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밝은 날 밤 세상 다 잠들었는 지 까맣기만 하고 저벅저벅 소리만이 울리고 있다. 노곤하고도 기계적이다.
머리에 눌러 쓴 철모는 수분을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정수리 근처를 짓누르고 땀에 젖은 군복은 사타구니 안쪽
을 스쳐 벌겋고 쓰라리게 한다. 앞 줄과의 간격을 맞추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면서도 보이지 않는
끈이라도 묶은 듯 기묘하게 발 동작까지 따라하고 있다. 긴 행렬이 산을 꼭대기까지 오른다. 붉은 모자를 쓴 조교는
손전등을 발 밑으로 비추고 있다. 전 날 온 비때문이지 땅은 움푹패이고 흙탕물이 고여있다.
누구는 전투화를 적시고 누구는 엉덩 방아를 찢는다. 정신은 몽롱하고 땀에 흠뻑 젖은 몸뚱아리는 이미 자신 것이 아니다.
오늘은 4주차, 야간 사격을 하는 날, 달이 밝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먼 것처럼 그저 저벅저벅
그 소리만 들린다.
블루문 특급
그녀는 다리를 꼬고는 앉아서 자신 앞에 놓인 커피만 훔쳐보고있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으니 힘들만도 하건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자세 그대로 앉아서는 뚫어지게 커피잔 안을 들여다보고있다.
'그래서, 군대에 가겠다고? 아직 이르지 않아. 몇 해 더 다니고 가도 되잖아. 너, 시간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 건 줄 알아.
스무 한 두살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여도, 가장 좋을 때야. 젊고 꿈도 있고 더 즐길 수도 있고 말야. 그거 내 나이 되면
스무살 후반 되잖아, 그러면 아무것도 안보여. 다 무너져 내리는 거야. 우리나라가 얼마나 빠른데, 앞이 안보인다고, 그래 알아
얼마나 걸리는 지 다 알아. 근데, 가지마. 고무신 꺼꾸로 신는 다는 말 아주 싫어하지만 네가 가면 그럴 수 밖에 없어.
난 나이도 많고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할 거야. 기다릴 수는 있어. 그거 얼마나 된다고. 근데 네가 다시 오면 내가 늙었는데
이 얼굴에 주름살도 보일텐데 받아들일 수 있겠어? 몇 년만 더 나랑 있다가자, 그때되면 보일거야. 어떻게 해야할지
어떤 식으로 대처하면 좋은 지 그때쯤이면 생각 없겠어? 오늘은 나랑 섹스나 하고 노곤하게 잠이나 자자. 그렇게 하자 어때?'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데 온 얼굴이 주름살 투성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커피잔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스푼을 들어 휘젓는다. 기묘한 물결이 일고 언뜻언뜻 일그러진 얼굴이 흔들린다. 그녀가 다리를 펴고 일어서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라 일어서서는 그녀의 어깨 근처에서 방향 없이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다.
해가 찬란한 빛을 내며 지는데 때마침 비가 내린다. 비는 그녀의 머리칼을 적시고 하얀색 셔츠칼라를 회색빛으로 물들인다.
그녀는 고개를 반쯤 돌려 나를 바로보지 않은 채 나즈막히 말을 건넨다.
'여우비네.'
비때문에 눈밑을 따라 시커멓게 마스카라가 흐른다.
'정말, 여우비네.'
밤에 사격을 하면 총소리가 낮에 보다 소리도 크고 연사로 쏠 것이기 때문에 총알의 빛도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통제에 더 잘 따르고 본 조교의 지시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야간에는 특히 더 잘 안보이기 때문에 절대 뛰어서는 안되고 사격시 이상있을 때 왼발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총알의 빛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창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는 고통스러웠지만 길게 늘어진 그 빛은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신비한 생물체를 보는 듯했다. 이어지고 끊어지고 독특한 박자로 날아다녔다. 사격전 조교는 건빵을 뜯어 훈련생들에게 조금씩
나눠주었고 대부분은 처음으로 하는 야간 사격에 긴장했음에도 어금니로 과자를 부수는데 정신이 팔려있다. 긴장을 풀어주기위한
조교의 방법은 적중했다. 훈련생들은 지시에 따라 열을 서서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서는 엎드려서 총알을 연사해댔다.
하얀색 빛이 춤을 춘다. 경직되고 날카로운 소리를 머금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다.
건빵 때문에 목이 멘다. 빡빡하고 입안가득 질퍽해져서는 목구멍을 막아버린다. 수통에 물도 없거늘 숨을 탁탁 차오르게 한다.
‘사람은 한 사람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고 하더라. 몸은 마음대로 갈 수 있겠지, 근데 심장이 하나라서 그건 왔다갔다 할 수 없나봐.
그래 난 너보다 나이도 많고 네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난 보기 싫어지겠지. 그렇지만 나도 심장은 하나야. 내가 누굴 품겠어.
생각 많이 해봤어.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건 좀 유치하잖아?’
난 유치하지만 사실이라고 했다. 늙고 푸석푸석한 사과는 맛도 없고 흐물흐물해서는 노인에게나 어울린다고.
그녀는 다리를 꼰 채로 한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머리 뒤쪽을 어루만지더니 가슴 근처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반쯤 남은 맥주에 입을 댄다.
‘자러가자.’
그녀와 나는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는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두 차례 섹스를 했다. 중간에 속이 나빠서 화장실에 간 것을 빼고
는 짧은 필름을 붙여놓은 것 같은 오래된 활동사진처럼 뇌 속에 잔상을 남겼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성기가 욱씬거리고 목이 말랐
다.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난 뒷 축을 구긴 채 신발을 질질 끌고는 모텔을 나선다. 휴일이라 차도 없이 한산
한 종로거리를 걷고 있다. 수많은 방향으로 뻗은 도로 한 복판에서 그만 어디로 가야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구름이 잔뜩 낀 채 빛
을 모두 차단하고 있다. 길가에 눕자.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근처 편의점에 앉아서 음료를 마신다. 담배를 너무 많이
폈나보다. 목에 무엇이 낀 건지 기침이 일고 답답하다. 목 근처를 손가락으로 눌러보기도 하고 편의점 쇼윈도에 입을 벌려 비춰보
기도 했지만 무엇이 잘못 되었는 지 모르겠다. 좀 있으면 낫겠지 그렇게 몇 분간 생각하다 목 근처에 다시 손가락을 갖다 댄다. 근
육이 당기고 진동이 인다. 그래 그랬었지. 어제 너무 슬펐지.
‘사격을 다한 사람은 저쪽 구석에 마련된 총기소지 도구를 가지고 청소를 하도록합니다.‘
조교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날 선 표정으로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몸은 경직되고 기계화되는데 머릿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녀의 잘만들어진 얼굴로 부터 시작되서 물에 빠진채 제대로 말리지 못해 썩은 냄새가 풍
기는 오른쪽 군화로 연결되기도 하고 교육시간에 배웠던 베티고개로 부터 시작해서는 빠졸리니의 기괴한 마지막 영화로도 이어지
기도 하였다. 어떤 것이든 형체도 없고 이유도 없고 꿈의 한 단편처럼 뚝뚝 끊긴채 계속 되고 있었다. 한 여름이라서 늘 목이 말랐
고 훈련장에는 식중독의 우려로 끓인 소금물만이 제공되었다. 첫날 입소할 때는 cs복에 누군가 똥을 싸놓은 채 발견되었고 몇몇
은 사격하러 갈때면 길가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데 바빴다. 한 쪽에 쌓여있는 돌을 반대편으로 옮기는 가 하면
애가 둘이 있던 한 아저씨는 화생방을 견더 내지 못하고 조교를 밀치고 뛰쳐나가서는 콧물 눈물이 번벅 된 채 우느라 정신없는데
도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에 본능적으로 싹싹 빌기 까지 했다. 발목을 삐었고 막사 바깥에 설치된 수돗가에 수돗물을 몰래 마
시기도 했다. 그리고는 생각의 꼬리가 길게 이어져서는 어떤 구체화된 얘깃거리를 만들고 있다. 뒤틀리고 정상이 아닌 슬픈 이야
기가 길게 움틀이고 있다.
'이게 마지막이네,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안해'
총을 다 분해하고 꼬질대에 천을 끼우고는 기름을 묻혀 총열을 닦는다. 넣을 때는 우측으로 나올때는 좌측으로 개머리판을 문지르
고 가스마게를 열어 잔상을 닦아낸다.노리쇠 뭉치와 복좌기구를 뽑아내고 노리쇠뭉치를 다시 분해해 하나 하나 닦아낸다. 총알을
때리는 공이를 천을 이용해서 닦아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땅' 소리가 난다.
'왜 그랬어?'
'..내가 봐도 이상해서, 내가 봐도 이상한데 다른 사람 보면 더 이상할 거야. 쫓겨나기 싫거든. 맨날 구석에서 살았는데 너 보면 세
상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게 잘못 된거야. 사람같이 살겠다는데. 넌 이미 괴물 이잖아.'
뇌리쇠공이를 잃어버렸다. 풀숲어딘가에 숨어서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다. 내가 놀라서 떨어뜨렸는데 산경사에 따라 굴렀는 지 어
느 흙구덩이에 빠졌는 지 찾을 수가 없다.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새끼 손가락 보다도 작은데 바로 여기에 떨어뜨렸는데 사라져버
렸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오그라 든다. 영창이다. 총은 생명, 쏠 수없는 총으로 만들어버렸다. 영창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해
막막해진다. 눈물이 돌고 봉사처럼 바닥을 더듬더듬 거리고 있다.
'왜 그랬어?'
눈을 지나 얼굴을 따라 흠이 파였다. 하늘은 우박이 떨이지고 바닥에는 깊은 계곡이 생겼다. 그녀는 내게 노리쇠공이를 건네주었
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분해해서는 조그맣고 송곳같이 생긴 공이를 빼어내서는 내 총에 연결시켜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리고
는 달 밝은 숲속 어딘가로 사라진다.
입을 막고 흐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참는 것 버텨내는 것.
그것, 단지 그것 뿐이다.
첫댓글 역시 대단! 구성과 전개가 역시 대단.....제프리님의 글을 읽는 건 참 즐거운 일이군요 :)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우울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네요.
처음엔 아이스크림 춤 이라길래 이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냥 가라앉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