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의 믿음론, 기독교강요 제3권 2장 13(1559년 라틴어 최종판 완역, 문병호 옮김, PP.65-67)13. 믿음의 여러 의미(意味)우리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우리가 바로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믿음은 단지 경건에 관한 건전(健全)한 교리(敎理)만을 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그 동일한 서신에서바울은 집사들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딤전 3:9)을 지니고 있기를 원한다고 전한다.몇몇이 믿음에서 떠나가고 있다고 그가 선포하는 경우에도같은 맥락에서 이다(딤전 4:1).한편그는 디모데가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왔다" (적용. 딤전 4:6)라고 말한다.같은 선상에서그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이"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변론"(적용. 딤전 6:20-21: 참조, 딤후 2:16) 때문이라고 규정하고,다른 곳에서는 이에 속한 사람들을 "믿음에 관하여는버림받은 자들"(딤후 3:8)이라고 부른다.또 그가 디도에게"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라"(적용. 딛 1:13; 참조. 딛 2:2)라고 명할 때,그는 '온전함'이라는 말로써다름 아닌, 사람들의 경박함으로 말미암아 쉽게 부패하고 타락하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시한다.달리 말하면,믿음이 소유한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므로”(적용. 골 2:3),마땅히 믿음은 하늘 교리(敎理)의 전체 요체(要諦)에 미친다.왜냐하면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반면에그리스도가 중풍병자를 지붕을 통하여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하는 경우처럼(마 9:2),믿음은 때때로 어떤 특정한 목적에 한정된다.주님은 심지어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백부장이 보여 준 믿음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고 놀라워하셨다(마8:10).아마 백부장의 의도는 그의 아들을 고치는 데 모두 쏠려 있었을 것이다(참조. 요 4:47).그의 마음은 온통 그 치료에 있었다.그리하여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현존을 간청하지 않고오직 그의 명령과 대답에만 만족하였다.백부장의 믿음이 그토록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이런 정황 때문이었다.우리는 바로 앞에서 바울이 믿음을,기적을 행하는 은사로 여기고 있음을 배웠다(고전 13:2).하나님의 영(靈)에 의해서 거듭나지도 않았고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은사(恩賜)를 받았다.같은 맥락에서바울은 또 다른 본문을 통하여우리를 믿음 가운데 서게 하는 교리와 믿음을 동일시한다.주목할 것은 그가 믿음도 폐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때(고전 13:10; 참조. 롬 4:14)의심할 바 없이 이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오늘날도 교회의 사역이 유익하다는 것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실로 이러한 논법들 가운데 유비(喩比)가 존재한다.'믿음'이라는 이름이 잘못된 공언이나 거짓된 제목을 뜻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전용(轉用)되는 경우.이러한 오용(誤用. κατάχρησις)이사악하게 타락한 예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고 명명하는 정도에 미칠 만큼모나지는 않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우리가 보듯이,거룩한 역사는 사마리아와 인근 지역에 옮겨 심겨진 이방 부족들이 거짓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전한다(왕하 17:24-41).이는 마치 하늘과 땅을 섞는 것과 다를 바 없다.그러나 지금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하나님의 자녀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게끔 하고,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며,우리가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며,영원한 구원과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가우리 안에 사시게 되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나는 내가 믿음의 뜻과 본성에 대해서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해 왔다고 믿는다.서명범정리
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