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스님과 보천교
-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에서 발췌 --
일제가 보천교 (지금의 증산도의 전신) 와해를 위하여 많은 인력과 자금을 들여서 결국에는 유사종교로 몰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보천교가 민족주의자들의 소굴이었기 때문이다. 교주인 차경석의 아버지도 차치구라는 동학의 비중있는 간부였다.
차치구는 전봉준을 따라서 동학에 가다하였다가 결국에는 참형을 당해서, 목이 뒹구는 시체가 형장에 버려져 있었다. 목 없는 시체를 무서워해서 아무도 수습하려는 사람이 엇었는데, 당시 열네댓 살 밖에 안 되었던 차경석이 캄캄한 한밤중에 형장에 가서 아버지 시체를 지게에 메고 와서 매장하였다. 일본군에 의하여 참혹하게 아버지가 죽는 현장을 목격하였던 차경석은 일본을 증오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어 모두가 절망하였을 때 모악산 밑에서 ‘일제는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선언하고 다니던 신인(神人) 강증산(姜甑山)을 만났다. 고기잡는 어부를 하다가 예수를 만나자 만사 제치고 예수를 따라다녔던 베드로처럼, 차경석도 강증산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천교를 세웠으니 외부적으로는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독립을 염원하는 우국지사들의 아지트였다고 표현해야 옳다.
대표적으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2~1950) 같은 인물이 보천교를 많이 출입하였다. 조만식은 한규숙(韓圭淑), 정복규(鄭復奎), 정상탁(鄭常鐸)과 함께 당시 30만 원이라는 거액을 독립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고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된 적이 있다.
30만 원은 보천교의 차경석으로부터 나온 돈이었다. 차경석은 우국지사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였으며 형편이 되는 대로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돈은 300만 신도들이 살림을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탄허 스님의 아버지인 김홍규(金洪圭)도 보천교에 깊숙하게 참여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김홍규는 차경석을 보좌하는 4대 참모 가운데 가장 수석참모인 목방주(木方主)를 담당하였다. 차경석을 중심으로 수,화,목,금,토 오행에 맞추어서 각 방향을 담당하는 5대 방주(方主)라는 제도가 있었다.
가장 중심인 토방주(土方主)는 교주인 차경석이었고, 그 다음 위치에 목방주가 있었는데, 탄허의 아버지인 김홍규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조만식과 같이 체포된 한규숙은 수방주(水方主)였다.
김홍규는 처음부터 보천교에 들어갔던 게 아니다. 원래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상해로 갔었다. 그러나 상해에서의 독립운동도 쉽지 않았다. 도산 안창호와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탄허의 말에 의하면 임시정부에서 자금을 모을 때 각 지역에 자금을 모집할 담당자를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을 도산이 하였다. 그래서 김홍규는 도산에게 자신을 국내 담당 자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도산으로부터 여러 번 거절당하자 인연이 없다고 판단, 국내로 들어와 보천교 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운동 대신에 보천교 운동을 시작한 셈이다. 김홍규는 보천교에 오기 이전에도 태을교라는 단체에 가담하여 거액의 독립자금을 마련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적도 있다.
이렇게 탄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인 김홍규로부터 민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천교의 수석 참모였던 만큼 보천교 건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탄허는 보천교의 웅장한 건물을 처음 지을 때부터 보고 자랐던 것이다. 어렸을 때 보던 그 건물이 보천교가 일제 탄압으로 망하고 나서 서울로 옮겨져 조계사 대웅전으로 재건축되었으니, 조계사 대웅전을 바라보는 탄허의 심정이 어땠겠는가./(이하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