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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회]
“얘야!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
혁련후가 혁련혜를 꾸짖었다.
하지만 혁련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어이없는 얼굴을 하던 홍염화는 곧 혁련혜를 보며 차갑게 말을 했다.
“내가 그분의 부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제일 가까이 지낸 사람임이 틀림없지요.”
두 여인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적엽진인과 혁련후는 그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여인들의 기 싸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그들은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허~어! 저 아이가 저리 생각이 없는 아이가 아닌데..... 그 신황이란 아이 때문에 이성을 찾지 못하는구나.’
혁련후는 이대로 놔두면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소 냉철한 자신의 딸이 남자 때문에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낮설기 만한 그였다.
“자...자! 이제 그만들 하거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네들 앞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랑다툼을 하는 것은 그리 보기가 좋지 않구나.”
그때 적엽진인이 나서 중재에 들어갔다. 적엽진인까지 나서자 그녀들은 더 이상 다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외면했다.
“흥! 질투라니. 그렇다면 저 여자도 신가가를 좋아한다는 말이 되잖아?‘
순간 홍염화는 투지가 물씬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의욕이 없던 그녀의 기분을 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혁련혜였다.
이제까지 신황에 대한 자신의 마을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누군가 신황을 노리는 것을 알게 되자 경쟁심이 발동한 것이다.
한편 초관염은 두 여인의 모습을 잠시 어이없이 바라보다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확실히 무이 백부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남자지...... 하지만 과연 그가 이들을 신경이나 쓸지는...........’
그가 아는 신황은 여인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오로지 무공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고, 유일하게 그가 애정을 보이는 인물이 있다면 조카 무이뿐이었다.
물론 자신이나 초풍영에게도 정을 주기는 하지만 무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신황은 그야말로 무이를 자신의 친딸과 다름없이 대하고 애정을 주었다. 그것은 진짜 친아버지의 사랑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신황이 홍염화나 혁련혜의 애정공세에 얼마나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야 염화가 잘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얼굴도 생소하고 성격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이는 혁련혜보다 싹싹하고 붙임석이 좋은 홍염화가 더 마음에 드는 초관염이었다.
초경, 무림맹의 외성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이제까지 선별적으로 무림인들을 받아들던 외성의 성문이 서서히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들어가지 못한 무인들은 아쉬운 눈빛을 하였으나 위세 높은 무림맹에서 그들 같은 삼류 무인들을 신경 쓸 리 만무했다. 그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분분히 발길을 돌렸다.
“이러다 무림맹에 들어가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놈의 비무 대회를 한번 보는 게 소원인데.”
“흐흐! 어디 자네만 그렇겠는가? 여기 온 사람들 모두가 그렇지.”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의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
그때 격렬한 기세로 대로를 달리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수십 기의 인마와 한 기의 마차, 그들은 무림맹의 외성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말을 몰랐다.
무림맹의 외성 근처에서 서성이던 무인들은 급히 대로의 양쪽으로 몸을 피하고는 혀를 찼다.
“쯧쯧! 또 어디 세가주의 행차이신가보군.”
“하여간 자기들만 안다니까? 이 큰 대로가 자기들만의 땅인가? 저렇게 배려를 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그들은 대로를 질주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평을 털어났다. 하지만 이미 말을 타고 저 멀리 사라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탕탕~!
그들은 무림맹의 외성 문을 두드렸다.
이미 무림맹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이 끝난 시간, 때문에 무림맹에서는 초경 이후 누구도 안으로 들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스르륵~!
조그만 창문이 열리며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늘은 출입시간이 지났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다음에..........”
“열어!”
차갑게 말을 하는남자, 순간 조그만 창문을 통해 입을 열던 무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무심한 표정의 남자, 하자만 그 무심한 눈을 바라보는 순간 온몸이 벼락에 맞은 듯 찌릿찌릿 저려왔다.
그만큼 남자의 눈빛은 심혼을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시......신대협!”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이 나왔다.
누가 그를 모를까? 이곳 무림맹에서 맹주인 백무광보다 더욱 유명한 무인, 그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신황이었다.
정문 경비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잠갔던 빗장을 풀고 정문을 열었다.
그러자 수많은 팽가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살벌한 기세에 정문 경비무사는 무어라 말을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신황이 앞장서고 그 뒤를 팽가의 무인들이 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한참 외성에서 술을 마시며 흥청거리던 무인들의 눈에 금방 들어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입을 열거나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기세가 너무나 사나웠기 때문이다.
사나운 기세로 말을 모는 그들의 모습은 금세 외성에 묵고 있는 무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팽가다.”
“팽가 사람들이 왜 이시간에..... 그리고 앞장을 선 사람은 신대협이 아닌가?”
“그러게! 내 눈에도 그리 보이는데.”
그들은 영문을 몰라 자신들끼리 이유를 물었지만 속 시원히 대답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신황이 지나던 객잔의 이층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어찌 된 일인가?”
신황이 고개를 들자 초관염이 모습을 보였다.
초관염은 적엽진인과 혁련후와 이야기를 나누다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신황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다.
신황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초풍영이 소리쳤다.
“숙부님, 숙부님이 오셔야 합니다. 어서요!”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초관염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적엽진인과 혁련후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두 분을 따로 대접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초관염이 일어나자 홍염화도 같이 일어났다. 그녀 역시 그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초관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나간 후 적엽진인과 혁련후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팽가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모양이군.”
“그러게! 팽가주는 무공뿐 아니라 강단이 있는 사람인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군.”
그들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황 등이 묵고 있던 별채에는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팽가의 무인들은 별채를 중심으로 삼엄한 경계를 펼쳐 외인들이 접근을 하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다.
별채 안에는 성수신의 초관염이 급히 팽만우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용케 내가 가르쳐준 방법을 기억해냈구나.”
그는 팽만우를 진맥하다 초풍영을 보며 미소를 보냈다.
“아이구! 말도 말아요.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놈이 엄살은...... 여하튼 수고했다.”
다행히 초풍영의 노력 덕분에 팽만우는 위기를 넘긴 상태였다.
비록 기식이 엄엄하기는 했지만 초관염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회복시킬 수 있는 상처였다.
초관염은 급박한 순간 자신이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려준 방법을 기억해내 응급처치를 취한 자신의 조카를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철이 없다, 근성이 없다 구박을 하지만 그래도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신황은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보다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그의 품에는 팽만우를 간호하다 지쳐 잠든 무이가 안겨있었다.신황은 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홍염화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 아이가 무이인가요?”
“그렇다.”
신황은 자신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숨을 토해내고 있는 무이의 뺨을 만지며 대답했다.
마치 친딸을 보듬고 있는 듯한 신황의 모습에 홍염화는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이제까지 신황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무이의 귀여운 얼굴은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안아 봐도 될까요?”
신황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무이를 넘겨 주었다.
그 과정에서 무이가 약간 몸을 뒤척였으나 이내 다시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홍염화의 품속에서 편안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에 홍염화의 입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신황은 그렇게 홍염화에게 무이를 넘겨준 후 마당의 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두 사람, 적엽진인과 혁련후였다. 그들 때문에 신황이 무이를 순수히 홍염화에게 넘겨준 것이다.
신황을 바라보는 적엽진인의 눈에는 이채가 어려 있었다.
‘천....살성(天殺星), 하늘이 내린 학살자의 기운을 타고 난 남자다!’
혁련후와는 달리, 그는 신황이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단정을 했다. 그만큼 신황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아이를 염화에게 넘겨주고 나니 천살성의 기운이 흘러나오다니.........’
적엽진인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단지 조그만 아이가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인데 이렇게 기질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혹여, 저 여아가 하늘이 천살성을 제어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아이가 아닐까?’
하늘의 법은 공평해 결코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을 어지럽힐 거대한 힘이 나타나면, 반드시 그를 제어할 다른 힘을 내보낸다. 그것이 하늘의 이치였다.
전설에 의하면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난 자는 세상을 혼란하게 할 희대의 살성이 되거나 영웅, 둘 중 하나로 극명하게 운명이 갈린다고 했다.
‘천살성을 제어할 수 있는 아이라니....... 하늘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하구나.’
적엽진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황을 향해 다가갔다.그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혁련후였다.
“또 보게 되는구만.”
“오랜만입니다.”
“그렇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괘 바쁘게 움직인 것 같군. 아, 그리고 이 사람을 소개해주지.... 자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야. 이 사람은 무당의 검선인 적엽진인이라고 하네.”
혁련후의 말에 신황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당의 검선 적엽진인, 그 역시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전 그는 초풍영과의 비무에서 도가에 어울리지 않는 패도적인 기운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도가의 검법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패도적인 검법을 창안했다는 그를 한번 직접 보고 싶었다.
“신황이라고 합니다.”
“적엽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구만.”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며 다시 한 번 서로를 냉정한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역시 천살성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다. 이토록 잘 정련된 살기라니.......’
‘무당의 검선, 무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랐다면 패웅이 됐을지도 모를 만큼 패도적인 성향을 풍기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그때 혁련후가 그들의 상념을 깼다.
“자... 자.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지. 마침 나도 자네에게 할 말도 있으니 말이야.”
그의 말에 신황뿐 아니라 적엽진인도 동의를 했다.
신황은 그들과 함께 별채의 한쪽에 세워져 있는 정자로 향했다.
그 뒤를 홍염화와 혁련혜가 눈싸움을 하며 따랐다. 또한 자리가 자리인 만큼 팽가의 장자인 팽주형이 같이 참석을 했다.
자리에서 팽주형은 그간 있었던 사정을 적엽진인과 혁련후에게 설명을 했다.
팽가의 가주인 팽만우가 적들의 암습을 막다 중상을 입은 사연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륙십강의 일인인 팽만우가 중상을 입을 정도로 적이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신들 역시 그런 일을 당한다면 당할 수도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허! 탈혼창이라니.... 그런 흉악한 물건을 또 언제 준비했다는 말인가?”
“그러게 말이네.”
두 사람은 천산파의 인물들이 탈혼창까지 준비했다는 말에 경악을 했다.
탈혼창은 그들 세대에서도 기억하는 이가 얼마 되지 않는 흉악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황이 제갈가의 육합천괴멸살진을 뚫고 천산파의 문주인 적무영을 죽였다는 말에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미안하지만, 자네 나이가 어찌 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서른하나입니다.”
“서른하나라.....”
신황의 대답에 적엽진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젊어도 너무 젊지 않은가? 나나 대륙십강에 속한 다른 대부분의 무인들이 마흔 중반에야 지금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불과 서른의 나이에 지금과 같은 경지라니.....
하늘은 어쩌자고 중원에 이런 인물을 보낸 것인가?’
만약 이대로 발전을 해나간다면 그들이 이십여 년 전에 손을 들었던 투광(鬪狂)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적엽진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적엽진인은 침중한 얼굴로 신황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무모하게 일을 벌인 건가? 아무리 자네가 강하다 할지라도 그리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분명 무모한 것 이라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뜻밖의 그의 말에 신황이 적엽진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도가의 공부를 깊게 이해해 유현한 눈빛을 하고 있는 적엽진인, 그와는 반대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신황의 무심한 눈빛, 그들의 대치는 잠시 계속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신황의 입이 열렸다
"무이가 위험하니까.....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무이라.... 저 아이를 말하는 것인가?”
신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적엽진인은 홍염화가 안고 있는 이아가 무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왜 저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인가? 그간 자네의 행적을 들으면 모두가 저 아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더구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에게 그리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
적엽진인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팽주형의 얼굴에 흠짓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무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아는 그는 혹시나 신황이 또다시 두 눈을 부라리며 난동을 피울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달리 신황의 표정에는 별달리 변화가 없었다.
그는 적엽진인을 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진인께서는 피가 섞여야만 도움을 주십니까? 저 아이는 나의 조카딸입니다. 나의 조카이기도 하지만 딸이기도 합니다.
진인은 아버지가 딸을 보호하는 것에 계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만, 자네는 피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있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네의 두 손에 묻히는 피의 양만큼 많은 원혼이 자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을.........”
그의 말에 신황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진인의 눈에는 원혼들이 보이는 모양이군요?”
“아무리 자네가 천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어도, 정도 이상의 살겁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네. 이대로라면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 떨어져 영겁을 고통 받아야 한다네.
비록 자네가 저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네.”
적엽진인의 말에 신황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모습에 팽주형은 왠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팽주형의 불안함은 현실로 나타났다.
“상관없습니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자네.........”
“난 무이의 아버지입니다. 아비가 되어 딸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설령 그 때문에 내가 영겁을 지옥에서 고통을 받더라도 말입니다.”
쿠~웅!
순간 적엽진인은 자신의 심장이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을 느꼈다.
‘아비라니.........’
평생을 도가의 성지의 무당에서 지내 결코 알 수 없는 감정,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감정이 신황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는 지옥 불에라도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일지라도.신황은 싸늘히 말했다.
“난 죽음을 관장하는 명왕(冥王), 무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죽음을 세상에 뿌릴 수도 있습니다.”
적엽진인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저 아이를 위해 살행(殺行)을 하는 것이 과연 세상에 도움이 된다 생각하는건가?”
“그럼, 힘없는 아이가 세파에 휩쓸려 그렇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는가? 공덕을 쌓는 일은 힘이 드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힘이 드는 일은 죄를 짓지 않는 일이네.
자네가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저지르는 죄의 모든 업은, 결국 저 아이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네.”
“괴변 늘어놓지 마십시오.”
적엽진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괴변(怪辯)이라니? 누가 있어 천하의 적엽진인이 하는 말에 괴변이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러나 신황의 얼굴은 여전했다.
“저의 죄업은 모두 제가 짊어지고 갑니다. 거기에 무이를 왜 끼워 넣는 겁니까? 말장난은 사양하겠습니다.”
“뭣이!”
신황의 도전적인 말에 적엽진인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신황의 태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검선 적엽진인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상황, 그의 태도에 조마조마해진 것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었다.
“신대협!”
팽주형이 신황을 불렀으나 신황은 대답 없이 적엽진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혁련후가 순간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늙은 도사, 자네가 한 방 먹었군. 하여간 자네들 도가의 사람은 너무나 말을 비꼬는 경향이 있어. 그렇게 말장난을 하다 언제 한번 된통 당할 줄 알았어. 크하하핫!”
“아....빠!”
혁련혜가 민망한 듯 말렸지만 혁련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오래된 친우가 당황하는 모습이 정말 즐거운 듯 그렇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혁련후의 태도에 적엽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혁련후는 오히려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신황은 잠시 그들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군요.”
그는 홍염화에게 무이를 받아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잠시 눈치를 보던 팽주형과 홍염화가 따랐다.
혁련후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적엽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금 전의 노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적엽진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혁련후는 적엽진인을 보며 말했다.
“대단하구먼, 자네의 말장난에 휘둘리지 않고 저리 시원하게 반박을 하다니.”
“말장난이 표가 나던가?”
“그건 아니지, 누가 있어 자네의 말이 그렇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만큼 저 신황이란 아이가 심지가 굳은 거겠지.
자신의 업을 자신이 짊어지고 간다! 그 얼마나 멋진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강골이야. 아쉽게도 요즘에는 저런 아이들이 드물어.”
“아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자네 말대로 보기 드문 강골이야. 아마 어떤 말로 위협을 해도 눈썹하나 깜빡이지 않을거야. 그나저나 다행이군!
신황이 무이란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누가 있어 그를 제어하겠는가? 검선(劍仙)이란, 명성을 얻고 있는 내 말을 한 귓구멍으로 흘려보내는 저 인간을.”
“그러게 말이야.... 저 둘이 만난 것도 하늘의 안배겠지.”
그들의 말을 들으며 혁련혜는 그제야 적엽진인이 일부러 신황을 시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살성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야말로 난세(亂世). 이럴 때 천살성을 제어할 수 있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무이란 아이,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어야겠구나.’
조금 전의 경우에서처럼 신황 같은 사람은 윽박지르는 것이나 명성으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납득을 하지 않으면 결코 남에게 설득당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그 점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허허~, 정말 세상일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적엽진인은 그리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봤다.
“도대체 하늘의 법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네. 대천마성에 이어 천살성을 세상에 내보내다니.”
“이제 천살성은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무이란 그 아이가 있는 이상 알아서 살심을 누르겠지....
하지만 대천마성은..... 만약 대천마성이 정말 다시 빛을 발하는 것이라면 정말 천하는 예전보다 더한 혼란에 빠져들 거야.”
“걱정이네! 자네 역시 천기를 봤겠지만, 하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적엽진인과 혁련후는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하늘의 움직임, 하늘의 움직임이 매우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콰~앙!
제갈문은 자신의 책상을 소리 나게 주먹으로 쳤다. 그의 앞에는 비영이 송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 가문의 아이들과 비각의 부하들이 죽었다고? 이...놈, 이놈이 정말....”
제갈문은 몸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사정없이 떨렸다.
좀전에 들은 급보, 신황과 팽가의 인물이 무사히 무림맹으로 들어왔다는 보고와 함게 연락이 끊긴 제갈가의 식구들이 제갈세가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일부만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제갈세가의 식구들을 이끌고 오기로 한 제갈영휘가 패인이 되었다는 소식, 그것은 제갈문의 냉정한 이성을 모조리 날려버릴 만큼 거대한 충격이었다.
콰~앙!
우다탕!
“으아아~! 신황, 정말 네놈이 끝장을 보려고 하는구나.”
제갈문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사방으로 던지며 괴성을 내질렀다.
“딸아이, 그리고 내 가문의 동생까지.... 네놈은 도대체 어디까지 날 괴롭힐 것이냐? 이놈, 신황!”
제갈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지금 이성을 잃기 일보직전이었다. 비영은 그런 제갈문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정할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런 비영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동안 혼자 광분을 하던 제갈문은 겨우 이성을 찾으며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이대로 둘 수 없다. 그냥 이대로 둔다면 우리의 대사에도 분명히 결정적인 방해가 될 것이다.”
제갈문은 두 눈에 핏빛을 세우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때 비영이 끼어들었다.
“일단 이성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지금 그의 처소에는 이선(二仙)이 같이 있습니다.”
“이선이 무슨 일로?”
“아무래도 새로 같은 반열에 올라선 신황에 대한 흥미로 보입니다. 자신들과 과연 같은 반열에 올라설 자격이 있는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어차피 이선이든 신황이든, 종국에는 모두 제거해야 할 존재다. 그들의 모든 것을 파악해라. 일거수일투족부터..... 그들이 만나는 사람 하나까지 모두 파악해서 보고해라.”
“존명!”
비영이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제갈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가능하다면 백팔철기군(百八鐵?軍)이라도 동원할 것이다.”
홀로 남은 제갈문의 몸에 붉은 별빛이 비추었다.
신황은 무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의 적엽진인과의 대화는 이미 그의 뇌리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제아무리 적엽진인이 무어라 말을 하고, 하늘의 도를 운운하더라도 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크릉~!
무이의 품에 안겨 있던 설아가 꿈틀거렸다. 오랜만에 상봉해 이제까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한 몸처럼 찰싹 붙어있는 그들의 모습은 신황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무이나 설아나 모두 조금씩 키가 자라 있었다. 서로 헤어져 있는 동안 조금 더 자란 모습으로 상봉한 것이다.
신황은 둘이 조금 더 자게 내버려두고 홀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초관염이 밖으로 나오다 그와 마주쳤다.
“어찌 되었습니까?”
“뭐, 풍영이가 워낙 초반에 응급처치를 잘 취해서 큰 문제는 없다네. 더구나 팽가주의 내공이 워낙 심후하니 별문제는 없을 걸세.”
“잘되었군요.”
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이대로 팽만우가 죽었다면 무이는 또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신황은 자신이 천산파의 문주인 적무영을 죽인 것보다, 제갈세가의 절진을 철저히 부순 것보다 무이가 또 다시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초관염은 신황의 얼굴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상황으로 봐서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냥 팽가 식구들을 이곳에 머물게 해도 되겠는가?”
“하지만 이 상태로 다시 팽가로 돌아가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곳에 있는 이상 제가 지킬 겁니다.”
신황이 이렇게 된 이상 무이를 자신의 옆에 두는 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다. 신황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황은 밖으로 나왔다.
휘~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정신을 날카롭게 일깨웠다.
“제갈문, 백무광.........”
이제 적인 게 확실해졌다. 그의 눈에 스산한 한기가 떠올랐다
그때 등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부님~!”
순간 신황의 눈에 떠올랐던 한기가 봄바람에 녹는 눈처럼 사라지고 훈훈한 미소가 입에 떠올랐다.
“더 자지 않고 벌써 일어났느냐?”
단지 입가에 미소가 어린 것뿐인데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그것은 도저히 조금전의 그하고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그가 몸을 돌리자 무이가 졸린 눈을 하고 서있었다. 또한 무이의 품에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설아가 안겨 있었다. 무이는 신황을 향해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까 많이 자서 그런지 잠이 안 와요.”
신황은 무이를 안아 주었다. 그러자 무이가 팔을 둘러 신황의 목을 감았다.
“많이 무거워졌구나. 키도 조금 큰 것 같고.”
신황은 무이를 안고 일어나며 그리 말했다.
“정말 큰 것 같아요?”
“그래! 많이 컸구나.”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랬단다.”
무이는 신황의 목을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팽가에서는 잘 지냈었느냐?”
“네!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정말 잘 대해 주세요.”
무이의 말에 신황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차가운 얼굴에 입가만 올라가는 그만의 독특한 웃음, 무이는 저런 신황의 웃음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걱정할 것 없다. 워낙 건강한 분이니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의 말에 무이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신황은 무이의 떨림을 느끼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걱정할 것 없다. 앞으로도 그렇고........”
무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신황은 느낄 수 있었다. 어깨를 적시는 무이의 뜨거운 눈물을. 무이는 신황의 품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신황은 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시리도록 차가운 붉은 별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켜주마’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그만의 목소리가 입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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