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
가락국기에 수록된 왕릉이 실제로 있다. 어떻게 이렇게 오랜 역사 유적이 훼손은 커녕 엊그제 봉분같이 잘 보존되어 왔는지 의아할 정도다. 최근 함안의 아라가야의 봉분이 일제 발굴의 훼손을 넘어서는 노력 덕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가야가 주목받고 있는데, 수로왕릉까지 더해 가야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질 거 같다.
1.방문지대강
위치 :
방문일 : 2023.12.24.
입장료 : 없음
주차비 : 1,000원
2. 둘러보기
함안의 박물관에서는 아라가야 말이산고분군에서 발굴한 순장 흔적을 전시하고 있는데, 금관가야의 수로왕릉에서도 임진왜란 도굴당할 당시에는 순장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가야 여러 국가에서는 아마 대부분 순장을 했던 듯하다. 고대국가에 머물고 중세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인간에 이원적인 순장의 세계관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가야국이 왜 중세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대국가로 머물렀는가가 여러 가야의 흔적을 더듬어보며 제기되는 의문이다. 가야의 중심 지역인 경남 지역과 신라의 중심지역인 경북 지역이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여러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각각 다른 두 나라의 연원과 함께하지 않나 하는 추측도 인다.
1) 수로왕 소개
가야(伽倻) 또는 가락(駕洛)의 건국신화는 두 가지로 전한다.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 대목에서 최치원(崔致遠)이 쓴 이정(利貞)이라는 승려의 전기를 인용해서 말한 것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에게 응감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고 했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가야 대목에서는, 하늘에서 자주색 끈이 한 가닥 내려와 둥근 알 여섯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알에서 깨어난 아이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에서도 각기 다섯 가야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했다. 그것은 건국시조가 하늘과 바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여섯 가야의 시조 가운데 수로왕의 내력만 자세하게 말한 것이, <삼국유사> 다른 곳에 수록된 별도의 기록 <가락국기>(駕洛國記)이다. (한국문확통사 1권 관련부분)
2) 수로왕릉 소개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무덤의 높이는 약 5m이다.
왕릉의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전사청(典祀廳)·제기고(祭器庫)·납릉정문(納陵正門)·숭재(崇齋)·동재(東齋)·서재(西齋)·신도비각(神道碑閣)·홍살문·숭화문(崇化門) 등의 건물이 있다. 아울러 신도비·문무인석(文武人石)·마양호석(馬羊虎石)·공적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다시 퇴락해져서『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세종 28년(1446)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년(선조 13)에 당시 영남관찰사이며 수로왕의 후손인 김허수가 수로왕비릉(허왕후묘)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축한 뒤였다. 수로왕비릉 역시 높이 5m정도의 원형봉토분으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움무덤〔土壙墓〕또는 돌덧널무덤〔石槨墓〕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지봉유설』에 따르면 왕릉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石室墓〕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지봉유설』에서는 임진왜란 때 수로왕릉이 도굴당했음을 밝히고 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47년(인조 25)에는 왕명에 의하여 허적(許積)이 묘비문을 지어 비를 세웠고, 1865년(고종 2)에는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능소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크게 지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홍살문
가락루
숭화문
2) 소개
수로왕릉 :
사적 제73호. 원형봉토분으로서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른다. 이 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소재지와 위치가 부합되고 있어서 수로왕릉으로서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왕릉은 신라말의 이 지역 호족인 충지(忠至), 고려시대 양전사인 조문선(趙文善)과 관련한 기적(奇蹟)을 보였던 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80년(선조 13)에 경상도관찰사였던 허엽이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능비를 세웠는데 '가락국 수로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봉유설 芝峰類說〉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로왕릉을 도굴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광 속이 무척 넓고 두골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매우 컸다. 널 옆에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되었다. 이것을 광 밖에 내다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순장된 사람들일 것이다"라고 하여 순장묘일 가능성을 짚고 있다.
1878년(고종 15)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김씨·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했다. 이때 안향각(安香閣)·석양·비각 등이 설치되었으며 왕릉의 전면에는 가락루·연신루·회로당 등의 건물도 있다. 능역은 건물 15동 47칸, 임야 1만 5,170평이다. (다음백과 전재)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에서 순장된 흔적들이 발굴되었는데 수로왕릉도 순장 관련 기록이 있다니 모두 고대국가라는 것이 드러난다. 대체로 순장이 없어지는 시대가 중세라고 한다.
왕릉 입구 밖 거리. 김해김씨종친회 사무실이 보인다.
가락루
가락루를 통과하면 납릉정문이 보인다.
납릉정문
쌍어문. 흰색 물고기가 그려진 神魚門. 두 마리가 그려져 있어 雙魚門이라고도 한다.
왕릉 앞 양호석
문무인석
숭정각
숭신각
숭신각은 신도비각이다.
신도비
연신루
안쪽은 봉안루라 되어 있다.
3. 관람후
수로왕비 허황후릉과 구지봉 관련 내용은 별도로 탑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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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 가보고도 가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 보셨다 해도 최근 상황이 이렇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김해김씨대전종친회 입니다 소장하고 계신 사진 중 가락루 전경 사진 원판 파일 제공 가능하십니까? 행사용 현수막 사진으로 사용하고자 하는데요 가능하시면 메일 주소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kji195911@hanmail.net
네, 기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더구나 종친회에서 쓰겠다니 사진 찍는 보람을 느낍니다. sooksunji@hanmail.net 제 이메일주소입니다.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