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장 강해 일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말씀 사도행전 22장 1-사도행전 22장 16
요절 사도행전 22장 7절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성전과 유대인과 율법을 무시하였다는 고소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변화된 간증을 통하여 자신이 전혀 성전과 유대인과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만 자신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의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자신과 같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은혜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말로 말하는 바울)
1,2절을 보십시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오해로 인하여 유대인에게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 천부장을 보내사 바울을 결박하여 보호하셨습니다. 바울은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구제헌금을 전달할뿐 아니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를 이루고자하는 소망이 더욱 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유대인의 전도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갖고 유대인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부형 여러분, 자신이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달라고 합니다. 부형들은 형제들과 선배 여러분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도 부형들이라고 부르며 매우 정중하게 말하였습니다.(7:2). 부형이라는 호칭은 조상들의 하나님, 저 의인의 호칭과 함께 유대인을 깊이 이해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자신과 유대인 무리들과의 동질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자신도 이스라엘의 전통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자신이 변화된 것을 변명합니다. 현대 영어의 변명(apoiogy)이 해명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무리들과의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아람어로 해명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바울이 배교자이자 민족을 버린 자로 여겨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모국어로 말하자 그들은 너무도 뜻밖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 대다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잘 몰랐습니다. 심지어 1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학자인 필로조차도 모세 오경에 대해 방대한 주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오경을 해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하자 메시지를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율법이 엄한 가말리엘 문하생)
3절을 보십시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 출신임을 말합니다. 다소 성에서 성장했고 예루살렘에 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가말리엘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5:34). 로버트슨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유대인들로부터 우리의 랍비라는 최고의 칭호로 불리어지는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워서 그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지녔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에게 엄한 율법적인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소개함에 있어서 태생(길리기아다소, 21:39), 성장(이 성에서) 그리고 교육(가말리엘 문하)에 관해 언급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고 율법에 정통하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교에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예를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울)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은 율법에 열심이 있어서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도를 핍박하는 자로 여러 곳에서 소개합니다.(26:10고전 15:9갈 1:13, 23빌 3:6딤전 1:13). 유대인 무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보다 바울은 훨씬 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처넣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교회에 대해 핍박한 사례들이 더 많았습니다. 바울이 후에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딤전 1:13), 또는 죄인 중의 우두머리(딤전 1: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바울의 과거에 대한 증인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증인이므로 바울의 말은 최고의 신빙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성도를 핍박하였으며(9:2), 산헤드린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서명한 위임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에서는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는 대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까지도 공문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2에서 공문을 받은 것이 대제사장 개인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전체 산헤드린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의장 즉 대표로서 서명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해명할 당시의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지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당시에는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도 잡아 끌어다가 예루살렘에서 형벌을 받게 하려고 공문을 받아서 가던 자였습니다. 다메섹은 동쪽으로 안티레바논 산맥과 남서쪽으로 헤르몬 산, 남쪽으로 아스왓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대 수리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이 도시는 바르발 강을 끌어들여 관개 용수로 사용한 과수원과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각지로 흩어진 예루살렘의 성도들 가운데 다메섹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큰 빛을 만난 바울)
6절을 보십시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바울이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에 부활의 주님이 오정 즈음에 은혜로 그를 큰 빛으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사도행전 9장 3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시각이 오정쯤 되었다는 것과 홀연히 바울을 둘러 비추인 하늘의 빛이 매우 강렬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나타나는 상세한 묘사입니다. 이 빛은 정오의 태양 광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9:9). 그런데 이 빛은 바울에게만 집중적으로 비추었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습니다.(11절). 큰 빛이 바울의 어둠을 비추었습니다. 큰 빛은 참 지식의 빛으로 바울의 무지를 비추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으면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빛을 만나면 우리의 무지가 사라지고 분별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큰 빛을 통하여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였습니다. 큰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사도바울에게 생명의 큰 빛이 비치었습니다. 그는 큰 빛으로 진리를 알고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사울을 찾아온 나사렛 예수)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바울은 땅에 엎드려져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는 사도행전 9장 4절과 거의 동일한 표현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땅에 거꾸러져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에게 비추인 하늘의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아십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바울이 누구냐고 묻자 소리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도 역시 사도행전 9장 5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출신의 예수임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사울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마 28:20).
(바울만이 알아들은 소리)
9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함께 있는 사람은 빛은 보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빛을 보았다는 것은 이것이 바울만의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조현증 환자가 겪는 환청이나 환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에서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진술 사이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의 계시로 보지 못했으며,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바울만이 그 순간에 있었던 사건의 경험자이자 완전한 참여자였습니다. 바울은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10절).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려고하는 바울이 예수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계획하고 부르신 예수님)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바울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여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6에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만이 기록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이 질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행한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은 마치 오순절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마음에 가책을 받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뉘우친 사실과 유사합니다(2:37).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행할 일을 누가 말해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회심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살피고 있었으며 이제 그 결정적인 때가 되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일을 그에게 이를 자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멀은 바울은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쪼인 강렬한 빛은 그의 눈을 멀게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쬐인 팔레스틴의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이 먼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햇빛을 쳐다보았다 해도 몇 초 또는 몇 분 안에 곧 정상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그마치 사흘 동안이나 장님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아나니아의 안수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9:8). 이러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환상이나 심리적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실제로 그가 눈이 멀게 된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어 바울의 눈먼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신 예수님은 해보다 더 밝은 큰 빛되시는 분이십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됨)
12,13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셨습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으로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0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 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와서 사울아 보라고 말하였을 때 바울은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과정이 사도행전 9장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보라는 명령은 더 분명하게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 입니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을 강조해 줍니다. 바울은 시력을 회복하여 아나니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바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때 죄사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보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신 하나님)
14을 보십시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할 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잘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 의인 예수님 예수님을 보고 그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미리 손으로 잡다란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세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바울에게 당신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될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데에서 믿음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째는 의인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7, 8절).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바울을 모든 사람의 증인 삼으심)
15절을 보십시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큰 빛되신 분이십니다. 성도와 함께 박해받은 분이십니다. 죄인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사도로 부르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를 예수의 증인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 곧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해야했던 내용은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본 예수님을 충실히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고 들음으로 변화된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습니다(4:20). 큰 빛이 임하면 우리의 어둠과 무지가 물러갑니다.
(죄사함을 받은 바울)
1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아나니아는 이제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세례와 죄 씻음을 연결하여 말합니다. 당시에 세례 의식이 죄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세례가 행해질 때 비로소 죄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죄사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이 겸손하게 하시고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게 도우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말씀 사도행전 22장 1-사도행전 22장 16
요절 사도행전 22장 7절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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