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설의 근본의미
연기법과 업보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지혜로운 자는 이와 같은 참된 이치로 업을 본다.
지혜로운 자는 연기(緣起)를 보는 자로서,
업과 그 과보(果報)를 잘 안다”라는 경구이다.
불교의 중심 가르침인 연기를 보는 자는
바로 업보를 아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 업을 설하고 있는 유명한 경전은
부처님께 인생사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인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떠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는 낮고 높기도 합니까?
왜 사람들 가운데는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병이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모습이 추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합니까?
그리고 권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부자이기도 하고,
천하기도 하고 귀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합니까?"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업’ 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경 전체가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다른 경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거나 또는 되는 것이 아니라
업으로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업으로 바라문이 되지 않기도 한다.”
또는 “업으로 인해 농부가 되고,
업으로 인해 수공업자가 되고,
업으로 인해 장사꾼이 되고,
업으로 인해 하인이 되기도 한다.
업으로 인해 도둑이 되고,
업으로 인해 무사가 되기도 하고,
업으로 인해 사제가 되고,
업으로 인해 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업은 마치 세상사와 인생사의
수레바퀴 핀과 같다는 비유로
“세상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도 업에 의해 존재한다.
존재들이 업에 매어 사는 것은 마치 수레가 바퀴의
고정 핀에 매어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업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업보설은 세상사와 인간사를
신이나 운명 또는 우연의 문제로 보는 것을
불합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업보설의 입각점이다.
달리 말하면,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사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새롭고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업설(kammavāda : 業說)은
합리적인 ‘인간의 행위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흔히 업을 사주팔자와 같은 어떤 운명적인 법칙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처음 의도했던 업에 대한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히려 이러한 오해를 염려하시고 업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意圖:cetanā)를 업이라고 언명한다.
누구든 의도가 일어나면 신구의(身口意)에 의해 업을 짓는다.”
이 경구는 불교적 정의의 업설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된다. 여기서 업에 대한 설명어로 사용된 cetana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긴 ‘의도’를 뜻하여 영어권에서도
intention, volition, will, active thought,
determinate thought 등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업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이다.
함의하는 바는 행위이되 의지가 개입된 행위,
의도가 개입된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행위는 가치있는 행위로서 결과[報]를
생산해낼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때문에 업은 항상 보(報)와 함께 이야기되며
선악(善惡)과 같은 가치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와 같이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언급된다.
이러한 점에서 업설을 굳이 분류하자면
신의설이나 운명설 그리고 우연설과
전혀 다른 ‘의지설’로 이름 할 수 있다.
2. 업설은 운명론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의 업보설은
팔자소관과 같은 운명론의 일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필자는 통속적인 업보설로 규정하고 있다.
주로 <전설의 고향> 같은 민간에 내려오는
전설 등에서 그려진다.
불교의 업보설이 운명론이 아님은
자이나교의 업보설을 비판하는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초기불교경전에서 불교는 자이나교의 중심세계관인
이원론(二元論)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세계관에 바탕한 자이나교의
업보설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A라는 업에 반드시 A라는
과보만이 결정된다’라는 기계적인 업보설을 주장한다.
즉 상황과 조건에 따른 과보의 가변성보다는
엄격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만이 있을 뿐이라 한다.
다시 말해, 한번 지은 죄악이나 불선업은
벗어날 수 없는 ‘기계적이고 결정론적 업보설’을 말한다.
때문에 불교에서 운명적이고
숙명론인 업보설이라 비판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기계적인 업보설은
그들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영혼의 정화를 위해서는 미세한 물질과 같은
업을 물리적으로 떨쳐내는 고행이 필요하다.
즉 자이나교의 수행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신업 중심의 업설인데 반해 불교에서는 의업의
질적 개선을 더 강조하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처럼 숙명론적 업보설을 비판한 부처님의 의도는
중생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의지를 깨우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적극적인 실천론은 다음의 압축적인
경문이 유명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業)를 하였으되
그 행위와 아주 똑같은 과보(果報)만을 받는다라고
하면 그에게 더 나은 성스러운
생활 또는 종교적인 수행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지은 이전에 지은 업에 따른
고(苦)를 멸진(滅盡)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종교적 삶은 가치가 있게 되고
고를 멸진할 기회가 있게 될 것이다.”
자이나교와 대비되는 불교의 업보설은
업에 대한 과보에 있어 상황과 조건,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도 있다 한다.
즉 가변적인 결과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전 비유에 의하면 농부가 한 나무의 씨앗이라도
밭의 상태와 김매기와 같은 밭의 관리 등에 따라
그 결과로서 수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한 줌의 소금이라도
컵이나 세숫대 그리고 저수지라는
각각 다른 조건에 집어넣어졌을 때
그 결과로서 짠 맛의 정도도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밭의 상태와 김매기 등의 밭의 관리나 컵이나
세숫대 그리고 저수지라는 상황과 조건은
바로 연(緣 : paccaya)을 말한다.
업보의 인과(因果)에 함께 연(緣)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 불교 행위론의 큰 특징이다.
3. 업설은 적극적인 의지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업론자(業論者)이며,
업과론자(業果論者) ․
정진론자(精進論者)이다”라고까지 규정한다.
업보설은 초월자의 힘을 빌어 인과를 조절하고
해결하겠다고 하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자율적인 윤리적 실천으로
인과를 조절하고 해결해야함을 말한다.
이에 대한 비판은《가미니경(伽彌尼經)》과
그에 대한 빠알리 대응경전에서 잘 보여준다.
당시 인도 사회에는 인생사를 업보라는 인과보다는
주술과 기도를 통한 주법으로 해결하려는 비과학적인
종교와 기복신앙이 사회 일반에 널리 성행하고 있었다.
양재초복(讓災招福)의 타력신앙으로
갖가지 종류의 주문, 주술, 의례, 그리고 기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행위와 함께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는
유신종교의 절대자에 기도하는 것 또한 인과업보를
모르는 소치라 한다.
엠브로즈 비어스(1842~1914)는 ‘기도하다’라는 말을
그의 사전에서 “지극히 부당하게도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익살스럽게 정의하는 맥락도 그것이다.
불교의 업보설과 관련하여 재미있게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업보는 기본적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성격을 갖는다.
경전에서 “자신이 지은 업은 부모도 형제자매도 일가친척도
그리고 친구나 지인들도 대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은 시람 만이 받는 것이다”라는 것이 업설이다.
이는 셈족의 종교관념인 원죄(原罪)와
상속죄(相續罪)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원죄나 상속죄라는 종교관념에 따른
예수의 대속(代贖)이라는 구원 개념 또한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불교가 일어나기 전 인도 종교에서도
창조신인 뿌르샤(Purṣa)에 의해 인간차별제도인
사성계급(四姓階級)이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셈족의 <성경>에 나타나는 유대 선민주의(選民主義)도
마찬가지로 신에 의한 민족 간 차별이다.
유대교나 기독교 등의 셈족종교에서도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 의해 모든 인류가 이미 상속죄를 타고
나 죄인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죄를 특정한 한 존재인 예수에 의한
대속이 가능하다는 식의 교리는 자업자득의 이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비합리적이고 독단(dogma)적인
주장에 지나지않는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신은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대 사대까지 벌한다” 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의 업설에 의하면 이러한 연좌죄(連坐罪)는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두 사람에 의한 죄가
다른 사람에 모두 전가되는 연좌죄는 물론 예수와 같은
한 존재의 희생 또는 죽음에 의해 다른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부정된다.
불교의 자업자득이나 자작자수는 자신의 업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행위 당사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하고 있다. 얼마 전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상대선수의 어깨를 깨문 일을 용서했다는 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술이 업보설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나게 했다. ‘밀양’에서 전도연은 아들 유괴범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를 찾았다.
그런데 범인은 ‘주님의 이름으로 참회했다’면서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용서한 적이 없는데
가해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 용서한 것이다.”
(경향신문 2014-06-29 [여적]축구장의 용서)
지금도 세상은 무자비한 학살자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살상한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용서받은 듯
세상을 활보하며 호위호식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세상사 ‘신의 뜻대로’이니
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 살상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편리함이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맨정신으로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여기서 인간의 위치는 무엇인가?
윤리적 책임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그래서 이전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선교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셀프 용서란 건 없음을 직접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부처님의 문제의식도 마찬가지였다.
삼종외도설로 절대신의 뜻대로 세상만사가 이루어진다는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과 같은 신의론(神意論)을
비판하고 부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의지를 가진 인간은 신의 뜻에 의해 세상이 진행된다는
식의 부조리한 세계관의 문제를 명료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특히 초기경전의 《도경(度經)》에서
자재화작인설과 업설과 관련하여 인간행위의
적극성과 책임성의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인간과 세상은 본질적으로 각기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지 인간 스스로 관여
개입할 수 없는 외적인 힘의 영역으로 설정될 때
인간의 자율적인 도덕은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불교의 업설의 대의이다.
첫댓글 인간은 신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갖혀 있지나 않는 것인지....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고자 보호받고자 신을 만들고 인간을 제물로 바침으로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인간의 나약함이 신을 만들지나 않았는지....
붓다의 인간으로의 회귀는 바로 업설로 증명되는 듯하다...
인간과 세상은 본질적으로 각기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지 인간 스스로 관여 개입할 수 없는 외적인 힘의 영역으로 설정될 때 인간의 자율적인 도덕은 파괴되고 종속되는 것이다. 대단하고 명료한 붓다의 업설인 것이다..
스님 ~ 감사합니다. _((()))_
스님 저는 업을 믿습니다. 마음을 항상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치를 모르고 자기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잇습니다.남을 속이는것보다 나자신을 속이는 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 역시 인연 이려니 잘못한다는 기준을 내맘에 안드는 사람이 아닌 기본 양심을 저버리는 그런 행동.의사람 일지라도 그사람의 문제 로 두고 봅니다. 모든건 잘 지나가고 잇기 마련 입니다. 마음 먹은만큼의 모습의 군상 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 합니다.부처님은 제 편입니다. 부처님은 저의 힘 입니다.
모든 업은 의도가 그 원인이다.. 너무나 명쾌한 부처님말씀입니다. 단순한 문장속에 모든 게 담겨있네요
밀양의 전도현처럼.. 발심이 일어 외적으로는 보살행을 행하다가도 소소한 번뇌조차 관리못하는 자신을 보며 위선적 자아에 혐오감도 느꼈더랬습니다.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라는 명대사처럼 자신의 수행이 먼저라고 봅니다. 그래서 초기근본불교가 강한 끌림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