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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인 채 호미 쥐고
온 종일 밭을 매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된 일 끝에
찬 밥 한 덩이로 부뚜막에 걸터 앉아
끼니를 때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꽁꽁 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그래서 동상이 가실 날이 없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난 괜찮다 배부르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
더운 밥 맛난 찬 그렇게 자식들 다 먹이고
숭늉으로 허기를 달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가 추위에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고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게
닳아 문드러져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구언날 주정을 하고 철부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할머니 사진을 손에 들고
소리죽여 우는 엄마를 보고도
아! 그 눈물의 의미를
이 속없는 딸은 몰랐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글
우애(友愛)
우애(友愛), 수족지애(手足之愛), 동기지친(同氣之親), 여족여수(如足如手) 등도
모두 형제간의 두터운 우애를 뜻한다.
'형만 한 아우 없다'라거나 형만 한 아우 없다는 것과는 반대로, 葛帽兄弟(갈모형제)
아우가 형을 능가하는 경우를 가리 키는 말 '형제는 형제다'라는 속담도 있다.
사자소학에는 형제지정 우애이기( 兄弟之情 友愛而己 )라는 말이 나온다.
또 아버지는 의롭고 어머니는 자비롭고 형은 우애하고 동생은 공손하다는 뜻의 부의모자 형우제공(父義母慈 兄友弟恭 )이란
말도 있다.
형제투금(兄弟投金) '형제가 금덩이를 던지다'란 뜻의 형제투금(兄弟投金)도 설화와 곁들여지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
설화의 시대적 배경은 고려 공민왕 때다. 형제가 길을 걷다
황금 두 덩어리를 얻어 하나씩 나눠 가졌다.
지금의 경기도 김포에 있는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함께 배를 탔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자신의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형이 물으니 "제가 평소 형을 사랑했는데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이 미워 보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없 애기 위해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형도 "네 말이 옳다"며 역 시 금덩어리를 강물에 버렸다.
그 뒤 양천강을 투금뢰(投金瀨)라고 부른다.
장자(莊子)에도 형제간은 손발과 같아 떼어 버릴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의 형제 위수족(兄弟爲手足)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시경(詩經)에는 형제혁장 외어기모 (형제는 담장 안에서는 싸우기도 하나, 밖에서 모욕을 당하면 함께 이를 막는 다)란
말이 나온다.
兄弟의 關係(형제의 관계) 兄弟 關係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歸屬(귀속)되는 것이다.
兄弟란? 형제란 누구이며 어떤 사이인가?
형제란 육체적으로는 한 부모 아래 있는 자 녀들의 관계로, 부모를 제외하고는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 다.
우리들의 보편적인 생활 방법은 자기의 허물보다 남의 허물을 보기 좋아하 고 자기의 잘못보다는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사람의 근성이기도 하지만, 형제들이 자신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남의 약점만을 보려고 하 기 때문에….
성경책에도…. 형제의 눈 속의 티보다 네 눈 속의 들보를 의식하고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부 터 빼어라 하는... 말씀도 있다.
이야기의 배경-우리들의 형제 우리 兄弟는 5형제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父母)의 많은 不和 속에서 成長하며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살아갈 社會敎育과 高等敎育이 全無한 常態 로 5형제는 일찍 사회에 들어갔다.
父母의 보호에서 벗어난 이후 各自圖生 兄弟란, 각자 자기 일과 삶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며 혼자 결정하고 혼자 감당
해야 하는 관계 속의 사람들이다.
옛적 젊은 우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대부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서이다.
한때는 무릎이 맞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앉지만, 어머니, 아버지조차 떠나고 없어도 너 와 내가 이렇게
함께 모이게 될까?
우리는 혹시, 바람처럼 각자 막연한 길을 떠돌다가 인생의 사막에서 서로를 잊게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또 그렇게 간 단하지는 않다. 완전한 타인이 아닌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을 찾아 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을 똑똑히 기억한다.
자라면서 겪은 부끄러움, 좌절, 성공 그리고 행복까지. 인생을 갓 시작한 그 시절에 대해,
온 세상에서 우리 형제만이 알고 있다.
우리 兄弟들의 現實 우리 兄弟는 各自圖生(각자도생)에서 겪은 삶 속에서 부끄러움과 좌절을 겪어 나왔고
그 과정에서 도태되어 사회의 삶 속에서 무한경쟁에서 이겨내지 못하 고
자신의 병마와 가난으로 인하여 제때 치료를 못 하였고 형제로부터 금전적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된 형제와 조현병으로 인한 병마로 인한 가슴이 아픈 형제가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 속에 있다.
살아나오면서 늙은 나이임에도 지난날 형제들과 과거의 추억이 행복의 순간보다
각자 자신의 지난날 좌절과 설움에서 오는 분노를 잊지 못하여 노년으로 들어간 지금도 형제들에게 우회하여
자신의 분노를 토해내며 형제에게 복수하 듯 자신의 부와 성공을 자랑하고픈 형제도 있고, 마지막의 삶을 반성하며
자신 의 위치에서 형제의 우애를 다시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형제도 있다.
우리 형제는 모두가 어린 나이에 고등교육과 전문교육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회의 무한경쟁 속에 내몰리게 되면서
정서적 불안을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찢어질 듯한 가난 속에서도 어머 님의 여호와증인으로 성서의 기본교리 바탕 안에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어머니 의 따스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과 거짓과 참 그리고 선과 악을 가르쳐 살벌 하고 힘든 사회생활의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무지와 지혜를 교육받지 못하고 구하는 직업마저 우선 먹고 살아갈 방편으로 사회의 가장 낮은 직업군으로
전전하며 우물 안의 개구리 모양 작은 우물 안에서 살 다 보니 늘 가난에서 헤어나질 못하여 형제간 어려움에 있는 형제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형제 서로가 작고 미약한 언어에도 분노하고 서로를 질책하며 살 벌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을 질책하면서, 죽기 살 기로 살다 보니
자신을 돌아보고 형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가운데 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러러 습니다
. 話頭(형제의 진리) 형제의 眞理란 話頭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유리한 생각 과 유리한 말만을 생각하며
자신이 진리이고 자신이 바른 형제라고 아우성치 는 속물과 다름이 없다고 판단되는 대목이며 과거 형제들의 의 삶 속에서
형제 서로의 환경과 그 속을 모르는 가운데 자신의 가정을 최우선에 두고 형제 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과정을 거쳐 살아
온 兄弟들이 늙은이 시점에서 부 끄러움을 모르고 지금도 과거를 들먹이고 형제를 비방한다면 우주 천지에 무 지하고 천박한
형제이며 인생의 사막에서 서로 잊히고, 잊혀야 할 형제라 생각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란 수평적 존재이며 수직적 존재가 아님을 똑바로 직시 하여야 하며 형제 에게서 받은 상처와 좌절의 추억을 영원히
풀지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는 슬 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늦지 않은 현시점에서 형제의 진리를 말한 것은 아직은 형제의 나이 차이가 있으나 조금은 남아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자신을 깨달음의 경지에 까지는 못 가더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형제가 서로를 어둠 속에서 바라보지 말고 밝은 곳 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만이 가진 추억과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유언하신 형제들과
서로 우애를 지켜 살아가라고 당부하신 말씀을 조금이나마 받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
타인의 지식을 인용하자면 인간은 불을 통해서 어둠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 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불안하고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횃불을 들고 있으면 주위가 밝아져 주변의 물체들을 분간할 수 있 기에 불안감이 해소됩니다.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항아리에 물이 꽉 차 있습니다. 꽉 차 있어서 더는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더는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더는 어떠 한 보충 물이나 내용이 추가로 들어갈 여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워야 새로운 물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을 비워야만 형제의 생각 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眞理 무엇이 眞實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모든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진실은 더욱 알 수 없다.
인간관계의 보편적 진리’라는 주제 아래에, 다양한 내용의 설명을 해왔다.
따 라서 신이 아닌 인간인 이상 이들 모든 내용을 늘 지키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항 모두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많은 시간을 같이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절친한 것도 아니고,
자주 못 만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원한 것도 아니며, 다정한 것도 아니면서 말조차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무심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문제는 항상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는 것 이다.
형제(兄弟), 형제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부모님께서 그처럼 애지중지하시고, 하나라도 더 두고 싶어 하셔서 하 시던 그 형제자매……
그러나 '그 참 이상하다. 왜 내게 그렇게 대할까?'
까닭 모를 틈이 생기면 그건 돈 때문인 게 형제자매간인 것은 아닐까요?
나중에 알 고 보면 그는 그때 이미 돈에 물이 들어 형제의 인연이고 뭐고 다 팽개치는 게 세상 아닐까요?
형제, 글쎄요, 없으면 '외로울' 때가 있고, 있으면 '괴로울' 때가 있는 인연이 형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형제간에는 형제애(兄弟愛, 우애 友愛)가 최선으로 여겨졌다
. 유언에 가장 많 이 등장하는 말이 형제애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가문의 존속과 지속을 위해서 는 형제애가 필수 불가결한 사안이기도 하고 또한 그만큼 형제애를 유지하기 가
쉽지 않음의 방증이기도 하겠다.
형제애를 지키지 못하고 다투는 것을 "골 육상잔(骨肉相殘)", 혈족끼리 서로 해치고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표현 한다.
그 원인이 본능인지, 권력과 부귀공명과 같은 탐욕적 가치관의 문제인지,
아니면 이데올로기(Ideology) 적 문제인지 얕은 지식의 한계로 알 길이 요원하다
. 노인의 현실 속에 나를 돌아보고 나는 누구인가? 깨달음에 답이 있습니다.
생 로병사가 인간의 절대적 한계이며 절대적 진리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 맞습니까
우리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모 든 사람의 공통된 물음이고, 그것을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본업이다. 왜 그러 한가. 간단하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이가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안다’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것은 도 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를 ‘나’라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남들이 ‘너 참 똑똑하다.’ 하니까 스스로 ‘똑똑하다’라는 편견을 자 신과 동일시 하게 된다.
그렇게 남들의 시선에 의존해 내가 만들어진다.
나 스 스로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과 평가로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의 말 한마디에 크게 휘둘린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하고, 능 력 없다고 하면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황당한 일인가.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 하나 더 있다.
그렇게 나를 판단하고 결정지어 왔던 바로 그 ‘남’들도 여전히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 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판단과 견해에 휘둘려 나도 함께 더욱더 어리석 어지는 일들이 이렇게 우리 삶 속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스스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 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내리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남들의 판단과 견해에 휘둘려 울고 웃으며, 즐거움과
괴로움 속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야 할 것이 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은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잡을 것 같이 두 손 꽉 쥐고 태어 난 사람도 결국 병들어 빈손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더 많은 돈과 업적,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해 수없이 울고 좌절하고 피땀을 흘리며 갖은 고 생을 했더라도 죽음 앞에선
모든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나이가 들면 ···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
눈은 침침해져 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고
,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 인생은 정 말 허무하다.” 나는 누구인가?
천태만상 우주 천하 속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이고 선과 악은 무엇이 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나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 나는 내 좁은 인간 마음, 내 삶의 비디오테이프와 그 안에서 나온 수많은 생각 속에 있었기에 미완성이었고
삶 은 스트레스와고통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세상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려 다 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버림으로써 본래인 이 무한한 넓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 형제가 본래 품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나를 찾는 것이 아닐까.
본래의 품성이란 무엇인가? 또다시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답은 선 함이다. 무엇이 옳고 그릇됨이란 말인가?
인간이 만든 척도에서 바라볼 때 나 오는 답은 정답이 아니다.
진실로 그 답은 하나님의 십계명에 있는 것일까? 부처님의 반야심경과 화엄경에 있는 것일까.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 물리학자, 의학자, 수학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것일까?
우리가 사는 한국은 아직도 공자의 유교 사상과 교육으로 그 전체의 뜻을 제 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남들 평가를 따르는 선입견과 자신의 행동이 아닐 까?
우리 형제는 타인에 의한 눈치를 보며 사람의 禮와 道義와 축적된 부의 尺度 를 보고 우리 兄弟를 우리가 判斷(판단)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兄弟를 바라보고 平價를 할 수 있을까?
자신도 나를 모르는데 어찌 자신이 아닌 兄弟를 平價하고 平價 할 수 있는 尺 度와 知慧(지혜)를 과연 가지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兄弟를 시기하고 兄弟를 업신여길 수 있는 고도화된 철학적 지식을 가 졌는지?
자신의 지식이 남들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알아보았는지? 絶對的 眞理(절대적 진리) 형제란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귀속되는 것이다,
형제란 수직적 관계가 아니며 수평적 관계한다, 다만 나이가 다를 뿐이다.
인간의 본질적 행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하나님 진리는 주는 것이다.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도해 주고 자신의 행복보다 남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리도 같다, 형제와 이웃에게 용서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용서는 여호와하나님만이 사용 할 수 있다. 이해하다가 맞는 표현이다
. (살기 위한 몸부림의 징표를 이해하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고 귀하게 하라 (받들라) 절대적 진리는 우주 만물의 어울림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나의 존재는 부모님과 함께할 때 확인할 수 있다
. 나의 존재는 결혼이라는 짝과 함께할 때 확인 할 수 있다.
나의 존재는 형제가 있을 때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쌓여있는 우리 형제들만의 수많은 한 들을 우리 형제에게 토해낸들 형제 잘잘못의 시비만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변명 또한 무슨 소용입니 까. 말은 꼬리가 있어 계속 꼬리가 우리 형제를 괴롭게 할 뿐입니다.
하늘을 보니 분명 아침 해를 보았는데 어느새 저녁해가 산릉선에 있습니다.
마음은 40살 청춘에 걸려 있으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것을 느낍니 다.
아마도 예측한 건데 형님들 또한 밤이 깊이가 심할 때 온갖 잡념과 어지러 운 생각으로 잠을 설칠 때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만의 이야기를 아픔보다는 기쁨으로 승화시킬 방법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저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머리에는 온갖 잡념과 망상으로 정신이 몽롱하며 어지럽다,
자신이 자 신의 깨달음의 경지로 가기 위함이고 절대적 진리를 찾기 위하여 명상합니다. 온갖 잡념을 지워야 한다.
나의 죽음이 찾아오기 전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구여야 하였는가? 하나님의 진리는 삶과 죽음의 상위 진리가 있는 것일까?
부처님의 해탈은 無에서 無인가?
현재가 낙원이고 현재가 지옥인가? 하나님의 부활은?
부처님의 윤회는? 온갖 물음 속에 문득 이 글을 형제에게 보낼 때 과 연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나에 게 질문합니다
. 큰형과 큰형수님, 둘째 형과 형수님 조카들, 셋째 형과 형수님 조카들, 동생 필훈이 막내와 저의 자녀, 딸의 어미
그리고 처,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 사촌 들과 외사촌 자매와 형제는 친척들의 자손들과 그리고 형제들의 사돈들과 교 류한
적은 있는가?
형제의 자녀들이 삼촌과 사촌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가?
나 는 형들을 잘 이해하고 감사한 생각한 적이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한 것이 全無하다,
내가 아는 지식은 아주 얄팍하다, 無識(무식) 이 나를 좀 먹는다.
나의 자식과 형제의 조카, 손자, 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 고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러나 노년이 다 된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 을까
?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가?
그냥 꿈이며 몽상일까? 내가 형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형편없는 말을 형과 동생에게 하였는가?
지나간 일들을 들춰내 형제들의 우애를 깨뜨리는 것이 아 닌지?
우리 형제의 자손들과 나의 자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교육이 나 할 수 있을까?
아!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렇듯 살아오면서 아는 것이 없 는 무식하고 천박하였으며 형제를 찾아보고 나 자신보다
나의 주변이 우선인 것을 지금껏 모른 채 살아온 나의 삶이 이토록 간장 쪽지보다 더 작은 그릇이 다.
삶은 현실이고 절대적 진리이다.
나는 남은 인생 진실로 내 가족과 내 형 제 그리고 나의 노력으로 나의 주변 모두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 로
변 할 수 있을까? 그럼 나의 형님들은? 어떤 생각일까?
우리 兄弟들이 늙은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를 들먹이고 형제를 비방한다면 우 주 천지에 제일 천박한 형제이며
인생의 사막에서 서로 잊히고, 잊혀야 할 형 제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다리가 휘청거리지 않고 몽롱한 정신과 아물거리는 눈, 귀가 들릴 때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
형제의 우애를 위하여 말보다 두서없는 글이지만 서신이라도 보네 호소 해 볼까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3형제 가족들과 만나 남들처럼 짙푸른 들판의 꽃을 보고 형수님들을 위하여 불판 걸고 맛있는
고기 굽는 냄새도 풍기면서 어릴 적 따스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좋았던 추억도 이야기하고
캠핑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맛 있는 옥수수 굽는 이야기도. 한편으로 풍광 좋은 장소에 다시 만날 약속도 해 보고
기분이 좋은 형제의 미니잔치도 기대하면서 다음 약속을 할 수 있을까?
꿈같은 이야기인가? 모든 미련을 내려놓아야 할까.
나를 내려놓고 형님들과 가족들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챙겨 드리는 나를 다듬 어야겠다
. 慰安(위안)
I think people that have a brother or sister don't realize how lucky they are.
Sure, they fight a lot, but to know that there's always somebody there, somebody that's family.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라. 물론 많이 싸우겠 지, 하지만 항상 누군가 곁에 있잖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 잖아. 항상 형님들께 壽福康寧과 萬壽無疆을 기원하며…
. 안녕히 계십시오. 갑진년 2024.03.18. 일
저녁해가 봄기운 듬뿍 담은 매화꽃 그림자가 길게 드 러누운 저녁에. 아우, 언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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