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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디자인과 ‘어울림’
알청하주|2004.09.2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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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디자인과 ‘어울림’
안상수 (시각디자이너,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 교수)
주제어: 어울림, 한글, 훈민정음, 디자인, 타이포그라피
우리 전통 문화에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시 말하면 ‘한글’이라는 글자를
창조적으로 디자인해 내었던 디자인적 정신성이 깊숙이 관류하고 있다.
나는 이 시대 우리 시각예술에 한글 창제가 갖는 창조성의 정신이 면면히
생명력으로 살아 숨쉬길 진정으로 바란다.
1. 머리글
21세기 오늘의 문화․사회 환경은 다원적인 가치로 변화되고 있다. ‘어울림’이란, 인류가 그 고유한 문화를 지속케 할 수 있는 생명적 원리이다. 2000년 10월, 새 천 년기를 기념하여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그래픽디자인대회’의 주제어는 ‘어울림(Oullim)’이었다. 이 주제어는 20세기 근대 디자인을 되돌아보고, 이 즈음의 디자인을 반추하며, 21세기에 펼쳐질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종의 대안적 모토였다. 우리말 ‘어울림’이란 용어는 영어로 ‘The Great Harmony’로 번역되었으며, 기존의 ‘조화(Harmony)’ 개념을 포괄하는 더 큰 동아시아적 개념의 용어로서 제시되었다.
글쓴이는 한글 창제의 디자인적 의의, 한글의 조형성과 그 우수성, 그 조형적 우수성에 대한 평가 준거를 어울림의 관점에서 제시함으로써 ‘넓은 뜻의 디자인’이라는 지평에서 ‘한글의 디자인적 의의’를 조명해 보려 한다.
이러한 논의의 출발점은 글쓴이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 및 ‘정인지 서문(鄭麟趾序文)’에서 발견한 바, 그곳에는 이미 디자인의 원리와 철학이 내재해 있다는 감응에서 비롯되었으며, 글쓴이는 그 문구들을 디자인의 원리와 어울림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물론 이미 많은 분들이 해낸 한글 창제의 과학성과 우수성에 대한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삼으면서, 글쓴이는 한글 창제 자체를 넓은 뜻으로서의 디자인 행위(designing)로 인식해야 함을 설득코자 한다.
2. 생명적 원리로서의 어울림
우리말로 ‘어울림’은 ‘어울리다’, ‘어우러지다’의 명사형으로 ‘이것 저것이 모순됨 이 없이 서로 잘 어우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말의 어울림과 통하는 한자어로 ‘화(和)’를 들 수 있다. 고대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를 막론하고, ‘화’는 일찍이 ‘미’의 관념과 연관되었다. 중국 문화에서 ‘화’ 역시 줄곧 미적 이상으로 여겼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화’에 대한 개념의 기초는 《주역》에서 비롯되며, 《주역》에서 천명한 ‘화’는, 대립적인 것의 조화와 통일, 나아가 서로 비비고 움직이며 쉬지 않고 생겨나서 그치지 않는 동태적인 균형을 말하며,1) 《중용》에서 ‘화’란 천하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도(道)이자, 만물을 화육하는 이치이며, ‘화’에 성인의 오묘한 뜻이 담겨 있고, 천지의 온전한 공덕이자 성인의 완전한 덕의 상징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는 중화(中和) 또는 중용의 원리로 쓰이며, 일찍이 아름다움(美)의 개념과 연관되기도 하는데, 예술론에서 중용관(中庸觀)과 중화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역대로 여러 중국 예술이론 저작물들은 예술 중 여러 대립적 요소들의 통일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예술 창조의 중요한 비결로 여기고 있다. 장기윤(張其昀)의 견해를 빌면, 중용관은 중국예술론의 핵심이며, 이는 기계론적 균형설이 아니라 모순을 더 높은 발전으로 통일하는 일이며, 그 일관된 원칙은 중용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무궁무진한 가능태로서, 전체성으로서의 형식미로 이해할 수 있다.(장기윤. 1984; 708-710)
담단경(譚旦冏)은 중국인들의 하늘-땅-사람[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에서 중화(中和)는 사람[人]으로 전제되며, 중화에 이르는 방식은 양극(兩極) 조화론으로서 비단 유가(儒家)사상뿐만 아니라, 중국 예술 일반의 관념이 지니는 본질이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말하는 중화의 상태란, 비교적 높은 차원의 중용의 발전과정에서 모순을 통일하여 최후에는 양극에 군림하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2)
3. 완전성으로서의 어울림
중용과 중화로서의 어울림은 이것과 저것이 화해됨으로써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곧 어울림은 개체(個體)가 무시되지 않는 것이다. 개체는 존중되며, 만물이 지닌 제 스스로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어울림’이란 개체의 특성이 희생된 채 둘 또는 다수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하나[一, Unity]로서 어울림의 가치는 ‘다양성의 통일’, 곧 전체성이며, 완전성이다. 이러한 전체성으로서의 하나는 유한한 것의 근원이며, 이 하나로써 꿰뚫으면 만물은 상황에 마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전체성은 유기적 생명성 그 자체이며, 생명을 지닌 전체성은 진리, 선, 아름다움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심미적인 속성으로서 완전성(integrity)은 미적 가치가 당연히 가져야 할 본질적인 모든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체를 통해서 부분이 근본적으로 순수하게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며, 그들이 참으로 주어진 전체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곧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이 서로 조화되어 어울리는 전체성을 가질 때 완전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여럿이 여전히 여럿으로 보이면서 하나가 되는 것”(that in which the many, still seen as many, becomes one)과 상통이며, 이러한 미적 상태를 가리켜, 콜리지(Coleridge)는 “통일 속의 다양성(Multeity in Unity)”이라 규정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동양 고전에서도 발견되는데3), 화(和)는 동(同)과 대비되어 ‘화’란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풍요로움이 자라고 만물이 생겨나지만, 서로 같은 것들만 모아 놓는 ‘동’은 모두 다 못쓰게 되어버린다고 하고 있다. 곧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의 원리임에 반해, 동(同)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논리인 것이다.4)
요컨대, 어울림이란,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은 채, 전체성의 큰 조화 속에서 어울리며, 이 때 ꡐ어울림ꡑ은 대립조차 다양성 속에서 다시 큰 하나의 전체성이 되며, 그것은 역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 상태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어울림’은 곧 관계와 사이에서 생긴다. 우주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자연, 또 사물과 사물, 사물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의 화해된 관계에서 태동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 나아가서 ‘어울림’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명성에 대한 바탕과 이해의 토대 위에 지극한 자유와 절제를 통한 조화의 추구에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가 한글창제의 원리를 어울림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훈민정음 해례본 끝에 있는 정인지 서문의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가 모두 갖춰지고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다”(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는 문구를 통해서이다.
이 구절은 위에서 밝힌 바, 큰 어울림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곧 하늘-땅-사람 삼극의 뜻과 음양 이기의 묘가 모두 갖춰지고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 바로 훈민정음인 것이다. 어울림은 하늘-땅-사람의 삼재 및 무한한 것의 창조자로서 둘로 된 쌍, 곧 허(虛)와 실(實), 양(颺)과 체(滯), 중(重)과 경(輕), 강(剛)과 유(柔), 동(動)과 정(靜), 심(深)과 천(淺), 합(闔)과 벽(闢), 음(陰)과 양(陽)을 모순됨이 없이 모두를 포괄하는 지극한 경계의 상태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어울림이란 본디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존재하는 섭리이며, 우주의 본질이며, 인간 본성의 핵심이다. 하물며 디자인이란 우주의 일부분인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소치(所致)인 바, 디자인의 가치와 본질 역시 인간의 마음, 우주의 본질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글쓴이는 어울림에 대한 구체적 모색의 시도로 우리나라의 한글을 들어 ‘어울림’ 디자인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4. 창조적 디자인으로서 한글 창제의 기본 이념
훈민정음 창제의 기본 정신은 해례 첫머리에 세 가지로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異)을 인식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요, 백성에 대한 가여운 생각(憫)을 가진 것이요, 쉽게(易) 만든 것이 그것이다.
ㄱ. 한글의 정체성으로서의 ‘다름(異)’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을 남들과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점은 문제의식과 독창적 사고의 기제(機制)이며, 자아의식이 생기는 지점이다. ‘다름’에의 인식은 곧 정체성에 이어진다.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표준국어대사전)이며, 이는 곧 “본질적인 면에서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것”이다. 곧 ‘제 다움’, ‘제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쓴이는 바로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름’을 깨닫고, ‘제스럽고, 제 말에 마땅한, 제 말에 어울리는 글자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어 실천함으로써 한글 창제가 가능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식은 교착어인 우리말이 고립어인 중국어와 사뭇 다르기에 글자가 달라야 하고, 그 밖에 이미 새로운 글자를 지어 가지고 있었던 위글, 몽고, 서하, 여진 등의 글자들과도 역시 달라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건대, 한글 창제 이전 이두(吏讀)나 구결(口訣)로 뜻글자인 한자를 빌어 써 보았으나 근본적으로 우리말의 구조나 음운에 맞지 않아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는 듯한’ 불편함에 따르는 문화적 정체성의 갈등을 겪어왔다.
세종 임금은 우리말의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어 글이 통하기 어려운”[有聲無字, 書難通] 상황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어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지어낸 것이다. 차별성으로서 ‘다름’을 전제(前提)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개체의 본질이 존중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어울림에 대한 전제이기도 한 것이었다.
ㄴ. 디자인적 에토스(ethos)로서의 가엾게 여김(憫)
아랍인들이 신성하게 여긴 코란 글자는 ‘알라신의 글자’였고, 고대 이집트인들의 성각문자 역시 토트신이 만든 ‘신의 글자’였다. 한자나 쐐기글자, 이집트 그림글자 등은 해독해야 할 글자수가 너무 많았기에 일반 대중이 사용하기에 적합지 못한 글자였다. 그러나 30여 자로 축소 정리된 페니키아의 알파벳 혁명 이후 ‘신들의 글자’는 사람의 글자가 되었고, ‘섬기는 글자’에서 ‘누리는 글자’로 되었다.
한글 혁명도 이와 같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수 천 자를 해독해야 글을 읽을 수 있는 한자 환경에서 한글 28자의 탄생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백성의 눈을 뜨게 하고, 대중 교육이 가능하게 된 사건이었다. 곧 글자는 소수 지배자의 손에서 백성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글자가 없는 것은 시각적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소통이란 여러 형태의 사회적 교환의 효용을 극대화시키고 기호와 메시지 등을 전달 교환하고 순환시키는 행위이다. 이는 사물과 사람의 순환도 포함되며, 넓게 보면 소통이란 바로 인간의 사회적 삶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바로 한글 창제는 소통이 안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가여운 마음이 씨가 되어 백성의 편에서[民本], 백성을 위하는[爲民]의 정신으로 ‘쉽고 간략하게’ 지어졌던 것이다.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이 생명을 측은히 여기는 본성이며, 이는 디자인을 포함한 인간의 창조 행위 일반에서 필수적이고 보편적 가치일 것이다.
ㄷ. 쉬움(易)
18세기 강희자전에 실린 한자는 4만자 정도가 된다. 이러한 중국 한자를 상당히 통달하기 위해서는 보통 20년이 걸린다. 이와 같은 스크립트(script)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소모하며 엘리트적이다.(옹. 1995; 136-137) 그에 비해 한글은 ‘슬기로운 이는 하루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을’5) 정도로 간단하고 쉽게 배울 수 있기에 민주적이다.
‘쉬움’이란 자연의 섭리이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마땅히 어울리고 화순(和順)하는 순리이며, 쉽고 간략함의 추구란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바로 한글은 쉽고 간략함을 얻음으로써 천하의 이치를 얻게 되어6)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5. 어울림의 관점에서 본 훈민정음 창제의 디자인적 의의
이러한 기본이념을 가지고 탄생된 한글은 어떤 이유로 어울림 디자인의 전형(典型)이 될 수 있을까?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어울림이란 대비조차도 포괄하는 큰 뜻의 조화로서 작용하는 디자인의 큰 원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것은 한글 창제의 디자인적 의의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논의될 수 있다.
ㄱ. 창제 배경 원리로서의 태극과 음양대대(陰陽待對)의 어울림
‘훈민정음 해례’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한 줄기 굵은 사상은 동양철학, 곧 역학(易學)이다. 역학은 태극음양 사상이 뼈대이므로, 한글 창제의 바탕에는 태극과 음양대대의 사상이 철학적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 제자해의 첫머리는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늘과 땅의 도리는 음양오행의 이치로 되어있을 뿐이다. 곤괘와 복괘 사이가 태극이 되고, 태극이 움직이고 고요한 후에 음양이 생긴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생명을 지닌 무리들은 이 음양의 이치를 버릴 수 없으니, 사람의 소리도 모두 이 음양의 이치로 되어 있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坤復之間爲太極. 而動靜之後爲陰陽. 凡有生類在天地之間者. 捨陰陽而何之.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이와 같이 사람의 소리는 태극에서 생성된 음양오행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기에, 우주의 이치와 함께 작용하는 사람 소리를 궁구(窮究)하여 형상화, 시각화한 결과가 바로 한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첫소리를 음양오행에 의해 나누고, 가운뎃소리 ‘ㆍ’를 우주의 실체로 하여 그 속에 태극이 내재하여 ‘ㅡ’, ‘ㅣ’로 교변(交變)하고, ‘ㆍ’가 ‘ㅡ’와 ‘ㅣ’의 위아래, 양옆에 성수(成數)와 정위(定位)의 오묘한 융화에 의하여 글자를 조성한다는 것은 태극사상의 철학적 사변이란 것을 말할 수 있다. 제자해의 철학적 배경은 태극사상 곧, 역(易)의 사상이다. 합자에서도 첫소리와 끝소리는 하늘과 땅이며, 그 사이에 사람이 참찬(參贊)하여 만물의 조화를 원활히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음절 조성을 하늘(첫소리), 땅(끝소리), 사람(가운뎃소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천일합일(天一合一)의 사상까지 끌어올렸다.(강규선. 2001; 70)
태극이란 만물의 근원적 생성(生成)을 이루는 동적 균형을 말함이요, 그 자체로 이미 ‘어울림’이며, 한글 창제는 태극 사상의 실천, 곧 어울림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훈민정음은 이러한 태극 사상에 바탕을 두고 사람 성음의 원리를 정교하게 반영하여 형상화하였기에 28자는 ‘음(音)은 칠조(七調)의 가락에 맞고, 삼극의 뜻과 이기의 묘가 모두 갖춰지고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다’7)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ㄴ. 우주관, 인간관, 자연관의 어울림으로서 닿소리와 홀소리의 조형성
태극 음양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한글 글자꼴은 상하, 좌우 대칭의 원리가 적용되었고, 가획(加劃), 합자(合字)의 원리에 따라 소리와 형태의 변별 자질이 질서정연하게 구현되어 있다. 또한 한글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조음(調音) 위치와 조음 방법을 암시하고 있으며, 음소글자로서 닿소리글자와 홀소리글자의 형태가 시각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이는 쓰는 이로 하여금 쉽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변별 자질이 구현된 것이었고, 그 자소들이 모두 어울려 한글의 조형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획이 하나 더할 때마다 소리의 자질이 달라지는 것은 한글이 음소글자 체계(phonemic writing system)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차원의 자질글자 체계(資質文字體系, featural writing system)8)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소리를 적는 글자를 생각했던 세종은 그 첫소리 형상을 만듦에 소리 내는 생명 원천의 바탕, 곧 발음기관의 모습을 본뜨고, 가운뎃소리 곧 홀자 11자는 그 모양을 하늘-땅-사람에서 취하였다. 그리하여 첫소리 닿자 17자는 모두 발음기관의 형상을 본뜬 바, 어금닛소리 ㄱ은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형상을, 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형상을, 입술소리 ㅁ은 입의 형상을, 잇소리 ㅅ은 이빨의 형상을, 목구멍소리 ㅇ은 목구멍의 형상을 제각기 본떴다.
이러한 상형은 만물에 대해서 그것을 관찰하는 요령을 터득하여, 제각기 다른 형태와 모양을 모의(模擬)하여 그 자연 물성에 맞도록 형상화한 것은 우주관, 인간관, 자연관의 어울림이 아니겠는가?
ㄷ. 간이요(簡而要), 정이통(精而通)한 한글의 공능성(功能性)
훈민정음 28자는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고도 요긴하고, 세련되고도(精) 잘 통하는”9) 쉽고 단순한 글자 체계이다. 한글을 조형적으로 본다면 점, 가로선, 세로선, 빗금, 동그라미로 요소가 간단하기 그지없다. 바로 기하학적으로 이간(易簡)한 꼴이 이리저리 변통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 요소들이 모이고 엮이어 첫소리와 가운뎃소리가 되고, 또 그들이 모이고 합하여 하나의 소리를 나타내는 온전한 글자로 변한다. 이는 훈민정음이 갖는 생성철학적 우주관으로서 태극사상의 내부 조직체인 음양이 작용하여 무한한 겉 구조의 조직체가 생성되는 이치와 통한다.10)
예를 들어 점과 줄기 둘이 음양으로 어울려 홀소리 기본자 11자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홀소리 둘이 어울려 14자를 만들고, 또 홀소리 셋이 어울려 4자를 더 만들어 홀소리 29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글자를 만듦에, 낱자[音素]들이 제 꼴은 변하지 않으면서 서로 합쳐서 하나의 낱내[音節]글자를 이루어낸 것은 조형적 환치(換置)가 가능하고, 조형의 엔트로피가 적은, 디자인의 이상적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글은 소리글자로서 ㄱ, ㄴ, ㄷ …… 등의 요소로 분해 되었다가 그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글자를 구성하는 '분석과 종합'의 방법으로 엮어진다는 점에서 우수하며, 바로 이 점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이다.
요컨대, 디자인은 쉽고 결과가 간단하나 응용과 변화가 가능한 것이 좋을 것이다. 디자인이란 제다운 기능을 이해하여 그에 맞는 소통의 본질과 정수(精髓)를 추출해 내는 행위인 바, ‘좋은 디자인’의 본질과 서로 통하며, 어울림의 뜻과도 통한다고 하겠다.
ㄹ. 어울림으로의 시스템 디자인
디자인도 사람의 일이라, 디자인의 원리 역시 천지 만물의 이치와 원리를 사람에 이롭게 해석해서 형상화해 내는 것이 아닌가? 본디 조형원리로서의 형태[形]와 악(樂)의 원리로서의 소리[聲]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잠재태로서 깃들어 있는 바, 정음의 글자를 만듦에도 그 꼴[象]과 짝지어서, 소리가 거세어짐에 따라 매양 획을 더함으로써 제작되었다.[因聲加劃] 그것은 이어 짜임의 과학성으로, 또 글자 형상의 질서(taxis)로 나타났다. 질서란 바로 어울림일 수 있다. 질서란 거슬리지 않고[不悖], 틀리지 않도록[不戾] 조직화된 시스템인 것이다.
그림 1). 자음도 (이정호. “훈민정음의 구조원리”에서)
-닿소리글자꼴의 체계성:
제자해에 따르면, 첫소리 닿자의 첫 글자를 ㅇ으로 시작하는데, ㅇ은 만물의 근원으로 본 물(水)의 자리 목구멍을 본떠 만들어 그 거센 소리는 ㆆ으로, 또 ㅎ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 첫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은 모양을 본떠 만들어, 거센 소리는 ㄱ에 줄기를 덧붙여 ㅋ을 만들고, 입술소리 ㅁ은 입의 형상을 본뜬 바, 그에 연관된 소리 ㅂ, ㅍ은 줄기를 덧붙여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첫소리글자에서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조음체(調音體)의 자질을 보고, 오행에 바탕을 둔 소리의 성질과 음상(音相)이 글자꼴과 어울리는데,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또 계절과 음악과 체계적인 어울림을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표 참조] 또한 센 소리를 만들어가는데, 어금닛소리 ㄱ은 나무의 바탕을 이룸이요, ㅋ은 나무의 무성하고 자람이며, ㄲ은 나무가 나이가 들어 씩씩함을 상징한 것 역시 시각적 상상력이 논리적인 체계성과 어울려 돋보이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자형(字形)
오행
상형
오성(조음기관)
성질
음상(音相)
계절
오음
ㅇ
물(水)
목구멍 모양
목구멍소리(喉音)
깊숙하고 물기가 있음 (邃而潤)
소리가 비고 거침없음은 물이 투명하고 밝이 잘 흐르는 것과 같다. (聲虛而通. 如水之虛明而流通也)
겨울
우(羽)
ㄱ
나무(木)
혀뿌리가 목구멍에 닫는 모양
어금닛소리(牙音)
어긋지고 김 (錯而長)
소리는 목구멍소리와 비슷하나 여문 것이, 나무가 물에서 났으되 모양이 있음과 같다(聲似喉而實. 如木之生於水而有形也)
봄
각(角)
ㄴ
불(火)
혀가 윗몸에 붙는 모양
혓소리(舌音)
날카롭고 움직임 (銳而動)
소리가 구르고 날램은, 마치 불이 굴러 퍼지며 너울거림과 같다. (聲轉而. 如火之轉展而揚揚也)
여름
치(徵)
ㅁ
흙(土)
입술 모양
입술소리(脣音)
모나고 다뭄 (方而合)
소리가 머금고 넒음은, 마치 흙이 만물을 품어 간직하면서 넓고 큼과 같다. (聲含而廣. 如土之含蓄萬物而廣大也).
늦여름
궁(宮)
ㅅ
쇠(金)
이 모양
잇소리(齒音)
단단하고 끊음 (剛而斷)
소리가 부스러져 막힘은, 쇠가 부스러지지만 단련되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聲屑而滯. 如金之屑而鍛成也)
가을
상(商)
-홀소리글자꼴의 체계성:
가운뎃소리 글자를 보면, 모양이 둥근 하늘을 본떠 만든 ‘ㆍ’는 입 속 깊은 곳에서 소리가 맨 먼저 나서, 모양이 평평한 땅을 본떠 만든 ‘ㅡ’가 입 속 깊지도 얕지도 않은 곳에서 나는 소리로, 또 사람을 본 떠 만든 ‘ㅣ’로 입 속 얕은 곳에서 나는 소리로 전개되어 있음을 본다. 이는 하늘이 있고 나서 땅이 생겼으며, 하늘과 땅의 이치가 사람을 통해 발현되는 것을 성리학의 우주론인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글자에 나타낸 깊은 뜻으로 볼 수 있다.
‘ㆍ’는 가운뎃소리의 중심이 되고 머리가 되어 가로 세로로 구르고 뻗어 ‘ㅡ’,
ㅣ’를 만들어내고, 위아래 ‘ㅡ’을, 오른쪽 왼쪽에 ‘ㅣ’를 두고, 이 셋이 서로 사귀고 어울려 음양의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하늘-땅-사람 삼재가 만물의
그림 3). 한글 가운뎃소리 그림(모음도). ‘ㆍ’는 태극에, ‘ㅡ’와 ‘ㅣ’는 양의에, ‘ㅗ ㅏ ㅜ ㅓ’는 사상(四象)에, ‘ㅛ ㅑ ㅠ ㅕ’는 팔괘(八卦)에 해당한다. 태극 음양 삼재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가운뎃소리 글자꼴은 상하, 좌우의 역동적 대칭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머리가 되듯, ‘ㆍ, ㅡ, ㅣ’ 세 글자는 다른 가운뎃소리글자의 머리가 된다. 곧 ‘ㆍ’과 ‘ㅡ’이 처음 어울려[初出] ㅗ, ㅏ, ㅜ, ㅓ 네 글자가 나고, 그 다음 ‘ㅣ’와 어울려[再出] ㅛ, ㅑ, ㅠ, ㅕ의 모두 8자로, 그리고 다시 어울려 합용자(合用字)인 ㅘ, ㅝ, ㆇ, ㆊ, 나아가 한 글자로 된 것이 ‘ㅣ’와 어울려 ㅓ, ㅢ, ㅚ, ㅐ, ㅟ, ㅔ, ㆉ, ㅒ, ㆌ, ㅖ으로 10자, 그리고 두 글자로 된 가운뎃소리가 ‘ㅣ’와 어울려 ㅙ, ㅞ, ㆈ, ㆋ 체계적인 전개를 한다. 나아가 밝은 소리는 밝은 소리끼리, 어두운 소리는 어두운 소리끼리 어울려[모음조화] 새로운 소리글자를 만들어 내게 되는 빈틈없는 짜임새에 놀랄 뿐이다.
ㅁ. 삼재가 어울려서 만들어지는 한글
가운뎃소리의 기본은 삼재의 이치에서 나왔다. 삼재는 천개(天開), 지성(地成), 인생(人生)을 말하는 것이며, 이의 형상 ‘ㆍ, ㅡ, ㅣ’을 기본 글자로 만들어, 처음으로 하늘(ㆍ)과 땅(ㅡ)이 처음으로 사귐을 형상화하여 ‘ㅗ’를 만들어내고, 이어서 사람(ㅣ)이 하늘(ㆍ)과 합해서 ‘ㅏ’를 만들어내니, 이는 천지의 쓰임[用]이 사물에 나타나되 사람을 기다려서 이루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하였다.
ㆍ(하늘) + ㅡ(땅) = ㅗ
ㆍ(하늘) + ㅣ(사람) = ㅏ
음양 조화에서 만물이 생겨나듯 한글은 반드시 합하고 어울려야만 하나의 소리-글자를 이루는 원칙을 가졌다.[합자(合字)] 훈민정음에 ‘무릇 글자가 합해져야 소리를 이루며’11), ‘첫-가운데-끝소리가 어울려야 글자가 된다’12)고 하였다.
이 경우 사람을 형상화 한 가운뎃소리가 중심이 되는데, 이 뜻 역시 “첫소리와 가운뎃소리와 끝소리가 합하여 이룬 글자를 가지고 말하면, 움직이고 고요함이 서로 뿌리박고, 음양이 사귀어 변하는 뜻이 있으니,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요, 고요한 것은 땅이요, 움직이고 고요한 것을 겸한 것은 사람”13)으로, ‘첫소리-하늘, 끝소리-땅,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잇는 중요한 역할로서 가운뎃소리-사람’이라는 하늘과 땅의 어울림을 사람이 중심이 되어 주재(主宰)하고 실천하여14) 하나의 온전한 글자를 이루는 것은 삼재의 뜻과 우주의 순환원리를 적용한 것이었다.
나아가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의 삼재는 공간적으로 위, 옆, 아래로 정해진 곳에 위치하여, 각 소리 부분은 위상소(位相素)로서 기능을 하면서 서로 합하여 낱내[音節]를 이룬다. 이 경우 개개의 음소들은 독립적인 제 기능을 하며 그 형태와 자질은 변하지 않은 채 어울려 하나의 낱내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종횡(縱橫)과 조화의 원칙인 ‘합하여 쓴[合用])’ 법칙은 훈민정음 전체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제자 원리이다.(이정호. 1975: 112) 이러한 체계는 바로 이치와 형상의 어울림이요, 기능과 꼴의 어울림이라 할 수 있겠다.
ㅂ. ‘큰_디자인’으로서의 훈민정음 창제
훈민정음은 ‘큰_디자인’이다. 큰_디자인은 큰 슬기(大智)로 되는 것이지 얕은 꾀와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철리(哲理)를 감응하여 꿰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천지의 모든 도리가 음양오행의 이치로 되어있다고 보고, 사람 소리도 그 음양오행 이치에 본을 두고, 시공 개념과 오음(五音)의 개념이 유기적 순환 관계에 있다는 철학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김석득. 1983: 37) 사람의 음성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고, 이러한 뜻과 생각에 따라 글자를 지어냈기에 한글은 칠조와 율려(律呂)에 맞고 음양과 삼재의 묘를 모두 포괄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한 개인의 작은 재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소리가 어울리고 하늘과 땅이 사귀어15), ‘천지의 작용이 사물에 나타나되 사람을 기다려서 이루어진’16) 하늘의 일이었고, ‘이미 있었던 계통을 이어 받아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저절로 이루어진 것’17)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훈민정음은 ꡒ생김(Genesis)ꡓ이었다. 저절로 그러하게 그것답게 ‘창조적인 생김’이야말로 어울림의 목적인(目的因, causa finalis)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근거를 통해 우리는 훈민정음의 드넓고 깊은 디자인 철학이 깃들어 있는, 우주 원리에의 감응에서 비롯된 우주-자연-사람과의 어울림을 실천한 ‘큰_디자인 짓[행위, designing]’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6. 맺는 말
지금으로부터 3만5천 년 전 즈음에 슬기사람(Homo Sapiens) 나타난 이후, 6천년 전 즈음 그림글자(script)가 나타날 때까지 인류는 소리 말로만 생활해 왔다. 인류에게 글자란 동물과 구별되는 지적 수단이며, 글자로 선사(先史)와 역사를 나누는 커다란 이정표적 잣대이다. 우리도 그 5천 년 역사 이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우리말을 써왔을 것이지만,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 진정한 한국어는 제대로 씌어질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로부터, 로마인들은 그리스로부터 글자를 빌려 써 제나라 글자를 만들었다. 중세 동아시아에서는 거란 글자가 10세기 초에 반포된 이후, 거란 글자를 바탕으로 여진 글자를 만들고, 13세기 원나라는 서장(西藏)글자를 개량하여 음절식 파스파글자를 만들었으며, 월남의 쯔놈[字喃]은 한자를 변형해서 만들었다. 우리도 당시 국제적 글자인 한자를 이두(吏讀)로 빌려 써보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으며 마침내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민정음은 다른 나라의 글자 만들기처럼 이미 있는 글자를 응용․모방하지 않고 순수한 음소(音素) 단위의 창조적인 소리글자로 지어 내었다. 한글 디자인이란 단순히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디자인 가능한 세계를 포괄한 적극적 개념의 소산이었다. 이는 글자 환경과 소통 도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디자인의 이상과 통한다.
마침내 15세기 훈민정음 창제로 말미암아 그 전까지 불완전하게 떠돌던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게 되어, 대중교육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문맹에서 해방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 이후 한국어가 정교해지게 되었으며,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잠재적인 가능성은 끝없이 커나갈 수 있게 되고, 우리의 뜻과 생각은 고쳐 짜여질 수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큰 뜻은 ‘다름’에 대한 깨달음의 실천, 사람을 ‘어엿비 여기는’ 인본주의적 생각, 배우고 쓰기 ‘쉬움’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철학적 터전은 동양의 근본 사상인 태극 음양오행설에 두었다. 한글이란 사람 소리를 자연 철학적 관점에서 보고 그 소리의 생성과 조직을 음양오행의 역학(易學)에서 추출한 성운학(聲韻學) 이론과 원리에 따라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글자로 디자인한 것이다. 곧 뜻과 꼴이 맞는 어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창제'란 혁명적이고 예외적 생각의 실천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종 임금, 그 깊숙한 속 안 큰 슬기와 상상력에서 생겨난 큰_디자인이었다. 사람을 자연의 한 조각으로 보고, 사람의 소리 냄을 우주 성음의 결합으로 여겨, 그것을 추상화시켜 인식하고, 그 소리 나는 자연의 모습과 상징을 본떠 나아가 이를 간결하고 쉽게 응축하여 체계적으로 형상화해 내었다.
글쓴이는 이러한 우리 문화의 혁명적 사건인 훈민정음 창제를 디자인적 관점에서 보아, 제 모습 제 말에 어울리는 생명적이고 질서 있는 시스템이자, 자연 성음의 원리에 맞고, 끝없이 구르고 변통 자재하는 유기적 디자인의 탄생으로 보았다. 나아가 한글 창제에 담긴 넓고 깊은 뜻과 포부가 ‘어울림’의 뜻에 맞는 완전함을 지향하는 ‘큰_디자인 짓’으로 규정하고, ‘어울림’ 디자인 가치의 전형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상적 디자인이란 사람의 상상력으로 우주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합당한 새로운 생명적 기능에의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리라. 한글은 바로 이러한 우주-생명과의 어울림에 바탕을 둔 ‘큰_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글쓴이는 새로운 디자인 가치를 요구하는 21세기 초입에서 ‘어울림’이 새로운 디자인 사상을 잉태하는 씨앗으로서, 표현적 가치와 잣대로, 또 이 시대의 디자인을 풍요롭게 하는 슬기로 작용하기를 바라며, 그 실천적인 예로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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