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군인, 외교관, 개화사상가, 철학자이며 화가, 지도 제작자로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로 승화시켜준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정계은퇴 후에도 김옥균,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다.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崔益鉉),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증광시에 합격하여 출사했다. 그는 당시 여당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인 북학파였지만 1862년(철종 13년) 진주민란을 진압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하였다.[1]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의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 1876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 또는 환경(瓛卿), 정경(鼎卿)이라 했고,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桓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을 썼다. 이정리, 이정관, 류화, 김정희의 문인이며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환재 박규수는 1807년[2](순조 7년) 10월 27일 종로 계동에서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현감 박종채(朴宗采)와 정5품 통덕랑 류영(柳詠)의 딸인 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종채는 관직이 현감에 그쳤지만, 잇따른 난을 평정한 아들의 공으로 1863년에 이조참판, 1865년에 이조판서, 그리고 1873년에는 영의정에 거듭 추증되었다.
그의 어머니 류씨는 혼수품으로 데려온 학이 앞길을 인도하는 태몽을 꿨고, 아버지는 연암 박지원에게 옥판(玉版)을 선물받는 꿈을 꾸고 그를 얻었다 한다. 어머니의 태몽 때문에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했다. 그의 가계는 당색은 노론이었으나 일찌기 고조부 박필균때부터 당쟁을 스스로 거부하였고,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 역시 노론 내의 외척·탕평당으로서, 당시 주류였던 벽파와는 다른 북학파라는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내 독자적으로 영수(領首)가 되었다. 박규수는 성장 후에도 이런 선대의 사상을 계승하여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풍채가 컸고 논어를 즐겨읽어 연습장에 거듭 반복해 썼다. 특히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군자란 남을 공경할 망정 멸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인배들은 남을 멸시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孝民可以爲臣(효민가이위신) / 君子可敬而不可侮(군자가경이불가모) / 小人可侮以不可敬(소인가모이불가경)'이란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곱 살 무렵, 박규수가 외가에 놀러 갔을 때 일화다. 항상 무언가 그리길 좋아했던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외종조이자 스승인 류화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류화는 고명한 성리학자였음에도 '선비가 될 놈이 왠 불탑이냐'라는 식으로 면박을 주진 않았다[3]. 류화는 대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주었다.[3]
“ |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이 성인군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 시작한단다. | ” |
단계적으로 학문을 이루라는 충고였다. 일곱 살짜리 외조카손자가 혹시라도 가르침을 잊을까 일부러 시 한 수[3]를 주었다. 학문의 길을 자연스럽게 가르치고자 했던 셈이다. 이렇게 그는 깎아내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교육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청렴했던 가풍 탓에 어려서는 넉넉치 못해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가끔 진외종조부 이정리(李正履), 이정관(李正觀)과, 외종조부 류화(柳訸) 등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폭넓은 견해를 갖게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조종영(趙鍾永) 등 명망높은 성리학자들과 나이를 잊고 친구가 되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받을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였다. 18세 무렵에는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이곳저곳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걔중에는 당대의 명필이자 화가이며 금석학자였던 김정희도 있었다. 김정희의 스승은 역시 연암 박지원의 문인이었던 실학자 박제가로 박규수는 사양않고 할아버지의 학연을 활용했다.
그를 아는 사람중에는 박규수가 늘 특이한 것에 관심을 둔다며 기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집안 어른들은 그의 폭넓은 지적 호기심을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북돋아 주었다.[3]
박규수는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친분을 나누며 개화를 논하였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학문과 미래를 토론하였다.[4] 효명세자와 교유하면서 《주역》을 강의하고 서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충격을 받아 20여 년간 칩거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4]
대리청정 2년째 때에는 벼슬도 없던 그를 불러들여 특별히 주역을 진강케 하고 근신에게 '박규학의 학문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출중한 인물'이라 칭찬하며 그를 곁에 두었다. 1828년 효명세자는 그에게 명하여 연암집을 간행하여 올리도록 명하고, 너도 필시 저술한 것이 있을 것이니 모두 올리라고 하였다. 이때 자신의 저서 저서 상고도설(尙古圖說) 80권을 지어 효명세자에게 바쳤다. 효명세자는 그를 몹시 아꼈다 한다.
세자 대리청정 기간 중 효명세자가 김씨, 조씨 세도가문 등 특정 문벌의 조정 장악을 배제하고 남인과 소론계 인사 및 노론내 비주류인 북학파까지도 과감하게 등용하는 것에 그는 개혁의 가능성을 보고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1832년 갑자기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져 좌절하게 된다. 자와 호의 '환'(桓)이라는 글자를 '환'(瓛)으로 바꾼 동기도 효명세자의 죽음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 유씨, 아버지 박종채의 연이은 죽음으로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북학 사상에 눈을 뜬 뒤 할아버지 박지원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뒤 윤종의(尹宗儀), 남병철(南秉哲), 김영작(金永爵) 등 당대의 성리학자들과도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문과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자 헌종은 '일찍이 부왕의 사랑을 받던 너를 내가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며 '앞으로는 크게 쓰일 것이니 진력하라'고 하였다. 사간원정언(正言)이 되고 병조정랑, 용강현령(龍岡縣令)이 되었지만 1849년 헌종마저 사망했다.
1850년(철종 1년) 전라북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부안현감 재직 중에는 반계 유형원의 사적지를 찾고 그 저서들을 탐독하고 세상을 구할 학문이었는데 쓰이지 못했다며 찬탄하였다. 그해 사헌부지평으로 되돌아온 뒤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851년 사헌부장령, 1854년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그해 경상좌도 암행어사로서 민정을 시찰하였고 되돌아왔다. 1855년(철종 6년) 다시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봉고파직시키고 그 전말을 기록한 수계(繡啓)를 지어 바쳤다.[5] 1858년 곡산부사로 나갔다.
1860년(철종 11년)에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임명되어 6개월간 연경에 다녀왔다. 연행사절의 부사로 파견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하였다.
6개월간 베이징에 체류하며 외교 외의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1856년의 애로우 호 사건(Arrow號 事件) 직후 영국, 프랑스 양군이 북경, 천진을 점령하자 당시 청나라의 함풍제(咸豊帝)의 대응 방식을 소상히 조사하였다. 이때 함풍제는 아무런 대책 없이 러허(熱河)에 피난하였다. 그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목격할 수 있었고, 서양에는 보다 강성한 문명국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심병성(沈秉成), 왕증(王拯), 풍지기(馮志沂) 등 백여 명의 청나라 문인,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서도 견문을 넓혔다. 1861년(철종 12년) 초 귀국하자 곧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61년 열하부사로서 다시 청나라를 방문하였다. 제2차 아편 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청나라 정세를 살피기 위해 그는 일부러 다시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세력의 실체를 목격하였다.
1860년과 1861년의 연행사신과 1862년 진주민란의 안핵사로서 현지에 파견되었는데 이때부터 1871년의 신미양요 때까지 그는 외교 자문을 작성하였다. 중국어와 한자, 일본어에는 능통했지만 영어를 알지 못한 그는 영어를 해석한 중국의 글자를 일일이 찾아서 미국등을 상대로 한 지문을 작성했다. 이때까지 양요(洋擾)에 관련되는 청나라에의 자문(咨文) 및 미국측의 힐문(詰問)과 통상 요구에 대한 답장은 대부분 그가 기초하였고, 사망 전까지 그는 일본 등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 다수의 자문과 감수, 교열에 참여하였다.
1862년(철종 13년) 2월 진주에서 진주민란(晋州民亂)이 일어나 경상우도 지역으로 확대되자 그는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민심 수습과 사태 정리에 힘썼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지역 향반들의 횡포하에 신음하는 농민의 참상을 접하고 세금 감면 혜택과 구휼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그 수습책을 삼정이정에서 찾았다. 그 방법으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삼정 문제를 연구하고 또 중론(衆論)을 모아서 수습책을 마련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 5월 26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게 한다. 그 해 10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파일:Empress sin-jung-ik.jpg(조대비는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에게 그를 천거하기를 원했다.]] 고종이 즉위한 후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특별 가자(加資)되어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새로 즉위한 고종을 익종(翼宗)의 양자로 입승대통하도록 한 효명세자(익종)의 비 조대비(趙大妃)가 지난 날 자신의 남편과 절친했던 그를 우대했던 것이다.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에게 그를 천거하며 '박규수는 그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에도 익종께서 크게 쓰려던 인물이다. 그가 벼슬한 뒤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한번 써보는 것이 좋겠다'며 천거하였다.
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병조참판, 대제학을 역임하고 사헌부대사헌, 홍문관제학, 이조참판을 두루 거쳤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부터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고, 1865년 그는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하였다.1865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곧 공조판서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전임되었다. 이때에도 영건도감 제조직은 계속 겸임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그 해 8월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에 제수되었다.
1866년(고종 3년) 2월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와 교전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 평안감사로 있던 박규수는 셔먼호를 태워 버리라고 명령하였다.[6] 미국인 최난헌이 군함 1척을 이끌고 조수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지만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군함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1] 박규수는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구하던 중 한 교졸이 지원했다. 이 교졸은 어촌의 괴피선(작은 배) 수백 척을 동원하여 배안에 기름을 끼얹은 뒤 섶을 가득 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궁수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을 당기게 하였다.[1] 셔먼 호는 통상을 요구했지만 박규수는 이를 행패로 간주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박규수는 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고, 미국 군함은 한번에 화살세례를 받았으며, 군함 안에 있던 인화물질로 인해 선박은 불타고 말았다. 미국 상인들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을 추격해 대포를 쏘아 4,5명을 쓰러트렸다. 이것이 조정에 전해지자 박규수는 승자(품계가 승진됨)하였고 교졸 또한 진장이 되었다.[1] 이후 박규수는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를 얻게 되었다.
한편 개항론자로 돌아서기 전의 박규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균관 대학교 한국한문학 교수김명호에 의하면 박규수는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탄압정책에 동조했으며 교섭을 통해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 했다는 것이다.[7] 초기의 그는 오히려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는 시도[7]를 보이기도 했다.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울 때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론자였다. 박규수는 당시 평안감사로 부임한 직후 셔먼호 사건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면서 대원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는 미국측과 직접 교신하기도 했으며 미국·중국 등에 보내는 각종 외교문서를 짓기도 했다.[7] 또한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명호에 의하면“박규수가 이항로의 상소를 칭찬했으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 불허 등을 담은 대원군의 양이책을 전폭 지지했다”며 박규수를 대표적인 주화론자나 개국을 구상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7] 김명호에 의하면 “신미양요 시기에 박규수가 대미수교를 원했다는 종래의 논의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7]
한편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했다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한때 박규수의 초청으로 평양에 왔다는 설이 한때 전해지기도 했으나 성균관 대학교 한국한문학 교수 김명호는 이를 반박했다. 셔먼호를 타고 온 토마스 목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직전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활동의 지지와 후원 약속을 받았다는 설에 대해 전혀 사실 무근으로 셔먼호 사건 당시 박규수는 청나라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7]
1866년 10월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혹세무민에 무군무부의 사상이라며 전쟁을 선언하자, 박규수는 선처를 호소하였다. 박규수는 민중이 천주교를 믿는 것은 결국 관료들의 가렴주구와 악정을 펼쳤기 때문이며, 당국이 이들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현혹된 것이니 처벌보다는 선도해야 한다며 관대한 처분을 상주하였다.
그는 천주교도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려 수감 정도로 처리하였다. 그가 평안도관찰사로 재직 시 그의 관내에서는 천주교 박해로 인한 처형자가 한 명도 없었다. 또한 세금을 감면하고, 흉년이 든 농가를 구제하며, 평안도 출신들에게도 과거 응시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퇴청 후에는 서실을 열고 학문을 가르치는 등 여러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또한 2년 임기를 마친 후에도 다시 유임되어 1869년 4월까지 만 3년 2개월 동안 평안도관찰사 직에 있었다.
1869년 4월 다시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홍문관과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1871년 예문관제학과 홍문관제학을 겸하고 외교 자문을 직접 청나라에 지어 보냈는데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을 들었다. 이듬해 홍문관대제학 겸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였다.
대제학이 되어 1872년 청나라 황제의 혼례식이 있자,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데리고 두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1871년에 청나라의 사죄사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숭후(崇厚)의 형 숭실(崇實)을 찾아가 그를 통해 숭후를 만나 서양 제국의 사정을 상세하게 접하고, 서구의 서적과 무기, 화포, 건축술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된다.
다시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청나라의 동도서기론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조선에도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흥선대원군 계열, 최익현, 김평묵 계열의 공격에 시달렸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해 12월 의정부우의정에 승진되었다. 이 무렵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박규수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을 따르기는 했으나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우의정으로 고종을 보필할 당시 일본과의 국교문제 논의에 참여했었는데, 그는 개국을 주장했다.
1873년 12월, 박규수가 의정부우의정이 된 직후, 당시 일본이 왕정복고를 통고해 온 서계문제(書契問題)가 대두되었다. 그 서신에서 일본은 종전의 서계 격식과 달리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의 '황'(皇), '칙령'(勅令), 조선국에 대한 '대일본'(大日本) 등으로 표기되자 일본을 속국이나 야만국으로 여겨오던 조선 조정에서는 충격을 받고 수리하기를 거부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官爵)을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가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라며 외교문서에 쓰인 단어는 그냥 형식적인 것이니 연연하지 말자고 설득했다. 이어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저들이 나라의 제도만 변경하고 옛날같이 수교하려는 뜻을 표명하는 한, 조선도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하였으나 거부당했다.
형조판서, 의정부우의정을 거치면서 당시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74년 9월 사퇴하였다. 그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한거하면서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자제들에게 박지원의 사상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하기도 하였다. 《연암집 燕巖集》, 《해국도지 海國圖志》 등에 대한 강연과 서구의 자명종, 시계, 태엽, 기계 등을 소개하는 한편, 그림 해석하는 방법, 서구 사회의 존재, 청나라를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일본의 외교문서 수용 문제는 은퇴한 뒤에도 1875년 5월 대원군을 찾아가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 번 발사하기에 이르면 이후 비록 서계를 받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라며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 이유원과 뜻이 맞지 않아 관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에 의해 발탁되어 1875년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1874년과 1875년,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이 조·일 국교정상화를 요청하는 글에서 ‘황국, 대일본, 칙’ 등 조선 측에서 불손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용어를 사용하여 많은 신하가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반대했지만, 박규수는 천황 호칭은 지엽적인 문제이니 지엽적인 문제는 무시하고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왕의 오만함을 징치하자는 척화파의 주장에 대해서도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때 일본과의 수교를 수용하자는 주장은 박규수와 그의 문인 김홍집, 김윤식 등 소수였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 다수의 반대로 조선이 이에 거절하자 1875년 9월 일본은 운양호를 파견 강화도에서 포격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주장을 들어 주자고 주장하였다.
1875년 5월 그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 번 발사하기에 이르면 이후 비록 서계를 받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왜양일편(倭洋一片)인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호를 거부하는 것은 조선의 약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력 행사의 구실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 해 6월 13일, 서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고종이 특별히 시, 원임대신(時原任大臣)을 소집하여 어전회의가 열리자 박규수는 한낫 호칭을 문제삼아 일본의 인호(隣好)를 거부하면 반드시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 들 것이니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중에서는 그가일본에 나라를 넘기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어 곤욕을 당했다. 9월 25일 일본은 운양호를 보내 강화도를 폭격, 강화도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측의 패배는 그가 우려한 바대로 최악의 사태로 발전하였다.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 김평묵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주장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고, 오경석, 김홍집 등과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해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노론 위정척사파로부터 매국노로 규탄받고 모함을 당하였다.
1875년 11월 25일 특별히 대왕대비의 가상 존호 옥책문 제술관(加上尊號玉冊文製述官)이 되었다.
할아버지 박지원, 유형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金邁淳), 조종영, 홍석주(洪奭周), 윤정현(尹定鉉) 등을 선배로서 사숙하였고, 문우로서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金尙鉉), 신응조(申應朝), 윤종의, 신석우(申錫愚) 등과 주로 교유하였다.
그의 학풍은 제자의 한 사람인 김윤식(金允植)의 지적에 의 하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했다 한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박지원, 박제가 등 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인 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榘), 북인인 유형원, 윤휴 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하였다. 다양한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사숙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사상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론인 유수원의 학문에도 관심을 갖기도 했다.
백의정승 유대치, 중인 출신 외교관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은 사상을 떠나 친구로 지냈다. 박규수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하였다. 박규수는 자신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박정양, 서재필,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어윤중, 윤웅렬 등의 제자, 문인들을 길러냈다.
연암 박지원과 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본래 문우이자 친구였다가 원수로 변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풍자한 데서 감정싸움이 오고 가다가 유한준과 박지원은 끝내 원수가 되었다. 후일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심하게 험담하였다.
“ | 유한준은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평한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 당시 경주김씨가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본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유한준은 이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 ” |
— 과정록 중에서 |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유한준을 아버지의 원수를 뛰어넘어 백세 동안 이어질 집안의 원수라고 성토하였다. 저암 유한준은 연암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로 집안 끼리도 인연이 있고 연배도 비슷하여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 문학공부를 같이한 문우(文友)이자 친구로 지냈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여러번 비평하다가 연암은 저암의 문장을 두고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혹평했다. 반면 저암은 연암의 저작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이라며 몰아붙였다.[8] 그 뒤 유한준 집안과 연암 박지원 집안사이에는 박지원이 할아버지 박필균과 아버지 박사유의 묘를 이장한 곳이 유한준 선산 근처였다. 유한준은 연암 박지원의 이장을 반대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자신보다 먼저 요절한 15세된 손자의 묘를 박필균 묘 위에 매장했고 쟁송문제로 발전했다.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했고,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는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비판하였다.
1871년 홍문관 대제학 박규수는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들였다. 시를 지은 이는 16세의 유길준이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아들이며, 유길준은 유한준의 아들 유회주의 4대손이었다. 유길준이 처음으로 박규수를 만나러 갈 때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는 '우리집과 서로 원수같이 지내왔는데 어떻게 그 자를 찾아간다는 말이냐'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유길준을 만난 박규수는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게 아니겠냐'며 감개무량해하였다. 박규수는 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백세의 원수에 대한 생각은 잊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오히려 집안간의 불화를 잊자며 유길준의 뛰어난 재주를 거듭 칭찬하였다. 또한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며 자주 찾아올 것을 권고했다. 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오히려 박규수를 스승으로 받들고 그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았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석탑을 그리고 놀았다.[3] 성인이 된 뒤에도 여러 편의 그림을 그렸으나 태평양 전쟁때와 해방 직후, 6.25 전쟁 때의 참화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고전 읽기와 공부 방법을 흥미롭게 엮은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지었고, 그가 직접 제작한 지구 설계도 평혼의(平渾儀)와 천문지도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 등이 현재 전한다.[9]
문인화와 수묵화 외에도 또한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을 그렸고, 평안도의 전도를 그리기도 했다. 청나라 사람이 그린 세계지도와 천문지도 제작에 자극을 받아 손수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세계 지도인 혼평의(渾平義)를 제작하였다.천문도, 간평의(簡平義) 등 하늘의 별자리들의 위치를 관찰하여 천문지도를 제작하였다. refdsas
박규수의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은 2006년 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되었다.[10]
1876년 1월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를 청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불허하였고, 궤장과 의자, 안마를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876년 2월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9일 다시 수원부유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호개방론을 주장한 이유로 조선의 내부적 준비 부족으로 일본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외교론은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임시 방편의 하나임을 역설하고 일본과 우선 친교를 맺은 뒤, 국력을 배양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나중에라도 일본을 응징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규수는 평소 그의 사랑에서 후학들에게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문집에 대해 강의하였고, 서실을 열어 중국을 왕래한 사신들이 전한 신사상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는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년에 병석에 누웠으나 반대파와의 논쟁, 공격 등으로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를 두고 그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운양 김윤식은 박규수의 만년을 "나라 사정이 날로 그릇쳐지매 공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하였다.
수원부유수 재직 중 1877년 2월 9일(음력 1876년 12월 27일)에 임지인 수원부청에서 사망하였다. 고종은 애석해하며 '이 대신은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학이 박식해서 내가 의지하고 온 조야(朝野)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의정의 벼슬을 벗은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평시에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게 해주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하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3년치 녹봉(祿俸)을 특별히 부의로 지급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 20-3번지에 안장되었다가 1980년 말 하계동 아파트 단지 개발공사로 서라벌 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1989년 8월 2일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불목리로 이장되었다.
1878년(고종 15년) 11월 1일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웅렬, 김홍집, 윤치호, 홍영식 등을 거쳐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이시영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그가 죽자 그의 문하생 김옥균,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윤웅렬, 김홍집 등은 그의 사상적 동지이기도 한 유대치, 오경석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그의 문하생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므로 이에 연좌되어 관직을 추탈당했다가 1894년(고종 31년) 7월 갑오경장으로 복관되었다. 그의 집터는 갑신정변 전후로 헐려 훼손되었다가 후일 보성중학교, 고등학교의 부지가 되었다.
그의 문집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1921년 3월 31일 일제 강점기 때 이왕(李王)인 순종의 명으로 신응조(申應朝), 이돈우(李敦宇),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개화파에 대한 조선 사회의 기피와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박규수의 사상과 학문은 1945년 이후부터 평가,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으로 경기도 광주군에 그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저서와 유물 상당수가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그의 저서들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70년대 중반부터 일본 덴리대학교 조선학회에서도 그의 저서와 사상 등에 대 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의 개화 사상은 실학 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선대의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서구에 보다 우수한 문명이 있음을 인정, 좋은 것은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게 되었다. 중국의 개화파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항을 역설하였다.
그는 서양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 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하였다.
그의 개국론은 그가 운양호 사건 직전 언급한 것처럼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되었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하였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하였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하였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준다.
그는 조선 사대부들의 도덕과 명분론이 허울이며 위선인 것을 지적하였다. 선대의 선비들이 정치나 관료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청렴해서가 아니라 이해타산에 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 대저 선배들이 관리의 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청렴결백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인용문)... 중고 시대의 사대부들은 실은 꿋꿋한 절개를 숭상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해득실에 밝았던 분들일 것이외다.[11] | ” |
박규수는 지방관으로 처음 부임한 직후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11] 그는 선대에 살던 옛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행장이나 전기문에서 지나치게 옛 사람들을 정의롭고 도덕적인 존재인 것처럼 미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외교관계에 있어서 도의적인 것과 감정 보다는 실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위정척사파의 맹목적인 폐쇄론에 저항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외국의 주장이 합당하다면 이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수용해야 됨을 역설하였다. 외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타협을 통해서 절충안을 찾자고 주장하였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될 때는 막후에서 반대파를 설득하여 조약 체결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호칭 문제가 아니라며 실질적으로 조선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을 찾아야 함을 역설했다. 1875년(고종 13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그 뒤 그는 척사파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하였다. 박규수는 열여섯 살 때 한양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10대 시절에 남긴 시집인 <금유시집>에 나오는 작품이다. 다음은 시 일부다.[3]
“ | 세 개의 커다란 알약이 허공에 떠 있다.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 ” |
태양(A)·지구(B)·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을 시로써 정리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과학탐구 영역'을 공부한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시로 정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시 쓰기를 통해 복습한 셈이다.[3] 또 다른 시집인 <장암시집>에는 지구과학 지식을 정리한 시도 보인다. 이 시에서는 "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3]
그는 지구가 둥근 형태이고 그 속에는 말랑말랑하거나 묽은 용암이나 화산같은 것이 지구 속에 존재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화산 폭발이나 용암을 신의 진노, 귀신의 재앙으로 여기던 조선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의 동도서기론을 받아들여 이를 주창하였다. 서양법(西洋法)에 대한 동양(東洋) 학문과 가르침의 우월성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북학파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이를 개화파에게 전수시켰다. 동양의 정신 문명은 우수하지만 서양의 물질 문명 역시 우수하므로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이롭게 이용하자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박규수는 백성이 있은 뒤에야 사대부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사대부가 백성의 윗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 직분이라 가르쳤다. 가르침 외에도 그는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사둔 땅을 어느 시골사람이 사기로 그 땅을 사고 돈을 잃게 되자 그는 자신의 땅을 그냥 양보했다 한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대에까지는 한성부의 벌열가문이었지만 조부 박지원의 대부터는 재산이 없었다.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생인 생원인 주씨(周氏)가 박규수 모르게 논 80석을 사 두었다. 그런데 신씨(申氏) 성을 가진 시골 노인이 찾아와 '연전에 사기를 당해 대감댁 땅을 모르고 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박규수는 주 생원을 불러 땅 문서를 신씨 노인에게 주라 하였다. 주생원이 후생들을 위해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였으나 박규수는 '백성이 있고 사대부가 있는 법'이라며 사기로 그 땅을 사게 된 노인에게 주게 했다.
박규수는 최초의 개화사상가의 한사람이며 동시에 북학파와 개화파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박규수는 실학파의 일파인 북학파에 속하여 있었으며, 성호 이익의 사상과 북학파의 사상을 접합시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을 사모하고 본받았다.[12] 비록 당색은 달랐지만 이익과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1870년대 중반, 박영효와 그의 형 박영교(朴泳敎)는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13] 수많은 문인들을 양성하여 김옥균, 서재필, 박정양, 윤웅렬, 윤치호 등의 개화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1862년 2월 진주민란 수습을 위한 안핵사(按覈使)에 임명되어 진주로 파견되어 수령들의 행동, 지역 유지들의 월권행위 등 민란의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였다. 전 해의 연행사절 때 받은 서구에 보다 훌륭한 문명국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충격과 동시에 이는 또다른 충격이 되었고, 그로 하여금 국내 현실을 반성,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의 개화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도 받았던 개화파들은, 박규수의 문하에서도 배운 점을 근거로 그들이 아닌 박규수를 사상적 선조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학문적 연원을 찾았다.