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
박 중 술
투박하지만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묵직하고 믿음직한 체구로 우리의 보금자리를 감싸주는 울타리 역에 충실했다. 그 세월이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비바람 맞아 결빙과 해동을 반복하는 사이 여기저기가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더 이상 서있기도 버겁다는 듯 갈라진 곳은 날이 갈수록 더 크게 벌어진다.
한 때는 담장이 지키고 있는 집에는 삼대가 북적이며 살았다. 부모님과 그의 아들 딸 며느리 손주 등 대가족의 보금자리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젊은이들은 세태 따라 하나 둘씩 떠나고 부모님은 차례대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떠났다. 졸지에 적막이 감도는 빈집으로 변해 버렸다.
부모님의 체취體臭가 어려 있고 우리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그 집을 못 잊어 종종 찾아간다. 오늘은 문학회 동인들과 함께 그곳으로 간다. 가는 내내 어린 시절 추억들이 봄날에 새싹처럼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민다. 몇 갈래 추억을 더듬어 가려내는 사이 벌써 집 어귀의 담장과 마주했다.
외롭게 빈집을 지키는 일이 어깨가 무거웠던 것이 틀림없다. 담장은 전보다 눈에 띄게 쇄약해진 느낌이다. 언젠가부터 돌 하나가 배를 내 밀고 있었다. 그 돌이 기어코 담장의 대열에서 밀려나 땅에 퍼져 앉았다. 도미노가 일어날까 염려스럽다. 짧지 않은 세월의 풍상에 시달려 뼈대만 남아 힘없이 허물어져가는 담장의 모습이 애처롭다.
우리 집 담장에는 곳곳에 손톱 없는 손가락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담을 쌓을 때에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이다. 투박한 담장에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손가락지문의 주인공은 아버님이었다. 손톱 없는 손가락 지문은 작업 중 손톱이 달아 없어졌거나 돌에 치어 문들 어진 흔적이다. 처절한 상처는 아버님의 치열한 삶을 말해준다.
당신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쌓아서 정성으로 관리하다 물려준 담장이다. 성실히 관리 보존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나 헐어진 담장을 복구 할 묘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차원에서 오늘 동행하여 현장을 확인한 문우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며칠 후, 일전에 고향 갈 때 동행한 김 시인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왔다. 담장을 붙잡고 있을 넝쿨나무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하게 뼈만 남아 빈 집을 돌보 헐어진 담장에 넝쿨 식물을 심어 가꾸면 노신사가 지팡이에 의지하듯 서로 의지해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 고 했다.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인 줄 알았는데 너무 평범하고 상식적이 아닌가. 될까? 싶었지만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내년 봄에 묘목을 구해 심어 보자 했다.
이듬해 어느 이른 봄날이다. 김 시인으로부터 사과상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왼 사과냐? 하면 박스를 열어보는데 넝쿨이 주렁주렁 달린 묘목과 그사이에 의문의 봉투하나가 끼어있었다. 묘목보다 주황색 봉투의 내용물이 궁금했다. 조심스레 뜯어보는데 김시 인께서 손수 쓴 편지다
편지에는 “이 넝쿨나무의 이름은 능소화凌宵花입니다. 또 다른 이름은 금등화金藤花라고도 합니다. 어느 나라의 소화 궁녀가 임금의 성은을 입고 빈의 자리에 올랐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궁의 구석자리에 밀려나 임금을 그리다 죽어 능소화로 환생했다는 애절한 전설을 품은 꽃나무입니다. 옛날에는 양반집 앞뜰에만 심을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양반 꽃이라 고도 합니다.
마디마다 흡착 근이 달려 있어 꺾어 심어도 잘 자랍니다. 그래서 담장과 한 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 입니다. 김 시인이 직접 꺾꽂이해서 키운 묘목이라며 뿌리가 튼튼하여 빨리 착근 할 것입니다.“ 라고 씌어있었다. 주인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하다. 잘 키우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이튼 날 고향집 담장 밑에 정성껏 심었다.
봄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같이 심은 감나무의 활착상태도 살필 겸 고향집을 찾았다. 능소화는 벌써 뜨거운 여름인양 가지 뻗기 경쟁이 한창이다. 앙증맞은 흡착 근으로 담장을 붙잡고 고물고물 기어올랐다. 담장은 언제 벌써 능소화의 연초록 흡착 근을 잡았다.
이듬해 여름이다. 장대한 능소화는 담장을 가볍게 껴안았다. 하늘을 향해 뻗어난 가지는 소화 빈의 애절한 사랑의 전설을 아는 듯 정열의 붉은 꽃을 피우며 담장 넘어 지붕을 덮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능소화는 빈의 신분身分도 잊은 채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담장을 얼싸안고 화사하게 피어난다. 힘없이 허물어져 가던 담장은 붉은 능소화 이불 덮고 회춘을 꿈꾸고 있다. 가히, 천생연분이로구나!
박 중술||2018년,문학도시 등단<수필>, 부산 문인협회 회원. 부산 금정문인협회 회원. 부산 부경문인협회 회원. 부산시청퇴직 홍조근정훈장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