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 빌 3:1-9
사람이 세상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큰 비중이 성취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한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대한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올 3월에 종영된 “강연100℃”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을 초대해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프로인데 많은 유익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절망적 건강상태에서 회복된 사람도 있고, 직업이 없어서 날마다 고민하다가 시골로 귀농해서 농사를 지어서 연수입이 수억 원씩 되는 사람도 나와서 강연을 하고, 항상 운동을 해서 95세인데도 청년같이 건강하게 사는 할아버지도 나와서 이야기를 했고, 하반신 마비 장애인인데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댄스를 아주 멋지게 추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세상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금욕종교나 고행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한 세상을 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적 진리라는 신학이 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가장 큰 강조점이 이 지상에서 축복 부분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얼마나 복이 많은지 8장을 보면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28장을 보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한 때는 우리 기독교 진리가 오해를 불러온 때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의 경제활동을 위축시켰습니다. 이윤을 남기는 것은 죄라는 신학을 발표해서 그때 유럽 경제가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상업하는 경제인들이 교회를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 취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인 칼뱅이 성직 개념에 대한 새로운 신학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모든 직업은 다 선하다. 농사짓는 것도 거룩한 성직이요 장사를 하는 것도 똑같다. 자기 노력의 극대화를 통한 열매를 자신이 누리는 것은 창세기에 너는 엿새 동안 힘써 나의 모든 일을 하는 하나님의 축복 노동 기초에 충실한 것이다.” 이런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모든 기독교가 새로워졌고 그 신학에 기초한 경제 부흥이 유럽 서구 국가에서 일어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시 그 사회에서 매우 성공한 인물이 자신이 성취한 모든 소유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여기 소개된 몇 가지 조건들은 유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장 흠모하는 소원들이 나열되었습니다. 빌립보서 이 대목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라 설교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바울 사도의 가장 훌륭한 성공 성적표이며 가장 화려한 이력서 대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1절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뻐하라”는 앞으로 기뻐할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기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후반부 말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기서의 “같은 말”은 바울이 바로 직전에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했던 말씀, 곧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그들에게는 안전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면, 그들은 내적인 문제 곧 그들 사이에 있는 다툼과 허영 또한 서로 간의 원망과 시비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면, 그들은 외적인 문제 곧 대적하는 자들의 위협도 이겨내고 또한 미혹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안전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면 우리의 심령이 안전합니다. 우리의 가정도 안전하고, 우리의 교회도 안전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여, 주 안에서 늘 안전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삼가라”는 말씀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삼가라”는 말씀을 세 번 반복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저해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들을 삼가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부르면서 이방인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을 개들이라고 경멸적으로 부르면서 그들을 역습하고 있습니다.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행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교란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들의 할례란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자신들의 몸을 상해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없으면 육신의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율법주의자들은 개들이며 행악하는 자들로 그들의 몸을 상해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예수님 밖으로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을 삼가야 했습니다.
3: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을 삼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자들은 괜히 그들의 몸을 상해했을 뿐이고, 실상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듭난 참 할례파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했습니다. 반면에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육체로 봉사했습니다. 여기의 “봉사”는 “예배”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그들의 예배는 받으셨지만, 율법주의자들과 그들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할례 받은 육체로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육체를 신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 의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곧 할례파요,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알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3: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육체를 신뢰할 만하지만,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육체를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할례 받은 육체로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마음에 할례를 받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으로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후반부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육체를 신뢰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육체를 신뢰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알기 전, 바울은 육체로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바울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 이상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자들처럼 육체를 신뢰하지 맙시다.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으로만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이들 네 가지는 바울이 그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출생으로도 육체를 신뢰할 만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더라도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음을 먼저 부각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 받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했습니다. 할례 받은 육체가 그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종교 의식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아브라함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의 상속자는 야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이스라엘 족속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구원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가정에서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베냐민 지파요”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베냐민만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바울의 이름은 본래 사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나뉠 때,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다윗의 집에 충성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의 음모에서 유다인들을 구한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이렇듯 베냐민 지파는 작지만 긍지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신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구원을 받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몇 대째 믿어온 집안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각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입니다. 바울의 부모는 양쪽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히브리말에 능통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역사와 전통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도 육체를 신뢰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힘 있게 예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3: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5절 마지막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와 6절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열심으로는, 율법의 의로는” 이처럼 세 가지 모두 “무엇으로는” 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 바울은 그의 노력으로도 육체를 신뢰할 만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입니다.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서 조상들의 전통까지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율법교사인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하면, 바울은 전혀 손색없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임을 신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자신이 가진 종교적 직분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입니다. 행 8:3절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더군다나 사울 곧 바울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까지 잡아오려 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이스라엘의 순결을 해친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음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열심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입니다.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는 아무도 바울을 흠잡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율법의 의로는 아무 것도 자책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전형적이고도 모범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이전에 자신이 신뢰하던 육체를 모두 떨쳐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체를 신뢰하며 예수님을 떠나렵니까? 이는 사망의 길입니다. 아니면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렵니까? 이는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처럼,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영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후에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았거나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과거에는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전에는 그의 손익계산서에 ‘이익’으로 평가되던 것들이 이제는 ‘손해’로 평가하고 심지어 배설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였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한 행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 교회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외적인 업적, 성과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할례의 표시를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듯 많은 경우에 믿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재력, 권력, 학력을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려 합니다. 또한 자기의 한일이 알려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교만이 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바울이 위에서 지적한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들이나 자신이 성취한 업적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고 보니 이 세상에서 좋다고 귀하다고 붙잡았던 것들이 이제는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리가 이룬 세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전부 신학교로 가고, 선교지로 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과 같이 과거의 자랑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평가하고, 과거에 그렇게 얻으려고 목적으로 삼던 것들을 이제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회심하였다고 하여 로마 시민권을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진 율법의 방대한 지식과 헬라의 학문이 성령의 인치심 가운데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전에 의지하던 것들을 포기하고 신앙생활의 발전에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여기서 ‘배설물’은 음식 찌꺼기나 몸 밖으로 나온 똥을 가리킵니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고 보니 전에 그처럼 대단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이 시시해졌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어떻게 하면 자기의 노력으로 의를 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며 만족한 삶을 살 것인가 하였으나, 이제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을 본받아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왜 사는지 영적으로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경력이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믿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격하여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기를 기뻐하며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 하였는데 8절의 ‘그리스도를 얻는다.’와 9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바울의 두 가지 기도의 제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에서 ‘얻는다.’는 상업적인 용어로서 저울 양편에 각각 무엇인가 올려놓고 그 중에서 한쪽을 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덜 중요한 것으로 상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공급자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능력을 받으며 삶과 인격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를 날마다 삶에서 경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의롭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의의 기원은 하나님이고 방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를 위하여 얻는 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를 한번 받으면 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계속 추구할 것을 제시합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보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지라고, 꼭 붙들고 있으라고 유혹한다. 내려놓으면 모두 잃어버린다고 우리에게 속삭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을 때 진정 내 것이 되고, 더 좋은 것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도 하버드 대학 박사라는 명예도, 앞길이 훤히 열린 미래의 보장도, 몽골로 선교사로 가고자 할 때 염려되는 가족의 안전도, "너는 그저 내려놓으라."는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여 다 내려놓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버리는 것 아닙니까?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세상 성공은 따놓은 단상이지요. 그러나 다 버립니다. 그리고는 살기 힘든 몽골 선교사로 그냥 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안락한 생활을 다 버리고 갑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세상 성공 다 버리고 갑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예수 바로 믿기 위해, 예수님 더 얻기 위해 버릴 것 없습니까? 내가 목숨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데, 이거 없이는 못 살 것 같은데, 문제는 예수 바로 믿는 일에 방해된다면 오늘 과감하게 버리지 않겠습니까? 버리세요. 그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분으로 내게 찾아오십니다. 버리세요. 그때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버림으로 가장 좋은 것 되시는 예수님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 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더욱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소유한 그 영광과 감격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름의 상을 위하여 / 빌 3:10-16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 그가 대단히 불안해하였다고 합니다. 천국에 갈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을 청하여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고 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라고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8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고맙네, 이제 나는 준비되었다네.” 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죽음 앞에 서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집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쓴 ‘신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는 결코 살아 본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실제는 마구잡이로 살고 있는 이유는 앞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게 되는지 막연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 대신 눈앞에 되어지는 일은 크게 보입니다. 입시, 취직, 결혼, 사업... 그러다 보니 이쪽이 좋아보여서 그리로 가다가, 저 길이 더 좋아 보이면 그 길을 따라가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길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방향전환이 일어나고 목표가 바뀝니다. 그래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왔다 갔다 합니다. 마구잡이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면 열심히 살았지만 무엇을 했는지, 뭘 이루었는지 모릅니다. 마구잡이 인생의 비참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게 들립니다. “나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으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생에는 부름의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상을 받으려고 열심히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승진, 합격, 결혼, 하다못해 초등학교에서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 받는 일까지 다 상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상을 받으려고 열심히 삽니다. “달려가고 있습니다.” 학원도 다니고, 일찍 출근도 하고, 야근도 하고, 화가 나도 참고, 몸이 아파도 참습니다. 그런데 상이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주는 상도 있고, 회사에서 주는 상도 있고, 방송국에서 주는 상도 있고, 나라에서 주는 상도 있습니다. 상이지만 쓸데없는 상, 받아도 안 받아도 그만인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으려는 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하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은 10-11절에서 고백한 대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에서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요,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이기에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고 하면 한 마디로 구세주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구세주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가 왜 구세주가 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흔히 기름을 붓는다고 할 때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경우는 세 가지 경우입니다. 곧 직임을 맡기기 위해서 기름을 붓는데 첫째는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세웁니다. 두 번째로는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세웁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이 세 가지 역할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제사장인 메시야는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곧 우리의 죄를 용서받도록 하기 위한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더 나아가 지성소에 제물의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희생 제물과 그 피를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다고 인정하여 주셨다고 선언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 복을 빌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왕인 메시야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고 모든 대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선지자인 메시야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메시야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이요, 그 예수를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을 알아야 합니다. 메시야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해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그 십자가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부활의 생명을 위한 첫 열매가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우리도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또한 생명의 부활로 이끌어주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부활합니까?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곧 주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 고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현장이 새로운 삶의 현장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고난이 없이는 죽음도 없고, 죽음이 없이는 새 생명의 부활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곧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처럼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나도 주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각오만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건강이 먼저고, 내 가족이 먼저고, 내 부모가 먼저요, 내 자식이 먼저고, 내 기업이 먼저고, 내 하고픈 일이 먼저고 그렇지 않습니까? 주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하면서도 정말 그렇습니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주 앞에 있기를 주저하지 않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아직은 주님과 좀 떨어져 있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십시오. 지금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세상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시건만 과연 우리 가운데 깨어 있어 기도하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말로는 기도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막상 이른 잠을 깨어 주 앞에 나오기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형편과 사정이 다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 내가 죽을 정도로 어렵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저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소리소리 지르지 않겠습니까? 죽고자 한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죽을 마음이 없다면 목으로 물은 넘어오지, 숨은 쉬기가 어렵지, 힘은 점점 빠져나가지, 그런 상황에서 허우적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고, 사람 살리라고 외쳐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데 소리인들 제대로 나겠습니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안간 힘을 다하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다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만 하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겠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고 했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다윗도 전쟁터에 출전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왕궁에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 앞에 사무엘하 8장에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고 하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만큼 이제는 전쟁에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왕은 전쟁터에 안 나가도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넘어지지 않습니까? 사실 처음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한번 다윗이 상황에 매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사울 왕이 부하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고 할 때 그가 다급하게 도망을 칩니다. 그래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갑니다. 그가 아히멜렉에게 갈 때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울의 신하 도엑이라고 하는 에돔 사람 사울의 목자장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다윗의 마음에 더 큰 두려움과 불안함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그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까? 결국 그 때문에 아히멜렉과 눕 땅에 있는 제사장 80명이 나중에 사울에 의해 몰살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가드의 아기스 블레셋 진영으로 도망을 쳤지만 거기서도 죽을 뻔 하지 않습니까? 겨우 미친 척 하여 그곳에서 쫓겨나 목숨을 건졌지만 그날의 경험이 다윗의 마음을 꽉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았고 그 결과 하나님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는데 이제 살만 하니 그가 전쟁터에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 침상에서 일어날 정도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만 어떻게 됩니까?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을 보게 되고, 그 때문에 좋은 부하 하나를 죽이고, 남의 부인을 빼앗아 오는 몰염치한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편안할 때가 오히려 더 위험한 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무엇에 매여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터입니까? 체면입니까? 아니면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누가 믿는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자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더 늦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모이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달리기의 원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선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거리라면 아주 폭발적인 힘을 순식간에 다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지만 장거리라면 힘을 안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 명심할 것은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부름의 상이라는 말은 지금 주님이 부르셨는데 단순히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지금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는 천천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달려가야 할 정도로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 우리 몸에 눈이 앞에만 있을까요? 그것은 앞만 보고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뒤에도 눈이 있다면 앞도 살피랴, 뒤도 살피랴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앞에만 두 눈을 두어서 앞만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뒤를 살필 필요도 있습니다. 과거가 없이 오늘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우야 어떻든 오늘은 과거의 결과입니다. 과거의 결과 과거로부터 우리가 심어온 것을 오늘 거두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심든지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염려 근심 걱정 원망 시비를 심었다면 그런 것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즐거이 주님을 위해서 심었다면 또한 주님으로부터 기쁨과 평안을 더한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란 이미 지나간 날들입니다. 지난날에 잘못을 오늘에 와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지난 날 잘못 되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나를 바로 세워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더욱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 우리의 지난날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좋은 기억으로 가득하다면 지금도 역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에만 매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듯 또한 우리를 불러서 맡기신 일이 바로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요, 복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따라서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난 날 안 좋은 기억에 매여서 오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지난 날 좋은 추억만 생각하고 그때가 좋았는데 하면서 오늘을 허송세월한다면 그것 또한 바른 자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일을 향한 오늘입니다. 오늘도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아야지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오늘을 산다면 오늘의 의미도 아무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부름의 상을 위하여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부름의 상을 위하여 우리가 달려가야 할 푯대는 무엇입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여기 앞에 있는 것을 잡는다는 말은 “카테이레 세나이”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사냥개가 짐승을 물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낭떠러지에서 사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버틴다는 의미입니다. 나뭇가지를 놓으면 죽습니다. 죽자 살자 붙잡고 매달려야 합니다. 신앙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고 죽어도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우리가 달려갈 때 아무데나 방향 없이 달려가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방향 없는 달음질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푯대를 향하여’라는 말은 분명한 푯대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표삼고 달려가야 할 푯대는 무엇입니까?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부적격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합격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의 상을 위하여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중간에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한번 믿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말 자체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계속해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순히 믿으라고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부름에 따르는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유업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시는 것들을 다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전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15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지금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자기들은 온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전한 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으로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이 땅에서도, 또한 내세에서도 결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온전히 이룬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임을 먼저 밝혔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여기서 말씀하는 “이렇게”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기 바라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자신의 부족함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다는 확실한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이미 자기들이 온전함을 이루었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본받기보다는 오히려 육신의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15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와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제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전해야 할 말씀은 다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이와 같이 바울은 달리 생각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깨우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먼저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들어서 그들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도 자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집중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그저 세상사는 재미에만 몰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먼저 말씀으로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의 바람을 일으켜서라도,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고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깨우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릇된 길에서 건져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구하면서, 언제나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대로 행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는 사람은 푯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중간에 옆으로 빠지거나,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달려온 그대로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16절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남보다 앞서 달렸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남보다 뒤쳐졌다고 해서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면서 중단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푯대를 향하는 우리의 앞길에 이런저런 장애가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홍해가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여리고 성이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낙 자손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지금까지 달려온 방식 “그대로” 계속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대로”는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름의 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그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푯대로 삼고 달려가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본받는 것입니다. 그 언젠가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상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본받게 될 것입니다. 부름의 상을 받는 그 날까지, 의의 면류관을 쓰는 그날까지,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늘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적으로 성숙해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을 우리도 바라고, 예수님이 뜻하시는 것을 우리도 뜻하며,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것을 우리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다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주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에 항상 힘쓰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 빌 3:17-21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또 괜한 열등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나는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나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둘째로, '내 나이 몇 살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나이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칠 수 없는 것, 추구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바로 알면 기회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또 과욕과 허욕에 눈멀지도 않습니다. 셋째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나이는 몇 살입니까? 이것은 각자 스스로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출세 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후가 더 중요합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면서도 가장 알기 힘든 것이 있다면 죽음 이후 곧 내세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어 세상을 떠나 내세로 가야하기에 정말 내세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 너머 저 내세에서 이 현세로 온 사람이 없기에 내세를 알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이야기 가운데 읽은 한 토막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콜로세움 경기장에 굶주린 사자를 풀어 산사람을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로마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많은 기독교도들 틈에 끌려나왔습니다. 이제 막 사자 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옵니다. 어린 아이가 두려워 떨자 어머니가 아들의 몸을 꼭 안아주면서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얘야, 눈을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올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세를 살면서도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한 번은 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만남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만남이 될 것이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고,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주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의 삶과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의 삶이 다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만남을 준비하며 살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그 만남을 준비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더라도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준비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그 만남이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그 날이 막연하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날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때 도둑처럼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금이 그날을 준비할 때'라는 점입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도 준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한 번은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벧후 3: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장차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저 천국을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 것인가? 아니면 천국 백성의 바른 삶을 살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참 놀라운 요구입니다. 오늘 누가, 과연 몇이나 이런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믿음, 나의 경건한 삶, 나의 헌신된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본받으라.' 이 말씀은 우리 정서로서는 쉽게 말하기 힘든 말이지만, 사도바울이 자신의 믿음을 과신해서 한 말이 아니고 자꾸만 흔들리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뜨거운 열심과 확고한 신앙과 그리고 자신의 열정적인 헌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본받아 행하는 자들을 자세히 주시하며 관찰하라고 덧붙였습니다. 조만 간에 빌립보를 방문할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 또는 빌립보교회에서 바울을 이미 본받아 행하는 자들을 자세히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곧 이들을 본 받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을 닮으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40년간 근무한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은퇴식에서 마지막 인사말을 하면서 “내가 40년 동안 선생으로 가르쳤으나 단 한 번도 학생들에게 나를 닮으라고 말해보지 못한 채 교단을 떠납니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참 훌륭한 교육자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가르칠 때 “내 말을 들으시오. 이 진리를 배우시오. 이 교훈을 따르시오.”라고 말 할 수 있으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이야기할 부모는 많아도 나를 닮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새 신자를 영접하면서 이런 덕담을 건넸습니다. “자매님, 이 집사님만큼만 잘 믿으세요?” 전도한 집사님을 칭찬하는 말이지요? 특별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새 신자는 자기를 인도한 사람만큼 믿게 됩니다. 인도자가 주일 예배만 드리고 수요예배를 안 드리면 그도 따라합니다. 인도자가 여전히 술 담배를 하면 그도 술 담배를 하면서 예수를 믿습니다. “자매님, 이 집사님만큼만 잘 믿으세요?” 이 말은 이 집사님이 행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따라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매님, 이 집사님만큼만 잘 믿으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집사님이라면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한쪽은 바울이 편지를 써 보내는 '너희'라는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여러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의 세속주의 크리스천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 앞부분인 2: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원수들이란 이런 십자가의 정신을 저버리고 십자가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려기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이익만을 탐내며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기보다는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거기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안에서는 실제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향하여 칼을 들이대며 덤비거나 창을 들어 던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나 범하기 쉬운 일이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십자가의 원수의 삶은 무엇인가? 먼저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자들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마침이란 말은 그들의 운명이란 말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에게 정해진 운명은 멸망입니다. 멸망 뒤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여기서 배란 ‘코일리아’라는 말로서 ‘식욕, 정욕, 음욕, 물욕’이 다 여기서 나옵니다. 이것을 위주로 살면 곧, 이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배는 인간 욕망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욕망은 하나님 대신에 그들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어서 욕망을 따라 거침없이 살고 있고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결국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천하를 다 주어도 족하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온 천하를 다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뜻입니다. 귀한 것이 천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 소경의 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말세의 현상입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이 말씀의 뜻은 부끄러운 일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비도덕적이요, 반인륜적이라는 말입니다. 말세가 되면 파렴치한 일을 하면서 털끝만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가책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죄는 마땅히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짓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갈등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랑으로 알고 영광으로 삼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곧 이 세상일에 애착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천국 가는 발판으로만 이용할 뿐이지 거기에 애착하는 것은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또 땅의 일이란, 육신을 따르는 자로 육신의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맙소사'라는 미국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지 않고 벌거벗겨 놓으신 이유를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면 그들은 '주머니를 만들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고,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다시 '돈으로 채워 주십시오.'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숨을 거두려고 하는 유명한 소매치기를 위해 복음을 제시한 뒤 그의 영혼을 위해 그의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끝내고 보니 소매치기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는데 기막히게도 그의 손은 목사님의 금 시계줄이 꽉 쥐어져 있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도 없습니다. 욕망 따라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롬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아직 세상 것에 연연하고 그것이 탐나고, 그것을 취하려고 하면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신앙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처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참된 성도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찾는 자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면 먹고도 죽습니다. 가졌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람이 되면 가진 것이 없어도 부유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십자가 밑에 나왔으면서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로 살 것인가?’ 아니면 ‘천국 백성으로 살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물었답니다. '죽은 후의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내일의 일도 잘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참 정직한 답변입니다.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현세의 일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 너머 저 내세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도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내세를 설명하는 답을 내 놓았습니다. 수많은 종교, 철학, 그리고 무속이 제시하는 설명들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종이가 타 없어지는 것처럼 소멸되어 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조해 왔습니다. 둘째는, '영혼불멸설'입니다. 대표적으로 헬라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은 그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간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이승을 떠돌며 복수를 하기 때문에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굿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여러 종교, 여러 민족 무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윤회설’입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종교들 특히 힌두교는 '사람이 죽으면 현세의 행위에 따라 내세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이 지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때로 저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한다고 봅니다. 불교도 인도에서 시작된 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내세는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 5: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집으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현세는 사람이 지은 집에서 사는 것 같고, 내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에 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은 집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 낡고 여기저기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저기 금도 가고 비도 새고, 화재나 지진에 불타거나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현세의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완전합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내세의 삶, 저 천국의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쓴 '텍사스의 한 부자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어느 날 성직자를 집에 초대해서 잘 대접한 후 그 높은 장소에서 동쪽 문을 쫙 열면서, '저 기름펌프가 펑펑 올라오는 유전이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쪽을 여니, '소 떼가 있는 목장도 자기 것'이랍니다. 또 이쪽저쪽 창문을 여니, 골프장, 호텔이 있습니다. 다 자기 것이라며, '부러울 것이 없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는 40년 전 맨손으로 텍사스에 와서 일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성직자가 가까이 가서 어깨를 만지며 그 부자에게 말했답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부자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대와 소망은 위의 하나님이 계신 곳이지 텍사스의 부자처럼 동쪽도 서쪽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저 위의 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았는가?'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면서 그들이 또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 가운데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교인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지만 그들을 돌이킬 능력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특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시민이라는 의식을 강조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어떤 도시입니까? 빌립보는 마게도니아, 곧 오늘날의 그리스의 도시면서도 로마가 정복한 식민지였습니다. 군사적, 전략적 가치 때문에 로마는 거기에 식민도시를 세웠습니다. 그 시민들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군인으로 로마에 충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군복무의 대가로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고 로마시민의 모든 명예와 특권을 누리며 거기서 살도록 허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식민지에 사는 로마 시민권자들의 특징은 어디서 살든 완전한 로마인으로 행세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의 옷을 입고, 로마의 법을 따라, 로마의 언어를 사용하며, 로마의 도덕과 풍습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이면서도 스스로 로마인으로 여기고 로마인처럼 자랑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비유 삼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는 자각 속에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시민권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줄잡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노예였고, 나머지 가운데 절반은 자유인이었고 절반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민권은 앞서 말했듯이 로마군인으로서 21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주어졌거나, 세금을 많이 내어 로마제국에 충성한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날 때부터 로마시민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돈으로 로마시민권을 샀다고 했습니다.
로마시민권이 어떤 특권이 있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로마 당시 가장 혹독한 처형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이 베드로처럼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것은 로마시민은 어떤 죄를 져도 가장 혹독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죄인일지라도 대우를 받았습니다. 로마시민권만 해도 그처럼 대단한데, 바울은 지금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시민권자가 그 당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갑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아, 우리는 로마 시민권 정도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천국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교인이라 하면서도 '땅엣 것'만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이 하늘나라에 소속된 권속으로서의 놀라운 특권을 생각하면서 그 뿌듯한 자부심과 넘치는 기쁨을 항상 맛보면서 살아가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처럼 '천국시민'에 확실히 속한 성도들이 누리게 될 특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선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거기로부터"라고 직역되어 있는 말은 '거기로부터 오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실 때 약속하신 대로, 천국에서 '우리 거할 집'을 예비해 놓으신 후에 다시 우리를 찾아오실 재림의 날에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야말로, 장차 '천국시민'만 누리게 될 최고의 특권이요, 지금 이 세상에서 참된 성도들이 공유하는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다워지기 위한 최우선의 필수조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소망이 없다면 그 천국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그토록 좋고 행복한 곳이 되는 이유는 그 곳이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장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주택에 산다고 해도 거기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그런 집은 평수가 크면 클수록 더욱 쓸쓸하고 황량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나 왔어요."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와도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은 사실상 '집'이라기보다는 '여관'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아무리 작은 집이라 해도 자기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아내와 반갑게 아빠하며 쪼르르 달려 나오는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은 세상의 그 어떤 호화맨션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도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려주시지 않는다면 무슨 '유리 같은 바다, 열두 진주 문, 황금보석 길'이라는 것들이 뭐 그리 좋겠습니까? 그런 정도야 이 세상에서도 고급 아파트나 명품 백화점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천국이 진짜 좋은 이유는 그런 '화려한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7)라는 감격적인 소망,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라는 기막힐 행복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는 '온갖 좋은 것들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서 '구원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맞이해 주시고 또한 영원히 함께 살게 해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천국이 이렇게 마음 설레며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는 가족이 될 성도에게는 또 하나의 특권이 있습니다. 바로 21절에서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낮은 몸"이라고 한 것은 이 육신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저질성'과 '저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몸이란 실로 그 얼마나 '낮은 수준'의 것입니까? 걸핏하면 병에 걸리고, 시험에 아주 약하고, 죄를 짓는 데에는 그렇게 잘 끌려가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육신이라는 껍데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낮은 몸'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역시 끝이 없습니다. 감기만 좀 심하게 걸려도 평범한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몸'이며, 마귀가 집중적으로 공략해 오는 목표 역시 대단하지도 않은 미혹에 간단히 걸려 실족하게 되는 우리의 '취약한 육체'입니다. 그처럼 병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을 때마다, 그처럼 시험에 빠져서 스스로도 부끄럽고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을 때마다, 우리는 '이 육신이 좀 더 강건했으면, 이 내 몸이 완전무결한 고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면' 하고 안타까워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로 놀랍게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바로 예수님 재림의 날이 오면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날에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는 우리의 이 '낮은 저질 상태의 몸'을 당신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이 '썩을 몸'이 썩지 않고, 이 '죽을 몸'이 죽지 않는 '성화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게 될 성도들에게는 이 '낮은 몸', 이 '저질 수준의 육체'는 도저히 어울릴 수도 없고 마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천국의 영생을 보장해 주는 '시민권'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 내내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가슴이 설레는 행복감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언젠가, 아니 반드시 속히 이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만나서 다시는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영생하게 될 이 '하늘의 것'을 바라보면서 그날이 올 때까지 이 교회를 통하여 '주 안에 든든히 서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나는 누구입니까?’ 이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삶이 그림자조차 없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시민권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