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 -
(야고보서 3:1)
주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들을 듣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는데, 시험을 만났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는 것은 더디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2장에서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업신여기기 말라’,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믿는 자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말하는 믿음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또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산다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말씀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엡 2:8, 롬 3:28).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의롭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는다면,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마 5:16). 그래서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행함과 기생 라합의 행함을 실례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행동이 그의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또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자기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을 숨겨두었고, 그들로 평안하게 돌아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 역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① 믿음과 행위(삶)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 믿음에는 반드시 믿음의 열매인 행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③ 믿음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④ 행위는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확증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르고 건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바르고 건전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행위 중 하나가 언어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한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과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말은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이미 1장에서 말(언어)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성내는 것을 더디 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 야고보서 1장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혀를 재갈 물린다’는 것은 마부(馬夫)가 말(馬)의 입에 재갈이라는 도구를 물려 말의 행동을 제어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말을 가게 하는 것처럼 입의 말도 가려 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3장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이 땅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1-12절). ‘말(언어)을 조심하라는 것’이 이 단락의 주제입니다. 본문은 말을 많이 하는 직업적인 선생이 되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선생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 1절에는 ‘선생’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선생된 우리’, ‘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라는 단어는 ‘좋은’, ‘선한’, ‘아름다운’, ‘고상한’을 의미하는 ‘칼로스’(καλος)라는 단어와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디다스코’(διδάσκω)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를 의미합니다. ‘가정교사’, ‘초중고 교사’, ‘대학 교수’, ‘철학자’, 공연을 위한 ‘합창단 지휘자’ 등 여러 부분에서 가르치는 자를 ‘디다스칼로스’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58회 사용되었는데, 그중 48회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 41회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29회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되었고, 나머지 7회는 세례요한(눅 3:12), 니고데모(요 3:10), 유대 율법 교사(눅 2:46) 등을 부를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행 13:1, 고전 12:28, 엡 4:11, 약 3:1, 딤전 2:7, 딤후 1:11).
‘선생’은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선생’이라는 직(職)은 유다 공동체에서의 ‘랍비’와 비슷한 권위를 가졌을 것입니다(마 23:8, 요 1:38). 도덕적으로 선하고 탁월한 선생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1. 각 시대마다 훌륭한 선생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교회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친 훌륭한 교사였습니다(출 24:12, 레 10:11, 신 31:22, 6:4-9).
사사 시대에 사무엘도 훌륭한 교사였습니다(삼상 9:18).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도 훌륭한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잠 5:13).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왕하 2:5, 4:1).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는 포로 귀환기의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스 7:11).
이사야 시대에도 교사들이 있었습니다(사 43:27).
예수님도 어릴 적에 훌륭한 선생에게서 듣고 배웠습니다(눅 2:46).
예수님은 백성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눅 5:17).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눅 3:12, 19:39, 요 8:4, 12:21).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를 제자로 불렀고(마 10:1-4, 눅 9:1), 그들과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마 4:23, 7:28, 21:23, 막 1:21, 4:1, 눅 3:23, 5:3, 21:37, 요 7:28). 선생으로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도 교사들이 있었습니다(행 13:1).
시대마다 좋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운 자들입니다.
2. 직업적인 선생이 있습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기술과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다양하고 유익한 것들을 가르쳐 주는 훌륭한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성장기에 유익한 것을 가르쳐 준 교사들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고, 존경을 받습니다.
3. 영적인 선생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말하는 ‘선생’은 세상 학교에서 학문을 가르쳐주는 전문 직업인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고 바른길,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영적(靈的) 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교회에는 사울과 바나바와 같은 여러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 교사들로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세우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로마서 12장 7절에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들을 사람에게 주셔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성도들을 섬기게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가르치는 교사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교회 안에 세운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신실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가르치도록 세운 영적 교사입니다(딤후 2:2). 교사를 ‘천직’(天職)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4. 선생의 사명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선생들은 주로 개종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가르침에 앞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입니다(은준관, 『기독교교육현장론』, 25).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가 선생입니다.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참으로 존귀한 직분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언제나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선생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것은 영적 지혜와 지식입니다. 주님께 배운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마 28:19-20).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칠 것은 무엇보다 영적 진리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인생의 전 영역을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교사는 제자인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가르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5. 선생은 조심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9절을 보면,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훌륭한 교사였습니다(행 13:1).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워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자였습니다(행 5:34, 22:3). 그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그 지식으로 교회를 핍박하였으나(행 22:4-8, 딤전 1:13),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그는 사도로서, 교사로서 유감없이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행 28:30-31). 사도행전 20장 19-20절을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선교를 한다는 명분으로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폐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하였고, 또 조심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조심할 것이 물질 문제뿐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이성 문제와 언어 문제도 포함됩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선생’은 영적인 것을 가르치는 교회의 교사입니다. 교사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 직분을 주셨다고 하는 확고한 소명과 사명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보화를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또 죄인인 인간을 가르치기 위하여 교사를 세우셨습니다.(엡 4:11, 고전 12:28).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진리는 복음의 내용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입니다.
기독교 교사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교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대변자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증인”(김희자, 『교사론』, 16)입니다.
교사는 항상 진리의 지식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주의 영을 소유하려는 진지하고도 끈질긴 열정,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을 보이는 건전한 신앙인격, 말씀의 비밀을 가진 선생이어야 합니다.
Ⅱ.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 준비되지 않은 큰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번역된 ‘메 폴로이 디다스칼로이 기네스데’(Μὴ πολλοὶ διδάσκαλοι γίνεσθε)에서 ‘폴로이’라는 말은 ‘많이’라는 부사가 아니라 ‘많은’, ‘큰’ 등을 의미하는 형용사입니다. 이 문장을 헬라어 문법을 따라 번역하면 ‘너희는 큰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으로 금지 명령입니다. ‘큰 선생’이라는 말은 ‘큰 지도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생이 되면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접받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왕하 4:8-10 참조).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게 되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존경받고 대접받는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의 가르침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자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나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다는 것, 말을 잘하고, 가르치기를 잘하고 박식하다는 것 때문에 모두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인 것은 물론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선생이 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강용원은 “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받지 않고 전하려는 것이며, 듣지 않고 말하려는 것이며, 깨닫지 않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배우지 않고 가르치려는 것이다.”(“누가 교육하는가?”, 『기독교교육학 개론』, 284)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준비가 되지 않은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 특히 영적 선생인 목사의 직분은 한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는 역할도 하지만, 한 영혼을 망하게 이끄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선생, 큰 선생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특히 영적인 준비가 되지 않은 선생(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제자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진지한 갈망과 더불어 가르치는 일에 대한 적성과 또한 공적인 교육자의 직분에 필요한 다른 자질들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합니다.”(C. H. Spurgeon,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43)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한 것은 준비가 된 선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2. 준비되지 않은 큰 선생에게는 더 엄격한 책임이 따를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심판’으로 번역된 ‘크리마’(κρίμα)라는 단어는 재판하는 행위와 그 결과인 정죄와 저주를 의미합니다(눅 20:47, 23:40, 롬 2:2, 3:8, 5:16).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한 말과 그가 행한 행동 때문입니다. 몰라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말과 행동으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놓고 자기는 거짓을 말한다면 그 거짓에 대한 심판이 따를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쳐 놓고 자기는 음란한 일에 빠진다면 이 또한 무서운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선생이 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선생은 자신이 가르친 것에 대한 책임, 자신이 가르친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선생들은 그들이 사역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큰 책임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분입니다(눅 12:48).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약 3:2). 그러나 실수도 반복되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남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 때문에 실족하는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실족케 하는 선생에게는 화(woe)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8: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많은 선생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수고에 의해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사회는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을 구원하거나 세우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세운 자가 영적인 선생입니다. 영적인 선생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과 관계하는 자입니다. 영적인 선생은 영혼의 구원과 성장, 성숙을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선생이 된다면 그것은 본인에게도, 교회에도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 실수할 수도 있지만, 그 실수라는 것이 반복되고 고의적일 때는 실수가 아닌 죄악입니다. 영적 선생인 목사는 죄인인 인간을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연결해 주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는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 됩니다(딤후 2:1-6).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준비된 지도자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