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주어지는 구원 / 마 20:1-16
우리들이 운전하면서 길을 가다보면 접촉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겪고 쓴 간단한 글을 있어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는 제목의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승용차를 운전하여 출근하는 길에서 있었던 사고를 경험을 한 사람의 글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옆 차가 바짝 붙여지나가면서 승용차의 문짝을 찍 긁어놓았습니다. 그는 차를 멈추었습니다. 상대편 차를 운전하던 젊은 부인이 허겁지겁 내리더니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여성이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운전에 서툴러서요. 변상해드릴게요.” 그 여성은 바로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여성은 자기의 차 앞바퀴 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진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틀 전에 산 새 차인데 이렇게 찌그러뜨려 놓았으니 남편 볼 면목이 없다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도 그녀가 참으로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사고 보고서에는 운전면허증과 보험 관계 서류 등에 관하여 상세히 적어야겠기에 여러 증빙 서류를 담은 운전석 옆의 사물함을 열어 한 봉투를 꺼내주었습니다. “이건 저의 남편이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필요한 서류들을 담아둔 봉투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또 다시 울먹였습니다. 그런데 그 서류들을 꺼냈을 때 맨 앞장에 굵은 펜으로 다음과 같은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만약 사고를 냈을 경우에 꼭 기억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남편의 글이었습니다. 사고를 당한 이 사람이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예,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중심의 가치관을 버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한 사람의 영혼입니다.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고, 육군참모총장, 컬럼비아대 총장을 거쳐, 1950년 나토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소환되어 한국 전쟁에 참여했고, 1952년 미국 34대 대통령이 된 후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그는 전쟁영웅이었지만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전쟁 대신 평화를 주장했고,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할 줄 아는 진짜 군인이었던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룰 걸 다 이룬 사람입니다. 그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풀지 못한 과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구원 문제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30분간 면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이 막 나오려고 하는데, 그가 목사님의 손을 잡으며, “조금 더 있다가 가주십시오.” 했습니다. 목사님이 “아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라고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제게는 확신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자기 성경을 꺼내놓고,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슨 업적이 있다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내 모든 지나간 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순간, 그분을 믿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인도로, 아이젠하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함께 기도가 끝나고, 그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소! 주여,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여러분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앞에 설 준비를 마쳤습니까? 다른 모든 것을 가졌어도, 다른 어떤 것을 이뤘어도,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덜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를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바삐 가는 운명의 시계를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덜컥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 앞에 갑자기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D. L. 무디를 찾아와서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며 걱정을 늘어놓았습니다. 무디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방주 안에 있던 노아가 안전했나요?” “물론이죠.” “그렇다면 노아가 어떻게 안전할 수 있었죠? 그의 느낌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방주였나요?” 그는 금방 말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바보처럼 지냈는지 알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제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구원은 일종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가 붙들리고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행동(action)이 아닌 반응(reactions)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교회와 사회에 여러 가지로 큰 기여를 했던,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막 천국문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한 사람이 붙들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아,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곳을 통과하려면 약간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뭐, 복잡한 건 아니고 당신이 일생 동안 살아온 것을 점수로 환산하여 1000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소이다.” “1000점이라고요? 별로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요.” “자, 그럼 이제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얘기를 해보세요.” “전 30년 동안 어떤 선교 기관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했지요.” “아! 그래요? 정말 대단하군요. 1점입니다.” “네? 1점이라구요? 그것밖에 안 됩니까?” “네.” “계속하겠습니다. 저는 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한 여자와 결혼하여 무려 40년을 같이 살았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웠죠. 내 아이들은 지금 모두 목사, 교수 등 교계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늘 행복했답니다.” “정말이오? 당신은 매우 훌륭하오. 요즘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매우 드문데... 2점 가산입니다.” “네? 2점이라구요?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1000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좀처럼 점수가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조바심이 난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장년부 성경공부를 인도했어요.” “당신은 정말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이오. 또 1점 가산입니다.” 베드로의 말에 그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겨우 4점밖에 안 되는군요. 그런데 난 어떡하죠? 더 이상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얘기가 없는데.” 결국 그는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난 어떡해요? 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이 못되나 봅니다. 제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내게 구원을 주실 이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베드로는 그제서야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1000점을 얻었습니다. 이젠 들어가도 좋소.”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로는 우리가 1000년을 살아도 1000점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은혜라고 할 때, 종종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원을 우리는 은혜로 값없이 받지만, 그 걸 준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는지를 놓칩니다. 어떤 전도자가 탄광 속에 들어가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광부들에게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을 전하였습니다. 일할 시간이 되자 전도자는 탄광을 나오면서, 광부들에게 “아까 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광부가 신통찮다는 표정으로 대꾸했습니다. “값이 너무 헐해서 그런 종교는 믿어지지가 않소.” 전도자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승강기 앞에 서서 물었습니다. “이제 이 탄광을 나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야 타고 올라가면 그만이지요.” “위까지 올라가는데 한참 걸립니까?” “한 3분밖에 안 걸립니다.” “그럼 나는 애쓸 필요가 없군요.” “맞습니다. 당신은 그냥 타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탄광을 파고, 이만한 장치를 한 사람은,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었겠네요?” “그거야 그렇지요. 이건 지상에서 500m 아래에 있지요. 주인이 돈 쓴 거야 말할 수 없지요.” “네, 옳은 말씀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당신은 ‘너무 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에서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죽이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을비는 농사에 무익하다는 말을 합니다. 추수기에 비가 오면 여러모로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추수기에는 일꾼이 대접받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포도 수확기는 9월 말경입니다. 곧이어 우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포도철 동안은 매우 바쁩니다. 따라서 하루 종일이 아니더라도, 몇 시간만 일하는 일꾼도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품삯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장터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배경 아래에서 천국을 설명하셨습니다.
1절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어릴 때 과수원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과수원이 있으면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있어, 언제라도 가서 따먹을 수 있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모네 집이 백동리(지금 홈플러스 덕진점 부근)에서 복숭아 밭을 해서 가끔 가서 복숭아를 따먹은 기억이 납니다. 과수 농사를 짓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과일을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과수원에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닙니다. 한참 바쁠 때는, 비싼 일당을 줘도 일꾼을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모든 농사가 그럴 거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포도원이 나옵니다. 전주 근교에 포도밭은 관촌 가는 쪽에 색장리에서부터 신리까지 포도밭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연례 행사처럼 모임에서 포도밭을 가기도 했습니다. 요즘엔 일반 포도와 머루 포도, 거봉뿐 아니라 샤인머스켓이라는 품종등 다양합니다. 포도의 새콤달콤한 맛을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하지만 그 포도를 수확하기까지, 일꾼들은 남모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사람의 손이 얼마나 가느냐에 따라, 농산물의 품질이 달라집니다. 특히 수확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너무 일러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됩니다. 추수 때는 딱 맞춰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로 갔습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낼 일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랫사람을 시킬 수도 있는데, 주인이 직접 나섰습니다. 아랫사람이 없어서 주인이 직접 갔을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낼 품꾼을 얻는 것을, 그만큼 중시했다는 말입니다. 천국을 포도원에, 하나님을 집주인에 비유한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직접 나섰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집주인이 직접 장터로 나가 품꾼을 구하는 것은, 흔한 일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말입니다. 주인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드러내줍니다. 이게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열심이 빚어낸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 문제를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습니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께 최고의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취해야 할, 최고의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다고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결과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갔더니, 예상대로 품꾼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품삯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품꾼의 관심은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인을 잘 만나면 일도 편하고, 새참도 푸짐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안 힘든 노동은 없습니다. 거저먹는 노동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인심을 알 수 있는 새참은, 잠시라도 고된 노동의 시름을 달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성실해 보이고 건장해 보이는 품꾼을 불러,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불러 준 주인에게 짧게 “고맙수다” 하며,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뒤꼭지에다 “그려, 다들 수고 좀 해주게” 당부했습니다. 그래도 이른 아침에 나갔으니, 그나마 쓸 만한 일꾼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바쁜 철에는 일 좀 하는 품꾼을 구하기 힘듭니다. 당시가 포도철이었나 봅니다.
3-5절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갔음에도, 필요한 만큼의 품꾼을 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주인은 제삼시에 또 나갔습니다. 여기서 제삼시는 오전 9시를 가리킵니다. 오전 9시면 품꾼이 집에서 다소 늦게 나온 것입니다. 자기를 데려다가 일 시켜달라는 사람이, 그렇게 늦게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혹시나 싶어서 주인이 장터에 나와 봤습니다. 그런데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닙니까? 주인은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은 혼잣말로 “아이고, 오늘도 공치는 줄 알았더니 다행이네” 하며,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은 일꾼들이 일을 잘 하나 한 바뀌 둘러보다, 점심시간에 장터로 나가봤습니다. 그런데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사실 오늘은 더 이상 품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안 봤으면 몰라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오후 3시나 되어 혹시나 싶어 또 장터에 가봤습니다. 그런데 또 일꾼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에 배를 곯고 있는, 그들의 처자식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연신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사했습니다. 점심시간에 간 사람이야, 일당을 0.5로 쳐줄 수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후 3시에 들어간 일꾼은 일당을 계산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6절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오후 5시에도 일꾼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왜 빈둥거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그들은 서 있었습니다. 자기를 일꾼으로 불러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일하기 틀렸다며, 모여서 술 한잔 하고 있었다면, 주인이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물음에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7절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주인은 일은 해야 먹고 사는데, 자신들을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은혜에 감지덕지했습니다. 그들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믿기지 않은 표정을 하며 포도원으로 뛰어갔습니다. 지금 들어가면 한 시간 일 합니다. 그럼 얼마나 받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늘은 마누라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됩니다. 아빠만 기다리고 있는 자식들에게, 면목이 서게 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할 기회를 준, 주인에게 은혜 갚는 심정으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자기들 평생에 그렇게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한 시간이 잘 안 가는데, 오늘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품삯을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8절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품꾼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열심히 흘린 땀에 대한 결실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노동을 축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결코 노동을 고역이나 고통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노동의 과정이 고역스러울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노동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 틀림없습니다. 정상적인 노동이라면, 기도보다 덜 거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노동을 천시하고, 기도를 신성시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노동을 통해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십니다. 품삯을 받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노동한 사람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지만, 노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괴로운 시간입니다. 일꾼을 부를 때는 주인이 직접 불렀지만, 품삯을 나눠줄 때는 청지기에게 맡겼습니다. 청지기에게 감사 인사 받도록 해준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충성하는 청지기를 챙기고 배려하는, 주인의 넉넉한 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명을 받들어 품삯을 나눠주었습니다.
9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제십일시 곧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게 무슨 횡재입니까? ‘아니,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다니?’ 그들은 너무 좋으면서 맘에도 없는 말을 했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는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요.” 청지기는 웃으며 “그게 우리 주인의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습니다. 이 장면은 먼저 온 자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10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그들은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자기들에게는 조금 더 줄줄 알았습니다. 당연한 생각입니다. 저 같아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손을 벌렸는데, 자기들의 손에 한 데나리온이 쥐어졌습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누가봐도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이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11-12절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에 대한 원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원망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아마 누구나 그 자리에 있으면, 한 마디씩 던졌을 것입니다. ‘갑의 횡포도 유분수지.’ 이런 식이면 앞으로 일꾼 쓰기 힘듭니다. 누가 오려고 하겠습니까? 청지기를 둘러싸고 소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떨어져 그것을 지켜보던 주인이 다가왔습니다.
13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 중에는 좀 심하게 따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마도 그는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일 것입니다. 2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그러나 그 이후 시간대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이라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제삼시에 포도원에 들여보낸 일꾼들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했습니다. 제육시와 제구시에 들여보낸 일꾼들에게, 그와 같이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십일시에 들여보낸 일꾼들에게는, 아예 그런 말도 없었습니다. 사실 억울하기로 치면,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가장 클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 생각은 다릅니다. 주인은 그에게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품삯을 한 푼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계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14-15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4절을 보면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여기에서 “네 것”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있었을 것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것 아니냐? 이것은 정당하게 받은 것이다. 합당하게 받은 것이요, 또 은혜롭게 받은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세요.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소관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소관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것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나의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 삶의 기준입니다. 주인의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품꾼은 기분이 나쁩니다. 기분이 나쁜 거 하고, 사실관계하고는 별개입니다. 그러니 그가 주인에게 마땅히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을 때, 주인의 한 마디가 더해졌습니다.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 말을 들은 품꾼은 폭발직전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입니다. 만일 이 비유가 오늘날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면,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사용자 편을 든 것이 됩니다. 가진 자의 갑질을 옹호하는 것이 됩니다. 비유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품삯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구원 앞에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갔다는 말은, 일찍부터 교회 다녔다는 말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또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편의상 노동시간을 12시간으로 잡고, 인생을 80으로 계산해보면, 제삼시는 20대요 제육시는 40대요 제구시는 60대요 제십일시는 70대입니다. 예수는 젊어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늘그막하게 믿어도 구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헌신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제열한시에 들어간 일꾼처럼, 일한다고 해도 얼마하지 못합니다.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물질적인 헌신을 하고 싶어도, 자식들한테 물려주고 가진 게 없습니다. 여러모로 제약이 따릅니다. 이 땅에서는 모릅니다. 예수 잘 믿는 것과, 그럭저럭 믿는 것의 차이를 별로 못 느낍니다. 주의 일에, 주님의 몸된 교회 일에 충성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때 가면 차이를 느끼는데, 문제는 그 차이를 좁힐 기회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믿으나,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 또는 제십일시에 믿으나, 똑같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은, 구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상급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하되, 하늘상급을 위해 예수를 더 잘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더욱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의 은혜는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하시며 허락하신 현재라는 시간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고, 겸손히 주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영광의 그 나라에 이르는, 참으로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과 상급이 충만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생은 태도로 결정됩니다 / 마 20:17-28
한국 속담에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읆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당에 있는 개도 3년 정도 있다보면 글을 읽고 노래를 한다는 뜻입니다. 곧 무식쟁이라도 유식한 사람과 사귀면 견문이 넓어지고, 또 무슨 일 하는 것을 오래 오래 보고 듣게 되면 자연히 할 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넛가게에는 빵을 만드는 baker가 있고 baker를 돕는 helper가 있습니다. 그런데 helper를 오래하면서 baker가 하는 일을 잘 관찰하다보면 helper도 어느새 baker처럼 일할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관찰력이 떨어져도 helper를 3년 정도하면 최소한 baker일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배우는데 3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짧은 기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어떤 일을 배우게 되면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전문가 소리를 들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도 3년정도 일하고나서 어느정도 일에 익숙해지면, 더 좋은 조건의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먹고 자면서 약 3년동안 같이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먹고 자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술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면서 3년을 지낸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승을 닮아가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아까 소개해드린 속담처럼 강아지도 3년을 서당에서 지내면 글을 읽을줄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제자들이 스승을 3년 동안 따라다녔으면 당연히 어느 정도 스승을 닮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지독하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중에 하나는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권력자나 재력가와 가까이 지내기 보다는 창기와 세리처럼 사람들이 거들떠보기는 커녕 업신여김과 무시를 당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주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럴때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회적인 약자, 소외된 자, 힘없는 자, 병든 자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잘 알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3년이나 스승되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님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흉내는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도 이전에 가졌던 고정관념과 편견을 바꾸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의 관심은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힘없는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항상 최고가 되는 것, 일등하는 것, 강한 자가 되는 것, 남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류분석학의 창시자 에릭 번(Eric Berne)은 인생태도를 4가지로 말했습니다. 먼저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① 자기긍정 :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 ② 자기부정 :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 ③ 타인긍정 : 나 외에 타인과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 ④ 타인부정 : 나 외에 타인과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 이를 바탕으로 네 가지 기본적인 인생태도를 정리했습니다.
제1태도 : 자기긍정 타인긍정, 함께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공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win-win의 패러다임입니다.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고, 자신과 상대의 목적을 함께 달성합니다.
제2태도 : 자기부정 타인긍정, 문제/갈등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고 움츠려듭니다. lose-win 패자의 패러다임입니다. 그냥 내가 지고 살아야 편합니다.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자신의 목적을 포기합니다.
제3태도 : 자기긍정 타인부정, 문제/갈등상황에서,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win-lose의 패러다임입니다. 무조건 이기려듭니다. 상대에게 상처주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제4태도 : 자기부정 타인부정, 문제/갈등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lose -lose의 패러다임입니다. 자기 포기, 허무적인 자세를 갖습니다. 상대에게 상처주고 자기도 상처받거나, 문제/갈등 상황이 두려워 세상과 마주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제1태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갈등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의 부정성이 나타나면서, 제1태도보다는 제2, 제3, 제4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여.우.당(여자들이여, 우아하고 당당하게 살자) 원장 김미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하루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하루를 대하는 자세가 바뀌고, 그 바뀐 하루하루가 1년이 되고, 5년이 되고, 10년이 되면, 인생은 바뀌게 된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또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태도입니다. 삶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 10퍼센트와, 그 일에 대한 나의 반응 90퍼센트로 이루어집니다. 태도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실력의 차이를 메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명의 지원자가 실력과 경험 면에서 대동소이하다면, 더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 선택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회사가 경영상의 이유로 사원 둘 중 한 명을 해고하려고 할 때, 비슷한 실력이라면 태도가 더 나쁜 쪽을 선택하리라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은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태도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하는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태도가 불량한 사람이 성공한 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잠시는 재능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태도에 문제가 있어도 반짝 성공은 할 수 있지만, 꾸준히 성공을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요즘은 스포츠에서도 인성을 중시합니다. 2015년 부산 벡스코서 열린 ‘플레이 더 챌린지’ 무대에서, 제일기획 신치용 부사장이 강연을 했습니다. 신 부사장은 지난 20년간 삼성화재 배구팀 감독으로 정규리그 19회 출전, 16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일기획 부사장으로 발탁되며 정든 코트를 떠났습니다. 신 부사장은 배구 팬들에게는 전설적인 감독으로 영원히 기억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렇게 한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에게는 뭔가 비결이 있습니다.
첫 번째 비결 : 성공적인 팀을 이끌기 위해서는 진정성과 솔선수범이 필요합니다. 삼성화재 배구팀을 챔피언으로 이끈 신치용 부사장은 ‘진정성’과 ‘솔선수범’을 그 비결로 꼽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팀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선수에 대한 진정성 있는 마음이 필요해요. 팀 운영을 하려면 선수들이 나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대할 때, 비로소 선수들도 나를 믿게 되죠.” 또한 솔선수범하는 자세 역시 그가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신 부사장은 “항상 선수들보다 일찍 출근했다. 감독이 일찍 오면 선수들도 다 일찍 오게 되지 않겠나?” 라며 웃음 지었습니다.
두 번째 비결 : 팀워크를 증진하려면? 리더십보단 멤버십입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팀워크가 핵심입니다. 신 부사장은 “팀워크는 리더십보단 멤버십”이라 답했습니다. 그는 “멤버십은 바로 ‘인성’이다”라며, “동료에게 배려하고 헌신하면 다시 돌아온다. 그게 바로 팀워크이자 선 기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신 부사장은 이러한 멤버십만 있다면, 어떤 일을 해도 어렵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스태프와 구단, 선수의 삼각 구도가 잘 맞으면 힘들어도 행복합니다. 반면 멤버십이 좋지 않다면 우승해도 불행하죠.”
세 번째 비결 : 어려울 때일수록 정도(正道)를 지킵니다. 신 부사장의 수첩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도(正道)를 지킨다, 나는” 그는 “힘들 때마다 이 말을 되새겼다”라며,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부딪쳐야 할 때는 부딪치고,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겁해지면 선수들은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정정당당하게 간다면 무너질지언정 다음을 기약할 수 있죠.” 그의 이러한 정신은 스승 양인택 감독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양 감독은 신치용 부사장을 감독의 길로 이끌어 준 멘토입니다. “사나이가 비겁하게 사는 거 아니다”라는 양 감독의 한 마디는 지금까지도 그가 되새기고 있는 말입니다.
네 번째 비결 : 나를 버티게 한 이유, 책임감입니다. ‘배구 감독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느냐?’고 묻자, 신 부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더 안정적인 일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나를 버티게 한 이유는 책임감입니다.” 그는 “감독은 항상 책임감을 느끼고 팀과 선수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힘든 일도 극복해 내는 것이 책임감”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신 부사장의 책임감은 2012년 리그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당시 삼성화재 배구단은 리그 중반까지 꼴찌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선수들을 독려했습니다. “나는 비록 지금은 꼴찌지만 우승을 꿈꾸고 있다. 꼴등을 하더라도 도전은 계속해야 한다.” 이 말은 선수들에게 원동력이 됐습니다. 선수들은 그 결과 기적 같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다섯 번째 비결 : 작은 도전이 습관이 되면 큰 도전이 됩니다. 신 부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은 도전이 모여 습관이 되고, 결국 큰 도전이 된다.” 그리고 “나의 도전은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년 내내 선수들보다 먼저 출근했습니다. 말로 하기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줬습니다. 늘 솔선수범했고 결국 좋은 성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신 부사장은 “정상에 있는 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편안함과 유혹에 넘어가 ‘절제’를 소홀히 한다면 선수를 절대 보호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음 약해지지 않고 오직 정도를 걷는 것. 그에게는 이것이 감독의 역할이자 숙명이었습니다.
신 부사장이 말한 다섯 가지 비결은, 하나 같이 인성 곧 태도와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언젠가 어떤 기자와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욕을 절대 못 쓰게 합니다. 감독은 물론이고 선수들끼리도 그렇습니다. 쌍소리 많이 하는 선수는 다른 팀으로 내보냅니다. 용병을 뽑을 때도 인성을 첫 번째로 고려합니다. 삼성화재가 용병을 잘 뽑는다고 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잘 뽑는 게 아니라 들어와서 잘합니다.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는 선수들은 폼만 잡고, 국내선수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병이 팀워크 속으로 얼마나 들어오느냐가 중요합니다. 혼자서 플레이 하려고 하고, 시합이 잘 풀리지 않으면 동료에게 화를 내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런 선수는 팀을 망칩니다. 신 부사장은 인생은 태도가 결정한다는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은혜로 구원이 주어집니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원은 은혜입니다. 은혜 아니면 구원받을 존재가 없습니다. 세상에 누가 자기 공로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세상에 누가 자기 선행으로, 자기 품행으로, 자기 덕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100% 불가능합니다. 100%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해서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서 보내셔서,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위에 반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action(행함)에 reaction(반응)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믿음 위에 서 있는지를, 예배 때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 순간순간 자기 믿음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누려도 구원 받지 못하면 헛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지 않고, 아버지의 부요하심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썩 바람직한 신앙은 아닙니다.
17-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자신이 영광 받으러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에 성공하기 위해서 갑니다. 말은 재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서울에 가면,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가능할 거라는 믿음으로 올라갑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신다니 신났습니다. 다들 촌사람들인데 서울에 올라간다니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분에 김 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으러 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에 살아날 거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전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다들 심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예수님께 항변했다가 사탄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도 몇 번 들어 이제 적응이 됐는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바다에 던져져도 살 수 있고, 불구덩이에 던져져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어서였나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문제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내린 최종 결론입니다. 이게 막연한 믿음입니다. 이게 생각 없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안 괜찮다는데, 자기는 괜찮다고 하는 것이, 믿음일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했다면, 20절 이하의 촌극이 벌어졌을까 싶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말씀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할 수 있을까가 고민입니다. 하루 성경 한 장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소원 중의 하나는 전교인이 자기 나이만큼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최소한 성경을 1년에 정독으로 일독은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 내 영혼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가 신앙상태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내 마음이 어떤 감정이 생기는가가 신앙상태입니다.
20절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말씀에서 떠나 있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청탁을 한 것입니다. 자기 두 아들을 잘 봐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두 아들은 예수님의 핵심 제자입니다. 열둘에 속한 것만 해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세 손가락 안에 든 거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잘 나가는 랍비의 최측근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게 부모 마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핵심 제자의 어머니란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아들들 자리청탁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참 심란했을 거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말이 예수님하고 다르고, 마음이 예수님하고 다르고, 뜻이 예수님하고 다르다면, 그걸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힘 빠지게 만드는, 두 제자와 그 어머니입니다. 두 제자의 어머니가 청탁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자기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역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주의 나라를 세울 줄 알았던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종교지도자들을 정리하고, 주의 나라를 세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의 표정만 봐도,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죽음 얘기를 꺼낸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이번 일에 목숨을 건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또 그 어머니는 예수님하고도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적극적으로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한 내용은 예수님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자신이 어머니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대답을 들었는데, 그럼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답을 하셨습니까?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곤란한 부탁을 받았지만 책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무지가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런 것을 보면 바른 기도는 바른 지식에서 나옵니다. 말씀에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5년 전 여름, 진안에서 1남신도, 1여신도 모임 중에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각자마다 느낀 점이 다르겠지만, 저는 그 영화를 보고 어려서부터 믿게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주인공 리스트로벨 기자는 너무 어렵게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쉽게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그게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거는 일이니까,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긴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을 취미 생활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면 몰라도,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 온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가 끝내 예수 믿기로 했을 때, 내뱉은 말이 기억납니까? “하나님, 당신이 이겼습니다.” 지금껏 하나님을 이겨보겠다고 싸웠으나 자신이 졌다는 고백입니다. 무신론자로서 신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그래서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을 찾아 도움을 구했지만, 끝내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전도자가 에스겔 36:26절 말씀으로 격려했습니다. 겔 36: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의 아내는 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남편에게 새 영을 주옵소서.” “남편에게 새 마음을 주옵소서.” “그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야말로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교과서입니다. 단순히 배우기 위한 교과서가 아닙니다. 말씀을 정독으로 1독하되, 1독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읽다가 말씀 묵상에 잠기고, 때론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최고의 성경 읽기가 될 것입니다.
어머니와 두 아들은, 예수님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란 물음에, 겁 없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잘하면 자기들이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을 수 있다는, 성급한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주의 나라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주의 나라에서 좌편에 우편에 앉게 될 날이, 바로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3년 주님 따라다닌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나이다” 대답한 후, 주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23절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대답은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너희들은 못마셔.”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마시겠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실 잔이라면 우리라고 못 마시겠어.’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마실 잔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누구를 주의 나라 좌우편에 앉게 할 힘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대로 사태 파악을 한 열 제자들은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사실 열 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같이 따라 다녀놓고, 결정적일 때 자기들만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하니, 그게 말이 됩니까? 더구나 자기 엄마를 내세워 청탁을 했으니, 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제자는 머쓱해졌습니다. 뭐라고 변명하기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그 자리에 있기가 쑥쓰러웠던지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어색한 분위기가 더 이상 계속되면 곤란합니다. 제자들은 다들 예수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먼저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고관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는 것쯤은, 제자들도 아는 바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직접적으로는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 뜻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본래 높은 사람들은 그런 줄 알았습니다. 본래 권력자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도 어머니를 통하여,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을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기들이 아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6-27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제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는 말씀이었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작은 자를 밟아야 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낮은 자를 딛고 서야 했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고, 먼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교회에서 조차도 이 리더십은 오랫동안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리더십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기업에서까지 섬김의 리더십을 공부합니다. 섬김을 통해 얻은 리더십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권위적인 리더십은 무너졌다하면 비참하게 무너집니다. 그건 태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권위를 지탱해준 태도에 문제가 생기면, 더 이상 리더십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섬김의 리더십은 다릅니다. 섬김은 진정어린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섬김을 받고나면, 그 리더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리더를 위해 기쁘게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섬김의 리더십에서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남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목숨을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이 될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값을 치루는 일은, 오직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으로 섬기는 일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목숨으로, 우리의 이웃, 우리의 형제자매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목숨으로 섬긴다는 것은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목숨처럼 귀한 것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럼 목숨처럼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곧 우리의 목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우리의 목숨도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목숨인 시간을 투자해서 돈을 벌게 됩니다. 또 목숨인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지식을 쌓고 재능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숨을 내어주며, 남을 섬긴다는 것은, 내게 목숨같은 시간과 재물과 지식과 재능을, 나누어주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큰 자요, 일등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 자가 누구입니까? 곧 어린아이처럼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관심만 가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과 같은 시간, 재물, 지식, 재능을 나눔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 일등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정말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자신들의 옛사람의 모습을 쉽게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저희들도 제자들의 모습과 다를바 없음을 고백합니다. 수십년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간, 저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을 본받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제는 저희들의 목숨인 시간과 재물과 지식과 재능을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러한 삶을 살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큰 자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간절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 마 20:29-34
단순한 게 힘입니다. 현대사회는 대단히 복잡해 졌고, 한때 그 복잡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의 성공 키워드는 ‘단순함’이다”라는 얘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능력 중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셨던 것도 바로 이 ‘단순함’이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복잡한 과정들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다 거쳐주셨기 때문에 우리마저 그걸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는 주님의 자신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신 말씀은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가 되기 위한 모든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치를, 이미 주님께서 취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할 일은 그대로 믿고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역사는 다 이런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것으로가 아닌, 바로 단순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단순하다’라는 말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아서 오해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함께 할 일은 진짜 단순하다는 게 뭔가를 찾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뜻을 제대로 알고 그대로만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을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 참된 단순함을 찾고, 그것으로 승부를 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이란 책이 있습니다. 상명대학교 강상욱 교수가 쓴 책인데, 과학을 하며 느낀 과학 현상과, 기독교와 불교에 나타난 가르침의 유사성을 모아, 이렇게 책으로 낸 것입니다. 그 책의 5장에 ‘간절하게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강교수는 ‘모든 종교가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전한다’며, 그 말을 들은 어떤 친구의 의문을 전합니다. 그 친구는 “간절히 바라서 이루어진다면, 한 달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로또 1등 당첨시켜 달라고 눈물 흘려가며 기도하면 이루어지겠네?”라고 놀립니다. 그에 대해 강교수는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에, 기대기만 하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꿈 측면에서, 이 말이 과학적 심리적으로 지지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한 고교생의 소원이 외국어 영역에서 1등급을 받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바람은 매우 간절하여 매일 기도하며 절실하게 바랐다고 해 봅시다. 그 학생의 바람이 그렇게 간절했다면, 집에 오면 TV나 인터넷으로 시간을 때우겠느냐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간절하면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당장 주변의 외국어영역 고수를 찾아가 방법을 전수받고, 매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배울 것입니다. 너무나도 간절한데, 그날 해야 할 양을 채우지 못했다면, 잠이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그 날 해야 할 양을 하지 않고 잠들었다면, 그건 진정으로 간절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날 해야 할 양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잠이 잘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1등급에 도달하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성적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교수는 자기 경험을 들려줍니다. 자신은 대학원 시절 석박사를 마치고, 박사 후 과정(Post Doctor)으로, 미국의 MIT(메사추세츠공과대학)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많아야 1~2명 가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가겠느냐?”며 주위에서 의아해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상하게 당시 MIT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했습니다. 그런 마음에 대학원 시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고, 결론은 더 좋은 논문을 많이 쓰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아이디어와 성실한 실험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매일 책과 논문을 읽으며, 그날 해야 할 실험이 끝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MIT에 너무 가고 싶어서 단 하루도 소홀히 보내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아이디어가 실패해서 의기소침할 때도, 졸업 후 MIT에서 연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도전했고, 그렇게 6년이 지난 후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강교수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자기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사례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면, 그 다음은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오며, 그렇게 살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몇 천배는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매우 절실한 마음 상태를 우리는 ‘간절하다’라고 표현합니다. 간절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매우 지성스럽고 절실한 마음 상태’를 나타냅니다. 정성 ‘간(懇)’, 간절할 간, 문지를 ‘절(切)’ 자를 함께 씁니다. 한자 의미대로 따져보면, 정성을 갖고 문지르는, 그야말로 정성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간절한 것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간절해야 이루어집니다. 간절함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간절하여 이루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올림픽 같은 세계 대회에서 메달이 왜 귀합니까? 왜 선수들이 메달을 따고 눈물을 흘립니까? 쉽게 딸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절하여 이루었기 때문에, 눈물 나게 기쁜 것입니다. 사법시헙 제도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존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지만 결국 사라졌습니다. 예전 시골 동네에서는 사시에 붙으면 동네잔치를 했습니다. 사시를 한 번에 붙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방의 쓰라림을 몇 번씩 맛봅니다. 그럴수록 간절함은 더해집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사시 합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충분히 동네 잔치할 만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계십니다. 한 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알고 가시는 길입니다. 단순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는 것과,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까지 알고 가는 것은 또 다릅니다. 주님의 마음은 당연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 속도 모르고 청탁을 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둘은 핵심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3인방에 들어갑니다. 요한은 별명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습니다. 그럼 3인방 중 베드로만 쏙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이 두 제자에게 분노했는데, 아마 베드로가 가장 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껄껄 웃으시며, 다른 제자들을 달래셨습니다. 최고의 리더는 섬김의 리더라는 것을, 참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의 리더는 섬김의 리더입니다. 섬김의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아들 청탁의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고, 교통정리가 잘 됐습니다.
29절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생각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엄마는 중병에 걸려 죽어 가는데, 자기 배고픈 것만 생각하고,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는 갓난애 같습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큰 차이가 있을까 싶습니다. 다 자기 살기 바쁩니다. 주님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주님이 1번이 아닌 자기가 1번입니다. 교회가 1번이 아닌 자기 가정이 1번입니다. 주일이 1번이 아닌 자기 취미활동이 1번입니다. 십일조가 1번이 아닌 생활비 지출이 1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큰 무리였습니다. 십여 명을 큰 무리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꽤 상당한 숫자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께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헌신할 마음도, 주님께 충성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따랐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님이 일하실지 모르니, 그들은 잠시도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그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숫자가 100이면 뭐하고, 1000이면 뭐하겠습니까? 몸이 성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양호합니다.
30절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맹인 두 사람은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늘 그 자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고, 누가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릅니다. 그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맹인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면, 광명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상상만 하겠지만, 살다가 시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다면, 생활하기에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역시 그것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 곁을 지나가게 되었고, 그들이 그걸 알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왜? 간절했으니까요. 그들은 눈 뜨는 것이 간절했습니다. 자기 평생에 두 눈으로 광명세계를 보고픈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하면 꿈이 생깁니다. 간절하면 불타는 소원이 생깁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게 진정한 간절함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집니다. 간절함의 깊이가 점점점점 더해집니다. 왜 기도하다가 맙니까? 왜 몇 번 기도하다가 중간에 관둡니까? 간절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말로는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아직은 살만해서 그렇습니다. 간절하면 버팁니다. 진짜 간절하면 죽을힘을 다해, 기도의 자리에서 버팁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여사는 생후 1개월 쯤 되었을 때에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장님이었지만, 8천여 편의 찬송시를 쓰게 되었고, 우리찬송가도 애창되는 곡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찬송시 중에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가 있습니다. 우리 말 제목이 ‘인애하신 구세주여’라고 번역되어 있고, 원작에는 ‘나를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라는 제목입니다. ‘오, 자비하신 구세주여. 나의 비천한 애원이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마시고 들어주옵소서. 나를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 이것이 이 찬송의 원래 내용입니다. 영어찬송 1절에 ‘Pass me not, 나를 지나치지 마십시오.’라는 탄원이 3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맹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안 보였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게 중요합니다. 이게 간절함입니다. 정말 간절하면 다른 사람이 의식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꾸 옆 사람이 의식된다면, 덜 다급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응답되려고 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눅 22: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행 12: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약 5:17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성경에서 “간절히”가 빠진 기도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맹인이니까 다른 사람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예수님께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최고의 약점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아쉬움이 있어야 예수님을 찾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예수님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게 다 자기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압니다. 그러나 인생에 하자가 생기면 예수님을 찾습니다. 어쩜 그래서 주님이 우리 환경을 흔드시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환경이 흔들리면, 예수님 찾으라는 사인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사인으로 눈치 채야 합니다. 맹인이 눈에 뵈는 게 없이 무대포로 달려드니, 누가 그들을 막아서겠습니까? 때로는 그런 무모함도 필요합니다. 계속 재기만 하면, 아예 시작도 못할 수 있습니다. 맹인은 잃을 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몸을 사리게 되고 소심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잃을래야 잃을 게 없으니, 인생의 전부를 걸고, 간절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맹인의 간절함은 소리의 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이 이 소리를 얼마나 크게 했을 거 같습니까? 예수님 주위에 큰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큰 무리가 조용히 주를 따랐을까요? 그랬다면 맹인들이 예수님을 조용히 불러도 됐습니다. 그런데 30절에 보면 “소리 질러” 라고 했습니다. “엄마” 이 정도는 소리 질렀다고 하지 않습니다. “야, 너 왜 소리 지르는데...” 할 정도면 “엄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엄마를 향해 차가 돌진해온다면, 그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엄마~”
어떤 사람은 소리 높여 부르짖어 기도하면, “아니, 하나님이 귀라도 먹었대? 하나님이 주무시기라도 한 대? 왜 그리 소리를 질러대?”라고 합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맞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 소리를 질렀다는 헬라어의 ‘크라제이’는 보통 소리가 아니라 비명입니다. 이 비명을 성경 속에는 어떤 데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지르는 소리와 같은 말로 씁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 소리치는 그때의 소리를, 여기에서 소리 지른다고 하는 말과 같은 말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건 비명을 질렀다는 말입니다. 느닷없이 맹인들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니, 무리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잠잠하라”고 꾸짖어봤자 소용없습니다. 간절한 사람에게는 그게 안 통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간절함이 더 커집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세요. “더욱 소리 질러” 그렇습니다. 그게 간절함입니다. 누가 뭐라고 한다고 입 다문다면, 진정한 간절함이 아닙니다. 소리 질러서 안 되면, 더욱 크게 소리 지르는 게 간절함입니다. 간절하면 포기를 모릅니다. 간절하면 장애도 극복합니다. 간절하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자기들을 향해 꾸짖는 사람들은 큰 무리입니다. 숫자만 많은 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두 눈이 멀쩡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맹인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담대했습니다. 그게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에서 담대함이 나오는 법입니다. 간절한 사람의 입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같은 말로 반복하여 소리 질렀습니다. 새로운 말을 하려고 긴 생각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반복하여 지른 소리는 짧고 강렬했습니다. 사실 이보다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면 그걸로 끝나는 것 아닙니까? 맹인들의 이 짧은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습니다.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이 첫 번째 소리에 반응을 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못 들었을 거 같지 않은데, 그냥 지나치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첫 번째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가 예삿소리가 아닙니다. 한 맺힌 소리입니다. 간절함이 절절히 흐르는 소리입니다. 안 들어주면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거 같은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첫 번째 소리에, 왜 반응을 안 보이셨을까요? 그들이 어떻게 나오나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간절함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눈 뜨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소원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님은, 여러 가지 제약으로 모든 사람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을 하셔야 했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부터 고쳐주시기로 하는 거였습니다.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고침받아도 그만, 그렇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고침 받아도 감사가 작습니다. 그러나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침 받아야 합니다. 고침 받으면 큰 감사를 합니다. 첫 번째 소리를 외면하신 예수님께 실망하여, 그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관뒀다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예수님이 본심은 그게 아닌데, 가끔 맘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것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게 믿음 테스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간절함 테스트라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때 맹인처럼 더욱 소리 질러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이 두 번째 소리도 못 들으신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번째 더욱 소리 질러야 합니다. 그렇게 언제까지 소리 질러야 합니까? 주님이 머물러 서실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응답받을 때까지 입니다.
간절하면 물러서지 않습니다. 간절하면 기도를 기권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머물러 서실 때까지, 주님이 응답의 말씀을 하실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들에게 이 말은 꿈에라도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간절함에 포기하지 않고 소리 질렀더니, 평생에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꽝(?)이 없는 로또를 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심장은 마구 쿵쾅거렸습니다. 잠시 후면 광명을 얻게 됩니다.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공중의 새를 볼 수 있습니다. 푸르른 초목을 볼 수 있고, 널따란 들판을 볼 수 있습니다. 기어 다니는 동물을 볼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걸어 다니는 사람, 가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대답해야 했습니다. 물론 어렵지 않은 대답입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이 한 가지 대답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춘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33절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평생의 한을 풀게 됩니다. 그 동안의 한 맺힌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을 하면서, 자신을 마음에 그렸습니다. 광명을 얻고 어린애마냥 기뻐 뛰는 자신을 마음에 그렸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립니다. 결국 그 마음의 그림대로 됩니다.
산악인 엄홍길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심상사성(心想事成)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그리는 대로 일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m 이상 16좌 등반에 성공한, 세계 최초의 산악인입니다.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22년 동안, 무려 38번의 도전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후배 6명과 셰르파 4명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6좌 등반에 도전하고 완등을 간절히 바라며, 노력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꿋꿋이 꿈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는 그의 말이 울림을 줍니다. 그게 간절함의 능력입니다. 마음에 그림을 그린 후,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그 그림이 현실이 됩니다.
34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심장을 가지셨다는 말을 기억합니까? 긍휼의 심장을 가지신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눈은 눈이되 볼 수 없었던 눈, 시신경이 죽어 있는 눈을, 생명이신 예수님이 손으로 만지자 곧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치유행위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만지기만 했는데, 죽은 시신경이 살아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생명의 주님에 의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그들은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뭐라도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도, 빈 몸뚱이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몸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이작 와츠의 고백에도 나옵니다. 찬송가 143장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가사처럼 몸 밖에 드릴 것 없어서, 이 몸 바치는 것입니다. 가진 것 빼놓고, 떼어놓고, 숨겨두고,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면 안 됩니다. 그에 대한 경고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입니다.
에이스 페르시발은 캐나다가 낳은 최고의 운동경기 코치입니다. 그는 38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서 운동에 관한 과학적인 분석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한 가지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이 원칙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선정한, 그가 만든, 그가 발견한 원칙이 뭔 줄 압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멈추지 말라.’ 그 한 마디입니다. 멈추지 아니하고 동일한 운동을 계속해서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신앙에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기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응답해 주마고 누누히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맹인은 오늘 여리고를 빠져나가는 길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됐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미 운명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영적 맹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눈뜨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주님을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간절하면 이루어집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하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하고, 삶의 문제 해결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함보다 크거나, 자신의 영적 성장보다 앞서지 않는 성도, 주님만을 바라보겠다는 간절함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부르게 하옵소서. 그의 사랑과 진리의 빛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치료하여 주옵소서. 이제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모든 상처가 치유를 받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을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맘껏 누리며 전하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