의도였다. 이 조직은 두 개의 본부가 있었는데, 하나는 버몬트 케포드에 있는 고더드의 농장이었고, 또 하나는 서부 해안의 수도원인 40에이커의 고가古家였다. 이 집은 과일나무와 넝쿨이 우거져 있었고, 산타 바버라 국유림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수도회의 중추를 이루는 구성원은 가정이 없는 수도승들이었다. 이들은 독신으로 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금욕을 실행하겠다고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수도처에 여성들의 출입은 수도승의 ‘고요한 삶’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졌으므로, 가급적 금지되었다. 평신도는 수도승의 의식주를 맡을 책임이 있었다. 고더드는 “다른 계층의 구성원은 서로 다른 필요가 있다. 수도승은 평신도의 물질적 보시를 필요로 하며, 평신도는 수도승의 영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이 미국인 승가는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우선 고더드의 엄격한 수도원 방식은 미국의 풍토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에서 선승을 모셔오려던 고더드의 계획이 실현되지 못한 데다, 고더드 자신이 센자키나 소케이안과 같은 수행력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막을 내리는 듯했다. 1934년, 산타 바버라의 최초이자 유일한 수도자는 평신도 수행자인 조셉 크레송Joseph Cresson뿐이었다.
고더드의 출판쪽 노력은 좀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 「선:자각의 잡지(ZEN, A Magazine of Self-Realization)」(훗날 ‘불교잡지[A Buddhist Magazine]’라고 부제가 붙었다)는 1930년에 버몬트의 쎄포드에서 창간되었다.
1932년, 고더드는 「불교성전(The Buddhist Bible)」의 초판을 펴냈다. 이 불경 모음집은 그가 펴낸 저작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읽힌 책이다. 여기에는 소승의 경전도 일부 포함되었으나, 주로 고더드가 디나야Dynaya 파派라 부른 챈(Ch'an; 중국禪), 젠(Zen;일본禪), 카규(Kagyu; 티베트)의 경전이 주종을 이루었다. 고더드와 그의 협력자인 중국 스님 와이타오는 주요 대승경전 중에서 「반야심경(Heart Sutra)」, 「능엄경(Shurangama Sutra)」, 「금강경(Diamond Sutra)」,「능가경(Lankavatara Sutra)」 등을 번역하였다.
고더드의 말이다. “「불교성전」은 문화사나 역사의 자료를 목표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개인 자아의 망념을 일깨워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아 불성 안에서의 믿음을 일깨우고자 한다. 자신의 불성을 깨우치려는 열망에 불을 붙이고, 사성제四聖諦를 따라 결국은 성불하려는 노력에 활기를 북돋우려는 의도다.”
고더드의 헌식적인 노력 끝에 이 책은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다. 처음에는 버몬트 쎄포드에서 자비로 출판했는데, 이후 「불교성전」은 판을 거듭해 출간되었다. 휴스턴 스미스 Huston Smith는 “학술적인 면이나 의미, 범위, 권위의 모든 면에서 이 책을 능가할 만한 대안은 없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구루, 엘런 와츠(Alan Watts)
엘렌 와츠는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는 20세기 약 25권의 책을 냈다. 그는 스즈키 다이세츠, 쵸감트룽파, 램 다스, 틱냑한 스님 등과 더불어 20세기 영어권의 중요한 불교저술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선의 길( The way of Zen)' 이다. 그 외에 (The Book: On the Taboo Against knowing who You are' ' The wisdom of Insecurity' 등이 있다.
그는 마국 대학가의 인기 강사였으며 1960년대와 70년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찾던 미국 젊은이들에게 선불교를 통해 그들을 매료시켰다.
미국사 (1950년대, 1960년대)
--소핑 몰의 모델.
--레비타운 주민을 미국평균인 . 잔디밭. 1952년 대통령 선거
종전보다 2.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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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와츠
엘런 와츠의 저서, 선의 길
「영국의 불교(Buddhism in England)」지의 편집자였던 앨런 와츠는 1915년 켄트의 치즐허스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1973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양의 풍물’에 익숙하게 자랐다. 앨런의 어머니는 선교사의 딸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교사였다. 그래서 앨런의 집에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선물한 동양의 그림이나 골동품들이 많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깊게 성숙시킨 독서를 많이 했는데, 특히 키플링의 「킴Kim」을 읽고 그리스 도교보다는 불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골동품상에서 카마쿠라 다이부츠의 모사화를 발견하자 즉시 구매하였다. 그는 그 그림의 주인공 표정이 심판하거나 광적인 얼굴이 아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고요하다고 느꼈다.
이 무렵 젊은 와츠는 프랜시스 크로쇼Francis Croshaw라는 사람을 만났다. 크로쇼는 생각이 모호하고 행동이 종잡을 수 없는 부유한 사람이었다. 크로쇼는 그 자신이 중산모中山帽와 9시에서 5시까지의 틀에 박힌 직장생활로 상징되는 통상적인 영국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터였다. 크로쇼 씨는 방대한 장서를 가진 서재의 소유자였는데, 그는 와츠에게 에드워즈 홈스Edwards Holmes의「붓다의 신조(The Creed of the Buddha)」라든가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의 「불교의 빛(Gleaning In Buddha Fields)」 등의 책을 빌려 주었다. 특히 후자의 책은 와츠에게 그가 물려받은 세계관 자체를 전복시킬 정도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또한 홈스의 책 속에 끼워져 있는 크리스마스 험프리스Christmas Humphreys의 불교에 관한 작은 노란색 소책자를 발견했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스는 런던에 있는 ‘불교도 오두막(Buddhist Lodge)’의 지도자격인 법률가였다.
와츠는 험프리스에게 편지를 썼다. 이 두 사람은 계속 서신 왕래를 하였고, 15세에 이른 와츠는 마침내 “괴물같이 억압적인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불교도라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와츠가 험프리스와 상면하기 얼마전이었다. 마침내 와츠와 그의 아버지(그는 자기 아들의 지적 발달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가 런던에 당도했을 때, 런던 ‘불교도 오두막’의 회원들은 자신들과 서신 왕래를 하던 사람이 16세의 소년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와츠는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아예 접어두고 런던으로 옮겨와서 인쇄소와 은행에서 일을 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그는 D. T. 스즈키, 블라바츠키, 니체, 헤블록 엘리스, 버나드 쇼, 라프카디오 헌, 드와이트 고더드, 칼 융의 저서들을 읽었다. 그는 스즈키의 여러 글들을 걸러내어 선에 관한 작은 책을 냈다. 그리고 불교회지인 「영국의 불교(Buddhismin England)」(훗날 ‘중도[The Middle Way]’로 이름을 바꿈)의 편집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불교도 오두막’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중국 승가를 현대화하려고 분투 중이었던 중국인 불교개혁자 타이츠, 러시아 화가 니콜라스 로에리치, 신비적 티베트 학자 크리슈나무르티(크리슈나무르티는 애니 베산트로부터 신지학의 횃불을 이어받았으나 중도에 이를 떠났다), 그리고 독일계 동양학자 프레더릭 슈피겔부르크와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는 미국으로 향하는 길에 런던을 거쳐 가는 중인 듯했다. 당시 런던불교공동체의 분위기는 불교 뿐만 아니라 신지학회 관계자들과 구르지예프 등의 신비주의자, 프로이드와 융 등 정신분석가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이론을 탐구하던 곳이다. 단순히 불교적 전통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의 자유와 다양한 정신적 실험에 몰입하고 있었다.
D.T. 스즈키
D. T. 스즈키가 세계신앙대회 참석 차 런던에 온 때는 1936년으로 와츠의 나이 21세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해에 와츠는 첫 번째 저서인 ‘선의 정신( The spirit of Zen)'이라는 책도 발행하게 된다. 이때 와츠는 엘리너 에버렛Eleanor Everett이라는 생기 넘치고 재능 있는 젊은 여성도 만나게 되었다. 엘리너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런던으로 피아노 공부를 하러 온 터였다. 어머니 루스
풀러 에버렛Ruth Fuller Everett은 인상적이고 우아한 부인이었다.
루스 풀러 에버렛은 저명한 시카고의 변호사 찰스 에버렛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니액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이 니액은 와츠의 표현에 의하면 ‘놀라운 사기꾼’인 삐에르 보나르가 하타요가와 탄트라 등을 여러 뉴욕의 명사들을 포함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친 아쉬람이었다. 루스는 이 아쉬람에서 처음 선이란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루스 풀러 에버렛은 1930년에 남편과 함께 선박 세계여행을 하다가 일본에 들렀을 때 D. T. 스즈키를 만났으며, 스즈키는 에버렛 부인에게 자신의 「에세이」를 주고 좌선의 기본 원칙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2년 후 일본을 다시 방문했을 때, 스즈키 박사는 그녀를 난젠지의 임제종 선사인 난신켄 로시에게 소개했다.
에버렛 부인은 아침마다 스님들과 함께 참선하면서 3개월반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녀가 이렇게 한 목적은 “소도에서 배운 대로 정확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외국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시험적인 수도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1938년 그녀가 뉴욕에 정착하면서부터 그녀는 소케이안의 미국 불교도협회(Buddhist Society of America)의 후원자가 되고 그 기관지인 「고양이의 하품(Cat’s Yawn)」지의 편집자가 되었다. 같은 해 앨런 와츠와 엘리너 에버렛은 얼즈코트에 있는 구역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과 그의 부친(그는 런던 로지의 재무담당이 되었다), 신부와 그 어머니가 모두 불자였지만 불교식 혼례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1948년에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엘런 와츠
와츠와 엘리너는 결혼 후 곧 뉴욕으로 갔다. 그들은 웨스트 사이드의 루스가 사는 곳에 근접한, W. 74번가의 소케이안의 작은 아파트형 사원과 가까운 아파트에서 살았다. 소케이안 외에는 선을 가르쳐 줄 스승이 없었으므로, 와츠는 자기 특유의 ‘외로운 늑대’ 성향을 당분간 접어두고 소케이안의 제자가 될 것을 청했다.
이 두 사람은 처음 몇 주는 잘 지내는 듯했으나, 곧 와츠는 소케이안의 지도방법을 거북하게 느끼게 되어 개인면담 시간에 출석하기를 그만두었다. 한 예로 소케이안은 공안체계를 확립한 18세기 임제종 선사인 하쿠인의 공안법을 사용하여 가르쳤는데, 와츠가 보기엔 모든 “공안에 각각 정해진 대답이 있었으므로 마치 짚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았다.” 와츠는 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케이盤珪, 1622~1693; 일본 임제종의 유명한 선사의 선이나 혜능이나 마조와 같은 중국선사들의 방법이 자신에게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와츠는 소케이안이 자신의 제자들을 전통 좌선 방식대로 가르치지 않고 절에서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케이안의 지도법은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인 산젠sanzen에만 의지하고 있는 듯했다. 공식적인 좌선수행은 루스 풀러 에버렛이 지도했다. 소케이안은 모임 전에 사람들을 의자에 앉아 있게 하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 했다. 그러나 루스 에버렛이 신도모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소케이안이 정식 명상을 지도하지 않는 점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소케이안은 에베렛에게 “나도 잠잘 지붕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사람들을 방석에 앉혀 놓고 선 수행을 시킨다면, 나는 거처할 지붕도 안 남게 될 거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소케이안은 사람들이 준비가 되고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가부좌로 좌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기뻐했고, 루스 에버렛의 추진 하에 점점 더 많은 젊고 열성적인 젊은이들이 아침 8시의 좌선시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와츠는 뉴욕에서 세미나를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뉴욕의 융 분석심리학 클럽 회원에게 우편 초청을 하자 500여 명의 학생들이 ‘포용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Acceptance)’ 강연회에 몰려들었다. 소문이 나자 곧 더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하퍼스Harper’s」지의 편집인도 강연을 듣기 위해 들렀다. 또한 「행복의 의미(The Meaning of Happiness)」(부제: 현대심리학과 동양의 지혜에 토대한 영혼의 자유를 향한 갈구)가 미국에서 와츠의 첫 저서로 출판되었다. 「타임」지와 신문들이 이 책을 호평하였으나, 당시 세태에 맞는 주제는 아니었다. 때는 바야흐로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와츠는 26세였고, 새로운 나라에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루스는 자신의 총명한 사위에게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교단에 서도록 권유했다. 와츠는「컬럼비아 종교리뷰(Columbia Review of Religion)」지의 편집자 마게리트 블락과 이 문제를 상의하였는데, 그녀는 와츠에게 교단에 서지 말고 「리뷰」지에 학구적이고 긴 글을 기고하도록 권유하였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엘런 와츠란 이름으로 검색을 통하여 뽑은 글이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것이 노예의 삶이다. 과거의 두려움은 자연의 재해, 질병, 전쟁, 권력의 수탈 등 비교적 드러나 있다. 오늘의 인생, 특히 젊은이를 지배하고 배척하는 두려움은 과거의 것들 외에도 소외, 도태, 실직과 경제적 위협 등 좀 더 복합하고 다양해졌다. 어떤 경우든 권력과 사회주류 세력은 젊은이의 진보적인 생각을 불온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다양한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유행을 쫓아가지 못하는 두려움, 성적과 취업의 실패,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의 실종 등 두려움의 종류는 늘었다.
한 세대가 줄곧 두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도 있었다. 미국의 1960년대도 그런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 달 탐사,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에 따른 사상의 억압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길을 읽고 방황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조국의 위대함은 초라해졌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이 강요되고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다. 쿠바를 두고 세계를 파멸로 이끌 핵전쟁의 위험이 눈앞에 보였다. 그 어떤 이상도 총알 한 방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야만의 시대가 시작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커졌다. 미국과 소련은 여전히 제3세계에서 위협적인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싫어도 전쟁에 끌려가 총을 들어야 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인류가 꿈꿨던 전쟁 없고, 이성이 지배하며 서로가 평화롭고 풍요롭고 풍요롭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났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까? 젊은이들의 방황은 끝 갈데없이 폭발했다. 이때 켈리포니아 일대의 방송 프로그램 하나는 작은 촛불의 심지가 됐다. 방송의 이름은 선문답(Talking Zen), 느린 목소리의 앨런 왓츠(Allen Watts, 1915~1973)가 디제이로 진행했다. 그 또한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다. 세상은 그를 일러 히피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의 부모는 덴마크 출신,앨런 왓츠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 영국 교외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분위기는 기독교와 더불어 유럽 고대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들꽃과 나비 등 자연의 아름다움과 영성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과 아버지 사업의 바쁜 이유등으로 그는 기독교 기숙학교에서 공부했다.
선천적인 약시 때문에 학교 교육엔 별 흥미를 갖지 못했다. 특히 제도권 교육의 무자비함이 그에게 흥미를 앗아갔다.
엘렌 와츠는 1938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선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선 수행 집단에 참석하는 한편 개인적인 탐구와 수행에 게으르지 않았다. 반면 일리노이 에반스톤 성공회신학교의 소버리 웨스턴 신학 세미나에도 참여하여 기독교 성경, 기독교사, 교회사 등을 집중 연구하였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신비주의 종교의 필요성, 정신에 주목하다.’였다.
직후 성공회 성직자가 되어 1950년까지 시카고 대학교 교목으로 활동했다. 동양정신의 정수와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던 그가 생계를 유지할 직업으로 성공회 신부를 택한 것은 의외이다. 직후 그는 저명한 신화학자 죠셉 켐벨, 음악가인 이 존 케이지 등과 깊은 교류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1951년이 되자 당시 자유로운 분위기로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서부,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겨 ‘미국 아시아학술연구원’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특정한 종교나 철학파를 넘어 일본과 중국 문화부터 인도의 베단타에 이르기까지 종양의 종교 학문 지혜에 관한 것이라면 예외 없이 자유로운 탐구를 하던 곳이었다. 와츠는 이곳에서 가르칠 뿐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고 배우는 입장을 가졌다.
선은 참으로 매혹적인 것이었다. 과거 그 어떤 종교적 전통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신과 직접 만나는 신비주의와는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피고 마음의 본성을 만날 때 예외없이 이제껏 얽매였던 관습과 권위와 제도의 허울에서 튀어 올아 스스로 신성한 조재가 된다는 것이다. 엘렌 와츠 뿐 아니라 당시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던 미 서부의 지성과 젊은이들은 이 동양에서 온 새로운 정신의 조류에 주목하고 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이념과 제도는 활기를 주지 못했다. 선, 동양의 신비주의, 마약, 프리섹스, 광란의 파티와 반전 반제도 등을 주장하는 음악이 서부 캘리포니아 일대를 사로잡고 있었다.
앨랜 와츠는 이곳에서의 자신의 탐구를 시작했고 거친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1953년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과 버클리 일대에서 전파를 송출한 라디오 프로그램 선문답(Talking Zen)을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젊은이들은 열광했고 그는 이미 유력인사가 되어 있었다. 1958년 유럽여행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대가 융과 신화학자 뒤르켐 등과도 교류를 했다. 유럽 여행 이후에는 공영방송에도 진출하여 정신성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전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초에는 방송 중에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 등을 복용하면서 그 효과 등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선불교의 입장을 표했지만 전적으로 불교적인 태도를 고수한 것은 아니었고 기독교나 기타 종교에 대해서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격언대로 “날지 않는 새는 죽여라”며 그 어떤 이론이나 가르침이라도 현실의 우리 자신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라고 강권했다. 그 때문에 전통과 미지의 가치속에서 혼돈하던 젊은이들은 그의 가르침에 열광하여 관습을 타파하고 낡은 길을 버리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는 한창 나이인 1973년 세상을 떠났다. 세 번의 결혼으로 일곱명의 자식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 가르침은 아직도 살아남아있다. 과거 방송 프로그램의 육성은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 듯 방송되고 있고, 그 내용들을 엮어 새로운 책이 나오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앨렌 와츠에 대한 글이다 .
Alan Wilson Watts (6 January 1915 - 16 November 1973) was a British philosopher, writer, and speaker, best known as an interpreter and populariser of Eastern philosophy for a Western audience. Born in Chislehurst, England, he moved to the United States in 1938 and began Zen training in New York. Pursuing a career, he attended Seabury-Western Theological Seminary,
where he received a master's degree in theology. Watts became an Episcopal priest in 1945, then left the ministry in 1950 and moved to California, where he joined the faculty of the American Academy of Asian Studies.
Watts gained a large following in the San Francisco Bay Area while working as a volunteer programmer at KPFA, a Pacifica Radio station in Berkeley. Watts wrote more than 25 books and articles on subjects important to Eastern and Western religion, introducing the thenburgeoning
youth culture to The Way of Zen (1957), one of the first bestselling books on Buddhism.
In Psychotherapy East and West (1961), Watts proposed that Buddhism could be thought of as a form of psychotherapy and not a religion. He considered Nature, Man and Woman (1958) to be, "from a literary point of view—the best book I have ever written."[2] He also explored human consciousness, in the essay "The New Alchemy"
(1958), and in the book The Joyous Cosmology (1962).
Towards the end of his life, he divided his time between a houseboat in Sausalito and a cabin on Mount Tamalpais. Many of his books are now available in digital format and many of his recorded talks and lectures are available on the Internet.
According to the critic Erik Davis, his "writings and recorded talks still shimmer with a profound and galvanizing lucidit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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