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대는 일제의 암흑기를 거쳐 6.25를 거치면서 살아오시었다. 한 때는 나라를 빼앗겨서 이 국 땅으로 망명을 가시더니 또 한 때는 해방을 맞이 한지도 오년이 되어서 민족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전쟁의 어둠속 에서 살아 오시었다. 참으로 힘들고 배고픈 시절이라 하니 내가 태어나던 해는 60년대의 중반 에는 정치의 어지러운 시대에서 태어났다. 나는 5남매중 외아들로 태어나 모정리에서 살아왔다.50년이 넘었지만 내가 고향을 떠난것은 오 래전의 일이었다. 아마도 21년이 휠씬 넘은 세월과 긴 침묵이었다.내가 익산에 와서 아내를 거느리고 산지도 21년이 란 세월이 흘렀다. 아내와 결혼 후에 아들을 낳고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에서 현재까지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때 묻은 흔적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한 많은 타양살이 그러나 내가 태어난 곳 내고향 모정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많이 변한 고향이지만 물 속에 잠겨 갈 수는 없는 여의곡 마을이라지만 아직도 그 어린시절과 추억이 묻어 나는 것이 고향의 한이었다. 용담댐이 완성되기전에는 모정리에서 살아오시던 부모님 이제 홀어머니만 한 분만이 유일한 생존 자였다. 이제 고령의 나이에 드시었지만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셔 때로는 내가 가면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시었다, 고 향생각을 하면 왜 그리도 눈시울이 뜨거운지 모르는 일이었다.우리 오남매는 각 도시에 나가서 잘 살고 있었다.막내 와 첫째 동생은 대학을 나와 좋은 신랑을 만나 잘살고 있었고 둘째는 고졸을 마치고 나와 누나는 중학교를 마치거나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 하기도 하였다. 재넘어 중학교 다닐 적에는 언제나 반가운 친구 제화가 언제나 단짝이 되어 주 었다. 중학시절에 만나던 친구 제화는 언제나 말썽꾸러기로 자라왔지만 이제 어른이 되고 철들다보니 가장이되었다. 그동안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일직 발을 디뎠고 그 뒤로 나는 제화에게 늘 소식이 없었고 편지 한장조차도 주 고 받은 일은 없었다,그는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치어 고졸이후에 신춘문예에 시나 소설을 내어 등단작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나는 그 당시 배운 것이 없어서 집안일을 돕고 살아온 나였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머물면서 늘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내 자신스스로가 소설을 쓴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움의 끈이 짧아서 친구 로부터 친척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왔었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나 또한 온갓 조소와 비난 속에서도 나는 문학의 열정 의 끈을 놓지 않았다. 라디오 신춘 문예작도 내어보고 그리고 드라마 희곡도 여러편 내어 보았지만 당선되기에는 하 늘의 별 따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글쓰는게 보기 좋았든지 아무런 간섭이나 재재를 받지 않고 글쓰는데 열 중을 하였다.나의 친척들은 나의 글을 보고 기특하다며 좀 더 배웠더라면 훌륭한 예술가가 될 터인데 배움의 시기를 놓쳤다며 다들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못 가르쳤다고 후회 하시기도 하지만 나 또한 배움의 길을 놓치니 후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빈 노트에 낙서로 삼아 시를 써보기도 하고 끊임없는 필사 작업도 서슴치 않았지만 나는 변한게 없었다.주위로부터 비웃음이 들려오지만 나는 그래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누구가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이러한 열악한 가운데 나는 글 쓰는 것을 포기 하지않 았다. 비록 못배우기는 하였어도 한글쯤은 아니까 나도 시인이 될수 있고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의 꿈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나라고 시인이 될수 없는 법은 없고 나라고 소설을 못쓴다고 자부 할 수 없는 일 언젠가는 노력하는자에 게는 결실의 열매를맺게 되리라는 속담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헬렌켈러나 에디슨이나 나폴레옹이나 율리시저나 그리고 예수와 같은사람도 비록 보잘것없는 가난가운데 성인이 되었는데 나라고 위대한 꿈을 못 이루라는 법은 없었 다. 가난했던 시절 60년대의 중순 보릿고개가 한창이던 시절 때로는 배가 고파서 삶의 하루를 꾸려갔던 시절이 지금 도 생생하다.호롱불빛 아래에서 전기가 없고 오늘날처럼 버스가 다니지 않았던 산골 마을의 향기. 나는 그 시절이 그 리워 질 때마다 시로서 마음을 위로받는다. 오늘날 창작시방에서 시인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내가 노력을 쏟을만큼현 재 나는 창작시방에서 활동중이었다. 이러한 꿈과 소망으로 이루어온 것이 나의 문학의 길이요 삶이었다. 좀 더배웠 더라면 더 유명한 소설을 쓸 수가 있고 시를 쓸 수도 있었는데 그저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였다. 모정리.... 그리고 조용하고 산이 많은 산골 마을....정들었던 여의곡 마을이 눈앞에 비쳐질 때마다 과거로 빠져들고 싶은 마음이 었다. 6,25전쟁이 3년간 이어지고 전쟁이 끝난곳에서는 복구의 건설이 이어지고 있었다.전쟁은 많은사람들에게 피해 를 주었고 아픔을 주었다. 6.25가 끝나고 8년이 지났다. 60년대의 중순경 전국은 무척 어지러운 침묵이었다. 해방의격 동기를 거치고 전란의 어둠이걷히고 겨우 재건의 복구가 한창진행중이었는데 마침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갔었고 박정희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10월유신 체재와 새마을 운동이 한참진행을 하고 있었다. 7월로 접어들무렵 여름이 한 창인 나는 김씨 집안의 가문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니 정말로 꿈같은 세상이었다. 내가 갓난 아이때에 누나를 볼 수가 있었다. 어둠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머니의 뱃속 에서 자라온 나는 이제 새로운 세 상을 보게 되었다. 그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는 모내기를 마치고 인삼밭에서 밭을 매다가 통증이오고 그리고나서 그날 밤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세상밖으로 나오자 기뻐 하였고 누나도 동생을 얻었 다는 마음에 들떠 있었다. 나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장차 장군감이 될 사람으로 칭찬이 잦았다. 전 깃불이 없어서 불편을 느끼 어야 했고 병원이 없어서 인근 읍내나 도시로 나가야 병원을 찾을 수가 있었다. 큰 집에서 도 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할머니와 큰어머니도 달려와서 나를 보고 기뻐하고 있었다.정천에 계신 작은 아버지의 내 외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 나에게는 슬픈 운명이 찾아왔었다. 홍역이라는 전염병아래 나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젓이 없어서 동냥젓을 먹고 살아왔었다. 동네 아주머니중에 유모 한분이 있었는데 어머니처럼 보살펴주시던 분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그 분께 찾아가서 젓을 먹이고는 어머니는 늘 고마움에 잊지 못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리었다. 이렇게 세상에서 태어나면서 부터 벙어리로 생활하게 되는데 가장 답답한 것은 의사 표현이나 말을 못하는게 나의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말 못하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파 했을 까? 전국적으로 홍역으로 앓는 아이들은 저 세상으로 가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기에 일수 였다. 그날도 나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세상 모르게 사랑받고 행복하게 지낼 아이인데 떡을 잘 못 먹어서인지 체하고 열이 많은지라 어머니와 아버 지는 늘 근심과 걱정속에서 살아왔었다.12남매중 7남매를 이러한 질병으로 인하여 땅에다가 묻어 버리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속이 타고 애간장이 탔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병원 입원비와 치료비를 대주기 위하여 밤 샘을 새다 시피하였다. 누나도 울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제 죽어가는 나를 등에 업고 무당 집에 찾아가서 점도 쳐보고 했으나 이미 운명은 결정 지게 되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고락의 갈림 길에 놓인 나 는 병이 악화가 되자 인근 병원인 대전으로 향하게 되었다. 병원으로 싣려 가면서 입원한 것이 대전역 근처인 소아과 병원이었다. 어린 나를 간호하기 위해 어머니와 누나는 밤샘을 하였고 아버지는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입원비도 마 련하기 위해 마을마다 돌아 다니면서 우리 아들 살려달라고 애원하시다시 도움을 구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우리옆집 아저씨는 입원비에 보태 써라며 선뜻 돈을 꺼내 주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9DC1365D2E51DF19) (대전시가지의 옛 모습) "김주사.어느 부모고 자식을 둔 심정을 왜 모르리요.아마 당신 아들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니 분명 하늘이 도을 것 이요.그러니 너무 상한 마음 가지시 마시고 치료비에 보태 쓰시요. 건강하고 튼튼한 녀석인데 홍역이라니...." "고맙소 .이 은혜 무얼로 갚으리요." "어서 병원으로 가보시요. 그리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시 나를 찾으시요." "애구 어쩌다가 그렇게 되시었수.마음이 아프지만 어쩌겠수.하늘이 점지 해주시니 분명 아드님은 살아날거유." "누구든지 잔병 치레 하는 법인데...." "참 안되었구려 불과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데 홍역이라니...." "사랑하는 자식들을 땅에 묻어둔 부모의 마음이나 오죽이나 허겠수.너무 상심을 마오. 하늘도 야속하지. 셍떼같은 자 식을 죽게 내버려두다니 세상에 이런 변이 어디있을꼬." "아우.너무 상심말게. 어찌 아우의 마음 모르겄나. 7남매를 땅에 묻어두는 아우의 마음 왜 모르겄나.그래도 살아 있는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눈물을 그치게." "형님.앞이 캄캄합니다.이제 이런일을 당하니,,,나에게는 복도 없는 놈입니다." "형님 너무 상심 마세요. 힘은 되어 드리지 못하지만 큰 형님이나 나 역시 같이 위로하고 싶네요.괜챦을 것입니다. 어 서 병원으로 가지요." "형수님 마음도 편하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너무나 눈물이 많으신 모양이라서 나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로 부터 치료비와 입원비를 마련하고 큰집 식구들과 작은집 식구들은 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 오시었다. 나는 이미 몸 이 말랐고 숨쉬기 조차 어려운 혼수상태였다. 머리에는 열이 39도에서 40도에 이르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사경을 헤메 이고 아버지는 죽어가는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겟 다고 아들의 손을 놓지 않았었다. 어머니도 가슴이 아파서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면서 아들의 목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주사를 꽃고 내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 다. 어린 나는 울 기운조차 없었고 힘이 빠져서 정신을 잃기가 수십번이나 되었다.의식에서 깨어나기는 하였지만 내몸 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식물인간이 되면 얼마나 부모의 마음은 아플까? 누나도 나의 어린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었다. 아프더라도 참고 잇으라고 누나는 늘 위로하지만 나의 아픔은 그칠줄을 몰랐다. 의사와 부모님은 나 의 치료를 위해서 서로 노력해 보겠노라고 약속을 하였고 영양제 주사를 맞으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나를 원망 하기도 하였다. 정말로 가슴이 아픈일이며 살아계신 부모님께 불효를 끼쳐드리지 않을지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하엿다. 나를 동 냥젓으로 살리신 유모께서도 찾아오시기도 하였고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부모님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아들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운명의 갈림길 꺼져가는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야 햇던 순간들이...... 죽음 아니면 삶을 선택해야 하는데..내가 죽으면 얼마나 부모의 마음이 아프실까 하니 어린 내 생각은 살고 싶었다.벙 어리인 나로써는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칠때마다 누나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신차리라고 정신을 놓지 말라고 위로하 지만 나에게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속이 끌어오르고 열은 계속 오르내리고 정신도 없는데다가 말을 못하니 본인의 마음은 죽을 것만 같았다. 석달 넘게 대전 소아과 병원에서 입원하면서 나에게는 홍역이라는 질병의 상처를받았고 상 심한 나는 이 세상을 포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살고 싶 다라는 말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병원에서 물 한 모금 밥한숫갈도 대지 못하고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었 던 순간 앞서간 형님들이나 누나들의 못습이 비쳐지는 것 같았다.절망가운데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던 부모님. 그러나 나에게는 소중하고 존귀한 분이시었다.운명의 갈림길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낸 나.조금만 손을 늦게 썼더라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저승으로 갔을지도 모른 상황이었기에....나는 병원에서 나오면서도 영양실족으로 걸려 있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에게 누나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너무 배고픈것도 잊었다.겨우 젓을 물리려 할 때면 토하기가 일쑤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영양을 받지 못해 소화가 될 일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좋은 약으로 쓰시었고 어서 자식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한번도 먹 어보지 못한 호랑이 고기를 먹어본 나. 그것이 몸에 좋다고 먹여보는 부모의 마음에 하늘도 탄복이되서인지 나의병을 치료 해 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햇던가?나는 집에서 자라오 면서 학교에 입학 할 때까지 벙어리로 살게 되었다. 말은 못하 지만 그래도 산다는게 어디 냐고 그것도 감사해야지 하면서도 늘 내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대로 사는것이지 이제와서 벙어리된 나 자신을 원망하고 불평한다 한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거늘.....
나는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있었다.내가 태어나기전에 "병수"라고 이름을 불렀다는데...그러나 호적상으로는 문 수로 되어 있지만 동네에서 집에서 부를 적에는 나의 아명인 "병수"라 불렀다.누나의 등에 업혀서 어머니의 젓을 먹이 러 다니었고 어머니는 소중한 나를 가슴에 안고 젖을 먹이시었다. 아, 부모의 사랑이란 이런것일까? 그러나 어머니의 젓은 잘 나오지 않았기에 제일 안타까웠고 내가 성장하는 가운데 유모의 젓을 먹어야 했다 내가 병원에서 퇴원을하자 유모는 나를 안고 젓을 먹이시었다, 어머니는 유모의 젓을 먹고 있는 아들을 보면 더욱 가슴이 아려 오고 사랑하는 자 식을 남의 젓을 먹고 자라야하니 오죽이나 가슴이 아플까? 어린 나를 보고 얼마나 예뻐하고 귀여워 해주시 는지 낳은 정보다 기른정이 깊다니......유모에게는 어머니보다 젓이 많은 모양이었다.모유를 먹고 자라오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사다 주신 센비과자를 먹고 자라왔다.어느정도 유모의 젓을 떼고 아버지는 나를 위해 항상 금산장날이 돌아오면 상점 에서 센비 과자를 벽장에 넣어 두시고 꼭 말 못하는 나에게 건네주시었다. 이렇게 과자를 먹고 석달만에 어머니가 만 들어 주신 떡을 먹고 자라왔다. 그동안 잔병 치레를 끝낸 후에는 떡으로만 삼개월동안 먹고 지내왔다. 허기 지고 배가 고픈지라 어머니가 해주신 떡은 꿀맛이었다. 입맛이 돌아오면서 나는 이제 건강을 되찾아가기 시작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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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이 걸리면 온 몸에 붉은 반점들이 생기지요) <20> 사람이 말 못한다는게 얼마나 답답할까? 서로가 소통이 안 될때 말문이 막히면 가족들마저도 불행해진다는데..... 나는 알고 있었는지...모르고 있었는지 내 운명이 정해지는데로 살아가는 것 뿐.나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발가 벗은
몸으로 다니면 어머니는 누나의 옷을 입혀서라도 자식의 허물을 덮어 주시었다. 머리를 바리깡으로 깎고 그리고 바보 다운 바보로 살아온 나의 운명.건강한 나를 보니 우리 가족들은 모처럼 웃을수 있었다, 비가 오고 먹구름이 끼고 천둥 과 번개가 치는 날이면 반드시 맑은 날이 오리니.... "병수야.너의 웃음을 보니 좋구나." "응....히히히..." "그래 제발 아프지는 말아다오." "어...엄마...." "그래.배고프지....떡이라도 해줄까?" "떠~억." "그래 니가 좋아하쟎아.떡." "떠....억 좋다....히히히..." "귀여운 내 동생." "아버지....히히히" "그래 잘 놀았어.귀여운 내 새끼."
아버지는 어린 나를 품안에 안으시고 나의 이마에 뽀뽀도 해주시고 금이야 옥이야 불면 꺼질세라 놓치면 깨질새라 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의 희망이지만 어머니는 나역시 즐거우나 괴로우나 함께하시는 동 반자였다. 어머니는 내가 배고파 하면 일터에서 돌아오시면 내가 좋아하는 떡을 만드신다.누나와 놀면서도 배가고프 면 누나는 어머니가 해 놓으신 떡을 부엌에서 꺼내와 어린 나를 먹여주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C3E425D2E603C1F) (시루떡)
"애구 우리 병수 떡 잘 먹네." "누우나!~" "그래, 우리 동생 잘 노네." "히히히히!~" "길자야.니 동생 잘 놀고 있구나." "응.봉순이 언제 왔니?" "방금." "니 동상 잘노네.낮도 가리지 않고 말이야." "온순해서 잘 놀아." "혹시 너 닮은게 아니여." "뭐라구....나 닮으면 어떼 가족은 혈육을 타고 나기 때문에 닮는 것은 당연하지." "경수야. 니 동생 왔다,앞으로 잘 지내." "응.누나."
봉순이 누나도 남동생이 있었는데 경수라는 아이였다, 나보다 한달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나는 그를 형이라 불렀 다. 친형이 이니지만 나에게도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형네 집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여름 이면 형은 언제나 나 를 보고 앵두도 따주고 살구도 따 주었다. 나이는 같지만 그래도 서로 형이라 부르고 아우라 불렀다. 경수형 또래는 거의 나와 나이가 비슷하였다. 경수형 친구도 많고 경수형은 나보다 1년 선배였다.경수형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일 찌감치 안경을 쓰고 다니었다. 그리고 눈 옆에는 사마귀가 생겨서인지 어디를 가더라도 확 알아보는 고향 선배이었 다. 앞집 아주머니나 아저씨도 나를 보면 무척 좋으신 모양이었다, 이렇게 나는 고향 모정리의 인연을 잊을 수가 없 었다. "경수야." "누나 왜?" "니 동상 놀러왓다. 살구 하나 따줘." "이리와 병수야." "형..." "이거 먹어볼래 맛잇어." "이게 뭔데,,,," "자두." "자아두~!" "응."
나는 경수형이 주는 자두 하나를 받아 먹었더니 달고 맛이 있었다, 햇살에 익은 살구 붉게 익으니 정말로 입에 닿 으면 꿀맛 같았다.그날 경수형과 나는 아저씨 집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놀고 있으면 누나가 나를 보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들밭에서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시었다. 어두컴탐한 방안에는 등잔불 이 켜져 있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계시었다.아버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안에서 쉬시면서 담배 도 태우시고 하면서 나를 불렀다. 아버지의 방긋 웃으시는 모습속 에서 나는 기뻤다. 듬직한 아버지가 살아 계시니 나야 더 이상 부러울게 없었다. 아버지는 술도 좋아하시고 친구 사귀기를 무척 좋아하시 었다. 그러한 반면에 누가 아프다 하면 먼저 함께 위로해주고 침도 놓아 주신 선한 분이시었다. 그와 반면에 노래도 잘 부르시기도 하고 때로 는 일본 노래도 불렀다.이버지는 그렇게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다.그러한 아버지가 있기에 나는 행복했었고 어머니 가 따스하게 해주시는 밥에도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때는 정식으로 밥을 먹기 시작하였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로 가던 날 비가많이 쏟아 지는 장맛철에는 언제나 어김없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산을 가지고 나오시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저 행복합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제 8살이 되어서야 말문이 터지고 이제 누구든지 만나면 대화를 나누게되니 이얼마나 기쁜 지 몰랐다. 내가 이제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늘의 뜻이었구나.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속에 아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간 절히 기도하신 소원대로 이루어졌으니 누나 역시 기뻐하고 큰집에서도 반가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큰 아버지는 내가 큰집에 들릴때면 늘 벽장속에서 곳감을 꺼내 주시기도 하였다. (옛날 필자의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셨던 침)
"병수 왔구나." "네,큰아버지." "이제 학교에 들어가더니 말까지 제법 잘하네." "고생 많이 했구나,병수야." "큰어머니도 건강하시었어요." "병수왔냐."
사촌형인 큰 형도 나를 보고 반가워 하시는 모양이었다. 은수형님은 그당시만하여도 모정 초등학교 간이 소사로 계시었다.희수형님은 대전에서 운전면허를 따서 택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춘 누나 영희 누나는 역시 누나와 같 은 친구요 또래로써 사춘동생인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병원에 아파누워 있을 때의 사정은 사촌누나와 사촌형들은 알고 있었고 할머니도 알고 계시었다.손자가 병원에 입원했을때 찾아오시었던 기억들이 되살아 남았 다.할머니도 나를 반기시면서 얼마나 손자를 귀하게 보시었는지 사랑으로 감싸 주시었다, 언제나 손자를 보면 반 가우신 할머니이시다. "이제 몇살이지?" "네8살이예요." "그래.이제 너도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구나." "고맙습니다.할머니." "너그 할아버지가 살아계시었더라면 정말로 기뻐 하실 터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엇어요," "그래.너의 아버지가 어렷을 때 돌아가시었지." "그래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나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는 아버지가 12살 때 돌아가시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많아 지병으로 돌아가시었다고 할머니는 말씀을 하시었다.그러고 보면 손자도 못 보시고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큰 집으로 살면서 혼자 사시었다고 한다. 할머 니의 친정은 장수라 하시었고 큰 어머니는 무주라고 하시었다. 큰 어머니의 존암은 백경운이시고 큰 아버지의 존 암은 김자 종자 철자이시었다.3형제의 가족들은 다툼 없이 사이좋게 맺어온 집안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큰아버지는 재산을 물려 받고 큰아버지밑에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살아 오시었다.그러다가 어머니를 만나고 보니 이제 각자 독립 하여 집을 얻게 되고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는 새로운 집을 짓고 사시었다. 점장이 말 로는 우리집이 집터가 쌔고 귀신이 많다고 하였다.그래서 점장이는 나를 절에다가 팔려고 하였지만 내몸으로 난 자식이라 그럴 수는 없고 사월 초파일이면 늘 지장산에 가셔서 아들의 건강을 빌어주기도 하였다. 외할머니와 함 께 지장산에 들리엇다가 집으로 돌아 오시면 손자는 건강하고 아무 탈 없이 자라남을 보시고 기뻐 하시었다고 한 다.이제 김씨 집안에서 태었으니 이제 김씨의 핏줄은 이어지는 셈이었다.아버지는 간간히 생각이 날 때마다 시조 할아버지에 대하여 알려주시었다.나는 누구의 뿌리인가 누구의 조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조상에 대한 은혜는 잊지 말았다. 큰아버지는 김씨의 족보를 보여 주시면서 조상의 뿌리를 확실히 알려 주시었다.그러한 튼튼한 집안의 가정에서 자라오니 나야 더 이상 부러울게 없었다.조상의 뿌리가 있는한 우리 집안이 살아 있는한 나 역시 부러울게 없었다. 나의 몸은 할아버지로부터 나의 시조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 태 어난 것이었기에 늘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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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산에서 내려다본 용담호 전경) <21> 모정초등학교 ! 운장산 기슭에 자리잡은 산촌의 학교이다 . 6년동안 정이 들었던 교정에서 많은 친구들의 추억이 살아남은 운동장이며 교실이며 이제는 찾아 볼 수없는 학교 의 그리움이 이제는 꿈솓으로 사라진다.제25회 졸업생의 기념 사진 이제는 빛바랜 사진만이 그 당시의 시절을 남 기게 되었다.6년간 같이 정들었던 운동장의 모교 이제는 수몰된 용담호수만이 남아 있는 모정초등학교의 터 당시 내가 학교에 입학랄 때만해도 300명이 넘었 다고 하였다. 코흘리게시절 어린 꿈을 싣고 다니었던 학교의 등교 길, 이제는 찾아 볼 수없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저 아이들의 웃음 사이 로 들리는 풍금소리에 맞추어 교가를 부르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전한다.
운장산 높은 정기 이어 받들어 손 목을 마주잡고 자라나는 우리 씩씩하게 자라나는 힌 꽃송이 즐겁게 즐겁게 자라나는 모정국교 길이길이 빛내자
"하하하!-" "선생님 우리 한번 따라 불러봐요.재미있네요." "그래." "자 반주 넣으시고 우리는 노래 부르고,,,,," "선생님 최고...." "하하하하하!" "재미있냐." "네 재미있어요 우리 교가는 평생 가도 잊지 않을걸요." "뭐." "하하하하!"
교가의 합창소리는 모정초등학교 운동장가에 매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우리반 아이들은 선생님이 쳐주시는 풍금 소리에 귀 기울이며 교가를 부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교가가 네 마음속으로보터 울려 퍼져 나오고 있었다, "병수도 노래 잘 부르네." "왜요?저는 돼지 멱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데요." "아니야.너는 가수 소질이 있어." "제가요." "선생님 병수는 그림도 잘 그린데요." "언제 내가...." "시치미 떼기는 우리반 아이들은 잘 알고 있어." "어머.그래 나도 그림 한장 그려줄래." "못 그려." "짜식 뒤로빼기는 그러지 말고 한 장 그려줘. 이 친구의 부탁이다." "맨잎으로는 안될걸.지금 세상에는 공짜가 어디있냐." "그래 그림 그릴 재료는 다 대줄테니 그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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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정 초등학교의 옛날의 모습)
내가 그림쟁이라는 소문을 여자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선생님도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림에 대한 소질도 강하고 글도 잘 쓴다고 하여 문예부로 미술부로 편입 되기로 하였다. 동시도 써보고 독후감도 써 보고 그림도 그려 보니 나에게는 다양한 재주를 가지게 한 것도 하늘이 주신 은덕이요 조상님의 은덕 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동창생들은 늘 교실에 남아서 1시간씩 교가를 배우고 그리고 배운 교가를 놓치기 싫어서 하교가 끝나는 길이 면 늘 교가를 불렀다. 책가방을 매고 고무신 신고 황토길 같은 신작로를 따라 교문으로 향하던 그 어린시절 책가방 이 나오기전에는 어머니가 아끼시던 책보로 책과 공책을 넣고 다니면서 즐거웟던 일들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장맛 철이면 망화리 아이들은 강이 불어서 학교에 못 나올 때가 있으면 내 마음은 안타깝기에 그지 없었다. 여름 방학이 면 머리실로 망덕으로 그리고 망화리로 놀러갔던 기억들 가을이면 소풍을 다니면서 고향의 향기를 맡아보던 그 어 린 시절....모정숲이 우거지면 왜 이렇게 보기 좋은지...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섰던 고향의 풍경들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가보고 싶었던 고향의 한을 저 하늘과 강은 아는지 모르는지.....이제는 용담호수로 변한 모정 리의 마을이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없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저 파라다이스처럼 펼쳐지는 호숫가에서 고향의 어린 추억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쩌다가 들려보는 용담호수를 바라보면서 지나간 과거를 잊고 싶지 않았다.망향의 정에 오르면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갔던 수몰민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내는지....아직도 고향의 한이 맺혀 두고온 고향 산하를 잊지 않으려는지.....한권의 책으로도 담지 못할 고향의 추억들.... 다시 되돌아올 수없는 고향의 추억이기에 나는 오늘도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았다.두고온 산하 어머니와 같은 고향이지만 다시 돌아갈 수없는 고향. 이제 남은 용담호수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한 많은 고 향이 그리도 그리울줄이야.인생 50년에 기록하지 못할 사연들을 이제부터 시작일찌라. 고향 앞산에서 들려오는 뻐 꾸기 울음소리 그리고 온 산을 진홍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의 물결과 철쭉으로 화사한 봄으로 맞이하는 고향의 봄 마을마다 벚꽃들의 향기가 진동을 하고 쑥을 케고 나물을 케던 시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며 방앗간에서 텅텅 거리 며 방아를 찧는 소리이며 아침마다 닭우는 소리 개짓는 소리 개울가에 오리들이 꽉꽉 거리고 마을공터에는 우람한 느티나무와 경노당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제비들이 강남에서 이사온 뒤로 집집 마다 처마 마다 둥지를 틀고 새싹의 초록의 물결이 봄을 장식하고 벌과 나비들은 아카시아를 찾아 꿀들을 모으고 농부의 마음에도 봄을 맞이한다. 아 지랑이 피어오르는 들판이며 여름날이면 초록위의 무더위 산새들이 지저귀며 아이들은 발가벗고 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시간 가는줄을 모르고 방학이 되면 곤충채집을 한답시고 여름밤에 우는 개구리들의 소리 어둠을 밝히며 날아 다니는 반딧불이며.....멍석을 깔아 놓고 밤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모기장 속에 어린 동생들이 나 란히 누워 있어 누나의 무서운 귀신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향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아버지가 살아오신 농토 할아 버지의 숨결이 묻어나는 나의 정든 고향 모정리 여의곡. 언제나 어린 추억의 뒷동산 대나무 숲이 즐거운 곳 가을이 면 벼를 수확하여 탈곡기로 타작하는 가 하면 가을 단풍으로 구 놓았던 모정숲 다람쥐의 천국이라 한 만큼 학교 길 가에 자라나는 코스모스가 미소를 짓는다.겨울이면 고향의 설경 하얀 들판이 되어 버려 은빛세계로 인도하는 내고 향의 설국이련가. 강이 얼어 붙은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고 바람 부는 날이면 연을 날리면서 시간을 보내던 내 고향 의 추억들 이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고향의 한이이었기에..... 고향을 잃고 타지에서 생활하는 모정리의 어르신들은 옛 사람이 되고 앞집 옆집 아랫집 윗집 아주머니 들도 이젠 백발이 되어 할머니가 되어 버리었으니 그 수많은 고향의 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어디서든지 만나면 반가운 정. 악 수를 나누면서 고향의 정을 잊지 못하니...세월은 어쩔수가 없었다.고향 산천이 그리워하는 고향 사람들의 한이 얼 마나 맺혀 있기에 눈을 감아도 편하지 못할것이니.,....우리의 조상들이 묻한 땅 언제 귀향할거나.....맑고 푸르른 금 강위에 용담호가 생기더니 그 한 많은 설어움 어디로 흘러가는지.......하늘 그리고 산이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맞아 주는 모정리의 그리움.어머니의 과거와 아버자의 과거가 묻어나오는 곳 정든 모정리....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8023A5D2E708435)
(어릴적 신고 다녔던 검정고무신)
"많이 변했네." "글씨 많이 변했어.정말 많이 변했어.우리 어릴적에는 그래도 모정리가 좋았는데.......물에 잠기다보니 갈 수 없는 노릇이고...." "병수야. 그려도 그때가 좋았지.우리 가족들끼리 모여 살던 고향의 옛 추억이 되살아나고..." "누님도 오래전을 잊지 않으시었네요.벌써 누님도 고향에서 지내면서 나를 업고 다니었던 사실을 왜 모르겠어요," "그땐 간난아이때 너를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모르지. 그래도 배가 고픈 너를 업고 다니면서 얼마나 예뻐 했는지 모 르지.너는 내 등에 업히면서 이빨로 내 등허리를 꾹꾹 물어 뜯을 때 그땐 왜 이리도 아팠는지...." "누나,제가 그런적이 있었네요." "너는 모를거다,그래도 니가 배고플때면 젓을 먹이러 다니었던 기억을 잊지 못할거다.아믄 잊지 못하고 말고....니 동생 겸수만 살았어도 좋앗을터인데...." "지나간 일 생각하면 무엇하겟어요.지나간 과거만 아픔으로 다가오는데,,,,,"
누나와 어머니랑 만났을때의 일이지만 내 밑으로도 남동생이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지만 다 지나가버린 속 앓 이였다.내가 누나의 등에 업히면서도 누나의 사랑을 몰랐다.누나는 배고픈 나를 어머니의 젓을 물리기 위해 들판으 로 다녔던 시절. 그래도 품안에 안긴 자식이라 어머니는 젓도 나오지 않는 젓을 물리려는 모정의 사랑. 지금 생각하 면 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팔순이 넘어 요양원에 계시지만 모정리에서 살아계시었을 때는 건강 하고 행복했는데,,,,.이제 어머니의 모습만 보아도 안스러울 지경이었다.우리 5남매를 키우오신 어머니의 삶이 이제 는 과거속으로 돌아간다. 그 젊으시던 어머니의 얼굴도 세월에 가면 늙어지는 법. 이제 아픈 곳이 생기다 보니 더욱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어머니는 생떼 같은 자식들을 땅에 묻어놓고 보니 얼마나 마음이 아파하시었을 까? 그래도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데 어머니는 모짐 세월과 모진 고난과 시집살이속 에서 살 아오시었다.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아버지의 선하신 마음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것은 수줍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나의 아픔과 기억 그리고 슬픔 가족들과의 사랑이 묻어있는 고향 모정리.... 전깃불도 교통수단조차도 불편했던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지만서도 내가 태어나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모정 리의 마을이었다. 댐이 생기기 전에는 얼마나 좋은 곳이었을까 푸른 산이며 나무와 숲들이며 산자락 앞에 모여든 마 을의 전원풍경이며 학교운동장이며 그래도 내가 잘하온 고향의 터전인데.,.....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이 다가 서니 이제는 마음마저도 쉴 곳이 없는 고향이 되고 말았다.21년동안 고향에서 살면서 내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친구의 이름들이며 선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그저 눈물자욱만 아쉽다.모정리에 있는 고향정에 오른다.햇살이 내 리 비치는 저 용담호수에 비쳐지는 과거의 그림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가 미로처럼 사라져 버린다. 과거로 돌아 가 는 느낌속에 모정리의 고향정에 오르면 다시 기억의 미로 속에 잡히기도 한다. 누나는 언제나 내가 용평리에 들리기 만 하면 따스 하게 맞이해주시 었다. 먹을 것은 없어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인정있는 누나였다. 누나의 등에서 자라온 나는 누나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3403B5D2E72EE02)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이지요.그저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어머니들의 마음)
"누님,저 왔어요." "오냐 잘왔구나." "어머니는 건강하시죠." "그래.건강해.그래도 니가 보고 싶을 때 자주 차아 뵈어라.이제 사시면 얼마나 더 시겠느냐.너를 바라보고 온 어머 니인데....나도 최선을 다할거야." "누나.요즈음 살기에는 힘들지 않으시죠." "그래도 니가 자주 찾아오니까 외롭지 않단다. 가족이란 무엇이냐 서로 찾아보고 만나는것이 가족의 정이 아니더 냐." "맞습니다.누님." "막내로부터도 전화는 자주 오죠." "그래." "부산에 있는 조카는 소식 오나요." "그래,내 걱정은 말고 너의 걱정이나 혀. 그동안 마누라 데리고 사느라고 고생이 많다. 이제 아들녀석도 대학에 들 어갔으니 군대에 갈일도 남았구."
누나의 미소에는 언제나 해처럼 맑았다.나도 누나의 염려와 걱정 때문에 늘 마음이 놓이었다. 가족이란게 다 이런 게구나. 가족은 슬픔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서로 나누는것이 가족의 정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혈육이란 정은 그 누 구도 끊을 수가 없음을 입증시켜주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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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편은 다음주 토요일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제 글이 길어지었네요 그리고 부족한 글 찾아주시어서 감사드리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귀중한 자료만 있다면 독자여러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은데 고향에 대한 사진이 없어서 그저 아쉬움만 남깁니다,*
*모정초등학교:운장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산골마을 학교 *운장산:완주동상면과 정천면과 주천면 경계선에 자리 잡은 장소 *용담호:진안군 반절이 묻힌 땅 면적 용담호의 유래에 의하면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용의 형상같이 닮았다고 해서 용담호라 부름.전국에서 6번째로 큰 용담호 *지장산:용담면에 위치한 북쪽지형에 자리 잡은 산 *월계리:전북 진안군 용담면으로 행정구역상으로 자리잡은 마을 유래는 닭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월계 마을로 이름이 지어짐. *용담호의 위치:진안과 금산 사이로 이어지는 장소 (북쪽 방향)서쪽으로는 전주와 군산으로 이어 지고 마이산과 운장산이 마주 보고 있음 *진안:동부권 산악에 자리 잡은 읍내를 말함 전주에서 무주로 가는 길 위치에 자리 잡음. 마이산을 통과하는 익산과 장수간의 고속도로가 뚫려 있음 교통으로는 편리함. 진안읍에는 시장통과 그리고 인삼조합이 자리 잡음. 남쪽으로는 진안에서 동향으로나 안천 벙면으로 가는 위치에 자리 잡음. *교통 소요시간 :서울에서 대전까지 3시간 대전에서 진안까지 1시간. 익산에서 전주 방면 전주에서 진안까지 40분 거리에 위치 *곰티제: 진안군과 완주군 경계에 자리 잡은 위치 *진안 특산물:인삼과 버섯으로 유명함. 흑돼지 사육장.그리고 김치공장이 자리 잡음 *모정리:전북 진안군 정천면에 위치한 마을 모정리의 마을은 산골 마을이므로 지리적으로 풍수적으로 살기 좋은 마을 금강이 흐르고 기름진 옥토와 산새가 좋은 산골 마을 모정숲이 자리 잡아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많이 찾아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