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란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언뜻 보면 그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가까운 존재입니다. 고대...중세의 신은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고대의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자주 일치시켰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포스 이야기, 중국의 삼황오제 이야기 등은 모두 신 같은 인간, 인간 샅은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들 신화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신들의 각종 활동을 통해 고대의 자연환경과 고대인들의 생활방식 그리고 그들의 보편적인 인생관...역사관...자연관 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고방식만을 반영한 것은 신화가 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사회적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사회 공통의 경험과 의식, 그것은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에서 신화는 사료의 하나로서 존중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건국신화입니다. 신화 속에서 신인 혹은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장면은 그 나라의 건국배경 뿐 아니라 신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단군신화 - 고조선
고조선과 조선 - 위만의 고향
고조선이라는 국가명칭이 처음 기록된 곳은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일연이 쓴 책입니다. 그 책의 기이 편 첫머리에 고조선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이어서 그에 관한 역사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부르니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지상세계에 내려가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싶어하니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천부인 3개를 주며 허락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 환웅천왕은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의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그 무렵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았는데, 항상 신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20매를 주며 백 일 동안 해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곰과 범이 받아먹었는데, 곰은 삼칠일을 잘 지내 여자가 될 수 있었으나, 범은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임신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단군왕검이라 했다. 단군왕검은 중국 요임금 즉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했으며, 나중에 백악산의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주 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고 했다.
위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것은 고조선 항목에 이어 위만조선 항목이 나오는 데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이란 위만의 '조선' 이전에 존재하던 '옛날의 조선이라는 뜻이 담긴 명칭인 것입니다. 삼국유사에서 이처럼 단군...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한 이유는 위만이 중국 사람이므로 그 이전의 조선과 국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조선전(朝鮮傳)에 따르면, 중국의 연나라 사람위만이 진...한 교체기의 전란을 피해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가니, 조선왕 준이 그에게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는데,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서기전 194년에 정변을 일으켜 수도인 왕검성을 급습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왕은 남쪽으로 내려가 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위만은 중국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따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인접했던 연나라와 조선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요. 그러다가 연나라에 소왕이 재위하던 무렵(서기전 311~279)에 진개라는 장군이 이끄는 연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조선은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휴유증으로 국력이 많이 미약해졌다고 합니다. '2천여 리'라면 매우 넓은 땅이지요. 그런데 조선이 어디 그 땅만 빼앗겼겠어요? 그 넓은 땅에 살던 사람들도 함께 연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연나라는 중국의 변방지역으로서 주민 구성이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따라서 사기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라는 문구만으로 위만이 종족적으로 중국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중국땅에 살던 조선 사람이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기에는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조선인의 풍속을 따랐다는 것인데, 위만이 조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민족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자기 모국으로 돌아오면서 원래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는 뜻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앞서의 시대상황과 준왕이 처음부터 그를 매우 신임한 실에 비추어 보면 원래의 복장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조선이라는 구로를 계속 사용한 점이라든지, 나중에 볼 바와 같이 위만정권하에서도 여전히 토착인 들이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세형 동검문화를 계속 이어나간 점 역시 위만이 조선 사람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정권 이전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을 따라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매우 유용한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조선과 근세의 조선을 구분하는 명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조선'은 바로 그러한 구분 점으로서의 편의적 명칭일 뿐입니다.
단군신화의 형성시기
다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돌아갑시다.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해 단군신화를 소개했습니다. 해당 기사의 공신력 높일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위서'와 '고기'가 과연 어떤 책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위서라는 제목의 역사서가 몇 번에 걸쳐 제작된 적은 있습니다. 그중 어떤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남아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물론 '위서'를 우리 쪽의 역사서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책은 아직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기'는 더욱 이상합니다. 그것이 책 이름인지, 아니면 '옛날 기록'이라는 뜻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점 때문에 한때 단군신화를 몽고항쟁기에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고 치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환인과 같은 불교식 명칭이 차용된 것이라든지,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즉위했다고 하여 역사의 유구함을 드러내려 한 것 등이 바로 그 증거라고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신화의 내용을 살피다 보면 거기에 얼마나 오랜 동안 인간이 겪어온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단군신화의 내용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봅시다.
신화의 상징성
환인은 인도의 신 이름을 한자로 옮긴 석제환인타라에서 따온 것으로 천제 혹은 태양신을 불교식으로 바꾼 칭호인 듯합니다. 신화는 원래 구전되어오던 것을 나중에 채록한 것이므로, 채록할 당시의 용어가 많이 차용되는데,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고려시대에 채록되면서 당시의 국교인 불교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화의 이러한 속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제왕운기에 실린 단순신화를 들 수 있습니다. 1287년 편찬된 제왕운기에는 단군신화가 유교식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상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상제 환인의 서자 단웅이 귀신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만든 다음 단수신과 혼인시켜 단군왕검을 낳게 했다는 식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신화는 세월 따라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신단수는 수목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애니미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곰과 범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과 범을 토템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 있으며, 환웅 역시 천신족을 자처하는 집단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곰에 대한 숭배는 동북아시아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진 의식이므로 어느 한 씨족의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곰을 숭배하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환웅이 거느린 풍백...우사...운사는 기후를 주관하는 신입니다. 특히 비와 관련된 신들이지요. 비는 해와 함께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쑥과 마늘은 농경문화의 잔편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면서 곡식을 가장 먼저 열거한 것도 농경문화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백일 동안 해를 보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삼칠일 만에 곰이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갓난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금기와 우려를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단군신화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경험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단군의 자손은 곧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계급의식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중세인 고려시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낡아 보입니다.
그런데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 위치한 무시사당의 화상석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물론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다른 신화를 형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거 동이족이 활동하던 지역에 동이족을 대표하는 집단(조선)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합니다. 석실로 된 무시 사당에는 서기 147년을 전후한 무렵에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단군신화는 청동기시대에 고조선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여주는 건국신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조선은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으며, 제정일치의 사회였을 것입니다. '단군'은 무당을 의미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무당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제사장이지요. 따라서 단군왕검은 제사와 정치가 한 사람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나온 명치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지배자가 바로 단군왕검이라는 것입니다.
한 제국과의 전쟁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측에 오히려 더 많이 전합니다. 특히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 조선과 한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를 살았던 사마천이 남긴 기록이기에 매우 자세하고 생생합니다. 주로 서기전 109년에 양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기록했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조선의 우거와은 주변의 진국 등이 중국과 교통하려는 것을 자꾸 막을 뿐 아니라 한 나라에 대해서도 제후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양국 간의 몇 가지 사소한 다툼을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한나라의 무제가 보낸 5만 여명의 군대는 한 차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했고, 1년 가까이 대치 상태를 거친 뒤 서기전 108년에 내분을 이용해 조선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곳에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 군대와 조선의 군대가 대치할 때, 조선에서는 태자를 화의 사절로 보내 말 5천 마리와 군량을 바치려 했으나, 태자를 수행하던 만 여 명이 지닌 무기를 처리하는 문제로 국경인 패수 근처에서 시비가 일어 그만 평화제의가 무산된 덕이 있다.
지나치게 간추린 내용이어서 입체적인 전달은 불가능하지만, 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었고, 중국과의 경계를 이루던 것이 패수였다는 단순 사실만큼은 분명히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또 태자의 사절단이 만 여 명에 달했으며, 말 5천 마리를 한나라에 보내려 했을 정도로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고, 군사 기반이 튼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상...니계상...상...장군...대신 등 다양한 관료조직을 암시하는 명칭들을 자주 접할 수도 있습니다.
한서 조선전(朝鮮傳)에도 사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지리지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이 이른바 한사군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 조선 멸망 이후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사람들을 교화시킨 이야기를 전하면서 당시의 형법 8개 조목 가운데 3개 조목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즉시 사형에 처하고,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되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50만(전?)을 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이 적용된 시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의 사회상과 문화 수준의 단면을 알려주는 매우 유용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도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합니다. 그중에는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한 부분도 있는데 그곳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연나라의 베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조선을 치려 하자 조선의 제후로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연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조선의 대부 예가 설득해 두 나라 모두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연나날의 제후가 왕을 칭한 시기는 역왕 때이니, 서기전 332~321년경입니다. 그리고 그 후 소왕 대인 서기전 311~279년 사이에는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군사를 이끌고 고조선을 공격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부는 진나라가 습격할 것을 걱정해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의 부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의 아버지입니다. 모두 서기전 4~3세기경 고조선의 군사력이 매우 강했음을 암시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과 관련해 우리나라에 전하는 사서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조선시대 숙종 2년(1675)에 북애거사가 편찬한 것이고, 환단고기는 각종 고서를 계연수라는 사람이 1911년에 새로이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책 보두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처음 간행된 생소한 책입니다. 그중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에 의하면, 우리의 고대사는 7대에 걸친 환국시대와 18대 1,565년간 이어진 배달시대 그리고 47대 2,096년간에 걸친 조선시대로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학적 지식에 근거하면, 위와 같은 전언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국가의 출현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우리의 경우 청동기시대는 아무리 소급해도 서기전 1500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임금과 같은 때(서기전 2333년경)라고 한 단군신화의 내용도 매우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국가와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서일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대몽항쟁기에 씌어졌으며,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규원사화에는 한말의 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이들 사서가 고조선시대의 기록에 근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한다면, 고조선측이 남긴 기록의 흔적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반도 서북부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상정합니다. 특히 지금의 평양 지역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한사군을 설치했지요. 그중 낙랑군에는 조선현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고조선의 중심지가 낙랑군에 편재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지역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 조사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러나 고조선의 문화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비파형 동검과 지석묘...적석총의 분포 범위를 생각한다면,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훨씬 넓어져야 합니다. 요동반도를 비롯해 요하 동쪽은 물론 요하 서쪽에서도 고조선의 문화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대능하 혹은 난하에서부터 한반도의 예성강 혹은 청천상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으로 모두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약 기록 속의 조선이 연나라와 인접한 나라였으며, 2천여 리를 빼앗기고도 여전히 국가 규모가 작지 않았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의 높은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나름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시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홀시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시기입니다. 고조선이 언제 건국해서 언제 멸망했는지, 또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었는지를 먼저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초기의 패수는 대능하에 비정될 수도 있습니다. 인근지역에서 고조선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조선을 대제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화유적의 해당 시기가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비파형 동검의 경우, 요서...요동...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되지만, 시기는 각기 달라서 요서 지역이 가장 빠르고, 한반도의 유적 편년이 가장 늦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조선이 이동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동반도의 남담인 여순에서 늦어진 서기전 6~4세기에 조영된 대규모의 적석총이 발견된 것을 보면 한동안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 지역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한 변의 길이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적석총 묘역에서 23기의 묘곽과 144명분의 인골이 비파형 동검...동경 등 다량의 청동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많은 인골을 순장된 사람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무덤의 주인은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동의 요양...무순 등지에서는 전국시대의 장성유적도 발견됩니다. 연나라 혹은 진나라가 적어도 이곳까지는 진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는 그보다 훨씬 동족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연나라 장군 진개가 있는 군대가 고조선으로부터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기록을 고소선이 최소한 2,000여 리 이상의 땅을 가졌던 증거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족으로 밀려났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전설을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이 동쪽으로 이동한 시실의 반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조선의 이동은 더욱 실감납니다. 역사학이란 이처럼 미궁 속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