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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허씨 선조들은 가락후손으로서 종인이라는 친분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
결과는 방산 허훈(판서공파 회현종중)이 암계 허석여(호은공파 고령구곡 )에게 보낸 간찰의
첫마디에서 알수 있다.
"나의 종인 인(潾) 석여(碩汝)는 치재(癡齋)의 후손이다.
나와는 젊은 때부터 정이 서로 두터워서 강촌의 백리길을 오고 가곤 하여 그대로 보내는 해가
없었더니......"
나의 종인... 방산 허훈은 판서공파이고 암계 허석여는 호은공파이다,
이 시절 방산과 암계는 같은 김해허씨 종인으로써 생각하고 친밀하게 교류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큰 스승들의 동계 정온과 여헌 장현광의 교우록과 문집, 간찰을 보면
같은 뜻을 가진 선비들의 교우록에 같은 이름이 종종 올라온다.
같은 시간을 살아온
치재 허명신(김해인) 미수 허목(양천인), 창주 허돈(김해인)은 서로 같은 종인으로써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판서공파 금주 허채는 고령의 도암서원 복원기를 직접 작성하였고
미수 허목은 어린 시절 치재 허명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70세의 노인이 되어서도 잊지 않고
감사의 답장을 보내왔다.
성재 허전/ 미수 허목(양천인)은
김해허씨인 치재 허명신(호은공파), 죽암 허경윤(판서공파), 방산허훈(판서공파)
경남 고성의 도연서원(호은공파)에 문집서문과 기록을 남겼다.
근본은 영남학파라는 큰 줄기를 타고 인맥을 형성해 왔지만
조선시대의 허씨들 중에서 서민층을 어떠했을지 모르나
적어도 지식층들은 상호간에 가락후손이라는 이름으로 친분과 공감대를 이어왔다고 결론 내렸다.
아~ 맞다.
김해에 있는 시조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을 허씨문중(죽암 허경윤 김해, 허엽 양천인등)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내고 보전한 것을 생각한다면 허씨는 가락후손으로 종인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양허씨와 태인허씨의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데 아마 그 수가 적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근본은 가락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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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재문집 서문
미수 허목 / 성재 허전 (양천인)
방산 허훈 (김해인)
홍와 이두훈 (성산인)
병조참의 김상직 (일선인)
학양 박경가 (고령인)
운계 정운석 (동래인)
고령현감 이만수 (진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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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桐溪) 정온(鄭蘊. 교유록)
허명신(許命申) 1569년(선조 2)~1637년(인조 15) (고령 구곡)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군익(君益), 호는 치재(癡齋), 居 高靈.
허돈(許燉) 1586년(선조 19)∼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합천 가회)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덕휘(德輝), 호는 창주(滄洲).
허목(許穆)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여헌 장현광 (교우록 허씨)
001) 허목(許穆) 1595(선조 28)∼1682(숙종 8). 경기 연천 양천허씨
239) 허국필(許國弼) 1579년(선조12) 선산 김해허씨
082) 허돈(許燉) 1586(선조 19)∼1632(인조 10). 삼가 오도 김해허씨
088) 허후(許厚)1588(선조 21)∼1661(현종 2). 경기 연천 양천허씨
300) 허의(許顗) 선산 김해허씨
301) 허국보(許國輔) 선산 감해허씨
156) 허침(許琛)1607년(선조40) 함양 공배 김해허씨
297) 허찬(許瓚) 함양 김해허씨
308) 허상원(許尙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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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현풍 출신인 치재 허명신 선조의 스승인 임진왜란시 의병도 대장인 송암 김면장군을 보는 중
치재 허명신 선조의 송암사우장문 松菴祠宇狀文 / 허명신-260
더불어서
금주 허채 선생(임은 허씨/ 판서공파)의 도암서원복원통문 道巖書院復元通文 / 허채(許棌)-305
도암서원복원고유문 道巖書院復元告由文 / 허채(許棌)-306
도암서원복원기 道巖書院復元記 / 허채(許棌)-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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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은 아버지가 고령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치재 허명신에게 배우게
되었다. 어릴적 스승과 제자 관계였는데, 70대의 미수 허목이 어릴적 스승인 치재공을 추모하며
그리워하는 글을 보니 요즘 사제관계에 비추어 감동적이다.
그 후손들도 세대를 거쳐 교류하여 성재 허전선생의 문집서문에 이르게 되었다.
미수 허목 (1595년 ~ 1682년)
1664년 현종5년
목(穆)은 치재선생을 追慕(추모)하여 고령 구곡에 절하고 감사하며 답장을 올립니다.
치재선생 곁에서 선생님을 모시던 맏아들 허생원(佖)에게 裵秀才(배수재)가 와서 구곡소식을 모두
다 들었습니다. 또 손수 쓰신 편지를 받아 세월이 지난 후 늦게 보았습니다.
목은 일의 자취가 생각납니다. 이 몸은 그때 나이 어린 아이였는데 지금은 이미 70이 되었습니다.
내 할 도리를 다 못하여 슬프고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때 서로 만날지 이를 계산해 보아도 끝없어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에 송구한 마음 아니 날는지 오직 죽는 날에나 잊을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穆)은 힘써 배웠으며 다 말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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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 허훈 문집에서
증 허석여 서(贈 許碩汝 序)
나의 종인 인(潾) 석여(碩汝)는 치재(癡齋)의 후손이다.
나와는 젊은 때부터 정이 서로 두터워서 강촌의 백리길을 오고 가곤 하여 그대로 보내는 해가
없었더니 내가 집을 동군천으로 옮기게 되자 길은 멀고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져서 낙락히 멀리 떨어
져 사는 것이 마치 삼성과 삼성처럼 원격하게 되었다. 을사년 여름에 내객이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서 나가보니 바로 군이었다.
얼굴은 이미 시들었으며 구레나룻은 다 흰빛이 성성하였다. 서로 대하여 깜짝 놀라 기뻐하면서 함께
금석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어 탄식하고 슬퍼하였다.
군이 말하기를 금년 정월 13일은 나의 회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시를 지어 주는 이가 많았습니다.
이에 방산자의 서가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
내가 말하기를 군은 총혜한 천성이 있어서 는을 거친 글과 귀를 지나간 말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으며 일체의 시세를 사무를 환하게 깨닫고 있어서 유용한 재주 아님이 없었건만 늦게 호방에
등과 하였으나 용양위라는 명목상의 직함이 그 굶주림을 구제하지 못하여서
그 궁핍함이 심하다. 그렇건만 시골집에서 편안히 쉬면서 담박하게 영구함이 없다.
낙천지명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내가 매우 존경하며 간만히 그가 다시 장수를 더하되 오관이 여상하고 걸음걸이가 더욱 건장하여
나를 다시 진안의 강가로 찾아 주기를 바라노라.
허목(許穆, 1595년[1] 12월 11일 ~ 1682년 4월 27일)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
문부(文父)·화보(和甫)[2],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
(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
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
이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정승 반열에 올라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으로, 남인 중진이며, 청남의 영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올랐으며 효종 사후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효종은 장남의 예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인선왕후의 1년복이 채택되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된 뒤 1675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의정부좌참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특별 승진하여 그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 영경연사, 사복시제조를 지냈다.
예송논쟁 기간 중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였고, 송시열에 대한 온건 처벌론을 주장하는 탁남의 허적, 권대운 등과 갈등하였다. 그뒤 북인 윤휴를 포섭하여 청남을 이끌었다. 지패법, 체찰사부 설치 등을 반대하였고, 1678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허견의 옥사의 파편을 맞고 파면된다. 남인의 강경파 인사이자 윤선도, 윤증과 함께 남인의 저격수로 유명하였으며, 동시대의 정치가 우암 송시열, 송준길 등의 주요 정적(政敵)이자, 예송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이었다.
이황과 조식의 제자인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정구 사후 그의 수제자인 모계 문위(文緯)와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와 외조부인 임제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3] 서예의 대가였으며 전서체에 능했다. 사후 1689년 복관되고 왕명으로 저서가 간행되었으며, 169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허목 자신은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성리학자였으나 서경덕과 조식 등 북인계 학통도 일부 계승하였다. 그는 후일 유형원, 이서우, 이담명, 이익 등에게로 학맥을 연결시킨, 성리학과 실학의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목내선 등의 남인계 성리학자들도 그의 문하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당대의 대가, 부호들이 그에게 묘비명과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그림에도 능하여 학문 교육 외에 그림 해설, 강의도 하여 화가들을 길러냈다. 인조 때의 남인 정승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정승이 된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 (헌종 2) - 1907 (융희 1))
1836년(헌종 2)∼1907년.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林隱, 지금의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 아버지는 증참찬 조(祚)이다.
29세에 허전(許傳)의 집지문인(執持門人)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고 허훈은 허전의 학통을 이었다.
의병(義兵) 군수(軍帥)인 허위(許蔿)가 아우인데, 허위의 손자들은 모스크바에 진(眞), 타시켄트에 선산(善山) 등이 거주하고 있다. 허훈의 성리설에 관한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심설 心說〉과 〈사칠관견 四七管見〉이며, 실학과 유관한 것은 〈염설 鹽說〉·〈포설 砲說〉·〈차설 車說〉·〈패수설 浿水說〉·〈해조설 海潮說〉 등이 있다.
그는 〈사칠관견〉과 〈심설〉에서 이이(李珥)의 성리설이 이황(李滉)의 견해와 다른 문제들을 비판하였고, 이황의 학문적 정통성을 재천명, 계승하였다.
장현광(張顯光, 1554년 ~ 1637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 중에서 부임(赴任)한 것은 보은현감(報恩縣監)과 의성현령(義城縣令)의 외직과 내직(內職)으로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형조참판(刑曹參判), 의정부우참찬 등이다.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하였다.
광해군 때 합천군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 조정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인조조에도 사헌부지평·집의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괄의 난 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형조참판, 대사헌 등에 제수되어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우참찬에 임명되고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군과 교전하는 한편 군량과 군자물품의 조달과 지원을 주도했으나, 패전 후 실망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유교의 입장에서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이르는 태극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 이황의 문인인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였다. 이황의 학맥이자 영남학파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던 처숙인정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사숙하고, 그의 문인으로는 허목, 유진(柳袗) 정극후(鄭克後) 전식(全湜) 김응조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허목을 통해 근기남인성리학파와 남인실학파로도 학통이 이어졌다. 노수성, 장순의 문인이다. 경상북도 인동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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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정온(1569~1641 桐溪 鄭蘊)
서울에서 보았을 때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측이 경상좌도 우측이 경상우도로 불립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표적 영남유림을 지칭할 때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이 있습니다.
경상우도에서 손꼽는 집안 중의 하나가 동계 정온(1569~1641 桐溪 鄭蘊) 집안입니다.
경상좌도가 성리학의 이론적, 명분론적인 퇴계선생의 학풍을 계승했다면 우도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해온 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았는데 초계 정씨들은 이런 학풍의 대표적 집안입니다. 위치는 거창군 위천면 강촌리에 있습니다.
동계고택은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금원산을 조산으로 예리한 필력을 자랑하는 기백산을 안산으로 하여, 강함으로 시작하여 줄기를 형성하다가 ,끝에서는 부드럽고 봉긋한 동산에 둥지를 틀어 양중음의 명당에 위치한다고 합니다.
동계집안이 조선시대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정온 선생이 광해군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직언 상소문(갑인 봉사)때문이라고 하네요.
동계가 46세 되던 해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강화부사를 시켜 죽이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합니다. 이에 동계는 상소문을 올려 임금이 지금 폐륜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을 합니다. 이때 광해군은 친형(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외조부인 김제남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며 동생 마져 죽이고 선왕의 공신들마져 귀에 거슬리는 상소를 했다하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상태라서 동계의 상소는 그야말로 죽음까지 각오하고 직언을 한 셈입니다.
동계의 상소문은 광해군이 막 수랏상을 받았을 때 입직 승지가 읽어 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짓을 하시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왕들을 만나시겠오!”하는
대목에 이르자 노기가 충천한 광해군이 수라상을 발길로 걷어차니 옆에 있던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질 정도로 반찬 그릇과 장종지가 튀었다고 전합니다.
뿐만아니라 이 처름 흉측한 상소를 전달한 승정원(비서실)승지들도 책임이 있다하여 그 자리에서 파직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까지 동계의 상소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감옥에 구금된 동계에게는 역졸들도 선생의 인품에 감화되고 또 여론에 압도되어 지성으로 보살폈다고 합니다.
동계를 옹호하는 전국 유림들의 여론 때문에 동계는 죽지 않고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형(기거하는 집의 담장을 탱자나무 같은 가시로 에워싸서 그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을 10년을 언도 받습니다.
훗날 같은 장소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제주 대정현 마을 사람들에게 동계선생의 유배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전해 듣고 동계의 선비다운 처신에 감동하여 나중 귀양살이가 끝나고 거창의 동계고택에 방문하여 당시 동계의 후손인 정기필에게 동계선생에 대한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이라는 현판을 써 주고 갔다고 전합니다.
동계가 충절의 선비로 존경받게 된 또 다른 사건은 병자호란 때입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조선시대 2대 난리인데요. 임진왜란이 인명피해와 물질적인 피해가 주로 발생했고 병자호란은,물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는데요. 임란은 비록 임금이 신의주까지 도망을 갔지만 무릎 꿇고 항복하는 일은 없었지만은 병자호란시대에는 오랑캐라고 우기든 청나라 태종에게 임금인 인조가 맨발벗고 신하의 예로서 3배를 올리고 아홉 번의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삼전도에 청군이 들이 닥치자 참극이 시작됐는데 “능욕을 피하려는 여인들이 강에 몸을 던졌고,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낙엽처럼 떠다녔다. 처참한 장면 이었다”라고 전합니다.
당시 인조의 항복장면을 역사는 이렇게 기록을 하네요
“”청 태종은 깨진 자갈을 100 미터 정도 깔아놓고
인조로 하여금 자갈 위를 높은 포복으로 기어오게 했다
그래서 인조의 팔꿈치와 무릎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단 아래 이르자 단 위의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
즉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번씩
모두 아홉 번 땅에 찧으며 절을 하는 항복의식을 거행토록 했다
시립한 청나라 장수들은 머리를 땅에 부딪는 소리가 작으면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호통을 쳐 인조의 머리통은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임금 1인의 치욕도 치욕이지만은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포로가 적게는 수만에서 많게는 50만까지라고 하는 데요. 그들의 굶주림과 추위로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하여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고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정조를 잃은 여자(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인 환황녀 (還鄕女)가 화냥년로 불리어 행실이 부정한 여자의 대명사로 일컫어짐)로 큰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 됩니다.--사가들은 병조호란에서 좀 더 피해를 줄일려면 백마산성에 웅거한 의주부윤 임경업장군의 진언대로 임금이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압록강을 주전선으로 결사 항전하다가 화의나 강화를 맺었으면 이런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실제는 두번이나 강화도로 인조가 도망 갈려다가 여의치 않자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서 항전도 아닌 농성하다가 역불급 항복하죠.
어쨌든 명분과 자존심을 생명보다 중히 여긴 조선조 선비들에게 삼전도의 치욕(현 송파구삼전동)은 선비로서의 자존심에 일대 경종을 울리게 되었고 동계선생은 오랑캐와의 화의를 결사 반대 하였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칼로 배를 그어 할복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국은에 보답 못한 것을 한탄하고 덕유산 자락의 “모리”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백이와 숙제 처름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동계후손들은 제사상에 반드시 미나리와 고사리를 올려 놓는다고 하네요.
이런 삶의 괘적들이 초계정씨를 전국의 명문가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치일란이라고 ,동계가 초계정씨 집안을 전국의 명문가로 올려놓는 치세를 이뤘다면 , 바로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1728)의 출현으로 집안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조선후기에 발생한 반란사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사건에 연루된 충청.호남.영남의 의 명문 호족들의 집안을 거의 멸문 혹은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으로서 주동자는 이인좌와 정희량 입니다. 충신의 후손에서 일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한 초계 정씨들은 30명 정도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20년 동안이나 동네를 떠나 뿔뿔히 흩어져 숨어 살앗다고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폐족이 된 겁니다.
그러다가 집안을 다시 일으킨 사람은 야옹 정기필(영양현감 1800~1860)이라고 하네요.
초계 정씨들이 반란의 주모자를 배출하고도 멸문을 당하지 않고 다시 집안을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 층의 열화와 같은 여론 때문이었다라고 하는데요, “동계와 같은 충신의 집안에 제사가 끊기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주류 측의 열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야옹은 피폐한 강동마을을 거의 복구했고 현재 강동마을에 거주하는 정씨들은 대부분 정기필의 후손일 정도로 안정적인 단계에 올려 놓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15대 종손(정완수)과 종부(유성규)씨가 종가에 거주한다고 하며 시인인 류안진씨가 유성규 종부의 집안의 언니이고 저희들이 자랄 때 거창의 교육장을 지내신 정우순씨(작고)가 14대 종손이라고 합니다.
정우순 교육장의 부인인 최희(14대 종부)씨가 그 유명한, 12대에 걸쳐서 만석꾼을 연이어 배출한 경주 최부잣집이 친정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부친의 임종을 대비해서 서울에서 아는 풍수가를 두 사람 불러서 고향 가조의 음택을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들판에서 가을일을 하다가 풍수가가 어느 한 지점을 가조의 최고 명당으로서 지목을 하였는데 지금 가북면 용산리 뒷동산 지점이었습니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다음날 현지 답사를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동계 정온 선생의 음택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유명인은 죽어도 아무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구나”라고 느껴지더군요.
동계 종택에서 근처에 수승대 까지는 약 1KM..
거함산에 휴가차 왔다가 이런 곳에서 바람 한번 씌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글은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조용헌(원광대 동양학대학원)교수의 책에서 많은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조선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등 전국의 명문 종가집을 답사하며 쓴 글로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동계 정온선생편의 전문을 보고 싶거나 전국의 더 많은 명문가를 알고 싶으신 동문은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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