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발칸 3국 여행기-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사라예보는 서기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건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시차로 인해서 아침에 들려오는 모닝콜 소리가 꿈속의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와도 같이 들린다.
설친 잠 때문에 몸이 무겁다.
빼꼼하게 열려있는 커튼 뒤 창밖으로 비가 오는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커튼을 열어 제치니 비바람이 몹시도 성난 것 처럼 소리가 시끄럽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황태자의 암살 장소이었던 라틴다리와 구시가지 관광을 한다고 한다.
비가 뿌리는 사라예보시내를 가로질러 가는 길에 출근하는 시민들로 분주하다.
시가지의 모든 건물들마다 총탄의 흔적들이 무수히 많다.
어떻게 이곳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사라예보의 건물들은 세르비아계가 주축이 된 유고연방군의 포격에 의해 거의 파괴 되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포격을 받지 않는 건물이 있는데, 이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 각국의 기자들이 머물며 프레스센터 역할을 하던 홀리데이 인 호텔이라고 한다.
이 호텔은 사라예보의 하나뿐인 안전지대로 고위급 관료는 물론 각국 대사급 외교관과 그 가족들, 유고 연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은신처 역할까지도 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노란색의 홀리데이인 호텔 앞을 지난다.
이 큰 광로를 저격수의 길(sniper alley)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이 저격수의 길은 사라예보 공항으로부터 시내까지 이어지는 도로인데,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이 도로 주변 건물 옥상에 자리 잡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저격하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악마와 같이 잔인한 이들을 어찌 용서해야하나,
지금도 같은 하늘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이상하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경제사정을 말해주는것과 같은 낡은 트램- 출근길로 트램이 만원이다.
사라예보에서 유일하게 포격을 받지 않는 건물이 있는데, 이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 각국의 기자들이 머물며 프레스센터 역할을 하던 홀리데이 인 호텔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나오는 노란색의 홀리데이 인 호텔 앞 지나는 대로가 그 악마와 같은 저격수의 거리이다.
주상복합 아파트의 외관에 무수히 많은 총탄흔이 보인다.
새벽부터 우중충하게 내리던 비가 멈춘다.
전쟁을 멈춘 이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면적은 한반도의 약 4분의1정도로 작은 소국이다. 이 조그마한 땅덩이에서 사는 사람들이 전생에 무슨 죄가 그리도 많다고 인구의 절반이 죽거나 타향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을까 하고 반문해 본다.
전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르비아계 연방군의 사라예보 포위 중 35만-40만명이 갇혔고,
이 중에서 적군이던 6만-7만여명의 세르비아 인들이 사라예보에 머물렀다. 43개월의 포위중에 1,600명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10,000명이 사망했고, 약 6만-7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쟁의 총성이 멈춘지가 거의 20여년이 된 지금 이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5천 달러에도 못 미친다고 하는데, 유럽연합의 경제지원이 절박하다.
지금 현시점에서는 EU에 가입되어야 경제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데, 무슬림이라는 종교의 영향으로 과연 EU의 일원으로 받아 줄지 그것이 의문이다.
예를 들어 이 나라 못지않게 지금 가장 EU가입을 원하는 나라가 바로 지척의 터키가 있는데, 나의 짧은 사견이지만 터키 또한 국민의 95%이상이 무슬림이기에 EU에서 가입 시기를 늦추는 것은 아닌가 사료된다.
이런 것을 따져볼 때 한때 같은 유고사회주의연방이던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 사람들로서는 얼마나 얄미울까. 그들은 독립하자마자 EU에 가입하여 경제지원은 물론이거니와 국제적 신망을 얻음으로 대외수출과 관광수익이 더욱더 신장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본에의해 건축된 쇼핑센터(보스니아는 수니파의 무슬림으로 수니파최대의 지분을가지고 있는 사우디가 지원)
포격으로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건물들과 잔해로 빈터가된 도심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의 건축가가 축조한 다리
총탄흔과 포격의 상흔으로 가득한 건물들 사이로 버스가 들어선다.
사라예보 구시가지로 다 온 것 같다.
내리던 비가 멈추고 다행히도 구름이 겉이고 파란 하늘이 투명하게 다가온다.
사라예보에는 한 가족의 교민이 거주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현지 가이드라고 한다.
현지교민 가이드의 안내와 설명이 시작된다.
버스에서 내려 청계천보다 좁은 계천이 있는데,
이것을 강이라고 칭하여 내심 우스운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이강이라고 하는 계천은 사라예보의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밀야츠카(Miljacka)강이라고 부른다.
이강 위에는 13개의 다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유명한 다리가 바로 라틴 다리(The Latin bridge)이다.
이 다리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가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에게 암살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이 되는 곳이기에 관광객이면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친다고 한다. 1798년에 만든 이 다리로부터 시작된 전쟁은 오스만 터키 제국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유럽 강대국들이 벌인 전쟁터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아 나와 아내는 사람들이 다 가기를 기다려 사진을 찍었다. 이 다리는 200여 년 된 돌다리라고 하지만 사라예보 내전 때 파괴된 것을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다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짧고 좁다. (길이 39m, 폭 4.3m, 높이 2.4~3m).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세월이 흘러가듯이 흐른다.
우리일행들이 사라지자 다리는 인적이 끊겨 한가했다.
다리위에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내가 방문한 오늘로 부터 100년 전, 내가 이곳에 서있는 오늘이 2014년5월, 그리고1914년6월
정확히 옮긴다면 1914년 6월 28일 이 다리에서 두발의 총성이 울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二重)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쓰러졌다.
저격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나이 19세. 그의 손에 브라우닝 권총이 들려 있었다. 탄환 두 발은 명중했다.
지금우리 부부가 서있는 이곳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 현재에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 Herzegovina)의 수도였지만 그 당시에도 수도 이었다.
그리고 동유럽 발칸 반도의 왼쪽에 위치해 있다.
프린치프의 거사는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의 배후에 세르비아왕국의 군부가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지 한 달만인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를 후원하는 독일이 세르비아를 후원하는 제정 러시아ㆍ프랑스ㆍ영국과 개전하여 시작되었다. 일본ㆍ루마니아ㆍ그리스ㆍ이탈리아가 삼국 협상 쪽에, 오스만 제국ㆍ불가리아가 삼국 동맹 쪽에 참전하여 세계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으며,
4개의 거대한 제국(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의 몰락을 가져왔다. 또한 전쟁의 결과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유럽의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이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끝나는데, 저격으로 사망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오픈카 번호판은 ‘A 111 118’이다.
왼쪽 강건너편의 노란색건물은 189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통치시절 사라예보시 청사로 이용되다가, 1949년부터 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1992년8월 내전으로 거의파괴됨과 동시에 보관중이던 200만권의 장서또한 소실되었다고 하며, 금년 5월초에 단장되었다고 한다.
비극을 품은 라틴 다리(The Latin bridge)-그냥 조그마한 다리일뿐이다.
저격당시 모리츠 쉴러(Moritz Schiller) 카페였던것을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이장소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아가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에게 암살된 장소라고 새겨져 있다.
다리 건너편에 사라예보 박물관(Muzej Sarajevo)이 있다.
그 앞이 암살 장소이라고 하는데, 100년전 그 당시에는 평범한 카페이었고 그 이름이 모리츠 쉴러(Moritz Schiller) 카페이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은 현재 보수중이어서 안타깝게도 관람을 할 수가 없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점령기간인 40년(1878~1918)의 역사를 소개한다는 내용이 있고, 피살 당시 황태자 부부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51세)와 조피(Sophie Chotek·46세)의 모습이 밀납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한다고 하는데, 황태자는 하늘색 기병대 예복 위에 화려한 훈장과 황금색 깃에 은색 별을 단 모습과 황태자비 조피는 힌색 드레스와 흰색 모자를 쓴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박물관외벽에는 사건의 개요와 황태자, 황태자비의 사진, 그리고 저격범 프린치프의 사진과 저격에 사용된 프린치프의 브라우닝 M1910 권총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권총의 실물은 오스트리아 빈의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도 일본의 강압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진 속 19세 저격범의 모습은 큰 눈망울을 가진 울분에 찬 식민지 젊은이의 모습이었는데, 왠지 그가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
여기와 관련된 오스트리아 황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의 암살 이야기는 전에 기고하였던 동유럽여행기(2011년 오스트리아 빈 방문기)에 올려저 있으므로 중복되는 설명은 지나가기로 한다.
저격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법정에 세워졌는데, 그의 죄목은 대역(大逆)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사형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의 법률에 의하면 20세 미만은 사형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프란치프가 저격당시 20세에서 27일(암살일 기준) 모자랐다고 한다. 결국 그는 20년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수감생활을 하던 그는 심한 결핵으로 한쪽 팔을 잘랐으며, 1918년 4월 28일 결핵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데, 그의 손에 의해서 일어난 세계1차 대전 종전 7개월 전이다.
사라예보에는 그의 무덤(St. Mark cemetery)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암살단원과 같이 묻혀 있다. 묘비명은 ‘비도브단의 영웅들’이라고 전해진다.
2011년 동유럽여행기를 기고하면서 여러쪽을 할애하여 프란츠 요제프황제와 그의 황후 엘리자벳 시씨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다.
여기서 암살된 황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는 프란츠 요제프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카를대공)의 아들이다.
그가 황태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프란츠 요제프1세와 엘리자벳 시씨 황후가 낳은 황태자 루돌프가 연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가능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가 황태자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14번째 결혼기념일에 부부가 동시에 타국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을 리는 없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황태자의 암살 소식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슬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황제는 조카의 결혼을 상당히 못 마땅해 했다고 한다.
황태자비(妃)가 하급 귀족 출신이었기에 그러하다고 한다.
귀천상혼(황족이 천민과 결혼)을 하였지만 황태자부부는 사망 전까지 행복했다고 전해지는데,
암살자의 흉탄에 급사한 비운의 황태자 부부는 자기가 소유했던 오스트리아 아르트스테텐(Artstetten)성(城)에 묻혔다.
그리고 이들이 낳은 가족은 그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외손녀로 원래 이름은 마리아 테레사)가 비호하게 되는데,
그녀는 카를대공의 후처이며 사망한 황태자의 새 어머니로 전처가 낳은 아들의 자손들에게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황태자 사망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그들에게 한푼도 지원하지 않아 매우 궁핍했으며, 오스트리아 왕가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알게 된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가 시아주버니인 황제에게 달려가 이들에게 한푼도 주지 않으려면 나에게 주는 연금도 끊으라고 하자 황제의 권위보다 더 큰 지위를 누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청을 안들어 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 합스부르크 손자들이 현재까지 호엔 베르크가문으로 남게 되며, 아르트스테텐 성 또한 그들 가문의 소유로 남았다.
우리는 황태자비 조피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여기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귀천상혼”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엄청난 스캔들이었다고 한다.
귀천상혼을 하면 왕위계승권과 상속권등 모든 왕권과 자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합스브르가문(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이었던 티센 공작인 이름이 비슷한 페르디난트 대공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페르디난트대공의 부인인 이사벨라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자신의 장녀(마리아 크리스티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자신의 딸에게 관심이 있어 자주 오는 것이 아니라 딸의 시녀로 일하고 있던 호테크 백작의 딸 “조피(조피 호테크 폰 콧구바)”였음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이 황실과 외부에 알려져 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 황실에서는 황태자의 연애사실에 대해 크게 진노하여 황태자에 대해 연애를 그만 두라고 강하게 요구한다.
호테크백작가문은 원래 체코 보헤미아 귀족가문출신 이었고, 상당한 명문가였으며, 그들은 합스브르가에 대해 항상 충성을 다해온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귀족가문이었다.
하지만 후일 대통을 승계할 황태자와 결혼할만한 출중한 신분은 아니었다.
황제의 압박과 외부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치욕감으로 나날을 보내던 황태자는
자신의 처지보다 더욱더 가련한 조피를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황태자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조피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황실은 물론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결혼에 대해 일체 언급을 회피하며 황태자에게 귀천상혼을 포기하라며 강하게 요구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그의 새 어머니인 마리아 데레지아 대공비가 황제를 설득하게 되고 여론 또한 황태자의 사랑에 깊은 연민을 보이게 되자 황제는 조건을 내걸고 결혼을 승인하게 된다.
그 조건을 보면
첫째 조피 호테크 폰 콧구바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작위를 공유하지 않는다.
둘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오스트리아의 황자(공주), 헝가리의 왕자(공주), 오스트리아의 대공(여대공)등의 작위를 받을 수 없으며, 계승권도 가지지 않는다.
대신 호엔베르크 공자(공녀)의 직위를 얻는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이 조건에 동의했고, 1900년 7월 1일 조피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귀천상혼이라고 합스브르크가문에서는 단한명의 “대공”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항상 자기를 지지해주던 새어머니 마리아테레지아 대공비와 이복동생들만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조피는 결혼과 동시에 호엔베르크 여후작의 직위를 받았으며 1909년에 호엔베르크 여공작으로 승격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더욱더 거리거 멀어졌다고 한다.
결혼 후 조피는 황태자의 아내였음에도 그 지위에 걸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황태자는 이에 대해 매우 격분해하였으나 조피는 이런 냉대에 대하여 인내하며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황태자부부는 자녀 4명을 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만약 사라예보만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 행복은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조피는 사후에도 냉대를 받는다.
그녀는 황태자비였지만 합스브르크가문의 대공비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편과 함께 영묘에 안장되는 것이 거부된다.
이때 황태자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새 어머니 마리아테레지아 대공비가 나서게 되고,
그녀는 아들이 영묘에 혼자 안장되는 것 보다 사랑하는 조피와 한께 안장되는 것을 더 원할것이라며 오스트리아 남부에 위치한 아르트스테텐(Artstetten)성(城)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황태자부부의 한이 서린 다리를 뒤로하고 구도심으로 향했다.
구도심에는 오스만제국 시절의 캐라반 사라이(Caravan Saray-대상들의 숙소)의 패허된 모습과 터키 이스탄불에 있었던 가장 유명하고 큰 시장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를 연상하게 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이스탄불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다.
구도심은 오스만제국시절에 세워져 아시아 터키풍이 물신 베어나오는 곳과 합스부르크에 의해 세워진 건물들로 정확하게 분리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도심이 어떻게 칼로 베어 놓은 것과 같이 한선으로 일정하게 구분되어 있다. 참 신기한 모습을 가진 사라예보이다.
1868년에 건립된 사라예보 동방정교회 성당
사라예보 대성당이며 "예수 성심성당(The Cathedral of jesus sacred Heart)이라고 한다, 1889년 오스만 헝가리제국시절 파리 노틀담사원을 본따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축하였다고 한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방분 기념상
사라예보 도심을 걸어가다 보니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정교회성당, 가톨릭성당, 유대교회 등이 몇 미터 사이를 두고 아무런 불편함 없이 공존을 하는 모습이 이채롭기만 하다.
그토록 종교적 민족적 이질감으로 서로를 반목하던 모습은 온대간대 없다.
그냥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서로 바쁘고 자기할일에 집중하고 지나가다 마주치면 한번 웃어주는 그런 사람들,
그래 이것이 평화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평화이고 진리가 아니겠는가.
도로가운대 햐얀색선의 동쪽은 오스만투르크시대의 건물, 서쪽은 오스트리아통치시절 합스브르크풍의 건물들로 나눠진다.
가지 후스레프 베이 모스크(Ghazi Husrev-bey's Mosque):16세기 지어진 이슬람 사원인데 전쟁중 많은 부분이 손상되고 1996년에 복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커피향과 입맛을 자극하는 양갈비 굽는 맛있는냄새가 물신풍겨나오는 식당들
터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를 연상하게 하는 시장, 이스탄불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다
이 시장은 술탄 가지 후레프 베이의 명에 의해1543년에 109m정도의 석조건물이 만들어지고 내부에는 52개의 점포가 있다고 하며.
시장의 이름도 '가지 후레프 베이 베지스탄(Ghazi Husrev-bey's Bezistan)'이라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 색채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터키인들의 거리가 구시가지이다.
붉은색 기와의 나자막한 건물들 그리고 돌들을 잘 다듬어 만든 골목바닥이 정겹다.
구획되지 않아 굽은 곡선으로 자연스럽게 휘어져 지은 건물들과 어우러진 모스크와 각종 종교 시설, 상점, 카페들이 밀집해 복잡할 것 같지만 나름 질서있는 골목들이 이곳 사라예보의 관광 중심지 “바슈카르지아” 이다.
그리고 이곳 사라예보의 관광객중 가장 많은 사람이 터키인이라고 한다.
오스만제국시절 이 땅을 지배했던 과거의 영화로운 추억을 더듬어 여행길을 택하는 것 같다.
터키인들은 이 사라예보를 이스탄불과 형제도시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이 터키와 한 문화권이었고 종교 또한 같기에 동질감을 공유해서 그런가보다.
무슬림과 기독교,동방정교,유대교가 공존하는 이곳 내뒤로 히잡을 두른 여성들이 보인다.
구도심의 바르슈카광장의 모습- 뒤로 보이는 박공 지붕이 구시가지의 상징이라고 하는 "세빌리 샘"이다.
이 샘은 1754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1년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아 샘물을 마시면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어 마실려 하다가 석회가 많이 섞여든것 같아 마시는것을 포기하였다.
가게 주인장의 망치소리가 창창하게 들린다. 내가 가게앞에 서있자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손짓을 한다.
무슬림들의 전통차를 끓이는 주전자와 찻잔이 매우 정교한 문양으로 아름답다.
거리의 상점들은 대부분 식당과 기념품을 판매하는데, 조그마하고 아담한 카페가 즐비하다.
구수한 커피향에 이끌려 카페로 들어가 유로화로 주문이 가능하냐고 물으니 거절이란다. 이 동네에서 무슬림들이 마시는 카푸치노와 같이 진한커피는 유난히 맛이 풍요롭고 진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서기1526년과 1529년에 오스만이 유럽의 중앙이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봉쇄한다.
1차, 2차모두 성함락에 실패하고야 말았지만 전편에 기고한 것과 같이 유럽은 이사건이후로 오스만의 무력을 항상 두려워 했었다.
2차 빈의 봉쇄전쟁에서 크게 패한 오스만 투루크는 전쟁물자를 놓이둔 채로 퇴패하는데, 이 전쟁 물자 중에 대량의 커피원두 콩이 있었다고 한다.
오스만이 패하면서 두고 간 노획품 중 원두커피 콩을 오스트리아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빈 방어전쟁 승리의 원동력은 다름이 아닌 빈에 살고 있던 무슬림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알바니아계 주민이었다고 한다.
이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집요한 성벽침투를 철저하게 방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커피원두를 즐겨 마시던 그들에게 빈 사람들은 필요 없는 노획품이 돌아가게 되고, 이들에 의해 진하고 풍미로운 커피가 전해졌다고 하는데, 그 유명한 비엔나 커피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다.
도심을 한 바퀴 돌은 버스는 오늘점심이 약속된 모스타르로 향한다.
약 2시간30분을 가야한다고 하는데, 차창밖으로 펼처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특히 에메랄드색의 강물은 혼란했던 과거역사를 씻어 내리려는 것과 같이 푸르디 푸르다.
이 강은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라고 하는데 헤르체코비나의 디나르 알프스 산(Diner Alps Mts)에서 발원하여 석회암지대를 굽이돌아 약218Km를 흘러 아드리아해로 들어간다.
산수화가 따로 없는 절경중의 절경이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아름다운 디나르 알프스 산(Diner Alps Mts)은 발칸반도의 북서부의 슬로베니아와 헤르체코비나를 잇는 산맥을 지칭한다. 길이는 약650Km, 폭은60~180Km이고 높이는 1.6Km라고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거대한 호수가 있었는데,
이것이 자블라니카 호수(Jablanica Lake / Jablanicko Jezero)라고 한다.
곳곳에 송어를 양식하는 곳이 있는데, 오늘점심에 송어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디나르 알프스를 넘는 길목의 레스토랑 카푸치노 맛이 일품이다.
네레트바 강변을 따라 두시간반의 디나르 알프스가 품은 산수화가 끝나고 모스타르에 도착한다.
모스타르(Mostar)에 차량이 천천히 진입하는데, 건물 외벽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보스니아 내전이 얼마나 참혹하였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모스타르는 사라예보 보다 전쟁의 상처가 극심하다.
사라예보는 이 나라의 수도로서 전후 복구가 다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려졌다. 그러나 이곳 모스타르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많이 남아 있다.
모스타르(Mostar)는 이슬람의 도시답게 빼족탑의 모스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국경에 인접하고 있으며,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수도라고 한다.
이 모스타르라는 명칭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오래된 다리 또는 낡은다리 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점심식사가 준비된 모스타리 다리입구의 예쁜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긴다.
음식 맛은 터키 이스탄블에서 먹던 음식과 비슷하다.
짜지 않았으면 더욱 맛이 있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모스타르의 "스타리 모스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폭이 좁고 물살이 매우 빠른 네레트바 강 위에 세워진 이 다리는 원래는 나무다리였다고 하는데, 석조로 지어진 것은 15세기 오스만제국에 의해 폭 4m, 길이 30m, 높이 27m의 석조다리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유럽의 한복판에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다리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스타리 모스트는 다리의 기능을 뛰어넘어, 종교와 문화가 서로다른 주민들을 이어주는 화합과 소통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강북지역은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이, 강남지역은 이슬람의 보스니아인이 거주하면서 이 다리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였고, 또 한때는 갈등과 전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아름답던 이 다리는 내전 당시였던 1993년 11월9일 기독교도 트로아티아계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내전이 끝난 2004년 2월 파괴되어 강바닥에 방치되던 다리를 새계각국의 지원 아래 부서진 다리의 돌조각들을 추슬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그해 7월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자는 평화 선언한다.
그리고 200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그리고 또한 내전 후 이곳의 기독교의 크로아티아계주민과 무슬림의 보스니아 주민들간에 종교와 문화를 서로 인정하면서부터 도시는 안정을 되찾았다.
점심식사를 하였던 터키식 레스토랑
식사 후 다리를 관람하러 사람들 사이로 부지런하게 빠져나가는데, 다리 입구에서 부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진행이 불가능 하다.
뒤돌아 강바닥으로 내려가 옥색의 강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강물은 시원하고 맑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본 다리는 한 장의 멋진 엽서처럼 아름다운 풍광으로 눈에 들어온다.
다리를 올려다보니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고 약간은 한산해보여 다시 다리로 가보았는데, 이 다리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다이빙을 보여주며 돈을 버는 사람도 있어 내심 별별 사람이 다 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데, 매년 이곳에서 세계다이빙대회가 열려서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다리의 입구는 상점들과 레스토랑들이 꽉 들어 차있다.
상점마다 여행객들에게 호객을 하는 목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세계각국의 관광객들이 연일 넘처나기에 상점들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어떤 무엇이 전쟁이랴 매일 먹고사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전쟁이다.
종교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전쟁을 벌인 이들 앞에서 무엇을 논하랴.
다리위에서 그림엽서와 같은 풍광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가 바쁜 여행객들의 눈에는 내전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모스타르의 풍광을 그저 지나칠 뿐이다.
모스타르를 뒤로하고 다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닉을 향해 간다.
사라예보에서 오던 길처럼 네레트바 강의 강변도로를 따라 가는데 그 풍광 역시 아름답다.
가는 도중 산허리에 자리 잡은 조그마하고 아담한 카페에서 이곳사람들이 즐겨하는 커피를 주문해서 마셨는데, 그 맛이 진하고 향이 좋다.
산을 넘은 버스가 다시 강을 끼고 크로아티아의 국경으로 향한다.
국경 마을쪽에 도로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라서 심하게 흔들리는 비포장도로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다.
길옆으로 계속 따라가던 강이 농수로와 같은데 운하처럼 잘 만들었나 보다. 작은 선박들이 정박한 농촌마을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리고 오푸젠(Opuzen)이라는 곳을 지나는데 특이하게 생긴 밭들이 있다.
물위에 밭을 띄워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이곳사람들은 물위에 띄운 농사법 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며, 물도 비료도 필요 없는 수경제배방식이라고 한다.
조금지나다 보니 일자로 수로를 깊게 파서 과수원을 하는곳들을 지난다. 농사의 천국이 이런 곳인가 보다.
길옆으로 계속 따라가던 강이 농수로와 같은데 운하처럼 잘 만들었나 보다. 작은 선박들이 정박한 농촌마을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물길을 길게 운하처럼 설치한 농수로
보스니아국경에 거의 다온 것 같다.
1박2일 동안 머물렀던 보스니아 해르체코비나 출경심사를 받기위해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지방 소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 같은 곳처럼 허술하게 생겼다.
차량을 주차하는 주차선도 없고 넓은 공터에 대충 주차하고, 곧 이어서 가이드가 여권을 취합해서 버스운전자와 함께 가서 출국신고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비 포장도로와 포장도로를 30여분간을 달린 끝에 보스니아의 마지막 휴게소에 들렀는데, 휴게소라기보다 슈퍼마켓에 가깝다.
나는 사라예보에서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맥주 서너켄과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딩가츠(Dingac)와 포십(Posip)와인을 각각 한병씩 구입했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 맥주 잘 먹었고 와인 또한 정말 맛이 깊어 몇 병 구매해서 귀국할까 고민을 했었다.
크로아티아국경의 검문소가 보이고, 다시 입국심사를 마친 차량이 아드리아해를 끼고 두브로브닉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첫댓글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in harmony...
댓글 달아주시는 분은 회장님외에 없네요.
아이쿠나---댓글이 아니라 노래를.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비틀즈 lmagine. 좋습니다
이 노래보다 더 잘 어울리는 댓글이 있을까 싶더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