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23강
말씀 / 누가복음 12:35-59
요절 / 누가복음 12:42절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115년만의 폭우가 내렸는데, 수해현장을 보고도 퇴근한 대통령을 향해 많은 비판의 소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봅니다. 말씀을 통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 수 있는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유대인들의 옷은 통으로 된 원피스입니다. 통으로 되었기에 바람이 잘 통하고 답답하지 않아 쉬기 안성맞춤의 패션입니다. 그런 옷의 허리에 띠를 띤 것은 편한 복장이 아닌 근무 복장으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것은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곳곳에 가로등이 있고 차량 불빛도 많기에 캄캄함을 느끼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해 떨어지면 캄캄했고 달이라도 뜨지 않으면 그야말로 암흑이었습니다. 혼인잔치는 대부분 밤늦게까지 피로연을 했는데, 주인이 혼인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36) 이에 하인이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 돌아오는 주인이 허리띠 하고 등불 켜서 맞이하는 하인을 보았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캄캄함을 모르는 세대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느낌을 알고 싶다면, 인가가 없는 시골 밤길을 운전하면서 일시적으로 라이트를 한번 꺼보십시오.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빛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밤길을 걸어온 주인이 등불을 켜서 맞이하는 종을 극진히 대접하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종을 자리에 앉히고 허리띠를 하고 종을 섬깁니다.
만약 주인이 밤 이경(9-12)이나 삼경(12-3시)에 왔는데도 그리하고 있는 종을 보게 된다면 어찌되겠습니까!(38) 주인의 감격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깨어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종이 놀고 먹으면서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고되게 일하였기에, 밤에는 주체할 수 없는 피곤이 밀려왔습니다. 주인이 미리 사람을 보내어 기별을 넣어주면 좋으련만..., 도적이 어느 때에 오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주인 또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오십니다.(39)
밤이 깊어갈수록 깨어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세상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집니다. 믿음으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숙처럼 일어나는 부흥의 시대라면, 수고롭고 힘들어도 서로 격려하며 힘을 주고받으며 으싸으싸하며 굴러가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영적 동지들이 하나 둘 잠을 자고 목자의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나 홀로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되어가면, 여전히 수고하는 스스로에 대해 어리석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분위기를 거슬러 살아가는 것이 무모하고 바보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세상의 어둠이 깊어가는데도 깨어있는 종을 보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마치 밤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보겠다며 눈을 비비며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보는 아빠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두울수록 오히려 깨어있어야 합니다.(40) 세상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깨어있는 자들의 영광 또한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돈과 쾌락의 시대를 견딘 비결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깊은 밤을 보며 절망하기보다, 밤이 깊을수록 더더욱 빛으로 드러날 소망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에서 힘차게 권면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41)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아마 베드로는 ‘우리는 깨어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리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냐?’는 역질문으로 끝났습니다. 이를 보면 베드로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자그룹이 아닌 사람들이 좋은 청지기일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였으나 지금은 아닐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두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 예수님 좌우편의 자리는 누구 것이냐’, 자기의와 자리싸움에 몰입하기 쉬운데,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정말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인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우리말 성경번역에는 지혜가 먼저 나왔는데, 원어에는 ‘진실한’이 먼저 나와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 “the faithful and wise manager"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똑똑함을 좋아하여 지혜를 먼저 번역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첫 번째 조건 ‘진실한’은 영어로 faithfulness로서 ‘신뢰할만한, 변함이 없는’이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충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머리 좋고 재능이 많아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앞세우고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말과 행동을 뒤집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탁월하여도 좋은 청지기가 아닙니다. 횡령으로 망한 기업, 모반으로 무너진 국가를 보면 대부분 그러한 사람들로 인한 사고입니다. 변함없이 충성하는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가장 좋은 청지기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지난 주 비행기 테러를 다룬 영화 ‘비상선언’을 보았는데, 흥행보증수표라 불리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습니다. 송강호 배우는 지상에서 테러범의 행적을 추적하는 형사로, 전도연 배우는 테러대책을 총지휘하는 국토부장관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주인공 이병헌보다 이들을 언급한 것은, 이들이 영화속에서 같은 대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형사들은 인터넷 사전 테러예고를 보고도 ‘장난이겠지?’라며 무시하는데, 송강호 형사는 현장 확인을 나가며 끈질기게 파고듭니다. 주위에서 왜 그렇게까지 하냐며 말리자, 송강호 형사가 한마디 합니다. “공무원이잖아!” 전도연 국토부장관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행기 승객들을 포기하자는 사방의 압박을 받는데도 어찌하든지 살리는 쪽에 서고자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주변의 압박에 대해 말합니다. ‘공무원이잖아!’, ‘공무원이잖아’라는 대사가 제일 크게 남았습니다. ‘진실한 공무원 영화이구나!’ 공공의 유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공무원이라도 그리 살기에 쉽지 않는 현실이기에 그런 대사를 쳤을 것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것저것 휘둘리지 아니하고 충성하는 진실한 사람이 참으로 귀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진실함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매주 맡겨진 말씀연구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니 혹은 이 정도면’이라는 말로 합리화할 것이 아니라 주초부터 깨어 부지런히 메시지를 쓰는 것입니다. 또한 중보의 기도를 날마다 감당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자의 년수가 쌓여갈수록 사람의 어떠한 섬김보다도 중보기도의 위력이 더 크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동역자들과 양들과 2세들과 가족들과 선교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여전히 커다란 충성심을 필요로 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불신의 홍수에서 믿음을 지켜야 하고, ‘그 시간이면...’이라는 현실적인 계산과 조급함의 꼬리표를 떼어내어야 합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것만큼 위대한 은사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다른 무엇보다 줄기차게 말씀연구과 중보기도에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를 통해 때를 따라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첫 번째 덕목으로 충성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101:6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4:2절은 말씀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당장의 유익과 분위기에 요동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럽게 맡은 바 십자가를 감당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귀하게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는 지혜로운 청지기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사람을 정확히 돕는 분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필요한 때인지, 아니면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때인지, 훈련의 손길이 필요한 때인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때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 냅다 훈련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훈련이 필요한 때에 이해와 사랑만 주면 마치 비만환자에게 초코릿을 주는 것처럼 독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상담가 오은영씨’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해석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는데..., 사람을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해석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사람을 돕는 지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 1:5절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사람을 돕는 올바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스스로 지혜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경험과 계산으로 돕다 보면 반드시 낭패를 겪습니다. 지혜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였는데도 지혜가 없는 것은 성령의 음성에 귀를 열지 않지 때문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눈과 귀를 열어두면, 성령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아한 손길을 체험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은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발견하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가장 빠른 지름길을 만드는 지혜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진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를 찾는 것은 때를 따라 양식을 먹여야 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먹을 것, 입을 것, 재미있는 것이 넘쳐나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영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은데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생활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말세지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말씀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깨어나도록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깨어나야 합니다. 지난주 115년 만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제 조카는 대치동에서 알바를 마치고 교대역에 있는 집으로 오기 위해 헤험쳐 왔다고 했습니다. 기상이변은 이제 전지구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파리의 세느강에 흰고래 벨루가가 나타나서 프랑스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흰고래 벨루가는 3,000km 떨어진 북극 해에서 사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민물강인 센강에 올라와서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나는 기후변화는 지구문명의 위기가 턱밑까지 왔음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탐욕과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늠름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오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러했고 가인도 그러했고..., 스스로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 아담부터 지금까지, 때를 따라 양식을 주는 청지기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양식을 먹이고 삶의 본으로 양식을 먹이는 청지기들이 필요합니다. 그를 통해 몇몇 영혼들이 돌이켜서 생명을 얻게 된다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역사입니다.(43) 주님은 그들에게 열고을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44)
이 땅의 현실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보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악한 청지기들이 더 많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저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5년이나 10년 내로, 최소 수십 년 내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상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청지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주인처럼 살았습니다. 문제는 좋은 주인으로 산 것이 아니라 악덕 주인으로 산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아랫사람에게 갑질하여 풀고, 그래도 기분이 더러우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취했습니다. 그렇게 살아보니 나름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수십 년이 흘러가는 데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46)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종을 엄히 때리고 엄한 벌에 처할 것입니다.(46) 47,48절을 읽겠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적게 받은 사람입니까! 혹시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은 아닙니까! 많은 재능을 받은 자들이거나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의 자리를 받은 자들은 아닙니까! 우리는 많이 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에만 목표를 두기 쉬운데, 다른 이들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나누기에 힘써야 합니다.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을수록 더 자신을 낮추고 더 많이 섬기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해야만 그가 얻게 된 것들이 참된 축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불처럼 더러운 것을 태우고 정결케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의 세례를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접한 제자들의 세계선교를 통해 전 세계로 번져나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를 깨닫을 수 있도록,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준비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자기 문제를 극복하고 복음으로 양들을 먹일 수 있는 사람으로 도와야 합니다. 지금 탐심 문제, 염려문제, 인간 갈등 문제에 빠져 수시로 허우적거리는 제자들을 도와야 하는 예수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습니까!(50)
제자들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51-59절을 보면 분쟁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분쟁하게 하려 왔다고 하십니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는데, 셋이 둘과 분쟁할 수 있고, 둘이 셋과 분쟁할 수 있습니다.(52)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일대일 분쟁을 할 수도 있습니다.(53) TV 리모컨을 두고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분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하는데, 아들은 첫열매를 드려야 한다며 다툴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소감을 먼저 써야 한다고 압박하는데, 딸은 ‘엄마나 그렇게 살라’며 맞받아 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같이 전도하러 가자고 요청했는데, 며느리는 해외여행 아니면 시어머니와 같이 다닐 수 없다며 다툴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 관계에서만큼 절대 분쟁이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쟁은 악, 평화는 선’, 절대적인 룰로 못박습니다. 하지만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서는 분쟁 없이 복음진리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진리 자체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더 앞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분쟁이 아니면 영의 양식을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극렬한 핍박에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부모에게 ‘도대체 왜?’라는 문제의식이 심겨지게 됩니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나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모와 자녀가 함께 기도하는 형제 자매로서 변화됩니다. 우리는 분쟁 없는 쪽으로만 달리고 싶은데, 분쟁이 양식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양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분쟁 그 자체를 피하는 길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런 와중에도 성령의 손길을 찾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면 소나기가 올 것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54) 반면 아라비아 사막이 있는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찜통 더위가 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55) 56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날씨를 분간할 줄 알면서 시대는 분간할 줄 모르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생을 얻고 하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분쟁으로 겁먹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가는 징조가 될 수 있음을 분별해야 합니다.(57)
세상을 살다보면 죄를 짓고 고발당할 수도 있고 억울하게 고발당할 때도 있습니다.(58) 사소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어떤 이유로든, 나를 고발한 자에 대해 조금도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손해보지 않고 고개를 뻣뻣이 세우며 예수님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분쟁이라도 각오하고 견디어야 하지만, 인간적인 다툼이나 오해는 가능한 속히 풀기에 힘써야 합니다. 화해할 수 있다면 존심이 내려놓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과 다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죄하고 정죄받는 감옥에 갇혀 버립니다. 무엇보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어느 때에는 분쟁하고 어느 때에는 화해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때를 따라 당신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