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하느님이 찾으시는 사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초나라에 장왕이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
그를 곁에서 지켜 본 신하들은
그가 왕이 되면 무언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음날부터 장왕은 호화주연을 베푸는 것이 아닌가?
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달거나 반대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왕이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초나라는 국력도 쇠퇴해갔고, 사회 곳곳이 썩게 되었다.
이를 본 소종이라는 신하가
왕에게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해 줄 것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목숨을 건 그의 충정어린 발언에
왕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왜 이제야 왔소. 내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시오?”
초나라의 장왕도 그러했듯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느님께서는 이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렇다면 왜 충성된 사람을 찾으실까?
당신 일에 쓰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이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28일
하느님의 뜻으로 상황을 판단하라
너무 쉽다고 생각할 때,
이것쯤은 내 경험과 상식으로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방심할 때,
우리는 덫에 걸리고 만다.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당신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처세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신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파일럿들 가운데서도 가장 숙달된 파일럿들이
뜻밖에 평이한 비행 중 사고로 죽는 비율이 높은 원인을 아는가?
자기 실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계기판을 보지 않아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파일럿들을 훈련시킬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기판을 철저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영리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 영리함이
오히려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당신 인생에서도 자기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솔하게 결정해 버린 일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라고 여겨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처리해 버린 일들이
당신의 덜미를 잡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느님 뜻을 해석하지 말라.
오히려 하느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라.
당신이 하느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느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29일
확신
가스파라드 메밀로드주교는 젊었을 때,
제네바에서 보좌신부로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성당에 아무도 없을 때,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그가 기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바로 그 때, 그의 앞으로 어떤 여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성당 안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몹시 놀랐다. 그 부인은 사과를 했다.
"제가 신부님을 놀라게 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의도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아는 개신교 신자임을 알았다.
그녀는 벌써 여러 번 자신의 강론을 들은 바 있고
가끔 종교 문제로 자신의 가르침을 청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돌출 행동에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되면 저를 분명 용서하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부님께서 성체성사,
즉 성찬식에 대해서 강조하시는 것을 자주 듣고
아주 큰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확신하고 계신지 어떤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신부님 몰래 신부님을 관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서 혼자 계실 때,
제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실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보았습니다.
저를 신부님의 성당에 받아주세요.
왜냐하면 저는 신부님이 성체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저는 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앙을 확신하는가?
30일
회개와 용서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이야기다.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훔쳤다.
그리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웠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조각에 몇 줄 적어서
그것을 아버지의 침실문에 끼워 넣고 돌아왔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다.
가서 보니 종이조각은 없어지고 문틈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다.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은 용서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가?
12월
1일
3가지 황금문
데이 C 셰퍼드는 ‘세 가지 황금문’이란 글에서
언어생활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말하기 전에 언제나 세 가지 황금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이다.
첫째 문, 그것은 참말인가?
둘째 문, 그것은 필요한 말인가?
셋째 문, 그것은 친절한 문인가?
이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하지 말고 크게 외쳐라.”
아쉽게도 오늘날 이 사회의 위기는
상당 부분 잘못된 말에서 기인한다.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말해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불필요한 말로 실수가 많다.
가깝다는 이유로 거칠고 무례한 말을 내뱉기 일쑤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문을 더 통과해야 한다.
곧 기도의 문이다.
말하기 전에 하느님 말씀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기도하면,
진실한 말을 하게 되고
꼭 필요한 말을 하게 되며
친절한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
“야훼여, 이 입에 문지기를 세워 주시고
이 말문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시편 141,3)
2일
도전
인류 역사는 불가능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
새로운 역사, 새로운 문화, 새로운 과학 시대는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불가능의 강을 건너고,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불가능의 산에 도전했던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과학적, 문화적 혜택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누군가가 깨뜨려 준 덕분에 주어진 것이다.
옛날 신문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1840년 신문기사
: 시속 30마일의 속도로 인간이 여행하게 되면
분명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
·1901년 신문기사 :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의 조립은 불가능하다.
·1926년 신문기사 :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1930년 신문기사 : 사물에 고정되어 있는 에너지를
동력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신문 기사들은 불가능이라는 말을 믿지 않고
이 사실을 가능으로 바꾼 사람들에 의해 백지화되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토머스 에디슨이나 라이트 형제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가능이라고 쓰인 말 앞의 ‘불’자를 떼어 버렸다.
불가능을 믿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발전되어 온 것이다.
당신에게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또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3일
동행 - 어디에서든 주님과 함께
17세기 평수사였던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가장 분주한 시간이나 조용한 기도 시간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소음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부엌에서도,
나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때처럼
평화롭게 하느님의 임재를 유지합니다. …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라이팬 속의 달걀을 뒤집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내게 일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그분께
내 전부를 바치는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면
땅에서 지푸라기를 하나 줍는 일에서도 만족을 느낍니다.”
로렌스 형제는 이런 자세로 15년간 부엌에서 일했다.
교회에서만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내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동행을 경험하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