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마을의 유래와 방촌팔경(傍村八景)
▶ 방촌마을은 조선 건국 후 장흥 위씨 자손들이 들어와 세를 이루고 살게 되면서 형성되었는데, 모두 12뜸으로 이뤄져 있으며 현재(2016년) 총 110가구가 살고 있다. 방촌마을은 상잠산이라든가 탑동, 장천 쉥골, 계춘동 등 방촌 주변의 산과 바다를 비롯한 풍광이나 방촌마을을 이루는 뜸들과 관련한 갖가지 풍경을 글로 담아낸 「방촌팔경」을 통해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방촌마을은 통일신라 때 정안현의 치소였고, 고려 때 장흥부의 치소였는데, 고려 말에 외구의 침입으로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이 돼서, 이 치소가 나주 봉황에 있는 철야현으로 피난을 갑니다, 내륙지방으로. 그러고 나서 조선이 건국되고 그러니까 어느 때나 국세가 약해지면 왜구가 창궐했어요. 창궐했는데, 고려 말에 나라가 망하고 나라의 기운이 약해지자 왜구가 성하고 그래서 왜구가 여기 들어와서 3달씩 민가에 피해를 주고 그래서 도저히 요쪽에 사람이 살 수 없어서 내륙에 피난을 갔었는데,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국권이 회복되고 그래서, 장흥부의 부노들의 진정으로 인해서 장흥부가 다시 귀향을 하게 됩니다. 귀향을 하게 되는데 그때, 이 방촌으로 오는 게 아니고, 지금의 장흥읍에 죽령산 하에 산성을 마련하고 그게 황보성인데 그 성을 마련하고 그쪽으로 귀읍을 하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나중에 그 터가 좁아서 수령영 터로 옮깁니다. 지금의 법원, 경찰서 있는 쪽이죠. 그래서 그쪽으로 옮겨가고, 거기에 살고 있던 장흥 위씨들, 그래서 그전에는 수령 위씨들이라고 그랬어요. 수령 위씨들이 그 터를 내주고 나와서 제일 처음에는 평화로 갔다가 평화에서 행원과 관산으로 나눠집니다. 나눠져서 행원은 유자 정이 가시고, 유자 형은 거기 사셨는데 그 할머니가, 유자 형의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당동으로 들어오십니다, 당동마을. 당동마을은 공예태후 임씨의 탄향지에요, 공예태후 임씨의. 그 쪽으로 들어오셨는데, 처가가 최씨인데 아주 요족하고, 풍족하니 살으셔서 거기에 들어오셨다, 그렇게 족보에 되어있거든요. 그래가지고 거기에 이제 곤자 할아버지가 아들을 다섯 낳았거든요. 그래서 덕자 홍, 덕자 의, 덕자 관, 덕자 화, 덕자 후. 다섯을 낳았는데, 덕자 홍은 판사터로 나오시고, 덕자 의는 옥산으로 가시고, 덕자 관은 덕자 후가 방촌으로 개가해서 들어오시는데 따라 들어왔다가 아들이 8살 될 때, 정자 호인데, 그 분이 8살 될 때 지금 현재 부산으로, 지금 부산 기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거든요. 거기 부산으로, 처가 쪽에 덕자 관은 그쪽으로 가시고, 덕자 화는 아들 때에 정자 철 때에 방촌으로 들어오시거든요. 그 덕자 관이나 덕자 화는 아들이 늦어요. 덕자 후보다 늦어요. 덕자 후는 큰 아들이 1578년생인데, 정자 철이 1584년생이니까요. 정자 호가 지금 잘 생각이 안 나는데 1579년생이나 될 겁니다. 그래서 막둥이, 막둥이가 아들을 좀 빨리 생산을 해요. 1578년에 정자 훈이 방촌에 낳으셨다고 하는 것이 그 무렵에 덕자 후가 방촌에 들어오셔 가지고 세를 이루고 그때에는 어떠냐면, 왜구에 의해서 이 장소가 전부 비어 있던 때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들어오신 것 같아요, 이렇게 수복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들어오셨는데 덕자 후가 들어간 데가 안항이라는 마을이에요. 얼굴 안(顔)자, 마을 항(巷)자. 근데, 안항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게 인제 재밌는 것이 안촌으로 불리고, 안동으로 불리고, 근데 그게 얼굴 안자가 내동으로 바뀐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현재 본 마을이 내동이에요, 방촌 안에. 본 마을이 내동이고, 거기에 지금 회주하기 자리에 위성열, 판서공파 종택이 있어요. 판서공파 종택이 위치하고 있고, 그 앞쪽에 보면 옥샘이 있거든요. 옛날 장흥부였을 때 옥! 옥이 있었는데 거기 옥에 있던 사람들이 먹고 살았던 샘이 있어요.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삼괴정이라는, 원래 여기정이라는 곳이에요. 여기정이라는 곳인데. 옥경이하고 명월이가 회주목 때 기생이에요, 관기. 관기가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정이라고 쭉 불리다가, [손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요게 사실은 지석이에요, 여기 모여 있는 게. 여기 있는 게 고인돌이에요, 남방식 고인돌. 지석인데, 1890년경에 연재 송병선 선생이 이 천관산으로 오세요. 90년도 조금 넘어서 오시나? 그 양반이 을사늑약에 돌아가시니까,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독약을 음독하고 돌아가시니까, 자진해서… 을사늑약 때 자진하신 분이 그 분 한 분 뿐이에요. 연재 송병선 선생이 여기를 와서, 그때까지만 해도 이 느티나무 3그루가 다 살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쪽 제일 큰 지석에 삼괴정이라 쓰고, 거기 각해 놓은 게 지금 있거든요. 그 다음. 인제 방촌 마을이 그렇게 해서 형성이 되었는데, 그 후에 다른 귀족들도 같이 들어오고 그래서 지금은 110호 정도 되는 큰 마을로 형성이 되어 있고요. 열두 뜸이, 열두 뜸으로 자연 마을이 형성이 되어 있어요. 제일 저쪽에 동산 밑, 그다음 내동, 등전, 그 다음에 계춘동, 그 다음에 신기, 그 다음에 가남, 가남쟁이, 호사, 그 다음에 산저, 산저가 응달 양달로 나눠져 있어요. 그 다음에 탑동, 호동, 그래서 열두 갠가 될 겁니다. 그래서 열두 뜸으로 자연스럽게 형성이 됐구요. 방촌에는 방촌팔경이 있어요. 방촌팔경이 있는데, 첫 번째는, 동산재월(東山霽月). 뭐냐면, 비 온 뒤, ‘비가 갠 뒤에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달’을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 다음에, 상잠만하(觴岑晩霞). 여기 방촌의 주산이, 조산은 천관산이고, 주산은 상잠산이에요, 상잠산. 상 자는 저기 잔 상(觴)자예요, 잔 상. 뿔 각(角)에 쓰는 잔 상. 그래서 상잠산! 그래서 잠 자는 영(令) 자가 변해서 잠으로 가지 않았나? 길게 내려 끄집어 내리면 영이고, 점을 찍으면 잠이여. 그래서 잠이나 영이나 똑같아요. 그래서 그 부분이 조금 헷갈리는데, 상잠만하는 뭘 이야기하냐면, 저녁밥 짓는 연기가, 내동마을에 저녁밥 짓는 연기가 그게 이렇게 상잠산에 띠 허리를 두르는 거예요, 상잠산에 띠 허리를. 얼마나 편하게 보이겠어요, 지금은 불 때서 밥하는 것이 없는데, 그때는…. 또, 그 다음에, 계동춘풍(桂洞春風)은 계수나무 계(桂)자거든요. 근데 여기 누가 태어나셨나면, 존재 위백규 선생이 태어나셨어요. 이 마을인데, 여기는 한겨울에도 아주 훈훈한 바람이 붑니다. 그래서 봄같이, 한겨울에 아무리 추운 날도 훈훈해요, 여기 바람이. 그래서 계동춘풍이고. 그 다음은 호동초적(壺洞樵笛)인데, 저쪽에 호동이 ‘쉥골’이라는 마을인데, 쉥골은, 쉥 자는 뭔 쉥자냐? 병 호(壺), 병의 호로병을 쉥이라고 해요. 순수 우리말이에요, 그거 호로병. <진품명품>에 많이 나오죠? 이것을 쉥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쉥골. 거기 마을은 천관산에서 풀꾼들이, 풀꾼들, 풀꾼들이 이 봄이면 옛날에는 그걸 풀을 베어다가 퇴비를 만들었잖아요. 예, 풀 품앗이를 했어요. 그래서 방구를 치고, 방구. 방구를 치고, 풀방구를 치고 내려오면서 피리를 불어. 왜 그러냐면, 그래가지고 이게 뭐 저, [옆에 앉아 있는 청중에게] 뭔 기 있어요이?
- [영기(令旗), 영기….]
아니 영기 아니고 무슨 기에요. 영기에요? 어, 영기하고, 또 풀꾼의 제일 우두머리가….
- [여기서는 뭐라 했어? 건곤이라고 안 했어?]
- [영쇠라고 했지.]
아니, 우두머리. 풀꾼의 제일 우두머리! 영쇠 말고! 그 우두머리가 감찬, 감차다고 뭐 저 곤장도 치고 그랬잖아요?
- [곤장도 치고 우에서 봤어, 우에.]
그런께 그런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천관산에서 풀꾼들이 비어올 적에 피리소리. 그 다음에 탑동효종(塔洞曉鐘). 지금 탑동 앞에 가면 삼층석탑이 있거든요. 삼층석탑이 있는데, 그 석탑이 있는 자리가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 저걸 가져가기 위해서 관산국민학교를 한 번 옮겼어요. 근데 거기 그 주변이 흉년이 들고 그래서 다시 그게 인제 민심이 사나워지자 일본 사람들이 다시 그걸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서, 제자리에 놔두지 않고 논 가운데다가 그냥 갖다 놔버렸어. 그래서 논 가운데 경지정리하면서 지금 옮겨온 건데 그 위쪽이, 탑동마을 위쪽에 절이 있었던 거 같애요, 절이. 절에서 나는 종소리, 새벽 종소리.
- (절이 지금은 없는 거죠?)
효 자가 새벽 효(曉)자에요. 네, 지금은 절이 없어요. 새벽에 들리는 종소리. 그 다음에 성동폭포(聖洞瀑布)라고, 여기는 지금 저쪽 천관산에 제일 높은 바위에 폭포가,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폭포가 흘러내려요. 한 20미터 30미터 되는 덴데, 그 폭포가 내리는데 그 폭포에 가서 여름에 피부병이 있으면, 가서 물을 맞으면 피부병이 다 낫았어요, 아주 시원했다는 그 말이야. 지금 이야기하면 땀띠 같아요. 그래서 가서 그걸 맞았고, 그 성동, 성조동이에요. 성동이 성조동인데 성인 성(聖)자에 할아버지 조(祖)자거든요. 거기에 지석이 하나 있고요, 지석이 엄청 큰 지석이 하나 있어요. 아마 동양 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지석이. 사람이, 사람이 한 50명 60명 위에 가서 앉을 수 있는 지석이에요. 엄청 커요. 그래서 성조동하고 이렇게 해보면, 추정을 해보면, 할아버지 조잔데 아마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이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성스러운 장소 같아요. 그래서 그 성동폭포가 인자 그렇게 되어 있고요. 그 다음에 도곡귀운(道谷歸雲). 뭐냐면 저쪽에 삼산으로 넘어가는, 넘어가는 등이 도둑, 도등, 도등. 뭐냐면 아마 도화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 (복숭아나무가….)
예, 복숭아나무가. 도등. 근데 이제 그걸 2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이 심어지는 등’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거기에가 주막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다 주막이 표시가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관산의 주막에 삼산 쪽 주막이 대덕 쪽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거든요, 거기가. 그래서 거기 주막이 있었는데 도등, 말하자면 도화꽃 등을, 등을 내건 주막! 이럴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지금 현재 어떤 게 맞다고 이야기를 못해요. 그라고 지금 현재로는 도둑막등, 도둑막등 이래요. 그리고 그쪽에 어은에서는 거기가 도둑에 막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지명상. 그래서 그 부분이 거기서 이렇게 비, 안개, 안개가….
- [도둑 있는 데는 남초등학교 자리가 도둑이었어….]
저 저 흘러, 흘러서 이렇게, 그 산허리, 천관산의 산허리로 쭉 들어오는 안개구름. 그걸 도곡귀운이라고 그러고요. 지금 금당폭포가 삼괴정에서 이렇게 보시면 저기 저 정남진 전망대 있죠. 그 다음이 금당도에요. 그 다음에 어스름치 보이는 그 산이 금당도인데 날이 맑은 날은 참 이쁘게 보여요. 거기를 해질녘에, 황혼녘에 황혼의 붉은 기운을 받고 그쪽으로 이렇게 고깃배가 만선을 하고 돌아올 때의 그 풍치
- [금당귀범錦塘歸帆].
- [배가 돌아오는 거….]
귀범이에요. 그러니까 폭대가, 배 폭에, 돛대 폭에 폭이 그 범이, ‘귀범’이에요, 그게. 그래서 그 배가 이렇게 황혼 햇빛을 받고 들어오는 그 광경이에요. 그래서 방촌팔경을 읊어 놓으신 건데, 이걸 누가 읊은 건지를 몰라요. 그때 그때 인제 아마 모이셔서 저… 존재 윗대 분들도 여기에 모이셔서 시회도 하시고 그러셨으니까 그럴 때 이렇게 거기에 이런 것이 결정됐지 않냐, 여럿이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1578년에 입촌을 하셔서….
방촌마을 삼괴정(三槐亭)
자료번호 / 06_12_02_FOT_20160809_WS_0003
제보자(구술자) / 위성(남, 70세, 관산읍 방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