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고등학교 강당건물을 지키기 위하여
동문회 및 강당철거저지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홍성군수를 통하여 강당을 충청남도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청원키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12월5일 홍성군에 제출키로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글은 급히 작성하느라고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여 약간의 오류가 있었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 글은 거의 오류가 없는 글로서
모교의 역사가 이렇게 자랑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이 청원서를 작성하면서야 알게 된 점은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그것을 정확하게 알게 되어서 다행으로 생각하며,
이 글을 읽은 우리 홍고인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강당을 지켜낼 것입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청 원 서
청원인 : 1. 조성면(홍성고등학교총동창회장)
2. 조부영(홍성고등학교총동창회 상임고문)
3. 김문웅(홍성고등학교총동창회 상임고문)
4. 이한구(홍성고등학교총동창회 명예회장)
5. 이재혁(홍성고등학교총동창회 사무총장)
청 원 취 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343-3 홍성고등학교 학교용지상 단층 조적조 함석지붕 바닥면적 357.02평방미터의 강당건물을 문화재보호법 제55조 및 충청남도지정문화재보호조례 제2조제1항제3호가목 소정의 기념물로 지정한다.
라는 충청남도지사의 처분을 신청하여 주실 것을 청원합니다.
청 원 이 유
1. 홍성의 지정학적 배경과 충절의 역사
공주는 조선시대 이래 1932년까지 충청 감영 및 충남의 도청소재지이었던 한편, 홍성은 고려 공민왕 7년에 홍주목으로 승격한 이래 인근 5군 14현을 관할하다가 1894년에는 공주부와 함께 홍주부로 개편되어 관찰사를 두고 인근 22개 군을 관할한 바 있는 호서지방의 행정중심지였기로 조선 영정조시대에는 충남 지역을 공홍도라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의 강점이후인 1911년에는 홍주부가 폐지되고, 홍주부의 중심인 홍양(현재의 홍성읍 인근지역)과 결성군의 일부를 묶어서 홍성군으로 축소개편되었습니다.
홍주는 수백년간 호서지역의 행정 및 교육 중심도시로서 역할하여 오면서 충절의 얼을 지켜온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바, 그 연원은 조선의 건국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유신들 중 이색의 문하생 72현(숲속에 은거한 선비라하여 士林이라 칭함)이 은거하던 두문동을 불태운 후, 살아남은 이들의 대부분이 홍주 땅인 홍양(최영의 식솔), 한산(이색의 식솔), 신창(맹유의 식솔) 등지로 이거하여 후학을 가르쳤고, 사림의 충절을 숭앙하던 김시습은 말년에 사림의 본고장 홍주목 한산군에 정착하여 사림의 정신을 후학에게 가르쳤으며, 홍양출신의 성삼문이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영원히 기려질 충절을 몸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홍주땅에 이색의 정신을 기린 문헌서원과 성삼문의 정신을 기린 노은(녹운)서원이 세워졌으며, 일제에 이르러서는 홍양 출신의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이 그 정신을 이어받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홍주땅을 충절의 고장이라고 칭하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2. 홍성고등학교 개교의 역사성
1915년까지 홍성지역에는 4개의 공립 보통학교만 설립되어 있었을 뿐이고 그 이상의 교육시설이 전혀 없었는데, 이는 일제의 조선인 우민화정책 및 무단정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의 3.1.운동이후 일제는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한 문화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일환으로 1920년에 총독부는 중앙에 민립대학의 설립을 허가하고, 인문계 고등보통학교가 없던 충남, 경남, 전남, 황해, 함북 등 5개도에 고등보통학교를 신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조치는 그 당시까지 한민족의 정신을 교육하는 인문학교의 설립을 봉쇄하여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조선인을 일제에 동화시키려는 우민화정책을 완화하는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이에 홍성지역에서는 군수 임연상이 1920. 12. 5. 군민대회를 소집하여 1915년에 구성한 근검저축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홍성군교육회를 발족하여 근검저축회의 재산 전액을 교육회로 이관시키면서 1면 1교의 보통학교와 홍성읍에 1교의 중등교육기관을 유치할 것을 결의하고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수개월후 교육회는 홍성지역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고등보통학교 설립기성회로 조직을 개편하였습니다. 이는 충청남도 각 군중에서 가장 먼저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사업의 횃불을 올린 사건이었습니다. 그후 공주와 천안 및 대전, 연기에서도 역시 그 지역에 고등보통학교를 유치하기 위한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21. 9. 30. 충남도청에서 충남고등보통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학교 설립비용의 절반은 충남의 각 군이 지적 및 호수에 비례하여 부담하고 나머지 절반은 학교가 설치되는 지역이 부담한다는 원칙을 마련하고 학교설립위치에 관한 투표를 실시한 결과 제1후보로 홍성:천안:공주가 5:3:2로 홍성의 압도적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공주에서는 도청소재지라는 이점과 공주갑부 김갑순의 로비등으로 도지사 김관현으로부터 이미 고보를 공주에 설립할 것을 내정받아놓고 있었으며, 후보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홍성을 탈락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갑자기 설립비 전액을 가장 먼저 납부하는 군에 고보를 설립해주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공주갑부 김갑순의 재력을 믿고 그리한 것이었으나, 홍성의 고보기성회는 이미 8만원의 기금이 모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3만5천원을 더 모금하여 호서은행 홍성지점에 11만5천원 전액을 입금을 시키고 도내에서 가장 먼저 고보설립인가를 신청하였습니다. 이는 어느 부자 개인의 힘으로 모금한 것이 아니라 전 군민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것이어서 그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으며 홍성의 선조들이 어느 정도로 후세 인문교육에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증거라고 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도청은 설립비 전액을 현금으로 도청에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호서은행 홍성지점에는 홍성고보기성회에 예금을 인출해주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홍성고보기성회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에서 11만5천원을 대출하여 도청에 납부하자, 도청은 대출받은 돈은 납부받을 수 없으니 모금한 돈을 가져오라는 억지를 부리면서 그 사이에 고보의 설립위치를 후보지 투표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공주로 확정발표하게 됩니다.
사태가 그리되어 1921. 12. 5. 홍성고보기성회는 군민궐기대회를 열고 홍성YMCA에서 장기농성에 돌입하였고, 박시양, 이병우, 윤대영, 이명세 등이 상경하여 총독부에 진정을 하고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서 연일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재경 호서유지들은 물론 재동경 유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충남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서자 도지사 김관현은 충남고보기성회를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송본(松本) 충남 내무국장은 1922. 2. 22. 총독부의 결정에 따라 공주에 고보를 설립하되 홍성군민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당시 2년제이던 공주도립농림학교를 홍성으로 이전시켜주겠다고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홍성의 지도자들은 조선인의 정신과 홍주의 얼을 교육하고자 인문학교 설립을 위해 모금한 것이지 농사를 가르치려고 모금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제의 강권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1922. 4. 공주고보가 개교할 당시 도청의 실권자이었던 송본 내무국장은 설립비용 17만원을 전액 홍성군에서 부담하면 홍성에도 고보를 설립해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였고, 이에 속은 홍성군민은 또 다시 모금운동에 돌입하여 17만원 전액을 호서은행 홍성지점에 예탁하고 학교 부지를 매입하여 터를 닦아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제는 그해 홍성고보 운영예산을 편성하지 않고 대전의 일본인 고등여학교를 공립으로 전환하여 운영비 4만6천원을 지급하는 예산을 편성함으로서 송본 내무국장의 약속은 일제의 홍성군민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이 곧바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홍성군민들은 재차 장기농성에 돌입하였고, 군민대표로 선출된 김병원등이 총독을 직접 면담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홍성부인회가 조직되어 대표 성처애외 2인이 도보로 서울까지 상경하여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담화를 발표하기까지 하였는바, 이로서 홍성고보설립문제는 전국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전 조선인들이 분개하게 되었으며, 그 분노는 결국 1923. 3. 30.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발기총회로 이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해 4. 3.에는 민립대학설립기성회의 김병로,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까지 홍성고보설립문제에 관한 진정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자, 일제는 결국 도지사 김관현을 인책 사임시키고 관련 공무원 23명을 경질하여 민심을 무마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홍성고보설립기성회의 이성래, 윤대영을 공주감옥에 투옥하고 홍성군수 임연상을 파면하였으며, 기성회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는 방법으로 홍성군민들의 고보설립운동을 중지하도록 강압하였습니다.
일제의 그러한 탄압에 의하여 홍성고보설립운동은 일단 중단되었으나, 일제는 기성회의 기금을 없애버림으로서 다시는 홍성에서 고보설립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할 의도로 홍성에 공업전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여 1927. 5. 20. 기성회의 기금으로 3년제 홍성공업전수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홍성군민들은 위 학교를 5년제 갑종학교로 승격시켜줄 것을 도에 요구하는 투쟁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1935년 그마저 대전으로 이전시켜버리고 그 대신 홍성병원(현 홍성의료원)과 2년제 홍성공립농업보습학교(현 홍성중학교)를 설립하여 군민들을 무마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전위적인 전투인력 확보를 내심의 의도로 숨겨둔 채 조선의 지도자들을 설득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울며겨자먹기의 심정으로 그때까지 고수해오던 1도1고보 정책을 1도2고보정책으로 수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계기로 홍성지역에서는 약간 남아 있던 기성회 기금을 모체로 하여 김교성, 신현태, 명화진, 박정규, 박돈규, 이한기 등이 주도하여 군수의 협조하에 호별세등급에 의한 기성회비를 할당모금하여 60만원의 자금을 확보하고, 곧바로 현재의 홍성고등학교부지를 매입하여 충청남도 당국에 기부채납함과 동시에 5년제 홍성공립중학교 설립인가를 신청함으로서 1941. 3. 26. 인가를 받고 같은 해 4. 11. 개교한 학교가 바로 현재의 홍성고등학교입니다.
3. 본관교사 및 강당의 건축과 현재 강당건물의 상태
홍성공립중학교의 설립인가 직후 학교는 개교하였으나, 교실을 비롯한 부대시설이 없어서 홍성군청 후원에 있는 안회당(옛 홍주목 동헌)을 교실 2개와 교무실 및 창고로 임시 개조하여 2년을 사용하면서, 현 홍성고등학교 자리에 본관 교사와 강당 등의 건물을 신축하였는 바, 본관과 교사는 모두 홍성군민들의 자발적 노동력이 투입되어 1943. 4. 5. 준공되었고, 내력기둥과 내력벽체는 소성 적벽돌로 조적하였으며, 대들보와 서까래 및 바닥은 목재로, 지붕은 기와로 이었다가 후에 함석으로 개조되었습니다. 공유재산관리규정상 내용연수가 40년인 위 건축물중 본관은 1972년도에 전부 소실되어 없어졌으나, 강당건물은 1986. 7. 21. 단 1회의 보수공사를 거쳐서 준공이후 현재까지 62년8개월간 건재하고 있습니다.
홍성고등학교 동문회는 근래 두 차례에 걸쳐서 구조계산사와 건축사 및 최고의 건축기술자를 모교에 파견하여 강당에 대한 간이 구조안전진단을 한 결과 벽체(내력벽)는 비록 벽돌로 쌓은 것이지만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튼튼하며, 트러스(지붕구조물)는 목재가 너무나 오래 되어서 당장 무너질 염려는 없지만 조만간 일체를 교체할 경우 최소한 20~30년간은 문제없이 버틸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4. 강당건물의 역사적 가치와 향토문화보존을 위한 기념의 필요성
개교의 역사가 그대로 보여주듯이 홍성고등학교는 20년이상의 험난한 기간동안 일제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설립을 주도한 인물들이 투옥되고 파면되는 희생을 딛고 개교된 학교이고, 순수하게 전 군민의 참여와 애국심으로 설립된 학교입니다. 그러기에 여타 학교들의 개교와는 달리 홍성고등학교의 개교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지키고 이어나가려는 많은 선조들의 충절이 절절이 배어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정신의 연원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홍주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던 사림파의 충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강당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충절과 민족정신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홍성고등학교를 설립한 선조들의 교육이념과 후학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우리와 우리의 후학들에게 말없이 몸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와 역사 및 시대정신이 내재되어 보존되고 있는 구조물을 우리는 유적이라고 말하며, 유적의 그런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흔히 문화유적이라고 지칭합니다. 오래된 구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정신이 깃들어있지 않은 구조물은 고적(古蹟)이라고 말할 뿐이지 결코 유적(遺蹟)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별다른 의미없는 오래된 주택을 우리는 고가(古家)라고 하지만 유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동산 구조물이 아닌 동산인 물건은 오래되면 골동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골동품중에서도 위와 같은 역사와 문화와 정신이 깃들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유물(遺物)이라고 말합니다. 유적과 유물을 합하여 우리는 유산(遺産)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때는 민족정신 그 자체나 예술 등 무형의 문화까지 합하여 유산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우리 후학들은 홍성고등학교를 설립한 선조들의 충절과 민족정신, 교육이념을 무형의 유산으로 물려받아 왔고 이를 지켜나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무형의 유산은 홍성고등학교 강당에 유형의 형태로 화체(化體)되어 있으며, 그 귀결로서 이 강당은 우리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들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몇몇 명문 사립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설립자의 정신이 깃든 본관과 일부 교사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설립자 1인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학(私學)도 그러할진대, 국가는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충절어린 민족정신과 교육이념을 후손들에게 널리 홍보하고 교육하는 것이 기본적인 의무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작금에 충청남도교육청은 이 강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교육정보관을 신축하겠다고 하면서 홍성군청에 협의신청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바, 다른 대체부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건물의 내용연수에 관한 법규를 들먹이며 그 자리를 고집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 홍성고등학교 동문회는 도교육청을 상대로 이 강당의 보전을 주장하였습니다만, 우리 동문회의 주장에 대하여 일부 인사들은 “교육목적과는 동떨어진 동문들의 감성에 치우친 주장”이라고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감성과 향수에 젖어 교육목적을 저버린 주장이 아니라, 홍성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한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우리와 우리의 후학들로 하여금 그 정신을 본받도록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의 강당은 교육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없기 때문에 철거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역사성을 가진 강당은 그 존재 자체로 훌륭한 교육이며 그 이상의 교육자료를 찾아보기도 힘들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보전관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서울로 드나드는 데 필요한 대문도 아닐 뿐만 아니라, 교통에 장애를 주고 있는데다가, 그저 그것을 바라보면서 망해버린 조선왕조에 대한 감성과 향수를 느끼는 용도에만 필요한 구조물일 뿐이니 숭례문을 철거하여 재정도 절감하고 도로로 편리하게 사용하거나 시민의 휴식처로 유용하게 써야 한다는 실용지상주의자들의 주장과 비교한다면 좀 과한 것일까요?
5. 결어
홍성고등학교이 강당이 위와 같은 역사성이 있어서 보전해야 하고, 그 보전의 필요성이 홍성고등학교 동문의 감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인 문화유산으로서의 성격으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사적(私的) 시설이 아닌 국가의 소유인 구조물이라면, 당연히 국가가 그 비용을 들여서 보전관리하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민족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고 우리 동문회는 생각합니다. 국가가 이를 게을리할 때 국가에 대하여 그 임무를 일깨워주는 것은 모든 국민의 의무이고 권리지만, 이를 보전하는데 특별한 인연과 관심이 있는 우리가 나서게 된 것일 뿐입니다.
나아가, 국가는 이 강당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깨끗이 보수한 후 홍성고등학교역사박물관 또는 홍성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이 후학들에 대한 교육목적상으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과거의 어떤 사건은 그 유사한 형태로 현재와 미래에 다시 반복됩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민족의 치욕적인 과거사와 유사한 사건이 언제 우리에게 다시 덮칠지 그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를 대비하여 홍성에 인문 학교를 설립함으로서 스러져가는 민족의 정신을 놓지 않고 후배들에게 가르치려 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애국정신과 교육이념은 현재도 교육되어져야 하고 미래까지 영원히 기려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정신이 화체되어 있는 홍성고등학교 강당을 “특별히 기념이 될만한 시설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향토문화보존에 필요한 건물”로 판단하고, 온고지신의 교육시설로 새로이 탄생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는 군수님께 이 강당을 문화재중 도지정기념물로 지정하여 줄 것을 충청남도지사에게 신청하여 주실 것을 청원합니다.
첨 부 서 류
1. 주민등록등본 5부
1. 토지대장등본 1부
1. 건축물대장등본 1부
1. 등기부등본(토지) 1부
1. 등기부등본(건물) 1부
1. 공유재산관리대장등본 1부
1. 홍성군지(1993.발행 증보1판2쇄) 제554~556쪽 사본 1부
1. 홍동면지(1994.발행) 제208~210쪽 사본 1부
1. 홍성고60년사(2001.발행) 제51~78쪽 사본 1부
1. 홍주의 얼을 찾아서(노승무 저, 2005. 도서출판 동문
발행) 제74~85쪽 사본 1부
2005. 12. 5.
청 원 인 조 성 면
조 부 영
김 문 웅
이 한 구
이 재 혁
충청남도 홍성군수 귀중
첫댓글 이 글을 읽고 우리가 공부한 모교는 그저 3년동안 공부하고 지냈던 그러한 공간 만이 아니라 역사의 한부분에서 지내왔다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적 가치가 있고 충분히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당연히 그리 해야 겠지요. 단지, 현재의 필요에 의해서 그러한 가치가 배제 된다면
우리 후배들 후손들에게 엄청난 부꾸러운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다행히 현재 도교육청의 교육감님(12회), 부교육감(28회)이 모교 출신이기에 현명한 결정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교육청에 계신 동문님들께서도 이일을 하나의 업무로만 보시지 말고 역사가 살아 있는모교의 대승적 견에서 봐 주 실것을
간곡히 부탁 드리며, 꼭 그리 되리라고 믿습니다. 선배님, 후배님들 모두 화이팅~~~~~~~~~
꼭!! 그리되리라 믿습니다...수고하시는 선배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전체멜로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