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시대는 레위기 제사법에 관심이 있고 레위기 희년법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신약시대에도 산상수훈은 관심이 있고, 같은 주제이지만 평지설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희년법과 평지설교의 주제는 생활 속의 가난과 경제문제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접근과 이해는 우리 스스로 성경 말씀을 빼거나 더하는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은 복음 전파, 교육, 치유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영생과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회당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는 고치시고 모든 약한 것은 고치셨습니다. 요약하면 구원과 영생을 위한 복음 전파, 신앙과 생활 교육, 약한 곳에 대한 치유 이렇게 세 가지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사역에 3년 6개월간의 공생애 기간을 가집니다. 희년을 선포한 나사렛 회당에서 청중들이 거부하자, 이제는 자리를 가버나움으로 옮겨서 활동을 계속합니다(눅 4:31).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가르치고, 귀신을 쫓으며, 문둥병자, 중풍병자, 각종 질병을 고치십니다. 열두 제자들을 불러 세우시고, 안식일에도 질병은 고치고, 배가 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게 하며, 그릇된 안식일을 바로잡아 줍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그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파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 사역은 말씀, 교육, 약한 것에 대한 치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 가지 사역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먼저 병자들을 만나서 질병을 고쳐줍니다. 그다음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첫 번째의 가르침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천국 백성들이 삶에서 필요한 도리를 가르친 생활교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들을 재해석하여, 이를 신약시대에 맞도록 복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생활 규례를 담아놓은 레위기에 비교하면, 산상수훈은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제사법과 예배, 성결된 삶을 위한 정결법,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사회규범과 윤리 도덕, 그리고 물질생활에 필요한 경제법 등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구약시대는 희년법, 신약시대는 경제 복음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시대는 레위기 규례에서 다른 것은 지켰어도 유독 경제생활에 관련된 희년법은 지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도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신앙공동체에 필요한 것, 신앙 전수가 복음의 본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신앙교육만 합니다. 그래서 생활공동체에서 필요한 희년과 경제 복음은 뒤로 밀려있거나 덮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재해석한 산상수훈에서부터 경제와 희년법에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간혹 성경을 희년법으로만 보려고 하여 치우쳐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말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종교적 내용인 레위기 제사법은 잘 지키려고 했으나 같은 레위기에 있는 희년법은 거의 지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종교는 희년 없는 율법에만 관심이 치우쳐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치우침은 희년법이 들어가야 비로소 종교와 삶은 균형을 회복할 수 있고 그 균형을 지속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의 신약시대에도 복음에 관한 관심은 신앙공동체에서 필요한 사람의 죄 문제와 정신문제가 주요 대상이고, 생활공동체에서 필요한 빚 문제와 경제문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구약 못지않게 희년과 경제에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레위기 희년법은 구약시대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약점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가 반복을 해야 죄가 해결되듯이 경제문제도 반복을 해야하는 해결되는 무르기 제도가 그 대표적 약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약점을 개선하고, 신약시대에 맞도록 복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곧 구약의 희년 제도를 복음적으로 대체하여 제도상으로는 완성을 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온전한 희년법을 복음으로 받았음에도 구약시대의 유대교처럼 복음이 가르쳐 주는 경제는 경시와 불순종으로 아직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내용적으로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토지나 금융 거래로 보면, 희년법을 따르지 않았던 구약시대의 거래 제도보다 오히려 더 빗나가 있거나 퇴보했습니다. 토지는 성경이 거래를 허용한 시한부 거래에서 금지한 영구거래로 빗나가 버렸습니다. 여기에 금융은 허구거래인 선물, 파생금융상품, 지금은 가짜 상품인 가상화폐까지 상품 행세를 하면서 가증한 상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으려면 레위기 희년법이 말하는 토지거래가 실물 없는 빚 거래이고, 금융거래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실물 없는 금융거래는 실물로 바뀌거나 원금을 소멸시켜야 문제가 풀립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제적 무르기입니다. 그리나 지금 경제는 실물 없는 허구적 금융거래를 무르기로 없애지는 않고, 더 크게 키우고만 있고, 그 값을 우리가 생활에서 벌금을 물듯이 지불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빗나간 생활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복음에서 희년과 경제에 대한 내용을 찾아서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에는 약한 것을 고치는 부분이 있고, 필자는 그중에 경제 부분이 가장 약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희년법과 공생애, 산상수훈과 경제 복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성경 희년법은 현재 실물의 자유 소유와 자유 거래(레 25:3), 미래에 생산될 미래물의 제한 소유와 제한 거래(레 25:15,16), 토지와 같은 영구로 존재할 영구물의 소유 금지와 거래 금지(레 25:23)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물질의 성질이 가진 창조질서를 따르는 생활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와 학문, 그리고 삶의 방식은 창조질서의 법칙과 뿌리가 들어있는 희년법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질서를 기초하여 7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하시고, 이 7의 안식과 희년 주기를 따라서 정밀 기계처럼 정확하게 그 시간의 역사인 구속사를 인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희년 주기의 시간표를 따라서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희년 주기를 따라서 3년 6개월의 공생애를 살면서, 세상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시 희년 주기를 70 이레의 시간표와 연동시켜서 선포한 그 희년의 주기를 다시 미래로 이연시켜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횃불언약 이래 2,107년간, 출애굽 희년 후 1,470년간 지속되어 온 희년 주기를 따르는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희년 선포와 초림 사역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주후 26년 7월 10일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한 희년은 이제 시작이고 진행이며, 이 진행은 미래의 어느 시기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했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1점 1획도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신약시대에 완성될 율법은 당연히 레위기 희년법이 경제 복음으로 들어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시작하는 초기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에서 희년법에 관련된 경제 복음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희년을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거부하려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3년 6개월의 가뭄과 흉년의 때에 선지자의 전언을 들은 사람은 시돈 땅 사렙다(사르밧)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 두 사람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약시대에도 희년법의 복음적 순종은 결코 쉽지않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포한 희년을 "주의 받아주시는 해"라고 했으나, 우리는 이를 "주의 은혜의 해"로 이해(번역)하는 것에서 빗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년을 선포한 현장에서 언급하신 3년 6개월은 엘리야 선지자가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 지낸 기간이며(왕상 17:3, 18:1),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로 활동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희년 주기에 연동되어 있는 70 이레의 예언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다니엘서 7:25에서 한 때, 두때, 반때와 70 이레의 미래(단 9:27), 그리고 계시록이 말하는 한 때(계 12:6,14)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설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 6:17)
산상수훈(山上垂訓)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갈릴리 호수 주변 산 위에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행한 교훈인데 윤리적 행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집약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행위를 지도하는 주요한 생활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왜 이 산상수훈을 평지설교(平地說敎)라고 할까요? 산상수훈을 기념하여 세운 팔복교회는 갈릴리 호수 위의 구릉지대로 언덕 위에 있습니다. 그곳은 호수에서 보면 높은 곳이므로 산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전체 지형을 넓게 보면 광야와 같은 평지에 속합니다. 마태복음은 수신자가 유대인이므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산에서 전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수신자가 이방인들이므로 산이라고 하지 않고 평지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한곳에 묶어져 있으나 평지설교는 누가복음 6장, 11장, 12장 등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산상수훈과 평지설교의 비교는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과 평지설교는 팔복의 가르침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구약을 재해석한 것으로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강령을 복음적으로 풀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평지설교보다 다루는 주제나 내용이 더 포괄적입니다. 그렇지만, 평지설교는 같은 성경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주로 가난한 자, 주린 자, 버림을 당한 자에 대한 경제 복음을 우선적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생활에 필요한 정신적, 윤리적, 경제적 내용(가치) 전체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지만, 평지설교에서 특히 팔복과 직접 대비되는 4복과 4화는 그중에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경제적 내용만을 집약하고, 이를 우선하여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지설교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으로 선포한 희년과 직접 관련되고 있습니다(눅 4:16~19).
그래서 산상수훈은 교훈을 설파한 곳이 산이므로 오늘날 말씀만 전하는 교회와 같고, 평지는 그 교훈을 교회 바깥에서 적용해야 할 생활 현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생활 규례인 레위기로 비교한다면, 산상수훈은 레위기 전체를 포함하는 복음적 내용입니다. 그러나, 평지설교는 레위기 희년법에서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경제문제의 해결에 중심을 둔 것으로 복음의 범위를 한정시켜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에서는 신앙과 관련되는 팔복과 산상수훈은 자주 다루지만, 평지설교가 가르쳐 준 4복과 4화는 거의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평지설교가 생활공동체에서 필요한 생활 교훈과 경제 복음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레위기를 전해도 제사법은 자주 다루지만, 레위기 희년법은 경제가 주제이므로 거의 전하지 않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은 시공에서 항상 필요한 영적, 윤리적 가치로 심령이 가난한(겸손한) 사람들, 의에 주리거나 목마른 사람들, 마음이 청결하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 정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평지설교는 지금 이때, 지금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고, 물질적, 신체적으로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평지설교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은 지금 가난한 자와 굶주린 자, 지금 우는 자와 버림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청중들은 제자와 무리이지만, 평지설교에는 여기에서 병든 자, 가난한 자, 빚진 백성들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8가지 복을 말하고 있지만, 평지설교는 4가지 복(福)과 그 4가지 복과는 상반되는 4가지 화(禍)를 말하고 있습니다.
팔복에서 받아야 할 땅과 기업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팔복의 8가지 복 중에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복입니다. 필자가 말하고 있는 희년법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른 복은 천국, 위로, 긍휼,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는 등의 추상적인 복이지만, 땅은 눈에 보여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복입니다. 가짜 지주인 바알 신이 주는 일시적인 재산으로서의 땅이 아닙니다. 창조주요, 참 지주이신 하나님이 토지의 안식과 거래에 대한 희년법까지 제정하여서 나와 나의 후손이 영구적으로 경작할 수 있도록 주시는 기업이고, 땅입니다.
시편 37:11에도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유한 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로 견뎌내는 자이며, 강포하지 않아서 칼과 활의 힘도 꺾고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기업을 받는 자는 8가지 복 중에 처음 언급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천국도 받고, 위로도, 긍휼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도 받아서 팔복이 말하는 모든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7가지 복을 받을 자도 역시 마태목음 5:4에서 온유한 자가 받을 땅과 기업을 함께 받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 그 땅은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애굽 종살이에서 풀려난 출애굽의 목적지도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은 분배한 땅을 잃지 않고, 영구로 간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친히 제정하여 주신 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짧게는 400년, 길게는 490년 만에 기업으로 얻은 바로 그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지키기 위해 제정한 안식년과 희년법을 지키지 않아서 다시 잃어버린 그 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서 희년을 선포하고, 천국 백성들에게 주려고 하는 바로 그 땅이고,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지금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이해이지만,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땅을 기업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과 기업은 실제적인 상급에 속합니다(마 5:12, 눅 6:23,35).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10여 차례 나오는 기업과는 의미가 다른 유일한 땅입니다(신약에서 기업과 유사한 용어, ‘유업’에 대해서도 10여 회 나옴).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업은 주로 내세(來世)에 받을 추상적 기업을 말하고 있습니다(엡 1:11,14,18, 히 9:1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과 팔복설교에서 말하는 기업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다른 10여 개의 기업과는 의미부터 다릅니다. 곧 천국에서 실제로 받을 유형의 땅이요 구제척인 기업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산상수훈이 말하는 천국은 내세를 말하는지 현세를 말하는지, 가시적 공간과 현실 세계를 지칭하는 나라인지, 비가시적인 천상세계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논쟁을 한다고 해서 쉽게 결론이 날 수 있는 주제도 아닙니다.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이런 큰 주제를 직접 다룰 식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필자는 산상수훈, 특히 팔복설교에서 말하는 기업이나 천국은 내세는 물론이고, 현세에서 이루어질(이루어져야 할) 나라이고, 역사적 실체로 봅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산상수훈이 가르쳐 주는 8가지 복과 평지설교에서 말하는 4가지에 대한 복과 화를 보면, 지금 현재에 실제로 가난한 자나 우는 자가 받아야 할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4가지 화는 이 4가지 복을 받을 자와 상반된 삶을 살아가는 부자가 당할 징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부자와 가난한 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레위기 희년법을 지켰다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희년법이 지켜지는 사회는 토지가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고, 그 토지는 한 가계의 기업으로 영구로 남아있어서 생업의 문제가 없고, 경제적 격차도 크게 발생하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나라는 평지설교가 말하는 것처럼 궁핍으로 울고 있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가 없고, 이처럼 화를 당해야 할 부자도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희년법을 지키지 않아서 사회는 이렇게 부자와 가난한 자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말하는 평지설교는 지금 이스라엘 경제를 희년법이 추구했더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된 희년은 가난한 자에게 전하는 복음이었습니다(눅 4:18). 물론, 지금의 이스라엘 사회를 토지가 처음 분배된 여호수아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평지설교는 불과 며칠 전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한 그 희년의 상태를 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이 상태를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지구촌 모든 곳에서 실제로 희년을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법과 율법, 신약의 복음이 알려주는 영혼 구원은 가난과 부자라는 신분 차이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에 있을 영생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사해져야 받는 것이지, 가난하다고 주어지고 부자라고 제외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이에 발생하는 경제문제의 해법은 희년법에 있습니다. 곧 경제문제는 희년법의 복음적 실현이 궁극적 해결책입니다. 그러므로 평지설교가 말하는 복과 화의 구분은 죄의 심판이 필요한 영혼 구원을 말하기보다 희년법이 말하는 현실의 경제문제가 복음적으로 해결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평지설교에서 가난한 자가 받을 복이란 경제문제가 해결된 희년의 복음적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 부자가 당하는 화는 희년법을 지키지 않거나 거부한 결과로, 돌아온 희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돌아가는 화는 그들이 희년을 거부하는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경고이며, 부자도 희년을 이루는 사역에 동참을 촉구하는 예언적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다음 마태복음이 말하는 천국은 내세라기보다 실제로 이루어질 현실의 지상천국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0:1이 말하는 천국은 실업자들이 있고, 품꾼들은 약속된 정상 임금을 받고서도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경제 상태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20:1이 말하는 천국은 현실이 아닌 비유에 속하지만, 비유 그 자체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제 상태를 말하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년법은 땅과 기업에 대한 생활 규례로 내용에서 흠이 없으며, 구약과 신약의 시대를 초월하여 완벽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희년법의 시간 주기를 따라서 구속사를 인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 말씀 중에 유독 희년법이 알려주는 땅과 기업에 대하여 너무 큰 흠을 보이면서, 그 법과는 상반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인가 희년법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에 가장 부합하는 나라의 통치 수단이며, 그런 희년법의 세상 통치가 이 땅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을 보여주실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계명에 불순종한 자들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고, 구원을 받을 자가 많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마 22:32,막 12:27, 눅 20:38).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다시 살리려고 왔습니다(요 3:16~18).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거저 주는 것이지만, 구원을 거부하는 자까지 구원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기업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받을 상급이므로, 희년의 기쁜 소식은 순종이 있어야, 그 순종을 따라서 받게 될 몫을 말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산상수훈이 말하는 팔복이나 평지설교가 말하는 4복과 4화는 경제활동에서 실제로 나타날 현상으로 봅니다. 이렇게 희년이 구현된 세상이 내세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며, 살아서도 천국이요, 죽어서도 천국인 희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마태복음 5:4에서 주려는 땅과 기업은 삶의 문제가 실제로 해결된 상태를 일컫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기업과 천국은 희년법이 말하는 가시적인 땅과 기업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어디까지나 죽어서 가거나 내세에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천국은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할 초월적인 공간이나 비가시적인 상태만을 말하며, 정신계의 세계로만 한정하여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런 생각과 태도는 희년법을 지키지 않는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성향(약점)입니다.
하나님은 희년법을 통하여 하나님, 땅, 그리고 사람이 함께 생활의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중에 유독 땅이 제외된 세상, 땅이 필요 없는 천국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땅은 사람의 생각대로 다스리고, 물건처럼 팔고 사기를 계속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사법의 구원과 희년법의 속량은 초월적이고, 유일한 수단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너희 기업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레 25:24) 칠년 끝에 면제하라(신 15:1)
구약의 희년법과 신약의 경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죄의 속량과 토지 무르기의 상관관계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제사법에서는 내가 죄를 지으면 짐승이 나 대신 피를 흘려 죽습니다. 그래야 내 죄가 사해지고 영혼이 자유를 얻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에서는 내가 땅을 잡히고 돈을 빌리면 나의 형제나 친족이 그 땅을 값을 치러서 무르기 해 줍니다. 아니면 사람이 빌린 빚을 땅이 희년까지 생산물을 내어서 대신 갚아줍니다. 그래야 나의 생존권이 걸려있는 기업이 돌아오고 궁핍의 문제가 해결되어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짐승이 피를 흘려서 죽어야 하고, 내가 팔아 먹은 땅, 내가 진 빚은 형제나 이웃이 값을 치러서 무르기를 하는 것은 시혜인 것은 맞으나 교환을 전제로 하는 경제생활에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성과 논리로도 이해가 어렵습니다. 안식년이 오면 갚지 못한 빚을 탕감하는 것도 시장원리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힐렐과 같은 랍비는 안식년이 오면 이 부채 탕감을 피할(권한 이전) 수 있는 ‘프로스블(Prosboul)’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신명기 율법을 피해 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죄나 빚을 속하거나 탕감하는 제도는 논리적으로도 불합리한 면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불합리한 것은 더 있습니다. 다말이 시부를 속여서 아들을 낳고, 가정을 회복하고 후사를 잇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아버지 뻘인 보아스를 찾아가서 죽은 남편의 대를 잇고 기업 무르기로 잃은(팔린) 기업을 되찾습니다. 이런 행동은 윤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평지설교가 말하는 가난한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 지금 주린 자가 받는 복, 지금 배부른 자가 당하는 화와 그들을 칭찬했던 거짓 선지자도 설명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이성과 논리로 불합리해 보이는 방법을 택하여 문제를 해결할까요? 그 대답은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내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빚 문제나 경제문제는 이런 방법이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에 빠져 죽음 직전인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구원자를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교리나 법리, 윤리나 합리를 따지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성적인 행위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또는 불교나 다른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내가 지은 죄가 있으면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그 중생의 업보를 모두 감당해 내어야 합니다. 내가 진 빚은 내가 갚아야 합니다. 갚지 못한 부채는 부도이고 파멸(파산)입니다. 이 말은 이미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세상 기준이나 타 종교의 가르침으로는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기준이나 다른 방식으로는 해결책이 없는 극한 상황이지만, 그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속물이나 대속자를 세운 속량이고, 구제(구원)입니다. 이 방법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희생으로 인하여 모든 종류의 속량이 하나로 귀결되고, 해결되어 종결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사법과 희년법, 곧 성경이 말하는 문제의 해결책인 속량, 구제, 탕감의 제도나 방식은 인간의 합리성과 합법성, 그리고 윤리와 시장원리에 맞지 않거나 이를 초월하는 제도입니다. 홍해를 갈라서 백성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는 것,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는 치유의 기적, 배가 고픈 자에게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도 창조질서와 과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병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렇게 초자연적, 초법적, 초윤리적, 초시장적 수단까지 모두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기어이 사람을 살려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그 속량의 최후 수단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희생시키는 방법을 택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고 속량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자연적 구원 방식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법치의 질서, 윤리 도덕, 그리고 경제질서인 시장원리를 해치지 않으며,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서를 바로잡아 주고 더 풍성하게 보완하여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 통치의 경륜은 세상의 학문이나 가치 기준이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필자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구원 방식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기간 3년 6개월 동안 가르쳐 준 복음에는 분명히 경제문제를 해결하여 놓은 희년법도 함께 들어있다는 점을 알리고, 강조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아도 죄를 사하는 제사법과 예배는 합리성의 여부를 떠나서 받아들이고 수용을 합니다. 그러나 같은 성경을 보아도 희년법만은 합리성을 따지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죄 문제를 해결한 영적 복음은 모두 수용하고, 신앙의 훈련과 성숙으로 완성단계를 향하여 진행 중에 있지만, 빚과 경제문제를 해결한 경제 복음은 아직 복음 속에 덮여있고, 멈추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하여 속량의 희년법이 들어있는 경제 복음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주기도에 들어있는 희년법의 경제 속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 11:4)
산상수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기도(주님 가르치신 기도)”라고 하여 예배나 모임에서 이 기도를 올립니다(카톨릭은 주기도 낭송이 예배의 주요 의식이고, 개신교는 주기도 대신 신앙고백이 주요 의식임). 주기도는 초반부터 나라가 임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도자가 '나(내)'라는 1인칭 단수로 개인의 신앙고백이 우선이지만, 주기도는 '우리'라는 복수가 들어있어서 공동체에서 필요한 공적인 의미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경제문제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는 문제입니다. 그다음은 빚을 없애는 문제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를 말하는 마태복음 6:12의 본문은 “죄(sins)”로 번역을 했으나 헬라어 원문은 ‘오페일레마타’로 “빚(debts or debtors)”이라는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11:4에서도 원문은 “빚”과 “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사해줄 대상은 죄(죄인)가 아니고, 빚이며 빚진 자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거나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활에서 진 빚은 하나님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하거나 갚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병도 고쳐주고, 죄도 사해주시지만, 빚은 사해 주지 않습니다. 빚은 우리가 서로 서로 사하여 희년 상태를 이루어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12의 전반부의 주기도는 이렇습니다.
(구번역 주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듯이
(신번역 주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듯이
(성경 원문 주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듯이
주기도가 말하는 경제의 두 가지 주제, 일용할 양식의 문제와 빚 사함의 문제는 희년법의 핵심 주제입니다. 사람은 굶주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자에게는 양식을 주는 구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고아나 과부를 살피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게 합니다. 유대인 613개 항의 율법에도 구제는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구제는 누구 못지않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공동체에서도 구제는 하는 것과 닮았습니다. 비공식 자료를 보면 신앙공동체에서 구제에 대한 예산은 전체 예산에서 7%~10% 정도로 약하지만, 그래도 구제는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원래 기업이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 그리고 가난한 자의 몫이었으므로 이런 비율을 감안하여도 7%~10%는 약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구제는 정부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세금 부담은 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제만으로는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굶주림에 대한 근본 해결은 구제가 아니고, 양식을 내는 땅을 기업으로 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인구의 20%는 절대 빈곤에 처해 있는데, 이들에게는 구제도 필요하지만, 근본 해법은 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법의 근본 취지입니다.
그다음 양식이 해결되어 절대 빈곤을 면하여서도 빚이 있으면 마음에 눌림을 당합니다. 그래서 경제적 자유가 제약됩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가난하여서 몸을 잡히거나 땅을 잡히고 진 빚은 탕감을 하거나 형제나 동족이 무르기를 하여 자유하게 합니다. 이것이 희년법입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주기도가 말하는 양식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땅을 주고, 몸값과 땅값을 무르기로 없애어서 경제적 자유를 주는 제도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주기도는 이러한 구약의 희년법을 신약시대에는 복음적으로 해결하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빚은 사해주는 그 방법 그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은 희년법을 준수해야 지은 죄가 사해준다는 조건부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빚을 진 자에게는 속량자가 나서서 값을 대신 치러주면 빚진 자가 자유하게 되는 그 방법 그대로 우리의 죄들도 십자가 대속으로 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는 우리는 죄의 사함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빚도 사해야 하는 간구가 담겨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회수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도, 제한 없는 용서를 말하며, 1만 달란트라는 큰 빚을 탕감하는 비유로 우리 죄가 사함을 받는 것을 알려줍니다(마 18:21~35). 그토록 큰 빚을 갚아주었으니 너희들은 서로 용서 못할 잘못이 없고, 갚지 못할 빚이 없을 것이니 갚아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희년법의 취지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나라가 임하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서 희년법이 말하는 경제문제, 곧 양식과 빚을 해결하여 자유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기도 본문에서 ‘양식’이라는 단어는 입에서 나온 즉시 생명의 양식인 ‘말씀’으로 바꿔어져서 전달이 됩니다. 사람이 먹을 먹을 양식이 사람의 마음이나 말씀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빚진 자”는 번역부터 “죄를 지은 자(구번역)”라고 하거나 “잘못한 사람(새번역)”으로 의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번역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죄 지은 자를 사할 능력이 없으며, 주기도가 말하는 빚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빚이 갚아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주기도는 원문 자체가 뒤틀려 있고, 주기도에서 해결하려는 경제문제는 정신문제나 윤리문제로 변질되고, 약화되어 있습니다.
희년은 몸과 땅이 담보로 잡힌 빚이 속량되고, 몸과 땅이 회복되어 백성들에게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는 때를 말합니다. 주기도가 말하는 양식과 빚은 하나님이 지으신 땅이 내는 생산물이 해결사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해법입니다.
희년법과 바알 신, 경제 복음과 재물 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주기도를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어서 재물에 대한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재물은 인격을 가진 신으로 표현을 했는데 여기서 재물로 번역한 단어는 아람어 ‘마모나스’입니다(눅 16:9,11,13). 이 마모나스가 인격이 부여되면 부와 물질을 섬기는 “맘몬(Mammon) 신”이 됩니다.
구약시대는 유대 종교는 겉으로는 여호와를 섬겼으나 생활에서는 희년법을 어기고 바알 신과 그 제도를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에서 이 맘몬의 섬김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를 혼탁하게 한 바알 신이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 맘몬 신으로 갈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엡 3:5). 탐심은 사람의 마음으로 품고 있는 우상이고, 이 우상의 실체는 재물이 숭배의 대상물이 된 ‘맘몬’입니다. 구약시대에 부와 풍요를 추구하던 바알 신은 태양 주상과 아세라 목상 등으로 우상숭배의 대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바알 신이 신약시대에 오면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우상숭배는 사라지고, 탐심이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여 그 자리를 대신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보기로 보이는 우상이든,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중에 들어 있는 탐심이든, 그 실상은 부나 권력의 수단이 되어주는 재물입니다.
필자가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의 종교는 바알 숭배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도 우리는 겉으로는 바알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삶의 실상은 어떠할지를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적대로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고 있다면, 이것이 신약시대에 바울이 말하는 탐심의 우상숭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의 목적이 진리와 영생을 추구하지 않고, 치병기복과 현실의 욕구 충족만을 추구할 때 이런 우상숭배가 생깁니다. 개인은 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집단은 집단의 이기적 이익만을 추구할 때 우상을 섬기거나 이단이 나타나게 됩니다.
재물은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3,3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진 재물을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재물에 대해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마 6:25, 눅 12:22). 이 말을 두고 간혹 사람은 먹는 양식이나 재물을 멀리하고, 오직 말씀만 먹으면서 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은 양식을 구하고, 빚을 없애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주기도의 내용과는 상반되거나 치우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하면 금욕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바알과 맘몬이 추구하는 바와 같이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는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을 구제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눅 12:33). 그런데 구제가 필요한 곳에서 발생하는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궁극적 수단은 바로 희년법의 준행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생활은 물질의 궁핍과 예속에서 풀려나서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생육하며 번성하는 것입니다. 개인은 자유롭고, 사회는 정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바알과 맘몬의 숭배처럼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되지만, 금욕주의처럼 물질을 멀리하거나 현실과 분리되어 은둔하는 생활 태도가 아닙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면 교통윤리를 존중하며, 도로교통법을 준행하며 차를 몰면 되듯이, 성경이 말하는 경제활동은 그런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궁핍과 예속에 대한 경제적 해법은 희년법과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따르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이 말하는 산상수훈과 누가복음 12:13~34의 말씀은 재물이 신의 자리에 있는 맘몬의 숭배와 세상 염려를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기도가 가르쳐 준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고 빚을 사하며, 가난한 자에는 구제(자비)를 하게 되면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섬김으로 영생과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누리며 살라고 합니다. 나와 나의 가정만이 아니고, 사회나 공동체, 나라 전체가 그렇게 자유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희년법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이 목적은 복음적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6:33, 눅 12:31).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과 평지설교를 통하여 가르쳐 주는 경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