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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40강-유식학의 3가지 자성(三性)(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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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정념(正念), 지금 마음을 챙기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깨어서 정신을 하나로 모으시지 않으면 주객이 찢어져 있어요. 주객합일을 못 시키면요 영원히 진리는 타자입니다. 나의 인식대상으로서 타자예요. 인식주체가 에고라면요 인식대상은 나와 상관없는 그냥 타자예요. 근데 인식주체가 무분별지라면 대상도 주객을 초월한 대상이 돼버리니까 주객이 합일이 돼버려요. 주객이 합일된, 이원성을 초월한 영역이 절대계지 출세간의 영역이지, 찢어져 있으면 세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거 한번 정리하고 갈까요. 유식30송에 지금 이제 다룰 게 3자성 이야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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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성 중에 원성실성(圓成實性) 기억나세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 그다음에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그다음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여기서 바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어디가 출세간이죠? 원성실자성이 출세간(出世間)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세간(世間)이에요. 세간이고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은요 무루(無漏), 그런데 벌써 원만하게 일이 이루어져 있어요. 원성(圓成), 이 말에 이미 힌트가 있습니다. 원만하게 이미 6바라밀의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원만하게 이미 완성돼 있는.. 내가 완성시켜야 되는 게 아니에요. 절대계는 이미 원만하게 완성돼 있는 진실한 자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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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타. 여기선 뭐예요? 그러니까 이걸 또 다르게 표현하면요 원성실자성이 이 상태예요. 진여를 무분별지가 꿰뚫어보고 있는 상태. 이게 한 덩어리로 원성실자성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요, 학자들이. 원성실자성은, 경전에서도 이제 수많은 불교학자들이 표현한 게 “지혜로는 무분별지요 진리로는 진여의 진리다.” 원성실자성을 둘로 찢어서 설명해요. 근데 하나로 통합돼 있어야 원성실자성이에요. 원만하게 이미 갖추어져 있는 거죠. 여기에 접속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깨어있으면 무분별지에 접속해서요 여러분도 무분별지(無分別智) 상태에 같이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의식 자체가 공명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깨어있는 마음을 저 같으면 이렇게 그려요. 이게 깨어있는 마음, 정념(正念)의 마음이에요. 정념. 여러분이 깨어계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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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에고인데도 6식·7식이 깨어나요. 다 깨어있어요. 6식이 깨어있으면요 7식·무의식까지 다 하나로 꿰어지면서 초의식인 청정, 이걸 9식이라고 할게요, 청정식(淸淨識)으로, 청정8식이라고도 하고 법상종은, 섭론종은 청정9식. 청정식인데 그러니까 청정한 8식(법상종), 청정한 9식(섭론종) 다 가능합니다. 이 자리에 접속이 돼 버려요. 그러면 이게 어떻게 설명되냐면요? 정념을 하면요 6식은 의식(意識)이죠. 그럼 7식·8식은 무의식(無意識)이거든요. 저 9식 무의식까지. 보세요. 초의식(9식)·무의식(7식, 8식)·의식(6식)이 하나로 쫙 꿰어집니다. 이게 정념 상태예요. 여러분이 깨어나면요, 제 '몰입' 책 보면 저걸 현대적으로 의식과 무의식, 슈퍼 의식이 꿰어진다는 설명을 해요. 깨어있으면. 딱 깨어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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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무의식, 초의식이 꿰어져가지고 내 안에 있던 좋은 과거의 업보의 필름들이 등장해서 지금 안 되던 일도 하게 해주고요. 초의식이 그거를 주재해 가지고 갑자기 신통이 일어나가지고 모르던 게 알아지고 안 되던 게 되고 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건 꿰어져있을 때입니다. 이게 몰입의 신비라고. 사람들이 몰입하면 안 되던 게 되고 잊혀졌던 게 기억나고. 이게 무의식을 지금 자극해서 그러거든요. 이게 한 줄로 꿰어질 때가 이겁니다. 작심삼일 상태는 반대죠. 의식이 결정해요. 무의식이 코웃음칩니다. 무의식이 딱 한마디 해요. “하던 대로 하자.” 갑자기, 갑자기 오늘 뭔가 영감 받았어요. “내일부터 새벽형 인간이 되겠다!” 그러면 이제 무의식이 뭐라 그래요? 그런 업보가 저장이 안 돼 있거든요. 전혀 안 해본 걸 갑자기 하자고 그러니까 “하던 대로 우리는 진행하겠다.” 그래서 계속 자게 만듭니다. 초의식은 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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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런 게 중생의 삶입니다. 초의식은 모르고요, 무의식도 말 안 듣고, 의식 혼자 작심삼일을 되풀이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점점 삐뚤어져가죠, 의식이. “어차피 인생이 이런 거야. 인생은 통수야!” 이러면서 이제 잘못된 지혜로 나아가는 거고. 이게 정념은요 바른 염(念)은 꿰어져요, 하나로. 쫙 꿰어지는 염을 해야 돼요. 즉 지금 여러분 몰라! 하시는 순간, 의식도 무분별지랑 공명해가지고 청정광명해집니다. 의식이 확 밝아지는 거 느껴지세요? 그러면 무의식이 여기에 협조적으로 나옵니다. 도와줍니다. 필요한 정보나 능력을 검색해서 대줘요, 그 종자를. 죽이죠. 그리고 그 안에 이제 또 이게 좋은 게 깨어있었기 때문에 깨어있음의 내가 행위를 했죠. 깨어있음의 좋은 종자가 또 저장됩니다. “깨어있으니 좋더라”는 게 또 저장돼요. 그러니까 할수록 늘게 돼 있거든요, 원래 무의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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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분야로 그 양화(良貨)가 악화(惡貨)를 구축(驅逐)할 수도 있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도 있고. 즉 좋은 놈이 나쁜 놈, 나쁜 놈이 좋은 놈 밀어내고 차지하는 게 무의식의 세계거든요. 어떤 종자가 승하냐가 이제 결정하죠. 좋은 종자가 쌓입니다. 입력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초의식, 청정광명심이 각성해줘야지 쫙 한 줄로 꿰어지면서 여러분 의식이, 이때는 의식에요 방해하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쭉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나와요. 안 그러면 여러분이 의식이 뭐라고 해보세요. 무의식이 당장 반발해요. “될 리가 없다”라고 안에서 탁 나옵니다. 근데 깨어서 해보세요. 자, 초의식 불러놓고, 의식이 소리 큰소리치면요 무의식도 아무 말 안 해요. 돕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만히 있어봐라. 그게 어디 있더라.” 하고 “언젠가 너가 한 번 착한 일 한 것 같은데.. 아침에 일어난 적도 있지 않나?” 뭐 이런 식으로 나와요. 뭔 말인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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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식을 불러오지 않으면 무의식은 말 안 듣습니다. 여러분 통제 밖이라 무의식이에요. 의식 안 돼서 무의식이에요. 근데 무의식을 누가 통제해요? 초의식이. 청정8식을 불러오면 오염8식이랑 에고의식인 7식이 깨깽합니다. 그래서 겨우 무의식 정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때부터 계속 의식이 새로운 걸 입력해요, 무의식에다 청정한 거를. 그러면 그게 정화예요. 이게 다예요. 여러분 유식30송 공부해서 어떻게 정화할 거냐? 깨어있지 못하면 다 꽝이라는 게 이겁니다. 여러분 심리치료 아무리 받으셔도 여러분이 깨어있지 않으면요 다 남 얘기예요. 왜? 의사가 아무리 좋은 말해도 뭐예요? 내 무의식이 다 튕겨요. “의사 놈들 믿을 거 못 돼!” 이 무의식이 튕겨요. 과거에 몇 개의 또 경험이 있겠죠. 탁 나와버리면 이게 관계가 다 망쳐요. 하던, 그런 자기가 갖고 있는 성격장애나 이런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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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용솟음치는데 이 통제가 안 되는데요. 이때 만약에 깨어있어 보세요. 딱 마음에 진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몰라!”만 하셔도 돼요, 이거. 몰라! 정신 모으기. 지금 이 순간에 정신 모으셔야 돼요. 과거, 미래에 안 헤매시고 학당의 실천지침대로 해보세요. 과거 끌려가지 말고, 미래 당장 안 왔으니까 몰라! 하시고 내 이름도 몰라! 하고 계시면 초의식이 각성해요. 그러면 무의식 통제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 초의식이 하는 거지 의식이 하는 게 아니에요. 근데 의식이 해줄 수 있는 게 뭐예요? 깨어있는 거요. 요즘 말로 뭐예요? 몰입해주는 거. 몰입하면 신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유튜브에 찾아보세요. 뭐 많아요. 제 몰입 책 말고도 다른 분들 몰입 책 보면 어떻게 좋아지는지 다 써있어요. 뇌가 건강해지고 막 의식이 건강해지고.. 그게 다 그분들은 그걸 이제 얘기 안 하는데 청정광명심 때문이에요. 초의식과 접속이 일어나서 그래요.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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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거는 다른 전문가들 얘기 찾아보세요. 저는 이게 원성실성·청정광명심, 이 자리가 출세간 자리거든요. 이 자리는 무루예요. 그리고 무루(無漏)고 또 뭐죠? 근데 무루는요 의타기성도 무루에요, 원래. 보세요. 원성실성에서는 주객이 초월돼 있습니다. 원성실성은 무분별인데, 의타기성은 벌써 타자가 등장하죠. 타자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자성. 벌써 타자가 등장했으니까 여기는 세간입니다. 그런데 무루냐 유루냐 하면요? 무루·유루는요 “번뇌성이 있냐? 즉 오염돼 있냐? 오염돼 있지 않냐?” 거든요. 의타기성만으로는 오염된 게 아닙니다. 의식의 나툼일 뿐이에요. 8식·7식·6식, 8·7·6식의 작용으로 현상계가 나툰 거예요. 대승기신론 가면요 현상계 나툰 것도 무명의 작용이라고 그래요. 거기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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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성을 발견합니다만, 유식학에서는요 현상계 나툰 걸로는 오염이라고 안 봐요. 에고가 아집 부릴 때부터 무명이라고, 7식이 이제 에고가 아집 부릴 때부터 무명이라고 그래요. 아집과 법집을 부리는 거죠. 나와 남을 구분하고 내 것에 집착하고. 이때부터 오염됐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이 7식의 아집·법집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집착이잖아요. 두루 따져서 이름을 세워가지고 집착하는 자성이니까 이건 변계소집성이다 보니까 유루가 따로 빠지는 거예요. 현상계, 세간에서 유루 쪽과 무루 쪽이 따로 빠지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무루인데 이게 달라요. 원성실자성은 무위(無爲)입니다. 작용이 없어요. 시공을 초월해서 어떤 작용이 없어요. 여기(의타기자성)는요? 유위(有爲). 작용이 있어요. 이쪽(변계소집자성)은 작용이 있죠. 그러니까 무루·무위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 무루·유위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의타기자성을 오염시키는 게 변계소집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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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루·유위. 안 좋은 거 다 몰아주면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그런데 저는 이걸 강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자성(변계소집자성)은 없어져야 될 존재예요. 이쪽(원성실자성+의타기자성)은 무루의 세계니까 우리가 부처가 되려면 변계소집자성을 없애야 돼요. 아집·법집을 없애야 돼요. 아집·법집만 없애면 돼요. 변계소집자성에서는 아집·법집은 실아(實我), 실체로서의 법(실법實法)과 나와 남이 있다고 집착해요. 근데 의타기자성에서는 항상 가아(假我)·가법(假法)이거든요. 사실은 이것도 방편의 말이고 아와 법이라는 건 견분(見分), 항상 인식주체가 있고 모든 만물에는 상분(相分), 인식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견분, 상분이라 그래요. 무분별지는 어떤 상태겠어요? 지금 원성실자성은? 견분과 상분이 통합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게 분리가 안 돼요, 불이(不二). 그래서 여기서는 아공(我空)·법공(法空). 아도 법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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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덩어리니까. 이해되셨죠? 아공·법공의 세계(원성실자성)가 있고, 가아·가법의 세계(의타기자성), 정확히 말하면 견분·상분만 있는 세계(의타기자성). 이 견분(見分)을 나라고 집착하고 실아(實我), 상분(相分)을 남이라고 만물이라고 집착해버리면 타자라고 대상이라고 집착하고 인식주체를 나(실아實我)라고 인식대상을 법(실법實法)이라고 남이라고 딱 집착하면 변계소집성. 이 3개(①원성실자성 ②의타기자성 ③변계소집자성)만 아시면 돼요. 유식학의 3자성입니다. 어렵지 않죠? 그래서 사실은 보세요. 이것까지 보시면 이건(아집-실아, 법집-실법) 실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게 실체가 없습니다. 이건(가아-상분, 가법-상분) 실체가 있어요. 견분·상분은 실체잖아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게 아니라 뭐죠? 이름의 개념의 대상이 있겠죠. 실체가 있는 겁니다. 여기(아집-실아, 법집-실법)는 실체가 없어요. 뭐만 있어요? 이름만 있어요. 이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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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이라고 하는 이미지만 있어요. 이미지. 그럼 이게 뭔 소리냐면 이름과 상만 있다는 게? 유니콘, 이름 있죠. 상(相), 이미지도 있죠. 올해 용의 해예요. 용 이미지 있죠. 용 이름도 있죠. 진짜로 본 사람은 없죠. 보통 꿈에서 보죠. 그러면 이게 변계소집성이거든요. 그러면 이제 실체가 없는 거죠. 실체가. 그러니까 그 이름의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그 이름의. 어때요? 그러니까 이건(변계소집자성) 실재가 아니다. 이렇게. 이건(의타기자성) 실재다. 그런 의미로 쓸게요, 이 말을. 의타기성은요? 그럼 있어요, 이거는. 견분·상분. 지금 보고 있는 자가 있잖아요, 여러분. 보여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분명히 보는 놈도 있고 보여지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의지해서 지금 이 우주가 굴러가는 거 알겠어요. 그런데 나와 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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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딱 붙이면 벌써 어떻게 돼요? 나랑 남은 상관없는 존재가 돼요. 이걸 펜이라고 해버렸더니, 보세요, 펜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여러분 의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펜!” 그랬더니 나랑 별개의 펜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돼요, 갑자기. 영원히 펜인 것 같은 것이 하나가 등장해요, 내 우주에. 나랑 별개로. 이게 꿈을 생각해 보세요. 일체유식을 이해하시기 쉬운 게 꿈이거든요. 어젯밤 꿈에 별짓 다 했는데 오늘 깨고 나니까 그냥 내 마음 작용이었죠. 근데 꿈꿀 때 분명히 꿈속에서 남은 남이였죠. 건물을 보면 그냥 “건물이 있네”라고 했죠, 꿈속에서. 깨고 보니까 뭐였어요? 내 의식의 대상일 뿐이었죠. 이겁니다. 꿈 상태예요. 분명 이름과 이미지가 다 있어요. 깨고 보니까 그냥 내 의식이었어요, 사실은 다. 꿈 깬 거랑 똑같습니다. 지금도 지금 꿈꾸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대낮에. 지금 꿈꾸고 계신 겁니다. 저도 지금 여러분 의식의 작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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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게 주관적인 꿈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주관적인 꿈은 함부로 해도 되는데, 나만 보니까. 근데 이거 지금 동시 접속해서 보시는 거니까 여기서 미친 짓 하면 안 돼요.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사이버 세계예요, 그냥. 이해되시죠? 지금 여러분이 각자 집에서 VR로 여기 참석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여기는 아무리 열심히 본다고 해도, 저라고 해도 그냥 VR 본 거잖아요. 내 마음의 VR을 본 겁니다. 그걸 보고 딱 집착해서 나랑 별개의 타자들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VR 봐도 그러지 않을까요? 남을 만나면 “어, 누구네!” 그러겠죠. “누구 만났네!” 하겠죠. 사실은 뭐만 봤어요? 그냥 모니터에 펼쳐진 지금 이미지만 본 건데 이름을 불러주고 붙여주고 나랑 다른 존재라고 이미지를 세웁니다. 이렇게 살아요, 우리가. 이 매트릭스를요 이게 지금 벌써 거의 몇 년 전이에요?
16:00
한 1,700, 1,600년 전에 이 이론이 다 나왔다니까요.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얘기한 것도요 아뢰야식설 여기서 다 얘기했다니까요, 기본적인 뼈대는. 재밌죠. 근데 제가 왜 융 강의까지 따로 했냐면요? 여러분 우리나라가 계속 금속활자 최초라고 자꾸 주장하면 뭐해요? 지금 책은 다 서양에서 발전시켰는데. 이런 거예요. 아뢰야식이 자꾸 인간 의식의 탐구의 선구라고 주장하면 뭐해요? 지금 병원 가면 다 칼 융으로 치료하는데. 이해되시죠,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선구라는 것만 강조해서는 도움이 안 돼요. 지금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어야죠. 이 부분도 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측면에서 제가.. 지금 유식30송 해석도 잘 하기 힘든데 언제 이게 실용적으로 쓰여요? 제가 실용적으로 써 먹는 법, 일단 깨어나야 된다. 깨어나야 원성실자성과 접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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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성실자성을 직관해야 견도위(見道位), 1지보살에 들어가요. 그리고 1지보살 여기 견도, 무분별지로 원성실자성을 꿰뚫어봐야. 이게 무분별지잖아요. 그럼 그 이후에 뭐가 보이겠어요? 여기(의타기자성+변계소집자성), 분별지의 세계로 나와가지고 의타기자성과 변계소집자성의 실체를 명확히 꿰뚫어 봅니다. 원래 파악하기 쉬운 게 얘네들이죠. 이건 세간지(世間智)로 파악해도 되니까. 이건(의타기자성+변계소집자성) 에고로 봐도 돼요. 에고로 분석해도 보여요. 하지만 얘네들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거는 무분별지로 원성실자성을 깨닫고 그 뒤에 봐야 예네들 실체가 정확하겠죠. 이 그림도 이미지로 넣어 두세요. 그리고 이제 읽어볼게요. 20송, 변계소집자성부터 읽습니다.
[제20송
이리저리 두루 따지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온갖 사물을 두루 따지니,
이렇게 두루 따지고 집착하는 것은
자성 불변의 본질 이 실재로 있지 않다
(‘변계소집자성’으로 ‘이름’을 지어 집착하는 ‘형상’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라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이리저리 두루 따지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의식에는 8식·7식·6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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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은 이미 얘기했고요. 그 8·7·6식이 작동하다 보니까 6식이 무슨 짓을 해요? 6식이 이리저리 따져요. 근데 따지면서 온갖 사물을 두루 따지니. 6식이 이리저리 따져요. 근데 그 따지면서 온갖 사물을 두루 따지니 이렇게 두루 따지고 집착하는 것은 자성이 실재로 있지 않다. 불변의 본질이 없다는 겁니다. “실체가 없다” 이 소리입니다. 아까 얘기한 거. 얘네들은 자성(自性)이 없어요. 왜 없냐? 어떤 의미냐 하면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이름과 이미지만 있는 거예요. 변계소집자성으로 이름을 지어 집착하는 형상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라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리입니다. 변계소집자성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걸 이름 붙여가지고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자성입니다. 자, 그런데 저는 한 가지 제안합니다. 유식학은 이게 유루·유위이기 때문에 얘네(변계소집자성)를 없애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얘네를 없앨수록 부처가 되고 완벽히 없애야 부처가 돼요. 그런데 저는 항상 주장입니다. 완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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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우리는 될 수가 없다. 왜? 얘네들을 없앨 수가 없다. 결국 부처가 아무리 도를 깨달아도 뭐라고 해야 돼요? 나와 남을 방편으로 써야만 설법을 할 수 있죠. 세간에서 활동할 수 있어요. 부처가 세간에서 활동하려면 아이디도 있어야 돼요. 아미타불, “나는 다른 부처랑 다릅니다. 아미타불이라고 불러주세요. 입구에서 아미타불을 찾으세요, 정토 오시면.” 자, 이게 뭐예요? 변계소집성이요. 그러니까 이거 없이는요 현상계가 안 굴러가요. 즉 뭐냐? 저는 유식학설이 조금 보완해야 된다고 보는 게 변계소집자성도 의타기자성의 한 응용이라고 봐야 됩니다. 왜? 무루가 있으면 유루도 있는 거예요. 이것도 의타기성으로 봐야 됩니다. 의타기성을 확장해서 변계소집자성까지 의타기성 안에서 품어야 된다. 그리고 변계소집자성은 독(毒)이기 때문에 잘 법제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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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으로 쓸 수 있게 해야 된다. 벌써 자기들이 이렇게 해요. 견분·상분이라는 이름 붙였죠. 이것도 이미 변계소집자성입니다. 이것도 견분·상분하면 이건 이름 아닌가요? 그것 좀 민망하니까 가아·가법. 이것도 가아도 이미 이름이고 이미지예요. 이해되세요? 그럼 이 말은 뭐냐? 언어를 쓰는 이상 변계소집자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없다. 그럼 이미 벗어날 수 없는데 자꾸 이걸 없애야만 도를 얻는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뭔가 이상하죠. 그래서 이것도 껴안아야 된다. 이건 제 의견입니다. 유식학이 더 자명해지려면 대승철학이 되려면 변계소집자성이 분명히 이런 특징이 다른 거 아니까 이거(의타기자성)랑 이거(변계소집자성)랑 이렇게 다른 특징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히 하되 광의의 의타기자성 안에 들어간다는 걸 이해하고.. 탐진치거든요, 변계소집자성이. 탐진치 없앨 수 있어요? 못 없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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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도 활용해야 된다. 부처님이 가실 때까지 탐진치를 다 없앤 모습을 보여줄 수 있나요? 안 돼요. 탐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세간 안에. 그러면 방편으로 쓴다 그래요. 방편으로 쓴다고. 그럼 방편으로라도 쓰려면 그만큼 허용해야겠죠. 더구나 보세요. 유식30송이 이미 인정하고 있어요. 변계소집자성이라는 걸 자성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왜 따로 구분해서 쓰죠? 필요하니까요. 이 자체가 이미 의타기자성의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걸 자기들이 입증한 거예요. 이걸 자성으로 하나 설정하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되거든요. 이해되시죠? 단 이놈은 허망한 놈이라고 자꾸 얘기하는 거예요. “없어져야 할 놈이고 허망한 놈이다. 모든 걸 오염시키는 주범이다”라고 계속 얘기하지만 오염시키는 주범이 없이 이 우주계가 지금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오염이 없이 청정하게만? 말이 안 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이것도 허용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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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미 자기들이 허용하고 있다. 이름까지 붙여가지고 또 쓰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좀 더 확장해서 이해하자. 이거 제 얘기고요. 21송, 의타기자성.
[제21송
‘의타기자성’(다른 것에 의지하여 발생하는 자성)은
분별(유위의 의타기성)이며13)에 의하여 발생한다.
(심법心法은 4가지 인연에 의지하고, 색법色法은 인연ㆍ증상연에 의지한다.)
‘원성실자성’(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진 진실한 자성)은
저것(의타기자성)에서 앞의 자성(변계소집자성)을항상 멀리 떠난 것이다.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과 섞이는 것도 분리된 것도 아니되, 변계소집자성에서 항상 멀리 떠나있는 ‘무루無漏ㆍ무위無爲의 진여’인 것이다. 무루ㆍ유위의 의타기성도 ‘무루’인 점에서 ‘원성실성’이라고 불릴 수 있다.)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다른 것에 의지하여 발생하는 자성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우주 만물은 다 자기 혼자 발생하는 게 없어요. 인연 따라 발생해요. 조건이 갖춰지면 생성돼요. 그럼 조건이 이미 타자예요. 타자가 있어야 나옵니다. 또 8·7·6식의 작용이라고 하더라도 8·7·6식이 서로 의지해서 작용합니다. 7식은 8식 없이 어떻게 7식이 작동해요? 6식도 마찬가지고요. 지난 시간에, 이전에도 다뤘죠, 유식30송 할 때. 서로도 의지관계다. 그리고 이 의타기성에 전제된 게 하나가 있습니다. 중관학파는 이 의타기자성 하면 “그냥 타자에 의지해서 연기한다.” 연기만 생각하는데요. 유식학은 의타기자성에서 연기만 생각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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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식이라는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일체는 8·7·6식의 작용이다. 의식의 작용이다.” 일체는 의식의 작용으로써 연기하는 겁니다. 중관학파는 그냥 이 펜이 실재하면서 연기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거고요. 유식학은 의타기자성에서 이것이 연기하지만 의식의 작용으로 연기해요. 내 마음 밖에 펜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게 중관파랑 유식학파의 차이입니다. 유식학파는 일체 존재를 내 의식의 작용으로 봐요. 일단 인식주체에 의지해서 인식대상이 있어요. 이것부터 의타기예요. 이해되시죠? 그래가지고 이 의타기, 존재하는 것들이 다 의식의 작용으로서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더 매트릭스 같죠? 매트릭스 세계가 변화하지만 결국 우리 뇌의 작용일 뿐이었잖아요. 의식의 작용이라고 보시면 되죠. 매트릭스처럼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의식의 작용으로써 연기하는 거지 실재하면서 연기하는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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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중관파와 유식학파의 큰 차이입니다. 대신에 이제 중관파도요 이런 유식학설을 받아들여서 제가 좋아하는 까말라실라 같은 '수행의 단계' 쓰신 분, 달라이 라마께서도 많이 강의하는 그 책 저자 같으면 이미 유가행중관파예요. 일체유식을 받아들인 중관파예요. 그렇게 서로 융합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절충파도 있어요. 또 의타기자성은요 분별이며 유위의 의타기성이라는 뜻입니다. 분별한다는 건요, 보세요, 무위가 아니라 유위라는 얘기예요. 유위. 인연에 의해 발생한다. 타자에 의지한다는 게 이제 인연에 의지해 발생한다. 이렇게 풀었고요. 그 인연 보시면 4가지가 있습니다. 이 4가지 인연만 외워두세요. 여기 모든 불경에 나와요. 4가지 인연, 그냥 인연(因緣)이 있어요. 이건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연을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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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에 붙은 연이라는 것은 조건입니다. 조건. 그런데 인연이면 직접적인 원인의 조건. 소연연(所緣緣). 소연이라는 건 대상이거든요. 인연의 대상, 인식대상을 말해요. 인식대상으로서의 인연. 즉 어떤 내적 동기가 있어야 되고요. 인(因). 바깥에서 나를 자극해야 되고요.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은요 일이 일어나는 거를, 정말 그 뭐죠, 도와주는 경우. 그러니까 아주 보조적으로 도와주거나 막지만 않아도 증상연에 넣어줘요. 그러니까 아주 광의의 인연이에요. 안 막아주는 거. 쉽게 말하면 여러분 눈 달렸죠. 눈 달려서 뭘 봐 가지고 뭔 짓을 저질렀어요. 그럼 이 눈은 죄 지으라고 한 적이 없죠. 그 짓을 하라고 한 적이 없죠. 이때 증상연이에요. 눈이 도움이 됐죠. 보조적으로. 안 말렸죠. 눈이. 뭔가 일이 일어나는데 약간 도움 줬잖아요. 방해 안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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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게 증상연이죠. 이런 거예요. 사실 계산하다 보니까 넣은 거지 정말 이건 별 도움 안 되는 인연이죠. 다만 따져보면 증상연도 있죠. 등무간연(等無間緣), 동등해서 틈이 없는 인연이 있어요. 이거는요 업보가 바로바로 구현되는 연입니다. 원인을 지었으면 바로 과보가 있어요. 동등한 성질의 과보가 바로 이어져요. 이건 뭘까요? 여러분 생각이요. 앞생각이 뒷생각을, 바로 지금 찰나찰나 생각이 이어져 가게 되고 있죠. 이 경우가 이제 등무간연(等無間緣)입니다. 밑에 설명 볼게요.
[13) ① ‘인연因緣’은 직접적인 과보를 낳는 원인을 말하니, 대표적으로 제8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가 ‘종자’를 낳거나(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종자’가 ‘현행’을 낳거나(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이 종자로 훈습되는(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인연을 의미한다.
② ‘등무간연等無間緣’은 이전 찰나에 멸한 심왕과 심소법이 틈이 없이 바로 다음 찰나에 동등한 마음을 열어 생겨나게 하는 인연을 의미한다.
③ ‘소연연所緣緣’은 심왕과 심소법의 대상이 되는 인연을 의미한다.
④ ‘증상연增上緣’은 다른 법이 일어나는 것을 돕거나, 방해를 하지 않는 인연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6근’이 있다.]
인연(因緣)은 직접적인 과보를 나눈 원인을 말합니다. 뭐 때문에 이게 발생했어! 라고 할 정도의 직접적인 원인. 대표적으로 제8식에 저장돼 있는 종자가 종자를 낳거나. 여러분 여러분 눈앞에 뭐가 펼쳐지려면 여러분 안에 아뢰야식 안에 있는 종자가 구현된 거예요. 그럼 종자는 씨앗이죠. 그럼 씨앗 인(因)자잖아요.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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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앗으로 인해 펼쳐진 거예요. 여러분 업보로 인해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펼쳐진 거예요. 종자가 종자를 낳는다는 건요 우리 아뢰야식 안에 종자가 자꾸 부풀려져 가요. 인연이 차곡차곡 카르마가 쌓여가는 겁니다. 폭발할 때를 향해 가는 거죠.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그게 원인이고요. 종자가 현행된 게 원인이고 현행이 또 종자로 훈습되는 인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들을 말해요. 이게 그러니까 현행한 게 또 잠재돼 있다가 다시 무르익어서 이숙(異熟)으로 무르익었다가 다른 때에 터져 나오는 거거든요. 이게 인연의 대표적인 모습이고요. 등무간연(等無間緣)은요 이전 찰나의 멸한 심왕(心王)과 심소법(心所法). 생각·감정들이에요. 여러분 의식 작용. 심왕은 8식·7식·6식 통틀어 말하는 거고, 심소법은 마음의 작용들이죠. 그 작용들은 지금 빡쳐 있으면 빡친 마음이 계속 이어지죠. 이게 등무간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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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탁 사라졌는데 전(前) 찰나에 사라졌는데 후(後) 찰나에 그대로 바로 동등한 마음이 이어져서 올라오는 거. 그래서 하나로 보이는 거예요. 하나로 보이는데 들여다보면 찰나찰나 생멸하고 있거든요. 그럼 그 인연은 바로바로 과보를 낳아주고 사라지죠, 전(前) 찰나가. 후 찰나가 과보로 등장하고 또 다음 찰나를 인도해 주고 사라져요. 이게 열어주고 사라져요. 이게 이제 등무간연, 동등해서 틈이 없게 동등한, 똑같은 게 틈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인연을 말하고요. 소연연(所緣緣)은요 심왕과 심소법. 즉 마음과 마음 작용의 대상이 되는 인연. 뭔 대상이 있어야 우리가 이게 작동하잖아요, 심왕 심소법이. 증상연(增上緣)은요 다른 법이 일어나는 걸 돕거나 방해하지 않은 인연, 대표적으로 6근이 있다. 6근이 도와줘요, 여러분. 뭔 일 할 때 막 또 열심히 다리가 하필 또 열심히 뛰어져가지고 그 일이 일어났네요. 다리 탓하기는 뭐하죠? 다리는 인연도 아니고 뭐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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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다 붙여보려면 증상연이죠. “너도 도왔잖아! 그리고 손, 너 방조했잖아!” 막 이런 식으로 해서 안 막았잖아요. 누군가 안 막고 있으면요 그것도 증상연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공범이 되는 거예요, 안 막았다고. “내가 그럴 줄 알았나! 뭐” 이런 이런 인연들이죠, 이 증상연은. 이렇게 해서 발생한다. 지금 4가지 인연 다 봤죠. 이 중에요 심법(心法)과 색법(色法), 정신과 물질을 둘로 나눠보면요 마음의 법에는 이 4가지 인연 다 해당되겠죠. 그런데 이 색법에는 인연과 증상연만 해당된다고 봐요. 이런 것도 알 필요는 없는데 학자들이, 불교학자들이 많이 얘기하니까. 왜냐면요 생각·감정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색법은. 등무간연이 없는 거고요. 종자를 저장하고 뱉고 하는 작용이, 그거는 이제 거기에 대상은 되겠지만, 색법이. 저기 소연연은 없겠죠. 인식주체는 아니니까 인식대상으로 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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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없다고 보는 거죠. 이런 거는요 그냥 뭐 외워두실 필요도 없고요. 옛날 분들이 어떻게 사유했는지만 한번 보세요. 이 인연을 가지고 어떻게 놀았다. 원성실자성,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진 진실한 자성은요 저것에서.. 글이 참 아름다운 게요 설명이 없습니다. 괄호 빼고 읽으셔야 돼요, 원문은. 저것에서 앞에 자성을 항상 멀리 떠난 것이다. 이걸 수많은 학자들이 분석한 겁니다. “저것이란 무엇인가? 의타기자성이다.” 그러니까 의타기자성, 의타기자성에서 앞에 거, 변계소집성 빼버리는 게 원성실자성이다. 보세요. 의타기자성은요 변계소집성으로 오염이 돼서 같이 유루가 돼요. 원래 본성은 무루인데 변계소집성이랑 같이 움직이니까 의타기자성도 유루가 돼요. 그랬는데 얘(변계소집성)를 싹 빼버리면 얘(의타기자성)는 무루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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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런데 의타기자성이 무루가 돼도 무루·유위거든요. 근데 원성실자성은 무루·무위입니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은 둘이면서 하나라고 보는 거예요. 출세간과 세간이 한 덩어리로 무루인데 원래 무루였는데, 변계소집성이 의타기자성을 오염시켰어요. 근데 얘네 빼버리면 원래 원성실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한 거예요. 이거 이 문장을 이렇게 쓰니까 헷갈려요. 그럼 의타기성에서 이제 이런 이론도 가능해지죠. 원성실자성을 출세간으로 안 보고 의타기자성에서 변계소집자성만 빼면 무루가 되는데 이 무루가 원성실자성인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야기가 이렇게 설명된 유식학 책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원성실자성이 따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내 삶에서 아집과 법집만 뺀 거다. 그게 원성실자성이다 이런 설명 어때요? 이것도 틀리지는 않아요. 유식학은 좀 열어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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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실자성하면 의타기자성 중에 무루화된 의타기자성도, 본색을 찾은 의타기자성도 원성실자성의 작용이기 때문에 넣어줍니다. 원성실자성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하지만 유위이기 때문에 뺍니다. 진짜 원성실자성을 논할 때는 또 뺍니다. 광의의 원성실자성에 넣어주긴 해요, 무루라는 측면에서. 그럼 됐죠. 불경이 이래요. 진짜 짜증나는 게요 다 넣어줘요. 해설을 들으면요 막 중첩되고 겹쳐요. 이런 점에서는 원성실자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렇게 각주 내주고 가버려요. 그러면 이제 보는 사람이 막 정리를 해야 돼요. 불교 경전들이 좀 그래요. 왜 그렇게 됐냐? 경전들을 수많은 저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관점에서 난개발하듯이 경전이 나온 거예요. 그럼 후대 학자들이 교통정리를 해줘야 되잖아요. 원효나 이런 분들 유명한 분들, 그분들이 나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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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교통 정리해서 주석을 내주다보니까 어떨 때는 또 이 이론대로라면 이게(의타기자성) 원성실자성이 되거든요. 그러면 이거(의타기자성)는 세간의 원성실자성이다. 또 이렇게 각주를 내줘요. 이렇게 이렇게 하다 보면 외울 게 어마어마해져요. 무슨 말씀 아시겠죠. 읽다 보면 불교는 좀 이런 걸 열어놓고 읽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 이건 이렇게도 부를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이런 얘기가 계속 나와요. 이런 관점에서는 이렇게도 부를 수 있다. “원성실자성은 변계소집자성을 거기서 뺀다면 무루이니까 원성실자성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이론의 근거가 됩니다, 이게. 저것에서 앞에 것만 빼면 원성실자성이다. 저는 그렇게 안 풀었어요. 풀이 보세요.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과 섞이는 것도 아니지만 분리된 것도 아니다. 둘이면서 하나예요. 하나이면서 둘이에요. 왜? 하나는 출세간이고 하나는 세간이다 보니까 따라서 변계소집자성에서 항상 멀리 떠나 있는 무루·무위의 진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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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무위의 진여인 것이다, 원성실자성은. 그러니까 저는 이 구절을 어떻게 풀었어요?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자성 빼면 원성실자성입니다.” 이렇게 안 풀고,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과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에, 섞이는 것도 분리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변계소집자성에서 항상 멀리 떠나있는 무루·무위의 진여인 것이다. 무루·유위의 의타기성도 무루인 점에서는 원성실성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해놓은 겁니다. 이 한 구절 쓰려면요 경전을 다 정리해야 돼요. 오만 잡설들이 또 다 쓰여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주장 저 주장, 이 구절을 어떻게 볼 거냐에 따라서. 저는 제 식으로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원성실자성은 확실한 출세간의 진여로써 그 자리를 잡아줘야 맞거든요. 변계소집자성이 항상 멀리 떠나 있어요. 그러니까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버린 거죠. “원성실자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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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타기자성과 함께 하되 항상 변계소집자성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풀었어요. 다르게 풀면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을 빼면 원성실이다.” 이 주장도 어디 불교 책 보시다 보면 만날 거예요. 근데 그것도 포섭은 해주면서 가자고요. 22송.
[제22송
그러므로 이것(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과 더불어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원성실자성인 ‘진여’는, 만법에 두루 한 맛으로 통하는 ‘공상共相’이니, ‘만법의 자성’인 원성실자성과 ‘만법’인 의타기자성은 섞이지 않되 분리될 수도 없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한 것이다.)
예컨대 ‘무상’ 등과 같으니,
(서로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인 ‘자상自相’을 지닌 만법은, 만법에 두루 한 맛으로 통하는 ‘무상ㆍ고ㆍ무아’의 보편적 특성인 ‘공상共相’과 섞이지 않되 분리될 수도 없다.)
이것(원성실자성)이 아니면 저것(의타기자성)을 볼 수 없다.
(이 만법의 자성인 ‘유식의 성품’인 원성실자성을 ‘무분별지’로 증득하지 못하고는, ‘후득지’인 ‘분별지’를 통해 원성실자성을 공상共相으로 삼는 만법인 의타기자성의 실상을 끝내 알 수 없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인 것이다.)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그러므로 이것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과 더불어. 벌써 설명 나오잖아요. 자기가 뭐라고 했어요? 저자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라고 했잖아요. 경전의 근거를 갖고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원성실자성인 진여는 만법에 두루 한 맛으로 통하는 공상(共相)이나. 그래서 혹시 지금 가슴이 답답해지신다면 공상 때문이겠죠. 공상의 반대는 뭐게요? 자상(自相). 그럼 이게요 자상은 개별 구체적이고 공상은 보편 추상적인가요? 그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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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은요 이런 거예요. 만약에 컵, 옷 그러면 컵은 컵의 보편법칙이 있겠죠. 왜냐하면 컵도 수많은 개별 구체적인 컵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개별적인 컵 A·B·C·D가 있는데 그걸 퉁쳐서 컵,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상은 이걸 말해요. 컵, 옷. 그럼 이 자체가 이미 보편 추상적인 거라고요. 컵 일반을 말하니까. 옷 일반. 이해되시죠? 그러면 공상은 뭘까요? 이 중에 공통적인 거예요. 만약에 빨간 컵, 빨간 옷이라면 빨간이라는 게 공상이 돼요. 이해되시죠. 근데 제일 대표적인 공상이 뭔지 아세요? 불교에서 공상 그러면. 만약 공상이 출제됐다 그러면 이걸 쓰셔야 돼요. 이게 공상의 제일 대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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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은 지금 만법이 해당되죠. 만법이 다 자상이죠. 만법의 공통된 공상, 불교에서 부처님이 외쳤던 공상 뭐죠? 무상·고·무아. 이거 맞추신 분은 오늘 맛있는 거 드세요. 좋으시겠어요. 어때요? 이게 공상이에요. 어떤 만법도 무상하지 않은 게 없잖아요. 그럼 이 공상이 이 모든 만법에 침투해 있다는 거예요. 한 맛으로. 소금 치면 다 소금맛 나죠. 모든 만물에서 이 맛이 난다는 거예요, 무상한 맛이. 이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원성실자성인 진여도 공상인 거예요. 만법에 두루 통하는 만법의 자성이니까. 원성실자성도 공상이에요. 우리 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보시면 돼요? 이게 지금 자상에다가 오온을 넣으면 되잖아요. 오온(五蘊). 오온은 지금 자상(自相)이면 공상(共相)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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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空性)이요. 이해되시죠? 오온(五蘊)이 공(空)이다 하는 건요 오온이라는 자상, 각각의 오온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공통적으로 다 공성(空性)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죠. 원성실자성도 이런 겁니다. 그래서 만법의 두루 한 맛으로 통하는 공상이기 때문에 진여이니까요. 오온이 공하다고 했을 때 그 공성이 지금 진여잖아요. 만법의 자성인 원성실자성과 만법 자체인 의타기자성은 섞이지 않되 분리될 수도 없다. 지금 오온이 뭐예요? 이건(오온) 지금 의타기자성이잖아요. 공성(空性)은 뭐예요? 원성실자성이요. 공상(共相)과 자상(自相)의 이 관계, 만법에 내재돼 있는 무상·고·무아의 특징, 이 관계처럼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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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이렇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인연 따라 발생한 모든 존재 안에는 원성실성이 침투돼 있다는 거죠. 한 맛으로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성실자성과 의타기자성은 같아요? 달라요? 같기도 다르기도.. 그렇죠.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고. 이 느낌이에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이걸 뭐라고 했어요? 색, 오온, 색, 공. 색은 색불이공(色不異空) 공하고 다르지 않고, 공은 색하고 다르지 않다(공불이색空不異色). 유식학적으로 풀면 이 구절이 이렇게 풀립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그리고 또 같기도 하고요 다르기도 하고. 이렇게 같기도 다르기도.. 색이 공하고 다르지 않고.. 또 공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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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같은 측면을 강조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다르기도 한 거죠.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이렇게 해도 되죠. 다른데 동시에 또 색이공(色異空) 공이색(空異色). 이것도 가능하죠. 다르기도 하고 색불이공(色不異空) 다르지 않기도 하고. 결국 하나다. 이렇게. 반야심경하고 좀 통하는 구절이죠. 예컨대, 예를 들어줄 때 이래요. 예컨대 무상(無常)과 같으니 이게 이 말이에요. 무상·고·무아랑 같으니. 서로 구별되는 고유 특성이 있는 자상, 각각 구별되는 특성을 지닌 자상을 지닌 만법은 만법에 두루 한 맛으로 통하는 무상·고·무아의 보편적 특성인 공상과 섞이지도 않되 분리되지도 않는다. 무상·고·무아랑 하나인데 또 둘이죠. 만법이 그대로 무상은 아니잖아요. 근데 무상의 맛을 갖고 있죠. 같으면서 둘이다. 그래서 의타기성은 원성실성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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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또 달라요. 이 느낌이에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볼 수 없다. 갑자기 또. 원성실자성이 아니면 저것을 볼 수 없다. 원성실자성의 작용이거든요, 의타기성이. 만법의 자성(自性)인 유식의 성품인 원성실자성을 무분별지로 증득하지 못하면요 후득지인 분별지를 통해 원성실자성을 공상(共相)으로 삼는 만법인 의타기성의 실상을 끝내 알 수 없습니다. 의타기성의 공상(共相)이 뭐라고요? 원성실자성이요. 둘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원성실자성을 모르고 의타기자성을 안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어요. 의타기자성은 더 알기 쉬운데 제대로 알려면 원성실자성을 알아야 얘(의타기자성)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같으면서 또 다르기 때문에. 이해되시죠? 근데 다르면서 또 같기 때문에.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뭐라고 했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 “만법이 본래 원성실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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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타기자성이 본래 원성실자성이더라.” 이 말을 한 겁니다. 근데 둘이 같으면서 또 다르다. 다르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제 반야심경을 유식학적으로도 한 번 풀어본 겁니다. 어떠세요? 지금 이해 혹시 안 되신 거 있으신가요? 지금 원성실자성까지 왔어요. 이 이후에는 이제 3가지 무자성으로 가볼게요. 자성은 지금 다 설명 드렸어요. 지금 원전(原典)이 이래요. 여러분이 원전 다 이해하셨으면 이해하신 거예요. 여러분은 이미 유식학자다. 집에 가서 자랑하세요. 무식은 면했다. 난 이미 유식하다. 아니 원전 이게 다인데 이거 이거 풀었으면 여러분도 당당히 유식학자의 지금 명함 내미신 거죠. 어쩌다 유식학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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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10분 쉬고 또 달려보겠습니다. 다 유식하게 만들어버리겠다는 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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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40강-유식학의 3가지 자성(三性)(43:10)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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