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항사 두번째 배를 타서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합판과 각목을 싣고 한국이나 일본으로 다니는 항로가 많았다. 과거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합판생산량 세계1위를 할만큼 많았는데, 이게 노동집약적이고 공해유발이 많은 제조업인데다 문제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예전처럼 원목을 수출하지 않고 자체내에서 합판과 각목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정책을 쓰므로 우리나라의 거대 합판공장들이 대거 인도네시아로 진출하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곳이 코린도 그룹이다.
인도네시아의 합판공장들은 소규모로 각지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큰 배들이 화물을 다 실으려면 여러곳을 찾아다니며 짐을 실어야 한다. 우리도 보통 한항차 실으려면 3-4군데를 다녀야 한다. 그리고 깜풍(인니말로 시골이라는 뜻)을 가야 하므로 항해자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우리가 갈 곳은 암본이라는 곳인데, 슬라웨시주의 작은 항구이며 접안부두가 없어 앵커리지에서 작업을 하고 해도도 없어 누가 그려준 스케지를 가지고 항해를 해야 하는 열악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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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도선사라는 것도 없고 캡틴이 자력도선을 해야 하고 들어갈때 보니까 만안의 한가운데 암초가 있다고 선명하게 스케치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조그만 만이지만 잘 들어가서 투묘하고 선적을 하는데, 작업도 느려 아주 오래 있어야 할 모양이다. 상륙해서 합판공장을 구경하였다. 원목을 얇게 돌려깍아 그것을 펴서 여자들이 달려들어 본드칠을 하여 여러장을 겹붙인후 스팀실에 넣어서 쪄서 말린후 합판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본드칠 하는 공정의 옆에 있었는데, 우리는 눈을 뜰수가 없었다. 어찌나 화공약품이 심한지 악취에 눈이 매워 눈물을 질질 흘리는데, 거기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여자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며칠간 선적을 하여 드디어 출항을 한다. 저녁시간이었다. 앵커를 걷어 올리고 렁업엔진을 하는 순간 앞에 조그만 어선이 갑자기 불을 켠다. 선장님은 순간적으로 조타오다를 내리는데, 한 5분쯤 지났을까 배가 심하게 좌우로 흔들리더니 전진을 멈추었다.
아.....좌초였다..
주위를 보니 스케치상에 표시된 한가운데 암초 그곳인 것 같았다. 이놈의 어선땜에 순간적으로 캡틴께서 실수를 한것이다.
그때 2항사께서 안된다고 말리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너무나 다들 어선을 피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본선위치를 확인 안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후진엔진을 걸어 몇번을 이초를 시도하였지만 너무 깊이 올라가 배가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전 사관들이 브릿지에 모였다. 우선 각자 할일이 주어진다. 3항사인 내가 할일은 매시간마다 선체 주위의 수심을 재고 우리배 흘수를 읽어서 보고하는 일이었다. 타수랑 둘이 밧줄에 커다란 철제샤프트를 매달아 치수표시를 한다음 선수부터 선미까지 일일히 물에 넣어서 수심을 재어야 한다. 그걸 매시간 해야 한다. 보통 7-8군데를 잰다. 그러니까 한시간 내내 재러 다니는 것이다. 더 힘든건 흘수를 체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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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흘수선 어디까지 물이 찼는지 확인해야 한다. 선측은 그나마 사다리가 고정이 되니까 그나마 낫다. 선미에 사다리를 내리면 선미는 깍여 들어간 모양이기 때문에 사다리가 공중에 그냥 매달려있는 상태이다. 큰 맘먹고 호흡을 가듬은 다음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밑에 물이 보이고 그날따라 유난히 달이 밝아 물속의 돌멩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너무 힘이들어 빨리 일고 올라 오려니 이놈의 사다리가 꼬여서 한번 감겨 버렸다. 그러면 밑에서 발을 굴러 사다리를 흔들어서 다시 정상으로 오도록 하는데, 어깨 힘이 다 빠지고 잘못하면 손을 놔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사다리를 타고 간신히 올라왔다. 학교 다닐때 푸시업을 열심히 해 둔 보람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 같다. 문제는 새벽 5시 최고조 시각까지 이것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이다.
최고조 시각에 다시한번 후진엔진을 써서 이초를 시도해 보지만 꿈쩍도 안한다. 모두 포기하고 결국 휴식모드로 들어가고 회사에 연락하여 긴급히 터크보트를 요청한다. 터그보트로 댕기면서 후진을 하면 나을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인니 현지 작업감독놈이 담날 올라오더니 켑틴 여기 왜있어, 여기 조심하라고 했지 않냐고 쪼개는데, 콱 쥐어박아주고 싶었다. 워낙 촌이라서 터크보트 오는데도 3일 걸린단다. 3일동안 뭐 세끼식사 할동안 한번씩 계속 나의 유격훈련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더더욱 터그보트와 함께 본사의 해사본부장(상무이사)이 직접 온다고 연락이 왔다. 선장, 기관장님은 이제 몸둘바를 모르게 되었다. 터그보트가 오고 해사본부장 상무님이 오고 내일 최고조 시각(아침 7시쯤)에 이초 시도를 하기로 하고 다들 미리 휴식에 들어갔다. 상무님이 3항사인 저에게 사관휴게실로 부르시더니, "3항사 요새 뭐 영화 재미난게 뭐야?" 하신다. 20년 선배이시고 회사에서 높으신 분이니 떨리는 목소리로 " 예...저..그..저는 런닝맨을 재밌게 봤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배에서는 3항사가 문화.오락 담당이다. 옛날에 그런 영화가 있었다. 영화 한편 틀어 드리고 일찍 쉬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이초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유격훈련을 한다. 최종 수심, 흘수를 재고 보고하고 7시에 터그보트가 선미에서 긴줄을 잡고 땡기면서 우리배는 전속후진으로 엔진을 건다. 엔진이 젖먹던 힘까지 내줘야 한다. 20여분 실랑이를 하니 배가 움찔하더니 정말로 뒤로 쓱 빠져서 다시 수심 좋은 곳에 옮겨져있다. 우리는 브리지에서 박수를 쳤다. 난 속으로 울었다. 너무 좋아서..3일간 힘든 유격훈련을 한거하고 지금부터는 안해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갑판부, 기관부 전원 다 동원하여 선박의 탱크들의 사운딩을 실시한다. 어디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지 안새는지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지인 말이 그곳은 모두 산호초 지역이라 배에 약간의 흠짓이나 생채기 정도만 나고 산호가 부서져버려 데미지가 없을 것이라고 하여 조금 안심은 되었다. 최종 배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은 내리고 우리는 한국으로 출항을 하였다.
어려운 항해를 하여 인천으로 우리배는 입항했고...
강선장님은 사고 책임을 물어 인천에서 직위해제되었다. 후임으론 목해전 20기 김선장님이 올라오셨다.
순간의 실수로 사고나는 현장을 목격한 나의 항해사 시절이었다.
첫댓글 생생한 선박 생활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